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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변태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평점 :
<장수하늘소>로부터 그는 왔다.
세상의 이기와 탐욕과 폭력적인 빛깔에 상처받은 이십 대 초반의 영혼은 사냥꾼의 총칼에 상처입은 어린 짐승처럼,이외수라는 이름의 동굴로 피신해 들어갔다. 그곳은 어둡고 습한 공간이 아니라 순정하고 고아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이미지들이,세속의 먼지와 티끌에 오염되지 않고 푸르른 창공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곳이었다.
<꿈꾸는 식물>은 이슬방울로 맺혔고, <들개>는 붉은 꽃으로 피어났고 <칼>은 맑은 바람이 되어 인간성의 본질, 예술가의 삶의 전형, 인간으로서의 살아가야할 길을 독보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이끌어내 주었다.
특히 극한의 상황 속에서 진정한 예술혼을 불태우려는 주인공의 자유롭고 야성적인 삶을 그린 <들개>는 예술가를 흠모하던 가슴에,뜨거운 화인처럼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 뒤에도 꽤 오랫동안 이외수바라기는 계속되어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괴물> <장외인간>까지 소설들을 모두 읽으며, 스스로 집에 감옥을 만들고 자신을 가두어 글을 쓴다는 작가의 문학적 열정에 매혹당했다.
그러나 이 또한 통과의례였을까. 세월이 흐르며 나의 감성이 무뎌졌는지, 작가의 삶이 변했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세상 속으로 섞여들어가는 그의 생경한 모습에 거리감을 느끼며 책도 손에서 떠나가 시작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작품을 접해보지 않던 작가의 <완전변태>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도 인간이거늘 어떻게 한 길로만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십 대 초반의 영혼을 소낙비처럼 두들겨 댔던 작가.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오로지 문학의 열정 하나만 품고 고아한 정신의 세계를 지향하던 작가였기에, 세상과 소통하는 모습은 마치 분칠한 무대위 피에로처럼 슬프고 낯설었다. 그래서 쏟아져 나오는 책들이 감성팔이 같아 절대 읽어보지 않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너무나 오랜만에 소설이 출간된 것이다. 이외수의 감성이 그리워, 아니 그 시절 나의 감성이 그리워, 향수에 젖어 읽어보았다.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단편소설집이라 살짝 실망했고 십 편의 단편소설 중에 네 쪽 반짜리 소설도 있어 조금 당황했다. 물론 단 한 줄의 글에 온 우주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초간단 소설은 깊은 울림보다는 미진함과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환상적이거나 정신적인 영역을 통하여 현실을 이야기하려는 이외수만의 어법은 그대로였다. <소나무에는 왜 소가 열리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노인이나 <명장>에 등장하는 노인은 구도자의 면모를 보여주며 현실을 대변해 준다. <청맹과니의 섬>은 배경이 되는 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가운데 섬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에 빗댄 심리묘사가 탁월했다.
그는 십 편의 작품 속에 매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법조계, 교육계, 예술계, 종교계 등 우리의 삶을 둘러 싼 강자 혹은 갑의 영역에 속한 이들의 속살을 망설임없이 파헤쳐 약자와 을의 아픔과 눈물을 보여주려 한다.
쩡, 하고 갈라질 것 같은 차가운 겨울하늘, 그 푸르름을 그대로 받아내는 호수의 맑은 물, 손가락을 갖다대기도 전에 베일 것 같은, 날 선 칼날 같은 감성의 언어는 아니었다. 마치 사랑방에서 할어버지가 화롯가에 앉아 불씨를 뒤적이며 들려주던 옛날이야기의 편안함으로 세상사를 풀어내고 있었다. 작가는 여전히 예리한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지만 그건 아마도 세월의 더께가 앉은 나의 감성 탓이지 싶다.
읽으면서 편안했다
강물을 흘러오는 화선지를 자국도 없이 가르고 지나가던 예리한 칼날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문학성 뛰어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안도감 한자락이 가슴에 남았다.
이제 감성의 언어들이 푸른곰팡이처럼 돋아나던 동굴 속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너럭바위 위에 앉는다
따스한 햇살 아래 몸을 말리며 흐르는 구름따라 세월을 낚는, 노인의 낚싯대가 가슴을 건드린다
바로 <완전변태>는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