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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 조선 화가들의 붓끝에서 되살아난 삶
이일수 지음 / 시공아트 / 2014년 4월
평점 :
바람이 가볍게 여인의 귀밑 솜털을 건드리며 속삭인다.
'오늘은 스님이 오시지 않아요. 제가 스님이 계신 절이 있는 산을 지나왔기에 잘 안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귀를 닫은 듯 그대로 망부석이 되어 왼종일 하염없이 송낙의 임자를 가슴으로 기다리고 몸으로 기다린다.
스님을 짝사랑하는 기생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그림에 내 마음을 이렇듯 얹어보았다.
꼬물대는 새끼강아지 세 마리를 품고 젖을 물리는 어미개의 눈동자에서는 강한 모정뿐만 아니라 자긍심까지 느껴진다.
'사람들아, 나 좀 보소. 이렇게 예쁜 놈들을 내가 낳았고 기르고 있소.'
그 눈빛에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이 겹쳐진다.
어미개와 새끼 세 마리를 그린 이암의 <모견도>란 그림에 또 내 마음을 얹어보았다.
'나 윤두서, 아직 죽지 않았소.'
앙다문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 올올이 일어서 있는 수염이 화가의 꿋꿋한 자존심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란 그림에서 윤두서가 그렇게 나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그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선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필요하지요.'라고 답을 해보았다.
이처럼 그림에 책처럼 풍부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줄, 마음이 깃들어 있는 줄, 예전에 미처 몰랐다. 그림은 그저 시각적인 감상의 대상이었고 그것마저 정해진 틀 속에서만 보도록 교육받은 세대였다. 서양화는 사조로써 분류되었고, 동양화는 우리 조상들이 그린 그림, 산수화 정도로 인식하는 잘못된 미술교육이 낳은 부작용이었다. 그나마 김홍도의 그림에서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유홍준의 <화인열전>으로 우리 조상들의 그림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웠지만 잘 몰랐던 미술> <그림에 마음을 놓다> <당신도 그림처럼>등의 대중을 위한 미술 안내서적에서는,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고 느끼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림을 보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더하는 묘미를 맛볼 줄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에는 주로 서양화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들을 읽다가 만나게 된 <옛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는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에 관한 감상법을 풀어놓은 책이다.
우리가 엄격한 규율과 법도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 성리학을 최고의 지상 가치로 여기고 절제를 미덕으로 아는 사대부들이 이끌어 간 시대. 그림하면 산수화나 사군자가 바로 떠오르는 문인화의 시대.
그 조선시대에도 희노애락을 느끼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노라고, 그들의 웃음과 눈물과 땀방울을 그림으로 그렸노라고, 이 책은 마치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 항변하듯 짙은 사람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화가들부터 생소한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화가들의 면면과 그림들. 거기에 깃든 풍성한 이야기들을 때로는 조곤조곤 때로는 엄숙하게 때로는 웃음이 터지게 지루할 틈이 없이 재미나게 들려준다.
소설처럼, 시집처럼, 푹 빠져 읽다보면 많은 지식도 얻게 된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대표작 이외의 그림들, 중국미술이 조선에 끼친 영향, 그림을 그리는 기법, 그림이 그려진 당시의 역사적 배경, 민중들의 삶의 모습 등 미술서와 역사서와 에세이의 역할을 모두 훌륭히 소화해 낸 멋진 책이다.
우리 조상들에게도 자유로운 예술혼과 불타오르는 창조성과 창의력이 있었음을 가르쳐 준 책.
'우리 옛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란, 결국은 그 사건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지적유희의 과정이면서, 또한 오늘과 다를 바 없이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간 고뇌의 공유다.'
조선시대는 오늘 날 우리의 삶과 다름없이 하루하루 인간 군상들의 역동적인 삶이 펼쳐졌고, 거기서 만들어진 수많은 이야기들과 감정을 공감하고 공유하라고 자꾸만 손짓한다.
남성위주의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여성에게 눈을 돌릴 줄 알았던 남자, 신윤복.
여성의 섬세하고 여린 자아를 느끼고 읽어내고 그것을 붓끝으로 표현해주었던, 신윤복.
인간의 욕망을 과감하고 솔직하게 춘화로 표현했던, 신윤복.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아름답고 고맙다
조선시대 화가들과 그림에 새록새록 애정이 돋아난다
또 어떤 그림에 나의 마음을 얹어 볼까,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