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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 -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좋은 엄마의 필독서
문은희 지음 / 예담Friend / 2011년 9월
평점 :
이 책의 주제나 이야기의 큰 줄기는 각 서점에서 제공하는 ‘책소개’(이것도 역시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보도자료이겠지만)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다.
- 아이를 존중하라
- 아이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하라
-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
- 아이와 부모는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라
- 아이가 나의 연장선이 아님을 인정하라
등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런 류의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저자는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자기만족에 젖어 있다. 자신의 연구소라고 부르는(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곳에서 연구라는 것이 이루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학술적 가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다. 상담 사례 몇 건을 통하여 성급한 일반화를 일삼고, 어떤 통계나 다른 연구에 대한 레퍼런스도 없이 단정적인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귀납적 추론의 위험은 반례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기존의 주장이 모두 거짓이 됨을 연구자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작품의 곳곳에서 묻어 나는 사대주의적 관점도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가 40년쯤 전에(정확히는 저자가 만으로 마흔 여섯 무렵) 박사 학위를 하느라 영국에 있었는데, 이런 저런 경우에 서양 엄마들은 그렇지 않더라. 한국 엄마들의 이런 저런 모습은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서술은 독자에게 매우 부담스럽게 다가온다. 엄격히 이야기 하면 40년 전 이야기를 현시대에 비교한다는 것도 무리이지만, 문화적 차이, 정치•경제적 차이, 개별 가정의 사정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런 식의 비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서양 어머니들은 철저히 아이와 나를 양육의 관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사회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까지를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이를 나의 한 부분(저자의 표현으로는 ‘포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양육의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이를 나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흔히들 이야기 하는 교육 및 양육의 갖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결과론적으로 저자는 우리나라의 양육 문제의 핵심이 마치 ‘엄마’에게 있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런 문제도 ‘엄마’ 탓 저런 문제도 ‘엄마’ 탓으로 단정짓는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물론 큰 틀에서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공감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보편적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저자의 주장처럼 서양의 엄마가 옳고, 우리나라 엄마가 그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의 문제일 수는 있지만, 우리나라의 지나치게 높은 교육열과 시민 개개인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복지의 부재 등 국가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서양과 우리나라의 대립관계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저자가 서양을 운운하기 때문에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보자.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서방 선진국은 우선 우리처럼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다. 결과적으로 대학진학에 우리처럼 목을 매달지 않는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어떤 일을 하더라도 기본적인 소득이 보장된다. 사회보장 제도가 각 자연인의 생활을 보장하고, 사람의 가치가 어떤 것 보다 우선한다. 정부가 사회보장과 재교육 등을 통하여 직업 전환이 유연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기본적인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어렵다. 부모 입장에서는 극소수가 성공을 이룰 수 있는 길(연애인, 운동선수 등) 보다는 보편적으로 기회가 높은 ‘교육’이라는 수단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직업 전환의 유연한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보장 제도를 통하여 기본적인 삶을 보장한다. 아울러 벤처 기업 등을 유한책임의 법인명으로 하기 때문에 투자를 유치하여 실패를 하더라도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절차상 문제가 없는 경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벤처 등 개인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어렵게 되는 경우 모든 부채를 개인이 떠안는다. 투자 역시 개인명으로 받기 때문에 사업이 도산하여도 책임을 개인이 지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렇게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안전한 길을 추구하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명문대를 졸업하였건, 좋은 아이디어가 넘치는 창의적인 사람이건 결국에는 공무원이나 공사 등 안정적인 직장을 선망한다. 무엇이 국민 개개인의 직업관을 이렇게 만들었겠는가? 이것이 단순히 ‘엄마’의 탓이란 말인가?
저자가 이야기 하는 서양 역시 농경사회나 가내수공업과 같은 원시적 산업화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족단위 노동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가족의 울타리로 묶여 여러 대의 가족 구성원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핵가족화가 진행되는 것은 산업화 이후, 도시화 이후의 삶의 모습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전쟁 후 70년 정도에 압축적인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가족의 모습은 핵가족화 되었으나, 우리의 부모 세대에게는 농경사회의 삶이 어린 시절의 경험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역시 어린 시절 명절이면 이런 저런 친척집들을 전전하며 인사를 다녔다. 그렇다면 가족간의 유대감을 강조하거나 가족 구성원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참견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 두려는 행동이 어쩌면 이러한 문화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나 우리는 유교적 문화로 600여년을 이어간 조선의 후손이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특성 역시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형성되었을 가족애를 ‘포함’이라는 조어로 시쳇말로 ‘퉁’치려고 한다. 한국 엄마들의 문제는 ‘포함’을 기본 단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과 본인을 분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도 40년쯤 전에 본인이 박사과정 논문을 작성하며, ‘발견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얼마나 무리하고 자아도취적 주장인지는 위에 잘 설명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의 연구 결과가 그렇게 저자의 주장처럼 대단한 것이었다면 우리 학계에서 그분의 연구 업적이 매우 높게 평가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저자를 제외한 어떤 누구의 글에서도 ‘포함’, ‘니’ 등의 주장을 읽어 보지 못했다. 40년간 저자는 이렇다 할 연구 결과는 내놓지 못하고, 저자의 다른 서적이나 컬럼을 통하여 자기 논문 표절을 일삼고 있다.
앞서도 밝힌 것처럼 저자가 이야기 하는 큰 줄기에는 동의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 책임을 ‘엄마’에게 지우려고 하는 저자의 저의에는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편협하고 자기 독선적인 저자를 지탄하고 싶다. 저자의 주장과 달리 ‘캥거루족’이 증가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서양의 엄마들은 성인이 된 아이들을 모두 쫓아냈어야 옳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는 사회 및 경제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시스템을 베끼면서 압축성장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미국 시스템도 일본의 그것도 아닌 매우 이상한 시스템의 모습이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인지 최근에는 북유럽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양한 정책의 도입으로 사회 문화가 바뀌어 갈 때 우리 역시 자식에게 천편일률적인 교육 보다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교육을 우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다음 기회를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되었을 때, 부모 역시 아이에게 꿈을 갖고 도전하라는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부모들에게 아니 이 책에서 문제 삼는 한국 엄마들에게 그래도 변화를 위해 힘을 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너와 나 한국 엄마가 아니라, 우리 역시 피해자이니 등을 토닥이고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이야기 하고 싶다. 누군가를 힐난하여 변화를 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