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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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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을 지나오면서 저는 이 사회가 움직이는 보다 큰 동력을 보았으며 줄곧 '어떤 운명' 앞에 서 있는 저와 천성산을 보았습니다.
저와 천성산은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정치와 거대한 자본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톱니바퀴의 축에 끼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권력과 정치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그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진실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제 몸에는 그들이 지나간 수없이 많은 바퀴자국이 있으며 상처는 오히려 제 안쪽에서 점점 깊어지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우여곡절을 겪고 공동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저는 그 현장에도 갈 수 없었고 그들은 저를 천성산 바깥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듯 합니다. 3개월만이라도 공사를 중지하겠다는 약속은 여전히 지켜지지 않은 채 천성산은 무너지고 있습니다.-7쪽

처음에는 어느정도 물리적인 충돌이 있었다. 포크레인에 올라가야만 했을 때가 그때였다. 이제 이분들은 그런 모험을 피하기 위해 포크레인 두 대를 현장에 들여 놓고 그중 한 대를 선택하게 하고 다른 한 대는 움직여 일을 하고 있다. 내가 그 두 대의 포크레인 중 어떤 것을 접수할지 그들은 지켜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두 대의 포크레인 중 한 대를 정지시키는 일밖에 없다는 것 - 그들은 이야기한다. 이제 곧 이곳에 10대의 포크레인이 올라올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산을 깎고 들어오는 10대의 포크레인 중에 1대를 정지시키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제는 현장을 떠나 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이제 운동 방법을 전환하여 천성산을 떠나 생명과 평화를 위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제 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내 자신에게 말하는 동안 나는 비로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의 슬픔과 안타까움 때문에 다른 이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것이 이제까지 누리고 살아왔던 교만한 삶들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23-24쪽

우리 마음에서 '우리'라고 하는 벽이 무너져야 비로소 '우리'라고 하는 너른 세계가 보일 것 같습니다.-74쪽

저는 아직 마음의 평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빛들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를 이곳까지 이끌어 온 온전한 힘과 살아 있는 에너지를 지금처럼 확연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분노와 절망은 제 몫이 아니었습니다.
2퍼센트의 집단에 의해 98퍼센트의 선량한 희생이 강요되는 이 사회에서 천성산이 한 운명으로 제게 다가왔고, 저는 새털 같은 그들의 무게보다 이 땅이 제게 끊임없이 전해 주는 생명의 메시지를 더 잘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112쪽

지난 4년 동안 거리에 섰던 이야기를 누가 물으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죽음에 이르도록 달리면서 바람에 머리를 헹구지 않으면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았다고 이야기하면 누가 믿어 줄까요.
날이 선 칼날 단두대 아래서 한 몸이 둘로 나누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을 생각하며 항시 긴장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둘이라고 ...... 동지와 적도 둘이었고 사랑과 분노도 둘이었고 꿈과 현실도 둘이었고 칭찬과 비난도 둘이었고 수행자의 초졸함과 아만도 둘이었습니다.
그러나 70일의 허기를 견디어 내고 난 후, 제가 가져가야 할 둘의 절망이 갑자기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155쪽

58+대국민호소문

지금 이땅을 통치하는 것은 '경제'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이 땅에서 "경제가 어렵다"는 말보다 강력한 주술을 가진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유령'은 정치권력을 조종하며, 무자비한 경쟁 논리로 힘없는 일체의 것들을 따돌리며, 개발 논리로 온 산천을 파헤치며, '국익'의 이름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군림한다. 이 '경제 유령'에 결박당한 채 우리들은 깊은 망각 속에서 꿈속의 인간처럼 살아간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난 50년 전보다 100배 이상 커진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지만 스스로 일구어 온 삶의 조건들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다만 긴장과 적의에 찬 나날을 살아간다.

무지개를 보면서 무지개 내린 연못에 머리를 감고 출가하였다는 비구니 지율 스님. 스님이 지난 3년여 시간 동안 경부고속철도의 한 구간으로 관통당할 위기에 처한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극한의 고행 속에서 상대해야 했던 것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또아리를 틀고 앉은 '경제 유령'이었고, '천 개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천 개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무명의 어두움이었다. -193쪽

대통령은 허장성세를 부렸고, 약속을 뒤집었고, 그러면서도 태연스러웠다. 건설교통부와 한국도시철도공간은 돌격대가 되었고, 환경부는 그들의 충직한 하수인을 자임하였다. 그리고 지율 스님은 거대 언론들의 외면과 공격,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극한의 고행을 마치 진기명기 구경하듯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무지 속에서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지율 스님은, 그저 적당히 하고 이제 그만 그쳐 주기를 바라는, 스님의 단호한 걸음걸이를 쫓아갈 수 없었던 이 많은 범부들의 망설임과 좌절이 안겨 주었을 번민 속에서 더욱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193쪽

그러나 지율 스님의 비폭력적인 실천은 우리 사회의 많은 양심적인 시민들의 죄의식의 심연을 건드렸고, 삶에 대한 책임과 성실성을 깨우쳤다. '도롱뇽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이 집결했고, 이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길을 열어젖히고 있다. 우리는 도롱뇽의 친구가 됨으로써, 천성산이 암석과 토양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자연구조물이 아니라 12개의 계곡과 22개의 고층늪, 그리고 거기에 깃든 수없는 생령들을 품고 살아가는 '어머니'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이 토목공학적 과업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 패륜이며, 그리하여 지금도 쉴 새 없이 이 산천을 파헤치고 갯벌을 메우는 이 모든 개발 사업들이 실은 바로 우리 자신을 허물어뜨리는 자멸적인 행동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도롱뇽소송시민행동)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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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이다. 두번째 걸음이다.
신부님들, 수녀님들, 신자분들이 많이오셨다. 그리고 나같은 소속되지 않은 이들도 보인다.
성당에서 지겹기만했던 미사를 이곳에서 본다.
오르간소리와 굵은 합창소리에 눈물이 솟다가 잦아들다가 반복한다.
저기 저 전경은 무슨생각들 하고있을까.
노여워하기보다는 연민하기로 한다. 

평택이다.
그 신부님들이 여기 그대로 또 있다.
오늘부터 평택에서도 매일저녁 8시에 미사를 드린다고 하신다.
손을 꼭잡고 꾸벅 인사라도 드리고싶은 심정이다. 죄송스럽고 한없이 고맙다.
신부님 몇분께서 사측입장을 대변해 회사입구를 막고있는 직원들앞에 서서
안에있는 사람들과 미사만 보고 나오겠다고... 설득하고 호소하셨다.
오고가는 말들은 들리지 않지만, 여기저기서 참지못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온다.
"한솥밥 먹던 넘들이 저러고있는겨, 인간도 아닌겨" 충청도 사투리다.
"마스크 쓰면 니 낯작 모를줄알어 이넘들아" 전라도 사투린듯하다. 
어떤이들은 돌출행동에 전전긍긍한다.  신부님들이 말씀하고 계시니 우리는 조용히 지켜보자구요. 타이르신다.
한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시면서도 또 참지 못하고 내지르신다.
참을수 있는게 이상한거지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든다. 

평택에서 노조를 규탄하며 정문을 막아서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속에서, 지난 노대통령 추모콘서트를 막겠다고 교문입구를 막아섰던 학교 직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이 경제대국이 되고, 국민소득 3만불에 육박하고, 아파트는 올라가고 올라가고, 기차는 빨라지고 빨라졌지만,
이게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쌍용차 직원들, 대학교의 직원들이 결국 양심을 속이고, 동료와 학생을 외면하고 지키고자 하는것은 그들의 일자리인것 같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일자리가 중요하나.
이 사회는 일자리를 잃으면 줄줄이 잃어버리는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짤리면 끝이다라는 것 때문이다.
사회보장이 취약하기 때문에 개개인이 밥벌이를 하지않으면 먹고살수 없다. 게다가 한번 해고되면 안정적인 재취업이 힘들다. 양심따위 의리따위 버리고 일자리 지킬수 있다면 그걸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란 이런 것인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가 무서운 것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데 있다.
자본은 이제 철저히 그걸 이용하고 있다.
손도 안대고 코풀고 있다.  

그나저나 참 불쾌했던건
신부님의 말씀을, 참지못한 고함소리를, 촛불집회의 목소리를 묻어버린건
윤도현의 타잔이었다.
타잔이 끝나고도 언젠가 내가 콘서트장에서 열광했던 그의 노래들이 연이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사측을 대변하고 있는 직원들이 틀어놓은 것이었다.
윤도현은 이 사실을 알까.
누구 윤뺀과 친한사람 있다면, 당신의 노래가 노조와 지원세력의 목소리를 막고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라고 좀 전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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