폰 괴테를 읽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류시건 옮김 / 오늘의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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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내는 일)이라 적고, 나약한 인간의 솔직한 고백과 인정이라 읽고 싶다. 평생 교회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기독교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신께 귀의하고 세례를 받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 모습을 수차례 지켜보았다.


 무신론자이며 종교에 대한 어떤 편견도 가지고 있지않은 입장에서 바라볼 때 생뚱맞다 싶은 그마지막 과정은 구원받고 싶은 소망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테두리 속에서 살아보고자 발버둥치면서 크든 작든 죄짓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랴.


 산 자의 오만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신의 죄가 삶의 마지막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자신의 목을 죄어오며 공포의 얼굴로 다가온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고백하고 인정함으로써 마침내 영혼의 평화를 얻는다. 한 목숨이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수 있게 이끌어주는 것이야 말로 종교의 종류를 떠나 진정한 구원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청소년 시절부터 수없이 다른 문학작품들 속에서 인용된 것을 보았고, 또 청소년용 문고본으로 읽어보았던 구원의 상징 '파우스트'. 줄거리는 흐릿해졌지만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이름만은 늘 뚜렸이 남아있었고,구원을 다룬 작품인 것만은 가슴 속에 깊이남아 이번 기회에 고전 다시읽기에 도전해보게 되었다.


 고전의 가치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재미와 감동의 빛이 바래지 않으며 특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실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파우스트 역시 1800년 대에 쓰여졌지만 오랜 세월 동안 속죄와 구원의 상징으로 수없이 회자되어 왔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이탈리아 기행>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거장 괴테. 그의 순수 창작물인 줄 알았던 파우스트가 원래 16세기 후반부터 민간에 전설로 전해지던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를 수록한 민중본이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민중본도 시간이 흐르면서 수없이 개작되고 그때마다 파우스트의 강렬한 인간적인 면, 오락중심적 요소 강조, 진리추구자로서의 파우스트 등 초점이 다르게 맞춰지게 된다.


 어린시절부터 인형극이나 민중본을 통해 파우스트 전설에 매료된 괴테가 초고 파우스트를 발표한 이래 추고와 개작을 되풀이하며 완성본이 나오기까지의 세월이 무려 60년.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의 창작에 대한 집념과 헌신과 성실성과 노고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괴테 필생의 대작이라 불리우는 파우스트는 괴테 본인의 인간적 성장과 생애가 그대로 투사된 결과물이며 기념비적인 명작인 것이다.


 농부의 아들이었으나 지식욕이 강했던 파우스트는 신학, 의학은 물론이고 천문, 수리, 마술 등 모든 우주만물의 궁극적 이치를 알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깨닫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24년 간 지상의 모든 지식과  쾌락을 얻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다. 그리하여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모험을 떠나 온갖 쾌락을 경험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파우스트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용기있게 외친다.


 '그렇다! 나도 어디까지나 이 생각에 따르리라.

 인간의 예지의 최후의 말은 이렇다-

 자유와 생명은 날마다 싸워서 쟁취하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위험에 둘러싸여서

 아이도 어른도 노인도 유익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나도 그러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함께 살고싶다.

 그러면 나는 그 순간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어도 좋을 것이다.

 멈추어라! 너는 진정 아름답구나!

 내가 이 지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더없는 행복을 예감하면서 이제 나는 이 지고의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비록 악마에게 영혼까지 팔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싶은 거인적 인간이었으나 끝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속죄를 통해 천상의 구원을 받은 파우스트.


 희곡의 형식을 띠었기에 오히려 읽는 부담이 덜했으며, 무대 위의 상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읽어나가노라면 훨씬 현실감있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운율감 있는 문체는 시를 읽는 느낌이었고 그리스  신화가 인용되었으며,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 등 문학과 역사와 미학과 철학이 어우러진 방대한 명작이었다.


 당연히 그 맛을 제대로 확실히 느끼려면 여러차례의 되풀이 읽기가 필요한 작품이다. 괴테의 인생역정이 담겨있고 수많은 해설을 낳고있는 작품이기에,앞으로 살아가면서 다시 꺼내어 읽을 때마다 느끼는 깨달음과 배우는 지식은 다를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결코 변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은 파우스트가 '구원'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온 세상의 비의를 다 거머쥐었던 파우스트도 결국은 나약한 한 인간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속죄하며 구원받았다.


 어떤 종교여도 좋고 종교가 아니어도 좋다

 

 인간의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겸허하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자신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진실되고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리하여 종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그것이 구원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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