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 했을 때 떠오르는 이름들이 여럿 있다. 유관순 전태일 이한열 박종철... 그중에 장애인은 없었다,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래서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사 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굴곡지고 한 많은 이 비좁은 땅에 독립열사, 민주열사, 학생열사, 노동열사 하고 많은 열사들이 있는데 ‘장애해방 열사‘는 처음 읽어보는 단어였다.
책을 펼치면 죽은 사람 이야기가 가득해서 읽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들 너무 고되었고 비련했고 너무 살아있었다. 이 사람들의 삶과 투쟁을 읽고 있노라면, 헤르만 헤세가 알은 세계고 어쩌구.. 태어나려는 자는 알을 깨야 하고... 이런 말들을 늘어놨던 게 그저 허장성세로만 느껴졌다. 이들이야말로 알을 깨려고 발버둥친, 진정 ‘태어난 자‘이고 우리들이야 말로 죽은 자나 다름없다는 생각.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학생들의 봉사점수를 채워주기 위해 주기적으로 근교의 장애/요양 시설에 ‘봉사활동‘을 데려갔다. 그것이 나와 장애인의 첫 만남이었고, 나는 말없이 누워만 있는 나의 담당(?) 장애인을 보며 울었다. 당시 암으로 병석에 누워만 있었던 할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가 너무 불쌍해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우는 나를 기특해했고 내가 이 ‘봉사활동‘ 프로그램의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는 반응을 보이는 거라며 칭찬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례하고 미개한 일인지. 아무 전문성도 없는 청소년들을 봉사활동이랍시고 시설에 데려가 장애인들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발상도 그렇고, 거기에 한술 더 떠 그들이 불쌍하다고 맘대로 동정하고 눈물짓던 어린 나를 떠올리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어떤 제도나 방법이 필요할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만남의 계기가 겨우 ‘봉사활동‘에 그친다면 비장애인들은 이 책에 나온 이들을 애도할 자격조차 없다.
이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이들이 간절히 바라며 죽어갔던 변혁이 아직도 미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을 살아가는 이들 앞엔 각자 얼마나 많은 의제가 있을까. 모든 의제의 중차대함은 같아도 순서는 있다. 나만 해도 항상 여성 관련 이슈들을 바로 앞에 두곤 했었다. 그래서 책을 닫는 우동민 열사의 말이 깊이 남았다. 우리 모두가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보면서, 그렇게 함께 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