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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거리의 목소리들 - 1900년, 여기 사람이 있다
이승원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4월
평점 :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쉼 없이 굴러온 수레바퀴.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사람들은 수레 위에 탄 소수가 아니라 수레를 밀고 당긴 대다수의 사람들, 시대와 지역에 따라 평민, 백성, 인민, 시민, 대중 등으로 달리 불리우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소리없는 아우성, 빛의 이면에 존재하는 그림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역사의 위기 속에서도 그 삶은 독하고 끈질기게 면면히 이어져 왔고 또 오늘을 살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장애물을 만나 크게 덜컹거리며 위태로울 때가 있으니 바로 역사의 격변기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대한제국만큼 역동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가마솥처럼 펄펄 끓어넘치던 격동기가 또 있을까. 13년에 불과한 대한제국의 역사가 조선왕조 500년보다 더 파란만장한 파노라마가 펼쳐진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였던 것이다.
밀려드는 열강들의 야욕 앞에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조국의 존립을 고뇌하던 고종은 나라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자 큰 결단을 내렸다. 일본 제국주의의 간섭을 피하여 아관파천을 단행했던 고종이 환궁 후 마침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독립연호 광무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이며 세계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려는 힘찬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엄청난 변화와 충격과 혼돈의 시대였다. 조선과 대한제국, 서구 열강과 일본, 오랫동안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고 있던 주자학과 새로운 서구 문명의 충돌 등 황제에서부터 저잣거리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밀려드는 폭풍우 속에서 방향을 읽고 헤매이며 정체성을 찾기위해 나름대로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그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 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보통 사람들의 삶에 애정어린 시선을 맞추고, 온기를 불어넣고, 손길로 어루만져 마침내 살아 숨쉬는 생명체로 되살려 낸 책이 있다. 역사학자가 아닌 한국 문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저자가 당시 발간된 여러 신문의 3면 기사와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 화백의 시사만평을 통해 지배층의 역사가 아닌 저잣거리 보통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삶의 풍경들을 되살려 낸 것이다.
오늘 날에도 신문의 시사만평이 가지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한 컷에 담겨있는 비판과 해학과 풍자는 신문 한 면의 기사가 지니는 힘과 비할 것이 못 될 정도로 촌철살인의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사만평이 대한제국 시대에도 있었다니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신문은 관보인 한성순보 발간을 시작으로 하여,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그 뒤를 이어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여러 신문들이 발행되었다. 이들 신문들이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독립의지를 공고히 하고 근대화에 앞장서 백성을 계몽하는 등 언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압축된 상징적 의미를 담고있는 시사만평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풀기위해 신문의 3면 기사를 끌어왔다.
'저잣거리의 다양한 소문, 공인의 스캔들로부터 사기와 도박, 절도와 살인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건, 사고가 3면을 가득채웠다. 그 속에는 흔히 정사보다 야사에 기록될 만한 소재가 많았다. 교과서에서 찾아보기 힘든 역사 속 군상의 삶과 일상과 욕망이 적나라게 하게 드러난 것이다.'(P30)
즉 시사만평에 숨겨진 진실의 뼈대에 기사 속에서 찾아낸 살을 붙이고 머리카락을 심어 호흡을 불러넣음으로써 마침내 역사의 격변기를 살아낸,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을 현재의 우리 앞에 되살려낸 것이다.
사이비 종교의 유행, 권력자들의 문란한 스캔들, 사생활 보도장이 된 신문광고, 성병 관련 기사가 보여주는 성의 불평등, 권력의 하수인들에게서 행사되는 갖가지 비리와 폭력들, 도박으로 인한 패가망신, 경품 추첨에 이르기까지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나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이 너무나 재미있고 생생하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불현듯 드는 생각
'이것이 대한제국의 신문기사인가? 오늘 배달된 신문기사인가?'
시대가 암울하고 혼란스러워도 온 몸으로 역사의 파도에 맞서며 매일의 일상을 견디고 살아간, 그 시대 저잣거리 보통 사람들의 모습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정치와 일상을 따로 또 같이 살아낸 그들에게서 우리가 살아갈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것
마치 만화경 같았던 이 책이 주는 가르침이다
옛날의 그와 오늘의 내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