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이 문장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속에 등장하는, 5월의 광주에 바치는 레퀴엠이다. 국민보도연맹(국민보호지도연맹, 약칭 보련) 학살과 유해발굴을 다룬 책을 읽는데, 어쩐지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을 돌았다.
통과의례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던 아널드 반 제넵에 따르면, 인간사회가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인 ‘장례’는 1. 기존 지위에서의 분리 2. 리미날 기간(liminal period) 3. 재통합 이라는 삼분 구조로 되어있다. 제넵은 특히 이 의례구조에서 ‘리미날 기간’을 강조했다. 리미날 기간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새로운 지위로 진입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과도기 상태로서, 수많은 금기를 지키고 의례를 수행해야 극복이 가능하다. 즉, 리미날 기간을 통해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한 의례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망자는 사령 상태에서 조상의 지위를 획득하여 마침내 죽은 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비정상적 죽음(uncommon death)’은 갑작스레 들이닥치고, 이 리미날 기간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적절한 의례의 기회를 빼앗는다. 죽은 자와 산 자 모두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지 못해 산 자는 죽은 자에 대한 의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자 또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게 된다. 그러니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한강의 문장은 한낱 비유나 과장이 아닌, 정확하게 폐부를 찌르는 진실이다.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삼아왔던 한국사회에 ‘비정상적 죽음’은 너무 잦게 찾아왔고, 이런 역사는 달마다 한반도 곳곳에서 떼제사를 지내게 했다. 4월에 제주43이, 5월에 광주518이 있다면 6월에는 한국전쟁 ‘기념일’이 있다. 올해는 육이오 전쟁 70주년이자, 우리가 ‘휴전’ 70년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 해다.
『밤의 눈』은 한국전쟁 때 자행됐던 보도연맹 학살을 다룬 소설이다. 보도연맹이란 이승만 정부가 좌익인사 관리를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로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에 만들어졌다. 표면적으로는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보호하며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으나, 지역별 할당을 채우기 위해 고무신이나 쌀 등으로 일반인들의 가입을 무차별적으로 유도하는 일도 많았다. 이 보도연맹을 운영하는 국가의 논리는 상당히 이중적이었다. 전쟁 발발 이전에는 보도연맹 가입자 수가 많은 지역일수록 ‘애국심’이 뛰어난 지역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등 전향에 커다란 무게를 두었지만, 전쟁이 터진 후에는 보도연맹 가입자=빨갱이 전적자 라는 도식만 남기고 전향에 부여했던 가치를 휴지조각으로 만든 뒤 ‘즉결처분’을 내린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정부 주도로 만든 반공단체에 가입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그리고 전쟁의 이유)를 되묻게 만드는 모순적인 행위다.
전쟁에 승패가 있다면, 그 승리는 특정하게 지칭할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이나 국가가 아닌 개념적 국가와 민족의 몫이다. 국가는 전장에서 희생된 개인을 열사로 추앙함으로써 안보와 호국을 강조하고 국가성을 강화한다. 반면, 전쟁 중에 수행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국가에 전자와 같은 반사이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에 위령 될 수 없는 원혼이 된다. 남겨진 산 자들에게는 오직 침묵과 망각만이 강요된다. 이렇게 패배는 구체적, 물적으로 존재하는 인간 개인 모두에게 돌아간다. (우리가 만약 ‘승전국’의 ‘국민’일지라도, 전쟁 이후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겐 오직 패배만이 남는다.)
"내 말은 육이오 때 죽은 사람도 구분이 있어야 한다, 그 말이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억울하게 죽었다고 사일구 뒤에 외고 편 놈들, 그때 군인이나 경찰 나가 죽은 유가족들 심정 생각이나 해 봤나? 얼마 전에 우리 시장 안에 그때 설친 자가 있다는 소리 듣고 사일구 뒤가 생각나는 거라. 오일육 아니었으몬 빨갱이들이 나라 말아먹었을지도 몰라! 대한민국 국민이몬 다 같은 국민인 줄 아나? 부산 시내 다쫓겨다니다 어데 수정시장에 나타나 까불고 있어!"
『밤의 눈』 p.345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에서 저자 노용석은 비정상적 죽음을 정상적 죽음으로 되돌리는 유해발굴과 의례 작업 과정에서 꼭 다루어야 할 문제로 ‘죽음의 위계화’를 꼽는다. 국가적 차원에서 죽음의 위계화는 사회적 죽음에 해당 되는 죽음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군경의 죽음 vs 민간인의 죽음) 그래서 민간인 피학살자에 대한 사회적 기념 또한 이러한 구조에 몸을 맞춰 이뤄지곤 한다. 유족회의 위령제나 각종 행사에서 과도하게 태극기를 노출하고 애국가를 열창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추모 대상인 희생자들이 ‘순수한 양민’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퍼포먼스다. (‘가짜 빨갱이의 죽음’ vs ‘진짜 빨갱이의 죽음’) 민간인 학살 추모와 공동체적 기억의 복원이 이런 식으로 흘러선 안된다. 죽음의 위계화는 ‘빨갱이 만들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흐리고 국가주의에 다시 복무하며, 최종적으로는 학살의 원흉이 되었던 이데올로기를 방치하고 승인한다.
『밤의 눈』 후기에 조갑상 작가는 힘든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소설 속 인물로 다시 태어나 세상과 만났다고 썼다. 영혼에게 무당의 입을 빌려주어 자신의 한을 토로하게 한 뒤, 그를 이승과 무사히 작고하게 도와주는 천도재처럼, 문학은 이렇게 하나의 위령제 역할을 한다. “그들이 따뜻한 가슴을 지닌 독자들을 많이 만나 위로받고,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을 읽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을 충분히 위로했을까? 우리 사회는 리미날 기간을 제대로 통과하고 있을까?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 엄결한 반공주의를 기치로 지켜낸 세상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점칠된 바로 지금이라면. 밤의 눈은 여전히 모든 것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