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해방 후 3년 :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조한성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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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격변의 3년간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민족지도자 7인의 시각에서 서술한다.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김구, 김규식 7명의 민족지도자 각자는 어떠한 대한민국을 꿈꾸었고, 당시 각자의 선택으로 어떠한 결과가 뒷따르게 되었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40대 중반을 향해하고 있는 나이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사실상 문외안에 가깝다. 그렇다고 고대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초중고 학창시절을 지나며 45년 해방 이후 6.25 발발까지가 그나마 배우는 근현대사였다.

그나마 45년 이후 50년 6.25 발발까지의 역사도 철저히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정권의 입맛에 맞는 정돈된 기록으로써의 역사만을 배웠다.

아마도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전두환 군부쿠데타 정권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좌익계열의 민족지도자나 이승만 정권의 불찰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낯선 좌익 계열 민족지도자와 중도 계열의 지도자들의 행보를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 등으로 인하여 친일세력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아픈 역사를 연대에 따라 담담하게 그려간다.

글을 읽는 동안 나의 무지와 무관심함에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너무나 많은 인물들과 낯선 이름들로 글을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무관심했던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을 이어갔다.

나이 탓인지 낯섬 탓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책을 계기로 배우지 못한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겠다는 반성을 한다.

만약 김구와 임시정부가 해방과 동시에(이승만에 앞서) 귀국에 성공하고, 안정적으로 정권을 이양했다면, 한반도는 단일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하여 지금까지고 이어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통이 줄어들 수 있었을까?

역사는 과거이고 현시점의 아쉬움은 가정일뿐이지만, 2019년 아베 정권과의 과거사 문제를 지켜보는 지금은 더 가슴이 답답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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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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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를 읽기 시작하였을 때는 의례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의 중반을 지나 결말을 향해가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다.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가족, 자식, 부부, 부모의 개념은 무엇일까?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실험도시의 모습이 어쩌면 ‘에덴’이라는 명칭처럼 유토피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본인이 주관적이라고 여기던 객관적이라 생각하던 사회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심어준 프리즘을 통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선입견, 편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배우고 익힌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충돌이 발생한다. 다른 문화권까지 가지 않더라도 종종 세대간 갈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늙은 세대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옛날에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산다. 본인이 배우고 경험하였던 선입견, 편견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보수적 성향을 드러내게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주인공 아마네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는 언제나 ‘도중’에 있다. 어떤 세상에 세뇌되더라도, 그것으로 누군가를 심판할 권리 같은 건 없는 것이다.>

작품의 결말로 가면서 지금의 우리 시선으로는 낯선 실험도시의 모습이 효율성과 합리성의 관점에서는 옳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나고 자란 세대는 그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을 읽으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지점은 결국 개개인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소모성 부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암울한 생각이었다. 영화 매트릭스는 더욱 극단적인 모습의 미래상을 보여준다. 인류는 그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 원일 뿐이고, 시스템은 끊임없이 행복의 기억을 주입한다.

빨간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약을 먹을 것인가?

현실 세계라고 다른 것이 있을까? 대한민국 정치계와 언론은 고령화 저출산을 입에 달고 있다. 그들이 걱정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결국에는 시스템 유지를 위한 자원 걱정인 것은 아닐까? 저출산이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여성의 탓인듯 이야기 하는 부류를 보면 더욱 이런 생각을 공고히 하게 된다. 아이를 낳으라 종용하지만,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의 고민은 개인에게 미루어 버리는 사회. 아이를 낳지 않는 행위가 매국 행위인양 지적하지만, 여성의 경력 단절, 아픈 아이의 보육 문제, 장애인 캐어 문제 등은 가족의 문제로 손쉽게 돌리고 외면한다.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이 디스토피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실험도시의 모습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사회의 구성원 각자를 차별하지 않는 세상은 정말 불가능 한 것일까? 장애가 있건, 성소수자이건, 나와 생각이 다른 이 이건, 빈부의 격차가 있건 어떤 이유로도 차별 받지 않는 사회, 모두가 인간 다운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사회, 함께 웃고 눈물 흘려 줄 수 있는 사회는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 한 것일까?

서로를 미워하고, 손가락질 하고, 자신의 집값을 걱정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실험도시 보다 나은 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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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좋은 엄마의 필독서
문은희 지음 / 예담Friend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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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제나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각 서점에서 제공하는 ‘책소개’(이것도 역시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이겠지만)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다.

- 아이를 존중하라
- 아이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라
-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
- 아이와 부모는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라
- 아이가 나의 연장선이 아님을 인정하라

등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런 류의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저자는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자기만족에 젖어 있다. 자신의 연구소라고 부르는(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곳에서 연구라는 것이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학술적 가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다. 상담 사례 몇 건을 통하여 성급한 일반화를 일삼고, 어떤 통계나 다른 연구에 대한 레퍼런스도 없이 단정적인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귀납적 추론의 위험은 반례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기존의 주장이 모두 거짓이 됨을 연구자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곳곳에서 묻어 나는 사대주의적 관점도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40년쯤 전에(정확히는 저자가 만으로 마흔 여섯 무렵) 박사 학위를 하느라 영국에 있었는데, 이런 저런 경우에 서양 엄마들은 그렇지 않더라. 한국 엄마들의 이런 저런 모습은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서술은 독자에게 매우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엄격히 이야기 하면 40년 전 이야기를 현시대에 비교한다는 것도 무리이지만, 문화적 차이, 정치•경제적 차이, 개별 가정의 사정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런 식의 비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서양 어머니들은 철저히 아이와 나를 양육의 관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회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까지를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나의 한 부분(저자의 표현으로는 ‘포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양육의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나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들 이야기 하는 교육 및 양육의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결과론적으로 저자는 우리나라의 양육 문제의 핵심이 마치 ‘엄마’에게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런 문제도 ‘엄마’ 탓 저런 문제도 ‘엄마’ 탓으로 단정짓는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물론 큰 틀에서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공감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보편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저자의 주장처럼 서양의 엄마가 옳고, 우리나라 엄마가 그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의 문제일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의 지나치게 높은 교육열과 시민 개개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복지의 부재 등 국가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서양과 우리나라의 대립관계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저자가 서양을 운운하기 때문에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보자.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서방 선진국은 우선 우리처럼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다. 결과적으로 대학진학에 우리처럼 목을 매달지 않는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기본적인 소득이 보장된다. 사회보장 제도가 각 자연인의 생활을 보장하고, 사람의 가치가 어떤 것 보다 우선한다. 정부가 사회보장과 재교육 등을 통하여 직업 전환이 유연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기본적인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어렵다. 부모 입장에서는 극소수가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길(연애인, 운동선수 등) 보다는 보편적으로 기회가 높은 ‘교육’이라는 수단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직업 전환의 유연한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보장 제도를 통하여 기본적인 삶을 보장한다. 아울러 벤처 기업 등을 유한책임의 법인명으로 하기 때문에 투자를 유치하여 실패를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절차상 문제가 없는 경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벤처 등 개인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어렵게 되는 경우 모든 부채를 개인이 떠안는다. 투자 역시 개인명으로 받기 때문에 사업이 도산하여도 책임을 개인이 지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렇게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안전한 길을 추구하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명문대를 졸업하였건, 좋은 아이디어가 넘치는 창의적인 사람이건 결국에는 공무원이나 공사 등 안정적인 직장을 선망한다. 무엇이 국민 개개인의 직업관을 이렇게 만들었겠는가? 이것이 단순히 ‘엄마’의 탓이란 말인가?

저자가 이야기 하는 서양 역시 농경사회나 가내수공업과 같은 원시적 산업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족단위 노동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가족의 울타리로 묶여 여러 대의 가족 구성원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는 것은 산업화 이후, 도시화 이후의 삶의 모습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전쟁 후 70년 정도에 압축적인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가족의 모습은 핵가족화 되었으나, 우리의 부모 세대에게는 농경사회의 삶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어린 시절 명절이면 이런 저런 친척집들을 전전하며 인사를 다녔다. 그렇다면 가족간의 유대감을 강조하거나 가족 구성원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참견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두려는 행동이 어쩌면 이러한 문화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나 우리는 유교적 문화로 600여년을 이어간 조선의 후손이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특성 역시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형성되었을 가족애를 ‘포함’이라는 조어로 시쳇말로 ‘퉁’치려고 한다. 한국 엄마들의 문제는 ‘포함’을 기본 단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과 본인을 분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40년쯤 전에 본인이 박사과정 논문을 작성하며, ‘발견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리하고 자아도취적 주장인지는 위에 잘 설명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연구 결과가 그렇게 저자의 주장처럼 대단한 것이었다면 우리 학계에서 그분의 연구 업적이 매우 높게 평가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저자를 제외한 어떤 누구의 글에서도 ‘포함’, ‘니’ 등의 주장을 읽어 보지 못했다. 40년간 저자는 이렇다 할 연구 결과는 내놓지 못하고, 저자의 다른 서적이나 컬럼을 통하여 자기 논문 표절을 일삼고 있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저자가 이야기 하는 큰 줄기에는 동의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엄마’에게 지우려고 하는 저자의 저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편협하고 자기 독선적인 저자를 지탄하고 싶다. 저자의 주장과 달리 ‘캥거루족’이 증가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서양의 엄마들은 성인이 된 아이들을 모두 쫓아냈어야 옳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는 사회 및 경제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시스템을 베끼면서 압축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미국 시스템도 일본의 그것도 아닌 매우 이상한 시스템의 모습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인지 최근에는 북유럽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양한 정책의 도입으로 사회 문화가 바뀌어 갈 때 우리 역시 자식에게 천편일률적인 교육 보다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을 우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다음 기회를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을 때, 부모 역시 아이에게 꿈을 갖고 도전하라는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부모들에게 아니 이 책에서 문제 삼는 한국 엄마들에게 그래도 변화를 위해 힘을 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너와 나 한국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역시 피해자이니 등을 토닥이고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이야기 하고 싶다. 누군가를 힐난하여 변화를 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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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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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강한 필체로 작품을 작성하였다면 어땠을까?

작품의 문장은 지적할 것이 없다. 비문도 없고, 진행에 심각한 비약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 아쉽다. 설정이 다소 무리한 면이 있고, 불필요한 선정성이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왜 작품을 이렇게 외설적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서인하의 진술 첫 마디에서 SM을 언급한다. 사도마조히즘적(가학적 피학적) 사랑이라고 언급하지만, 왜 이런 설정이 필요한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랑이라고 묘사된 내용이 SM이라고 느낄만한 부분이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카 섹스를 즐기고, 섹스 중 엉덩이를 때린 것이 SM이란다. 차라리 SM 등은 언급하지를 말던지 아니면, 보다 적극적으로 SM 묘사를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한다. ‘소실점’의 성적 묘사는 ‘원초적 본능’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SM이라는 단어로 가학적/피학적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사랑으로 퉁치려 한다.

디테일이 아쉬운 모습들도 보인다. ‘중소형차’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소형, 준중형, 중형, 준대형, 대형 정도로 구분한다.

도대체 ‘한쪽 입꼬리를 말고 웃었다’ 이게 무슨 말일까? ㅎㅎㅎ 작가에게 한쪽 입꼬리를 말고 웃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뭐 후하게 이정도는 문학적 허용으로 넘어가보자.

여성 비하적 표현도 보인다.

[강주희는 종종 법이 늙은 여배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분장을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면 모두를 장악하고 모두를 매료시킬 수 있지만, 그 껍데기를 벗고 나면 무기력하고, 그 무기력함이 때론 추해보이기까지 하는, 하나의 인격 안에 깃들어 있는 두 개의 영혼 같은 속성. 법의 권력과 법의 무기력. 양쪽 모두 진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여배우의 ‘여’를 뺀다고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있을까? 혹은 여배우를 통째로 빼고 ‘늙은 이’라고 표현한다면 문제가 있을까? 괜한 여배우를 언급하여 여성 비하적 양상을 보인다.

디테일이 아쉬운 다른 부분을 살펴보자.

최선우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16도로 에어컨이 동작중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의문 하나. 에어컨이 16도 설정이 가능한가? 보통 18도까지 이지 않은가? 더불어 아래 문장을 살펴 보자.

[최선우 씨의 사망 시각이 23일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이고, 서인하씨는 그날 2시 반경 집을 나섰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우 씨의 사고와 사망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맞습니까?]

저자의 주장대로 에어컨을 16도로 맞추었다고 치자, 시신은 빠른 속도로 식어갈 것이고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시신은 16도를 유지할 것이다. 냉장고에 들어간 고기처럼... 이 상황에서 사망시간을 정확히 추정 하는 것이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에어컨을 켠 시간도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집에 있을때부터 계속 켜두었다면 더욱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미드 CSI에서도 이런 경우 사망시간 추정 및 특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굉장히 큰 오차범위 안에서 추정만 할 뿐이다.

또 아래의 경우를 보자.

[“남 검사, 나야! 우리가 찾은 그 파일 속 희생자들 자료. 응, 프린트된 거. 그거 포렌식 의뢰해줘. 같은 날, 같은 프린터로 인쇄된 건지.”]

세상의 어떤 기술로 같은 날 프린트 된 것인지 파악할 수 있는지 저자가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같은 프린터를 특정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다. 특정 위치의 오차 등을 통해서 프린터를 구분은 하더라도, 인쇄된 시기를 특정하는 것은 내가 아는 선에서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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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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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출판사 소개 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수많은 복선이 깔려 있는데, 무심코 지나친 소품이나 에피소드가 뒤에서 의미를 갖고 연결되어 아귀가 들어맞는다. 던져진 단서 중 회수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작은 장면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작가 야쿠마루 가쿠는 매우 영악하고 꼼꼼하다.

출판사 소개글을 먼저 읽고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토씨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읽어 나갔다. 덕분에 많은 부분 후반부의 퍼즐 맞추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책장을 덮으며 ‘대단하다’라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리한 진행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때면 등장인물이 그에 대한 부연 설명을 잊는다. 결과적으로 무리 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완성도가 높지 않은 스릴러 작품이 많다. 혹자는 추리물, 스릴러물 등을 장르문학으로 구분하고 별기대하지 않고 작품을 읽는다. 마치 우리가 킬링타임 용 영화를 감상하듯... 이 경우 작가 마저 작품의 완성도를 형편없이 만들거나, 용두사미로 결말을 맺는 이들이 있다.

이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은 훌륭한 교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앞뒤의 이야기가 잘 들어 맞고, 전개에 무리가 없으며, 작품의 결말도 순조롭게 마무리 한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갖을 수 있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볼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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