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3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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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이 나면 모든 동물은 산불을 피해 도망을 간다. 풍뎅이는 반면 산불 난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알을 낳는다.

이 시대 지성인이던 '이어령' 선생은 경쟁력과 생존력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경쟁력과 생존력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비슷하지 않다는 것이다. 힘의 논리로 봤을 때, 공룡이 사라진 자리에는 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공룡이 사라진 자리 뒤에 더 작고 나약한 종들이 번식해 갔다. 남들보다 뛰어난 경쟁력이라는 것은 때로 생존력 앞에 무력할 뿐이다. 남들이 피해간 척박한 곳에 자리잡고 적응하는 생존력은 결국 경쟁자 또한 이기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종인 것이다. 어떤 경쟁자도 '환경' 앞에 무력하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와 같은 표현이 있다.

'누군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려거든 앙갚음하려 들지마라. 강가에 고요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아라. 그럼 머지 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 올 것이다. 강한자가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고로 가장 강한 자는 경쟁 관계에서 우위에 서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강한 자는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풍뎅이가 산불이 난 자리를 찾아가는 이유는 그곳이 안락하고 좋기 때문이 아니다. 그곳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경쟁자와는 상관없이 자기 자신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다.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잘 적응하는 과정은 때로는 어떤 경쟁자와의 대립보다 위험하고 어려울 수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고 나면 그 뒤에는 어떤 경쟁자도 상대할 수 없는 생존자가 된다. 날지 못하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새, 펭귄은 자신의 천적을 피해 스스로 영하 70도의 추위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투쟁의 흔적은 상흔이 되어 자리에 남는다. 이 상흔은 치열한 환경과 다툼의 흔적이다. 이렇게 호랑이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이라는 상흔을 남겼고 기린은 커다란 목을 남겼다. 자신을 위협하는 환경에 적응하고자 했던 수많은 세대의 상흔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도 남은 '상흔'은 '지성'이다. 이런 '인류학적인 진화'의 흔적은 승리의 표식으로 여겨지지만 바뀐 환경에서 이겨내기 위해 가져야 했던 변화의 흔적이다. 진화론적으로 진화를 얻어내기 위해, 개체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그 희생은 영광만큼이나 처절하다. 환경에 적합한 하나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는, 하나의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전체의 희생이 필요하다.

환경이 변한다. 개체가 변한다. 개체의 포식자가 변한다. 결국 환경에 더 적합한 것이 살아남을 뿐, 경쟁자와의 경쟁에서의 승리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정한 승리는 아니다.

갑자기 기후가 더워지면 어떻게 될까. 갑자기 기후가 더워지면 기존의 식물들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물부족으로 인해 모두 도태된다. 이때 물 부족과 강한 햇빛 조건에 적합한 돌연변이 식물이 살아 남는다. 이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이 돌연변이가 살아남게 된 이유는 바로 '커다란 키' 때문이다. 커다린 키는 수분 증발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햇볓을 포획한다. 또한 효율적인 광합성을 가능하게 한다. 높은 키는 바람에 의한 수분 증발을 줄이고 경쟁자와의 경쟁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들어서게 된다. 반면 이 나무에 열리는 나뭇잎을 먹고 자라는 '기린'의 입장도 변화된다. 기존의 경쟁력은 더이상 경쟁력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주로 먹던 식물들이 모두 말라 죽거나 높게 형성되자, 목이 긴 '돌연변이'를 제외한 나머지 식물들은 모두 도태되거나 굶어 죽는다. 이렇게 변화된 환경은 척박함에 익숙한 소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결국 소수는 다수가 되어 대세가 된다. 그것이 기린이 목이 길어진 이유이며, 호랑이의 발톱이 날카로워진 이유이고, 인간의 지성이 뛰어나게 된 이유다. 결국 결핍에 대한 적응력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어떤 경쟁에서보다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경쟁자는 '주변'이 아니라, 환경과 자신일 뿐이다.

한국인의 경우, 여러 민족 중 가장 눈이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부가 밝고 맑은 편에 속한다. 코는 짧고 얼굴은 둥글다. 당연히 한국인의 외형을 일반화 할 수 없으나 대체로 이런 특성이 많다. 이런 외형적 특성은 바이칼 호 주변의 찬바람과 같은 혹독한 환경을 견디면서 생겼다.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서 생활하는 민족은 대체로 낮은 온도와 강한 바람에 대응하기 위한 신체적 특성을 발달시킨다. 눈이 작고 피부는 희고 얼굴은 동그랗다. 코는 코는 짭다.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동물들 역시 두꺼운 체지방층과 짧고 넓은 몸통, 작은 눈을 가진다. 결국 하루와 한 달, 일 년이라는 차이는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작은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으나, 그것이 지속적이고 꾸준하며 반복적으로 환경에 노출된다면 그것은 장기적이 관점에서 꽤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환경은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도 포함한다. 실제 과거와 현대의 한반도인의 외형은 달라졌다. 대표적인 변화는 평균 신장의 증가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한국의 빠른 경제 발전은 식생활을 크게 개선했다. 이 결과 성장기 아동과 청소년의 신장은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미적 기준 자체도 바뀌었다. 과거 미인 기준은 아담한 '입'과 '둥근 얼굴', '수수한 눈'이었다. 현대의 미는 그와는 정반대다. 두툼한 입술, 날카로운 턱선, 진한 눈꺼풀이 현대의 미의 기준이다. 이는 미디어의 발달로 미의 기준이 글로벌화 됐기 때문이다. 또한 성형 수술과 화장품 증가, 시술 등 다양한 기술적 요인도 한몫 했다. 현대에서 '외형'은 또다른 의미에 '경쟁력'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외모'만 가지고도 '큰돈'과 '영향력'을 갖는다. 불과 얼마 전인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사람들이 외모를 경쟁력 중 하나로 여기게 했다. 이런 관심은 실제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 사회적 현상은 흔히 '외모지상주의'라고 한다. 서양보다는 동양이, 동양 중에서도 '한국'이 유독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그 이유로 '관계를 중요시 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통상적으로 쌀을 최초로 재배한 지역은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후난성 옥천암 동굴에서 9000년 전 볍씨가 출토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에서 발견된 소로리 볍씨는 약 1만 3천년에서 1만 5천년 전 것으로 밝혀져 중국 후난성에서 발견된 볍씨보다 2000년에서 4000년이나 앞서다. 이는 한반도의 쌀농사 문화가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 됐는지를 말해준다.

쌀농사는 관개사업을 비롯해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공사를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는 '수직상하적' 관계를 중요시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형성을 몹씨 중요하게 여긴다. 쉽게 말해, 우리는 호칭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누구의 형제인지, 성별은 무엇인지, 나이는 누가 많고 누가 적은지, 이 모든 것을 한번에 확인할 수 있는 호칭을 따로 부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술어'와 '명사'를 선택하여 '압존법' 등을 활용하여 관계 형성을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든다.

이렇게 관계를 세분화하고 그 위치를 명확하게 하는 언어는 기껏해봐야, 중국어와 한국어에 정도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쉽게말해 고모, 이모, 숙모는 일본어에서 'おば'로 통칭한다. 또한 영어에서는 'aunt', 프랑스 말에서는 'tante'로 사용한다.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일 때도 손윗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여동생, 남동생, 오빠, 언니, 누나, 형 등으로 구별된다. 이처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다른 이들보다 '체면'이나 '외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된 이유는 아주 치열한 생존 매커니즘의 결과물이다. 이런 변화는 지금 이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우리는 단기적으로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 발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환경에 적합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때로는 척박한 환경이 더 생존성을 키우는 강인한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있다. 고로 나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것은 포근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척박한 환경이다. 만약 내가 서 있는 환경이 척박하다면 그것이 나의 생명력을 길러주는 감사한 환경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거기에 적응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고로 생존은 '환경'의 탓이 아니라, 내 적응력의 탓일 수도 있다. 경쟁자에게 친 덫에 자신이 빠지지는 말자. 변화된 환경은 어쩌면 내 천적과 경쟁자를 모두 없애주는 최고의 환경일 수도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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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몽어스 크루원의 일기 1 - 첫 번째 우주 비행 어몽어스 크루원의 일기 1
마크 파워스 지음, 한성희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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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5시 50분이 되면 로봇청소기가 돌아간다. 모터 출력은 최대치다. 큰 소리가 난다. 청소기가 돌아가면 자고 있던 아이들이 깬다. 6시가 되면 아이들은 '오늘의 학습'을 가지고 온다.

한동안, 아이들은 오늘의 학습을 한다. 대략 30분 정도가 걸린다. 아이들이 눈을 뜨자마자, 학습을 하는 이유는 학습이 끝나지 않으면 학교가 끝난 뒤에 놀지 못하고 학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습이 끝나면 '그림일기'를 쓰거나 동화책을 읽는다. 나 또한 옆에서 책을 읽는다.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스케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에서 소리를 치거나 강제로 시키지 않는다. 아이에게 선택권을 준다.

"하는게 좋지 않나.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않아도 돼.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그러면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하겠다고 한다.

아침부터 시끌시끌하다. 고로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냥 가볍게 읽고 넘긴다. 그렇게 아침 '할일'하는 타임과 독서하는 시간을 가진다.

일곱 시 반이면 아침 식사를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이들은 자기 전에 식탁 위에 알림장을 꺼내 둔다. '아빠가 확인해야 하는 서류'다. 서명할 것은 서명한다. 그날 학교에서 있을 스케줄이나 일정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나중에 준비해야 할 것은 따로 빼놓는다.

식사를 마치면 아이들은 세수와 양치질을 한다. 또한 미리 꺼내 놓은 옷으로 갈아 입는다. 옷을 갈아 입으면 알림장은 가방에 집어 넣는다. 가방에 집어 넣을 때 가방 정리도 한다. 친구들과 같이 만들었던 색종이, 장난감, 쓰레기 등을 정리한다.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안락의자에 앉는다. 책을 읽는다. 아이가 지나가며 말을 건낸다. 가벼운 대화다.

학교 준비는 철저하게 본인이 하도록 한다. 옷 입고 가방 준비도 모두 스스로 하게 한다. 규칙이 있다. 모든 해야 할 일이 완벽하게 끝나면, 그에 맞는 '완벽한 자유시간'을 준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은 이렇다.

일기쓰기, 독서, 오늘의 학습.

다시 말하지만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는다. 권유하고 선택하게 한다. 그 과정에 유도는 존재한다. 그리고 했는지만 확인만 한다. 결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숙제를 다하면 놀이터에서 놀아도 좋고, 바닷가에서 모래를 실컷 만져도 좋다. 옷이 더러워지거나 손과 발이 더러워지는 것은 괜찮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면 샤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나면 만들기나 소꿉놀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디서 보건데, 아침에 쓴 일기와 저녁에 쓴 일기는 완전히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한다. 아침에 쓴 일기는 이성적이고, 밤에 쓴 일기는 감성적이다. 대체로 밤에 일기를 쓰는 것을 사람들은 선호하지만 밤에 일기를 쓰다보면 너무 감성적으로 하루를 판단한다. 친구랑 싸웠거나 속상한 이야기를 잔뜩 적어 놓는다. 다만 아침에 글을 쓰면 차갑게 감성이 내려 앉아, 그날의 계획이나 목표를 쓰게 된단다. 숙제나 해야 할일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하는 편이 좋다. 모든 에너지를 쏟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냥 쉬는 것'이 최고다. 거기에 앉아서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부담이 있다면 반드시 거부감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일과를 묻는다. 아이들이 주절 거린다. 친구 이야기와 선생님 이야기를 한다. 가만히 듣고 있는다. 또한 아이가 배웠다고 하는 어떤 주제에 대해 자꾸 딴지를 건다.

"아빠!, 줄을 설 때, 팔을 벌려야 돼."

아이가 이렇게 말하면 꼭 딴지를 건다.

"왜? 팔을 왜 벌려야 하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거래."

"왜? 선생님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래?"

"그건 모르지"

"모르는데 왜 해? 다율이는 몰라도 그냥 하는 사람이었어? 선생님한데 왜 해야 하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맞다. 내일 물어 볼려고 했는데, 깜빡했어. 내일 물어볼꺼야."

그러면 아이가 다음날 선생님께 물어 본다. 행위에는 '본질'과 '목적'을 확인하는 것이 반드시 중요하다. 왜 그것을 해야하는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어떤 교육 철학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일종에 대화 습관 같은 거다. 또한 반응이 재밌기도 해서다. 가끔은 괜히 반대가 될만한 답을 내놓는다.

"아빠, 발표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아?"

"발표할 때는 친구랑 딴짓하면서 발표하는 거 아냐?"

그러면 아이는 아니라고 정색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그러면 아이가 줄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교육학에서 가장 효율적인 학습법이 '교육'이라고 한단다. 다시 말해서 어디서 듣거나 보는 것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법이란다. 고로 일부러 틀린 대답을 말하고 왜 그런지 설명을 듣는다.

여기에는 교육철학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냥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재밌고 그 반응을 보려고 하는 일일 뿐이다.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면 외투를 걸어 놓고, 책가방에서 알림장을 꺼내 놓는다. 책가방은 현관 문 앞 신발장에 나란히 정리한다. 모든 해야 할 일을 다하면 선택권을 준다.

"밖에서 놀거야? 씻고 쉴꺼야?"

아이가 대답하는 대로 한다. 아이가 샤워를 한다. 깨끗하게 씻고 나오면 머리를 말려준다. 그 전까지 책을 보고 있는다. 아이가 깨끗이 씻고 나오면 다음날 학교 갈 때 입을 옷을 꺼내 놓는다. 그 쯤되면 3시다. 3시에는 청소기가 돌아간다. 청소기가 돌아가면 바닥에 있는 물건을 빨리 치워야 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집안일을 시작한다. 옷을 세탁기에 넣고 정리를 한다. 이렇게 정리가 모두 끝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시간이다.

일을 하러 나갈 때가 되면 아이는 무한대의 놀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아침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다. 모든지 다 해도 좋다.

단, 결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할 수 없다. 일단 중요한 것은 우리집에 전자기기 충전선은 모두 '세탁실'에 있다. 세탁실의 깊은 곳에 C타입 충전선과 라이트닝 충전선, 스마트워치, 스마트폰 충전기가 있다. 고로 집 전체에 전자기기가 없다. TV는 당연히 없다.

아이들이 잠에 들 때는 책을 읽어준다. 또래 책을 읽어주는 일이 힘들 때는 오디오북을 틀어준다. 아이가 잠에 든다. 그러면 몰래 일어나 그때서야 스마트 기기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한다.

몇 일 전에 하율이가 서점에서 '어몽어스'를 사야 한다고 했다. 어찌나 절실하게 찾던지 점원 언니에게 어몽어스를 한참 설명했다. 언니가 묻기에, 어몽어스는 워낙 많아서 어떤 걸 찾는지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찌됐건 본인이 생각하는 책을 하나 사고 왔다. 몇 일 간 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지난 주에는 그 책을 읽어달라고 가져왔다.

읽었다. '어몽어스', 어린이가 읽는 책인데, 이렇게 재밌단 말이야.

어휘가 조금 쉽고 내용이 단순해서 그렇지.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구성이 어린이 책에서도 그대로 있었다.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극중 주인공인 '빨강'과 '파랑' 누가 범인일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개인적으로 아이보다 내가 더 재밌게 읽었다. 1권에서 내용이 정리가 됐는데, 2권도 있다고 한다. 2권에 내용도 너무 궁금한데, 아직 하율이가 2권을 사고 싶다고 하진 않는다. 나중에 서점에 가면 하율이에게 2권을 읽어 볼 생각이 있는지 묻고, 사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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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카 김재희 케이스릴러
김달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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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무릇 천하대세는 합쳐지면 반드시 흩어지고, 흩어지면 반드시 다시 합쳐진다. 이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도입부다. 영원한 것은 없다. 천하대세 또한 마찬가지다. 기존 질서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은 없다. 기존 질서가 '통합'이라도 언젠가는 '분열'이 되고, 기존 질서가 '분열'이라도 언젠가는 '통합'이 된다.

'21세기'는 '파편화'의 시대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다. 시기에 따라 '분열'되고 합쳐진다. 어떤 시기에는 '채집'과 '수렵'이 옳다가, 어떤 시기에는 '농사'가 옳다. 어떤 시기에는 '농경민'이 세계를 제패하다가, 어떤 시기에는 '유목민'이 세계를 제패한다. 한 동안은 '대륙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다가 갑자기 '해양세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런 반복은 꾸준히 있어왔다.

봉건국가인 '네덜란드'가 중앙집권 국가인 '영국'에 세계의 패권을 넘겨준 사건은 시대가 바뀌면서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거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은 반복되며 증명한다. 한때는 '통합'이 세계적 추세였다. '세계화'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였다. 모든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질서에 반하는 경우, 시대착오라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파편화'가 대세다. 세계 뿐만 아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 정보는 중앙에서 개인으로 넘어간다. 실체가 어떠하든 '탈중앙화'를 외치는 비트코인이 1억을 넘는 시대이며, 공중파 방송국이 '인플루언서'에게 정보 제공자로의 역할을 넘기는 시대이다. 알고리즘은 점차 '개인 맞춤 정보'를 제공한다. 좌는 좌끼리, 우는 우끼리,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청년은 청년,노년은 노년, 소년은 소년. 각자 자신들의 세상에 묶여 파편화 된다. 고로 세대 갈등과 남녀 갈등, 인종 갈등, 국가 간의 갈등, 저출산, 고립, 양극화는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며 세계적인 추세다.

이런 파편화 된 세계에서 이슈에 대해 빠르게 정리하여 영상을 만드는 인플루언서들이 있다. '사이버 렉카'다. 사이버 렉카는 매스컴에서 '나쁜 쪽'으로 비춰진다. 개인적으로 꼭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개인의 시대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며,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예능을 본다. 권력이 중앙 집권되어 있던 시기에서 점차 파편적으로 나눠지는 그 과도기적 시점에서 그에 따른 부작용과 정화작용은 피할 수 없는 절차다.

모든 것에 양과 음이 있듯, 당연히 이들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 사이버 렉카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조회수를 이유로 자극적인 컨텐츠를 제작하거나, 때로는 팩트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잊혀질 뻔 한 이슈를 공론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짜집기 편집하여 송출하다보니 내용 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모든 과도기에는 이러한 문제가 항상 나오며 그 문제는 때로는 기존 질서와 부딪치며 큰 소음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미 시대가 달라지는 일을 과거도 돌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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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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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6세기 스코틀랜드의 어딘가 였다. 그 곳에는 '소니 빈'이라는 남자가 살았다. 그는 사회와 법률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인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사회를 등지고 살기로 했다. 이들이 택한 곳은 스코틀랜드 해안을 따라 있는 외딴 동굴이었다. 둘은 이 동굴에 터전을 잡기로 한다. 새로 잡은 터전은 그들의 새로운 집이자 세계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가족을 이루었고 자신들만의 '생활 방식'을 만든다. 생존을 위해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꽤 충격적인 방식이다. 그들은 밤이 되면 가족 구성원들과 동굴 주변을 순찰한다. 그러다 마주치게 되는 여행자들을 타겟으로 했다. 어두운 밤, 여행자들을 습격하고 그들의 물품을 훔쳤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신을 식량으로 삼았다. 시간은 점차 흘렀다. 대략 25년의 시간이 지났다. 소니 빈의 자식들은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그들만의 사회가 구성된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문화로 받아 들인다. 누군가는 사냥을 하고 누군가는 식량을 손질한다. 누군가는 내장을 비롯한 불순물을 바닷가에 버리는 일을 한다. 이렇게 분담된 일을 하면서 이 가족 구성원은 마흔 여덟 명까지 늘어난다. 살인과 식인에 대한 죄책감은 그저 '사냥'과 '조리'라는 단순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들 일가족의 이야기는 결국 사회에 알려진다. 소니 빈 가족은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약육강식'은 '죄의식'과 큰 영향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몰랐으며 자신이 사냥했던 많은 '식량'들 처럼, 자신들도 곧 '강자'에게 잡힌 먹이감의 운명이 됐음을 직시했다. 이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소니빈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설화의 중간 경계에 서 있다. 실제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가만히 지켜 보건데, 이는 근대에서의 어떤 일과 유사하다. '악의 평범성'. 20세기 정치 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보도하면서 사용됐다. 아이히만은 대량 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에 관여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악'과 거리가 멀었다. 아렌트가 관찰한 그는 '평범하고 성실한 공무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덕적으로도 평범했던 그가 그처럼 악한 인물이 된 이유는 일상적인 환경에서 단순 명령과 복종 혹은 체계의 일부로써 자신도 모르게 '악'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단순한 업무처리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악'은 특별한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히 사회 시스템에서 커다란 맥락을 바라보지 못했을 때 조차 발생한다. 그렇다면 '소니 빈'의 가족 또한 다르지 않다. 애초에 태어났을 때 부터 '살인과 식인'에 길러진 '소니 빈'의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돼지'와 '소'를 도축하고 불에 그을려 포식한다. 그들을 살육하고 포식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인간'이라면 거기에는 '죄'와 '악'이라는 이름이 여지 없이 들어간다. 가만 보면 그것은 '인간'만의 독특한 습성은 아니다. 자연계에서 '동족포식'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 이유를 따지고 들면 몇 가지가 있다. 개중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동족을 잡아 먹는다는 것은 다른 종을 잡아 먹는 일에 비해 꽤 비효율적인 일이다. 자신보다 나약한 종을 잡아 먹는 일에 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꽤 큰 위험 부담도 지어야 한다. 자연계에서는 '유전적인 차이'로 인해 '강자'와 '약자'가 나눠진다. '사자'는 같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다. 유전적 차이가 비슷한 경우에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가 한다. 이들은 '토끼'나 '사슴'과 같은 상대적 약자를 잡아 먹는다. 그것은 훨씬 더 효율적인 포식 방법이다. 이처럼 유전적 차이가 명확한 경우, 힘의 논리가 명확하게 사용된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 가만 보면 인간의 DNA는 서로 비슷하다. 다만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DNA'뿐만 아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돈'과 '사회적 지위', '환경'도 포함된다. 이렇게 '사회적 DNA'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약자'와 강자'가 생겨난다. 과거에는 동족을 사냥하는 일이 '에너지적으로 비효율'에 해당됐지만, 사회가 점차 양극화 되면서 서로 물려받는 '사회적 DNA'에는 '사자'와 '토끼'만큼의 차이가 발생한다. 인간이 실제 인간을 포식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일은 쉽게 벌어진다. 우리 사회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강자가 약자에게 포악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실제 '악'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악의 평범성'이 떠오른다. 자신은 실제 어떤 죄의식도 갖지 않으며 당연한 절차를 진행해 온 성실한 아무개라는 의식 말이다. 인간과 인간의 격차가 점차 서로를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격차로 벌어졌을 때, 어쩌면 강자나 약자 모두가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관계를 너무 당연하게 여길지 모른다. 우리가 사자가 '악', 토끼가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은 구와 담이라는 '남과 여'의 이야기다. 구를 먹음으로써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는 꽤 도발적인 주제다. 다만 그 이야기는 섬뜻하거나 더럽다기보다 안쓰럽고 씁쓸하다. 어쩌면 포식자로부터 동족을 지키기 위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다. 소설을 다 읽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는 '창세기'의 '9와 숫자들'이라는 음악을 들으며 이 소설을 집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 음악을 들으며 '잔잔하게 퍼지는 여운'까지 이 소설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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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
정신과 의사 토미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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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말을 들으면 때로는 심각한 상처를 받는다. 현실이나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쾌한 말은 잔잔한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고 그 하루 자체를 망치기도 한다. 일본에서 38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이자 정신과 의사인 '토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못된 사람에게는 칭찬보다 비난을 듣는 편이 낫습니다."

모두에게 인정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럴 받을 수도 없다. 살다보면 누군가의 잣대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메세지'에 큰 상처를 입니다. 그런데 공곰히 생각해보면 이렇다.

상대에게 '칭찬'을 받는 편이 더 치욕스러울 수 있다. 칭찬은 때로 상대의 기대나 가치관에 부응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가 상대의 기대와 가치관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에 따라 내가 원치 않는 모습일 수 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에 주목해보자.

추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하여도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범죄에 함께 연류된 공범에게는 완벽한 범죄에 대한 치밀한 계획이 '칭찬'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선한 행동에 대해 질투만은 혹자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1944년작, 영화 '가스라이트'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 자체의 유래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미치게 만들려고 조직적으로 거짓말하고 환경을 조작하는 내용을 다룬다. 아내는 점점 자신의 기억과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때로 칭찬과 비난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고로 '말'은 언제나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타인의 평가에 너무 의존할 필요도 없다.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비폭력 저항의 아이콘인 마하트마 간디는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그들의 더러운 발로 걷도록 허락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순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난데없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와 헤집고 다니는 인성이라면 그들의 평가에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전혀 없다. 그들의 기대와 가치관에 부흥하는 일이 되려 모욕일 뿐이다.

나를 평가한 상대의 인품은 어떤가.

그의 능력은 어떤가.

그의 칭찬과 비난이 곧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가.

삶을 언제나 평탄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비난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칭찬에 감사해야 하기도 한다. 다만 어떤 비난과 칭찬이 '자아'를 흔들 정도라면 전혀 게의치 말아야 한다.

붓다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번은 붓다가 비난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똥을 주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 똥은 누구 손에 들려 있습니까."

우리가 비난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을 '배움'으로 받아들이면 좋다. 다만 그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비난은 결국 비난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비난'하는 사람은 종종 자신의 내면의 불안이나 부정적 감정을 다른 이에게 투사한다. 이로써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로 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난다. 다만 이는 단기적 불편함을 경검시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기 인식 부족과 대인 관계의 문제를 만들어 결국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심리적 문제나 부정적 영향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인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성'이다. 모든 문제를 상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할 것인지의 문제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부에 두고 선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을 취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은 아닐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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