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5분 명상
혜거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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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큰일이라 생각한 일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살다보면 크고 작은 사건을 맞이 한다. 나를 삼켜 버릴 위협도 있다. 그러나 깨달을 때도 됐다. 나를 덮칠 듯한 위협 뒤에도 '아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고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사업을 망친다. 시험에 떨어진다. 기회를 놓친다. 인생을 바꿔 놓을 결정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 뒤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가 결정되는 순간,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다른 선택지는 사라진다.

비교대상은 사라진다. 사건 발생과 동시에 사라진다. '현실'만 남고 모두 사라진다.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 사람은 그것에 의미를 둔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냥 일어났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맞이할 뿐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럴 수도 있었는데...' 혹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이 마치 내것이었던 것처럼, 마치 내것으로 올 것처럼 아른 거린다.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감정'으로 오고 간다. 머리로 진리를 깨우쳐도 행하기 어렵고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며 '나'는 그것과 무관하게 작동한다.

하나처럼 보이는 '자아'는 사실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아'를 분열한다.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 등. 나를 구성하는 내면과 외면은 일체화 되지 못한다.

'해야 하는데...'하지 못하는 일,

'하면 안되는데...' 해버리는 일,

'부조화'는 불안을 야기한다.

바벨탑 이야기를 해보겠다.

성경 구약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던 시기다. 노아의 홍수 후, 모든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 함께 모여 살고 화합했다. 인류는 목적을 가졌다. '하늘'에 닿는 일이다. 야심찬 계획은 가능해 보였다. 신에게도 그렇게 보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끈기? 노력? 열정? 꿈과 희망?

아니다.

소통이다. 신은 인간의 계획을 무너 뜨리기 위해 '소통'을 막았다. 소통이 중단되자 탑쌓기는 중단됐다.

무슨 일이든 '집중'이 중요하다. 집중은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회사는 회의를 통해 사업을 전개하고, 정치는 소통을 통해 국민을 통합한다.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면 꽤 어려운 일들은 그럴싸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여러 사람도 아니고, 하나의 '나'를 구성하는 마음과 감정, 행동, 생각, 말이 모두 따로 움직이면 어떻게 이루고저 하는 바가 이루어지겠는가. 마치 소통하지 못하는 '인간'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작동된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르고 서로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일체화를 떠나 어떤 상태인지 관심도 없이 마구잡이다.

축구를 한다며 오르손은 오른쪽으로, 왼손은 왼쪽으로 힘차게 돌리고 머리는 위아래로, 오른 다리는 뒤로, 왼다리는 앞으로 움직인다. 그 정신없이 산만함을 갖고 경기장에 들어 섰으니, 체력과 실력은 둘째치고 '축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한다.

차분히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을 하나로 모으려면...

일단은 그렇다.

그것들이 뭘 말하는지는 듣고봐야 한다.

윗집과 아랫집이 싸우고 있으면 서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귀 기울이고 봐야 한다. 그 소통의 첫째는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물을 맑게 하려면 가만히 두어야 한다. 가만히 두면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온갖 티끌이 가라앉는다. 물은 점차 맑고 깨끗해진다.

후회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과거'와 '희망'이라는 낚시로 끌어당기는 '미래'에 줄이 손발이 꿰어 움직이는 현재를 살고 있다면 그 시간의 노예에서 벗어나 차라리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왼쪽 발가락 네번째의 감각을 느끼는 편이 훨씬 낫다.

스스로를 돌이켜보건데, '일치하지 않는 자아'는 일반적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상대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일체화된 자아를 갖고 있나'.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했던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처럼, 상대는 스스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로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코코샤넬은 상대를 겉으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다만 상대는 자신을 겉으로 평가할 것이라 했다. 즉, 나는 상대에게 연민의 마음을 갖되, 스스로는 정제된 자아를 가질 수 있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 나의 '자아'는 지금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도 고삐 놓쳐 촐랑거리는 망아지가 제멋대로 나를 헤치고 있진 않은지 잔잔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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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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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어쩌면 어제였을 수도 있다.'

카뮈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머니의 죽음에도 무관심한 태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도 주인공은 동요하지 않는다. 오늘이던가, 어제이던가, 헷갈려 하는 것이 극단적인 '사회 이방인'을 말한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면 그 도입부가 비슷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도입도 이와 같이 시작한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극단적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구는 강하게 독자를 흡입한다. 소설 '이방인'에는 '감정'이 없다. 그저 현상이 있을 뿐이고 '생각'이 있을 뿐이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일컬는 '사이코패스'는 어린시절 급격하게 미디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참 괴상했는데 겉으로는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와 달랐다. 그들에게는 '이성'과 '감성' 중 '이성'과 '본능'만 남기고 '감성'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았다. 그들은 감정도 없고 죄책감이나 후회도 없다. 감정에 공감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 괴기할 정도로 이상한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기까지 한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서 이런 사이코패스를 다루기도 한다. 소설 '아몬드', 미국 드라마 '덱스트', 영화 '추격자'라던지,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 그들은 공포스러워야 할 상황에 되려 침착하고 되려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성적 판단과 본능적 감각, 강약에 대한 인식과 정복욕 등이 있을 뿐이다.

소설 이방인의 무감정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여자친구인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무감정을 일관한다. 아랍인을 살해하고도 무감정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정할 뿐이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무감정자'의 독백을 하나 하나 꺼내 읽다보면 차분하면서도 섬뜻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악'을 바라보게 된다. 모든 일은 그럴만했고 인과관계는 명확하며 그것에는 불필요한 '감정 에너지 소모'가 없다. 그저 무향무취무색의 흑백화면을 동공에 힘을 풀고 지켜보는 느낌이다. 그 느낌이 어찌나 자유로워 보이던지, 어떤 경우에는 모든 것을 '초탈'한 성인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행동에 '비겁하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정당화를 하지도 않는다. 다만 범인과 다르게 보여지는 이것으로 그를 '성인'이라 볼 수는 없다. 그와 성인의 커다란 차이라면 '무감정'에 '비도덕성'이 함께 하는가다.

우리를 이끌던 성인들은 '감정'에 휘둘려 대의를 놓치지 않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참착함을 유지하며 꽤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 보았다.

십자가에 못 밖히던 예수의 '주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들은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처럼 자신의 목숨조차 초월한 침착함과는 다른다.

하나는 무감정과 비도덕이고 하나는 절제와 도덕이다. 무감정과 비도덕의 핵심은 '지극한 이기심'에 있다. 극단적인 자기 중심적 사고와 행동이다. 아이러나하게 이 대척점에 '절제와 도덕'이 있다. '절제와 도덕'은 지극한 이타심'에 그 뿌리를 갖고 있으며 초자기적인 사고와 행동을 갖는다. 이런 양극단이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이유는 '유다'와 '예수'의 모델을 함께 썼던 '다빈치'의 일화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극단적인 빛과 극단적인 어둠은 모두 앞을 보지 못하게 한다. 두 공통점은 양극단이 결국 하나와 닮았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중도에서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자칫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스치고 지나가는 흐름에 자연스럽게 따라가 버리기도 한다. 어쨌건 사회적 규범을 무시한 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살던 주인공이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사실 사이코패스는 생각보다 흔하다. 우리가 100명을 알고 있다면 그들 중 한 명은 사이코패스다. 통계적으로 볼 때, 한 번도 그런 유형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이 그런 유형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사이코패스이거나 혹은 살면서 수명의 그들을 만난다. 우리는 그들을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할 수 없으며, 그들을 '이방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저 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어떤 사건에 의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이방인을 격리하고 처치하고자 한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고 피해를 끼치기 때문일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르다고 반드시 격리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잘 섞여 일상을 살아가기도 하고 여느 드라마와 영화처럼 특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로 사회적 이득을 주기도 한다. 산술적으로 대한민국 5천만 국민중 50만은 사이코패스다. 이들을 모두 격리하고 처단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노사이드'라 할 수 있다. 인종청소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마음속에 '혐오'와 '불신', '공포'는 악을 처단한다는 목적으로 또다른 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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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2학년 평생 공부 습관을 완성하라
송재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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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교에서 소풍을 갔다. 아이의 가방은 터질 듯 했다. '돗자리', '쓰레기봉투', '외투' 거기에 3단 도시락과 간식을 채워 넣으니 가방이 빵빵했다. 자기 몸통보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아이에게 동화책을 챙기라고 했다. 아이는 가방을 열고 한참을 가방과 씨름했다. 겨우 가방에 동화책을 넣은 아이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이가 말했다.

"아빠, 책은 빼면 안돼? 가방이 너무 무거워."

아이의 가방은 정말 무거워 보였다.

아이의 눈을 보고 당연하게 말했다.

"음.. 그러면,.. 도시락을 빼도록 해"

아이는 그건 안된다며 도시락과 책을 모두 넣고 학교를 갔다. 순간적으로 가장 먼저 제외해야 하는 것. 그것은 중요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물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라리' 도시락을 빼라고 했던 선택이 나름 옳았다고 여겨졌다.

아이는 그날 '수수께기 동시책'을 가지고 갔다. 수수께끼 동시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이 책을 펼치고 친구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기가 많아진다고 했다. 얼마 전, 학교 선생님과 면담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아이가 공부를 못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내 교육관을 명확하게 말씀 드리고 왔다. 그렇다. 공부는 못해도 된다. 책은 읽어야 한다. 그 둘의 상관관계를 볼 때, 둘 다 욕심을 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진심이다. 아이가 명문대를 가던 말던 상관없다. 다만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생긴다. 개인적인 관찰과 경험으로 아이는 고학년이 되면 아빠보다는 친구와 시간을 많이 가진다. 되려 부모를 성가시다고 여길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그닥 좋아하진 않아도, 서로가 비슷한 걸 좋아하고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최근 아이 교육에 대한 책을 많이 읽는다. 아이에게 교육에 대해 엄청난 압박을 주진 않는다. 아이는 일어나면 꽤 긴 시간 책을 읽는다. '패드 학습' 하나, 한자 한 글자, 연산 수학 한 장 정도 한다.

학원은 다니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가 학원을 다니면 아빠와 함께 할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MBTI에서 지극히 I(내형형) '아빠'라 그닥 약속이 있진 않다. '일', '집', '일', '집'이라는 비교적 따분한 일상을 만족해 한다. 언젠가 아이들은 '아빠'보다 '친구'를 좋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향형 아빠는 곧 '거의 유일한 친구'를 잃을 예정이다.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즐기고자, 굉장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아이에게 '학원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아이에게 '책읽기'를 강제하진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초콜릿'이나 '과자'와 같은 간식을 챙겨서 무릎에 앉아 책을 읽는다. 거의 99%는 아버지인 내가 읽고 가끔 짧은 글을 아이에게 넘긴다. 넘긴다기 보다 뺏긴다. 아이는 자기가 읽고 싶은 부분을 미리 예약해 둔다.

동화책은 꽤 좋은 이야기 소재다.

나의 어린시절 '잭과 콩나무'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 었다. 나는 그 소설을 '호주 출신 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아이와 함께 읽으며 알았다.

아이와 책을 읽을 때,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소개를 읽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그러다보면 꼭 성인의 책처럼, 작가마다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읽었던 책을 썼던 작가의 다른 글이라는 것을 보면 기쁘기도 하다. 아이와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잭과 콩나무'라는 책을 이야기하니, 꽤 충격적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만보니, '잭'이라는 '아이'의 행운에 대한 관점으로 읽었을 때만, 흥미로운 책이었다. 콩나무를 타고 거인의 집으로 몰래 들어간 잭은, 사실 주거침입과 절도까지 행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거인은 난데없이 도둑질을 당한다. 어린 시절에는 왜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을까. 아이에게 '잭'이 남의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아이는 아빠를 닮아 다독한다. 다독하다보면 독특한 것을 알게 된다. 책마다 출판사마다, 작가마다 커다란 테두리를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제목을 보고 같은 동화라고 알고 읽었으나 전개 방식이 다른 경우도 많고 어떤 경우에는 결말도 다르고 아예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경우도 있다. 이전 책과 비교해서 읽다보면 그 또한 재미가 쏠쏠하다.

아빠의 욕심으로 간혹 원서를 섞기도 한다. 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읽는다. 문법이나 단어에 대한 설명도 없다. 다만 거기에 풍부한 감정을 넣어 읽는다. 아이도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러다 불현듯 하나를 물으면 그때는 알려준다. 그것이 고작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교육관'은 조금 독특하긴 하다. 나의 교육관은 '주체성'이다. 아이가 반에서 1등을 하건 30등을 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아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언젠가 아이가 똑똑해 지고 싶다고 말했다. 왜 똑똑해져야 하냐고 물었다. 똑똑하면 공부도 잘할 수 있단다. 공부를 잘하면 뭐가 좋냐고 물었다. 공부를 잘하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했다. 하고 싶은 건 공부를 못해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는 가만히 생각한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하고 싶으면 해. 근데 안 해도 돼.

정말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용기는 갖고 있는 듯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은 받아 들이면 그만이니까.

세상에는 '원'만큼 '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은 그릇만큼만 행복하다. 원을 크게 갖고 채우지 못하면, 원을 작게 갖고도 채운 것보다 불행하게 산다. 굳이 가능할지 말지 모르는 일에 대해 욕심으로 원만 키울 수는 없다.

송재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느낀바가 있다. 자기 정리 정돈 잘하고 예의 바르고, 자기 할일 똑부러지게 하면 된다. 그것이 진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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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 - 10년 앞선 고령사회 리포트
김웅철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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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문제가 자주 언급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개인적인 의견은 '해결 할 수 없다'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비단 한국과 일본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 추세다. 식단의 서구화로 청소년 신장이 커졌다거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피부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늘어났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사회적 변화'가 '생물학적 변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많다.

의료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질병이 치료 가능해졌고 예방접종과 항생제, 만성 질환의 관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대 수명' 역시 늘었다. 그것은 '사회적 변화'가 만들어낸 '생물학적 변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여성의 교육 수준과 노동 시장 참여'가 높다. 사회가 고도화 되기에 청년이 '사회 활동'을 하기 위해 기대되는 '교육 기간'도 연장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고도 기술 사회는 당연히 고학력 사회를 필요로 하고, 고학력 사회는 긴 교육시간을 필요로 한다. 출산율 감소는 단순히 '돈'이 부족해 생기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자원이 적은 '동아시아' 국가는 '인력'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다. 서구 다른 국가들보다 더 빠른 인구 감소를 경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구조'를 원인으로 두고 있다.

당장 내일부터 우리는 '독일말을 사용합시다.'가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과거에 연결된 오늘을 살고 있다. 고로 갑자기 끊어내지 못하는 사회구조는 '당장의 변화'가 아니라 '점차적인 변화'와 적응이 필요한 문제다.

출산률이 감소하고 인구가 고령화 된다면 '노인부양'의 문제가 대두된다. 과연 그럴까. 1960년대 대한민국의 기대 수명은 54세였다. 지금 현대 대한민국의 기대수명이 100세에 가까워진다. 짧은 시간에 생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다만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그보다 느리다. 다시말해, 1960년대에 환갑잔치는 꽤 큰 행사였다. 기대수명을 웃도는 장수를 축하하는 행사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오늘의 환갑은 간단히 가족과 저녁식사를 한다거나 조금 더 의미있는 '생일잔치'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노인부양'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다. 과연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노인의 수'가 아니라, '노인'이라는 정의를 바꾸어야 한다. 기대수명이 54세였던 시기와 기대수명이 80세가 넘는 시대에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1960년대 평균 신장도 큰 변화가 있었다. 대략 10cm의 차이가 난다. 다시 말해서 그 시대에 남성의 키 170cm면 장신에 속했다. 지금의 170cm는 분명 같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신장에 속한다. '농업 국가'였던 과거에는 그들이 할 수 있던 '생산능력'에 한계가 있었다. 정보 시대인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 그들은 역시 적잖은 생산능력을 갖고 있다. 분야에 따라 다르긴 해도 분명 젊은 층 보다는 더 큰 생산능력을 갖췄다. 워렌버핏의 대부분의 자산이 노후에 생겼다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 반드시 생산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출산율 감소는 분명 국가적으로 큰 재앙에 가깝다. 다만 인구가 늘어나는데는 출산률이 전부는 아니다. 많이 태어나고 빨리 죽는 것이 그만큼 재앙이다. 이런 재앙은 이미 대한민국에 있어왔다. 정보화 사회에서 사람이 빨리 죽는다는 것은 덜 태어나는 것만큼이나 재앙에 가깝다. 그런 재앙도 지금의 재앙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을 이미 지나갔기에 그 공포심이 덜 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기대수명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태어난 이들은 일찍 죽지 않고 장수한다. 인구 피라미드를 보면 '르완다'나 '이집트'처럼 아래로 넓게 펼쳐진 구조가 있다. 또한 일본이나 한국처럼 아래로 좁아지는 구조도 있다. 그러나 30년 뒤에 '대한민국'과 '일본'을 '르완다'와 '이집트'가 추월해 가는 사회는 상상하기 힘들다. 고도 개발 사회는 피라미드 상위층이 넓어야 유리하다. 하위층이 넓은 피라미드는 최소 30년 간 '생산 능력' 없는 '소비 개층'이며 이들은 한창 생산할 '중위 개층'의 부담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사회가 꼭 암울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미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착시에 가깝다. 고령화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저출산'은 '생산 계층'의 부담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 적게 태어나서 오래 사는 시대를 받아 들이기 위해, 우리는 '공포'가 아니라 '대비'를 해야 한다.

그간 '청소년 사교육 시장'을 열었던 과거의 시장을 '성인 사교육' 시장으로 변화할 수 있고 '사라지는 초등학교'를 '노인 학교'로 개교할 수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시장과 사라지는 시장을 잘 판단하여 그 중간 지점에서 지혜롭게 변해가는 것은 아예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가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완성된 시설 기반을 바탕으로 기존 산업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이미 일본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적자원'을 통한 성장이 필수적인 사회가 된다. 우리가 먼저 맞이하게 될 사회 변화는 다른 의미로 '산업 지배력'으로 이용 될 수 있다. 뉴스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내는 공포에 굳이 두려워하고 좌절해서는 안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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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전쟁 2 - 백악관 워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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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작가의 소설을 자주 보진 않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던지, '킹메이커'를 보면 '실존인물'의 '실명'이 등장한다. 소설이 워낙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기에 소설을 '실제'와 헷갈리는 사람도 있기도 한다. 소설이야 그저 재밌으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과 구분할 수 없는 사람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봐야할 것 같다. 어디서부터 실제고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모호하고 그 경계에 작가 가치관이 섞여 있을때, 소설은 약간 위험할 수도 있다.

다만 아예 배경 지식이 전무할 때, 대략의 윤곽이 잡힌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의 장점도 분명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의 소설을 보기 위해서 그 전과 후로 적잖은 책을 읽고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사람은 원래 입체적이고 다면적이다. 제3자가 아니라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사람은 '과거'에 의해 '현재'가 정의된다. 즉,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지금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만 '아들러'에 의하면 사람의 과거는 '현재'에 의해 정의된다. 즉,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원인론과 목적론 중 나는 '목적론'에 애정이 간다.

사람은 슬프고 싶기에 과거의 기억을 불행에 가깝게 편집한다. 즐겁고 쉽기에 과거의 기억을 행복에 가깝게 편집한다. 슬프고 즐겁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의 '나'이다. 그런 이유에서 과거는 '운'과 '불운'의 해석이 오락가락하는 '새옹지마'와 같다.

과거의 기억이 행운이 된 것은 '지금' 때문이고, 과거의 기억이 불운이 된 것 또한 '지금' 때문이다. 도망간 말이 다른 말을 가져오고, 말을 타고 놀던 아들이 다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 아들이 군징집을 피할 수 있다던 '새옹지마'의 이야기를 보자면 모든 것은 해석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좋고 나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도 입체적이고 다면적인데 어떤 사람을 '어떠하다'라고 정의할 순 없다. 물론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 만들기'다. 캐릭터는 복잡하기보다 단순할 때 이해하기 쉽다.

'트럼프'는 이럴 것이다.

'푸틴'은 이럴 것이다.

'문재인'은 이럴 것이다.

실존 인물의 과거를 일반화하여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쉽게 꿰어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모든 것이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에 그러 했던 사람도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그 사람이 그렇다고 봤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 봤기에 그럴 수도 있다. 단순한 논리다.

'링컨'은 말년에 대통령직을 한 번 수행 했을 뿐이지만 우리에게 그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의 삶, 대부분은 '사업' 혹은 '변호사' 였다. 그 또한 크게 존경 받거나 성공에 이르렀다고 할 수만도 없다. 우리가 그를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느 시점에 어떤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정치'와는 별개로 '주식'에서 이런 말이 있다.

'주식은 신도 모른다.'

비슷하게도 뉴턴이 자신이 평생 벌었던 자산을 투자에 실패하며 말했던 바도 떠오른다.

"우주의 이치를 계산 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가 없다."

방향과 속력을 알면 다음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거시물리학과 다르게 사람의 미래는 양자역학처럼 '알 수 없다'로 정의된다.

속력과 방향을 알았다고 다음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10년 간, 꾸준히 담배를 피웠던 사람의 내일 역시 담배를 피운다로 정의 한다면, '담배를 끊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예측불가하기에 우리의 삶이 이처럼 다채롭고 '주식시장'과 '인간 심리', '정치'와 '국제정세'가 어려운 것이다.

한창의 나이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을 들었던 적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를 보니, 그가 했던 예언이 웬만하면 적중했단다. 그 신과 같은 능력은 믿음직스럽다기보다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래를 예측한 이들의 이야기에 흠뻑 젖어있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그러한 이야기를 '허무맹랑'이라 본다.

우리는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아바바바'를 보고도 '아빠'를 떠올린다. 달 표면에 있는 얼룩을 보고 토끼와 절구를 떠올리고 하늘에 의미없이 떠있는 구름의 모양으로 '토끼'라던지, '강아지'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무렴 아무말이나 하더라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아'가 되고 '어'가 된다. 지금의 '밈'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무한도전'이다. 거의 모든 '미래'를 미리 예측하는 듯 한, 여러 짧은 영상과 화면은 실제로 예측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것'이라는 사실보다 우리가 '그것'을 '그것'이라고 본다는 사실이다.

소설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떻게 썼는지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다. 아는 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 고민해 보는 것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글에서 '나'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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