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가 지은 집
정성갑 지음, 행복이 가득한 집 편집부 기획 / 디자인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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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단순히 짓는 행위가 아니다. 종합 예술이다. 깊이 있는 인문적 지식이 필요하고 사람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단순히 머물고 자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어떻게 이동하며 어떻게 잠을 자는지 모든 동선과 생활 방식을 알아야 한다. 건축은 '사람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자연도 알아야 한다.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연결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로 건축은 '예술'이라고 말했고 '철학'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렇다.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없는 자에게 '건축을 맡기면 건축물은 '영혼'이 사라진다.

가만 들여다보자. 중동의 모스크는 대부분 둥근 '돔(Dome) 형태를 가지고 있다. 돔은 구조적으로 안정적이고 내부 공간을 넓게 만들어 준다. 공기 순환에 도움을 주고 건물 내부의 온도를 시원하게 유지 해준다. 돔의 둥근 형태는 실내의 공기가 중앙으로 모이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따뜻한 공기는 '위'로 차가운 공기는 '아래'로 모이는 대류 현상 중 '돔'의 가장 중앙 부분에 더운 공기가 모여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높은 부분에서 냉각된 공기는 다시 아래로 내려오며 공기는 빠르게 순환한다. 이 곳의 건물은 '하얀색'이다. 태양 빛을 반사시켜 받는 열을 최소화한다. 안과 밖을 모두 살피는 '철학'이 필요하다.

일본도 그렇다. 일본은 한반도에 비해 따뜻한 지역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집안 내부가 싸늘할 정도로 춥다. 일본은 아직도 바람에 '덜덜' 떨리는 창문을 사용하는 집이 많다. 우리처럼 단단한 '샤시'로 창을 내지 않는다. 이유는 '지진'과 연관되어 있다. 건물 자체가 지진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연해야 한다. 창문 틀의 유연성은 진동에도 파손되지 않고 충격을 분산시킨다. 한반도와 같이 '온돌'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지진'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온돌은 고정된 돌과 흙을 바닥에 사용하는 구조다. 지진은 바닥의 고정된 돌과 흙을 파손하여 자칫 더 큰 피해를 야기한다.

북유럽은 뾰족하고 높은 지붕을 설계한다. 뾰족한 지붕은 열손실을 줄인다. 앞서말한 '모스크'와 반대다. 공기층을 분리하기 위해서 '상하 공간'이 충분해야 한다. 북유럽은 지붕이 높고 뾰족하다. 뾰족한 지붕은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천장으로 쉽게 갈 수 있도록 한다. 따뜻한 공기는 건물 지붕에 쌓인 눈을 녹인다. 쌓인 눈으로 집이 무너져 사고가 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붕에서 눈이 적절히 녹아내리도록 '안전'에 우선순위를 둔다. 지붕에 눈이 쌓이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리기에 뾰족한 건물은 분명 중요하다.

건물을 하나 짓는 행위는 단순히 자재를 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같은 사람이 살아도 집은 환경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져야 한다. 내부와 외부에 의해 정체성이 독보적으로 생기는 것이, 사람을 닮았다. 이런 고민은 '건축가'의 몫이다. 건축가의 '철학'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축가는 '사람'과 '자연'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프로젝트의 예산을 관리 해야하고 자재를 선택해야 하며, 투자 대비 효과도 분석해야 한다. 경제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상적인 집을 짓는 목적으로 예산을 초과하는 기획을 해서는 안된다. 현실과 이상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건축주'와 '소통'이다. 이 또한 조화이다. '건축주'의 만족과 '건축가'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건축을 해야 한다. 그 균형을 찾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그들에게는 '의사소통의 기술'도 필요한 셈이다.

하나를 더 해보자. '물리학'이다. 건축가는 물리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안전하고 견고한 구조를 설계한다. 물질의 성질과 화학적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목재의 특성과 콘크리트의 특성을 이해하고 무게 중심과 대류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심미적인 감각도 필수적이다. 결국 건축가는 모든 것을 감안하고 하나의 건축물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아름다움이라는 매력 요소를 첨가해야 한다. 건축은 깊이 있는 예술적 행위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방면에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건축에 관심을 가졌다. 건축이 복합적 지식과 호기심의 균형이 필요해서다. 예술과 과학의 조화가 필요해서다. 이는 종합 예술이다. 공간, 비례, 광학 등 다양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건축은 의미를 상실한다.

'건축가 최욱'은 집을 지으며 아내에게 '명상의 방'을 지어 선물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찰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렇게 볼 때, 이 선물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처럼 '지식'과 '지헤', '이해'라는 다양한 능력이 균형을 맞춰야 좋은 건축가라 할 수 있다. 이런 건축가들의 특징으로 무엇이 있을까.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지을 때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서재'를 몹시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의 집에 '책'은 필수요소다. 어째서 '건축가'들이 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건축'이 가진 본질이 책을 닮아서 그럴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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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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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왕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던컨 왕은 이 반란을 제압한 '맥베스'라는 인물을 신임한다. 맥베스가 황야를 지날 쯤, 어디선가 마녀 셋이 나타나 예언을 한다. 예언에 따르면 맥베스는 코더라는 지역의 영주를 거쳐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충직한 신하가 '마녀'의 꿰임에 빠져 갈등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던컨 왕은 '맥베스에서 작위를 주는데, 그 작위가 바로 코더 영주의 작위였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짐을 마주한다. 이 내용을 또한 자신의 아내와 공유한다. 맥베스의 부인은 역시 '야망'으로 가득찬 여인이었다. 그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길 기대한다.

마침내 던컨 왕은 '맥베스'의 성을 방문한다. 이날 아내는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길 부추긴다. 던컨 왕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성에서 기분 좋은 연회를 즐긴다. 이후 왕이 술에 취해 잠에 든다. 맥베스 '결정' 후 '행동'의 기로에서 갈등한다. 양심과 탐욕의 부딪침에서 '부인'은 맥베스를 자극한다. 결국 맥베스는 단검으로 왕을 살해한다. 또한 왕의 두 시종을 죽이고 그들의 옷에 피를 묻혀, 그들로 하여금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운다.

사망한 '던컨 왕'에게는 '왕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상도 위험하다고 판단된다. 그들은 왕위를 잊지 않고 도피를 선택한다. 왕자들이 도피하자, 자연스레 맥베스는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맥베스'의 비극은 이미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가속화된다. 맥베스는 '뱅쿠오'를 의식한다. 그의 자손들이 자신위 왕위를 탐하고 빼앗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맥베스는 자객을 통해 '뱅쿠오'를 살해한다. 다만 그의 아들을 놓치고 만다. 그날부터 뱅쿠오의 유령은 맥베스를 괴롭힌다. 헛것을 보고 망상적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불안감이 만들어난 이상 증세가 나날이 심해지며 그는 잠도 잃고 기쁨도 잃는다. '던컨의 신하'로써 신임을 받으며 성의 성주가 되던 기쁨에 만족하지 못한 댓가가 치뤄진다. 더 많은 것을 얻고도 불안과 고통이 그들 따라다닌다.

마녀들은 다시 '맥베스'에게 예언한다.

"여자의 몸에서 나온 사람은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이 순차적으로 이뤄짐을 지켜봐왔다. 이번 예언에 대한 신망은 더 두꺼워졌다. 게다가 그들은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이른다. 맥더스는 예언을 듣고 '맥더프'를 살해하길 지시한다. 다만 맥더프는 '왕자'가 있는 곳으로 이미 도피한 뒤였다.

실제로 맥더프는 맥베스에 대항할 세력을 모은다. 그러나 맥베스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맥더프의 처자식을 살해한다. 죽음은 죽음을 부르고, 불안은 또다른 불안을 낳기 시작한다.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다른 하나는 또다른 하나를 만들어내며 점점 사건을 키워나간다.

고통과 불신의 나날을 보내든 맥베스는 점점 미쳐간다.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이 와중에 '왕자'와 '맥더프'의 손을 잡는다. 이후 그들은 불안증세가 악화된 '맥베스'를 공격하기 위해 버남숲 근처에 집결한다. 병사들은 나뭇가지를 머리에 꽂고 행군한다. 다만 맥베스의 예민함은 극도로 치솟아 있었다. 숲이 움직여 오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결국 맥베스는 자신도 전쟁에 참여한다. 마녀들의 예언을 다시 생각한다.

"여자의 몸에서 나온 사람은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

거의 모든 적이 없을 것이라 믿던 맥베스에게 맥더프는 말한다. 자신이 어머니의 배를 갈라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왕절개로 태어난 자이니, 충분히 맥베스를 죽일 수 잇다는 의미다. 맥베스는 좌절한다. 결국 맥베스는 멕더스에게 패한다. 그리고 왕자는 다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올라선다.

희곡에서는 생각해 볼 만한 여지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지나친 과욕은 화를 부른다. 충분히 맥베스는 왕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간단한 꾀임과 유혹에 빠져, 그 신임을 저버렸지만 어쩌면 유혹과 꾀임은 그 내면에 잠재적으로 있던 '욕망'을 건드렸던 자극제에 불과할 것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라면 전개되지 않을 사건과 고민에 쉽게 넘어가는 일을 볼 때, 우리는 외부를 탓하고 '유혹'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지만 결국 자신 내면에 있는 욕망은 언제든 화염으로 번질 수 있는 작은 불씨가 되어 있다. 과유불급. 결국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우리는 어디까지가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인지 알지 못하고 가끔 그 선을 넘어설 때가 있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담고나면 우리는 '신경쇠약증'에 걸릴 만큼 집착적으로 '자리'에 집착한다.

둘째, 여성에 대한 지위다. 맥베스의 아내와 마녀는 '맥베스'를 꼬득여 그에게 '신의'를 저버리는 일을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당시 사회에서 바라보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마녀는 '여자의 몸에서 나온 사람은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라는 예언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연약함'을 이야기 한다고 보여진다.

결국 비극은 '유혹'이라는 지푸라기에 붙은 작은 불씨인 '욕망'에서 시작한다. 결국 누구나 욕망은 있다. 다만 그 욕망이라는 불씨가 지푸라기에 넘겨 붙지 않도록 주의한다. 결국 주변에 어떤 사람들을 두고 있는지에 따라 그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기도 한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 몇의 평균이 자신이라는 말처럼, 어떤 사람을 주변에 두고, 어떤 사람을 주변에 두면 안되는지, 어떤 사람의 말을 신임하고, 어떤 사람의 말을 신임하면 안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자면 그 모든 비극이 벌어졌을 때, 탓해야하는 것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자신의 '욕망'이라는 불씨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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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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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손에 안 잡힐만큼 몰입해서 본 책이 얼마만이던가...

몇 번을 서점에서 스쳤으나 선뜻 집지 못한 이유는 분량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일상이 바빠 더욱 그랬다. 몇 번을 스치며 드라마로 제작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중에 드라마로 봐야지'

정말이지 큰 일 날뻔했다.

이 소설을 근래 들어 가장 재밌게 읽은 책 중 하나다. 드라마는 보지 못했으나 완독후 드라마도 볼 예정이다.

얼마 전,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윌라 오디오북'을 통해 '파친코 오디오북'을 공개했다. 덕분에 분량에 부담이 있던 이들도 쉽게 '파친코'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오늘 아침, '파친코 1권'을 드디어 읽었다. 종이책과 오디오북을 번갈아가며 읽었다. 오디오북은 역시나 성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종이책으로 읽는 것 또한 매우 좋았다. 오죽하면 종이책과 오디오북을 병행하며 봤다. 아마 이 소설은 몇 번을 재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경은 일제강점기다. '재일교포'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고 들었다. 다만 첫 배경은 '부산 영도'다. 부산 영도에서 시작한 소설은 한참이 지나도록 그 배경이 옮겨가지 못했다. 무언가 뜨뜻미지근하려나 싶은 소설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영화적'이라기 보다 '드라마적'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끝날 즈음 다음 화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내용상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 '도서의 내용'은 적지 않겠다. 다만 아름다운 그 시절 일상을 담은 소설이겠다하고 기대하고 읽다가 난데없는 속도감과 긴장감을 만난다. 한참을 몰입해서 소설을 읽다보면 다시 소설은 점차 속도감을 줄이고 일상을 만나게 한다. 긴장감을 살짝 줄이기 시작하면 다시금 속도를 높이고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짧은 소설에 이렇게 많은 배경과 반전, 인물을 모두 담았다는 것이 놀랍기까지하다. 도대체 한 권의 책이 맞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글이 표현이 부족하거나 서투르지도 않다.

걸어가며 오디오북으로 듣게 되면 괜스레 가던 길을 우회하여 한 바퀴 더 돌고 가게 된다. 책을 펼치면 끊어 읽은 부분에 대한 아쉬움으로 다시 한 챕터를 뒤로 가서 읽게 된다.

현재 1권까지만 읽었으나 1권이 끝나도록 왜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인지, 알지 못하겠다. 책이 너무 술술 읽힌다. 사실 '왜 제목을 파친코라고 지었을까'하는 호기심도 이 소설을 읽게 하는 또다른 재미중 하나다.

이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미국 국적의 '이민진 작가'의 글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1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는 '이민진 작가'의 배경을 보고 사실 갸우뚱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 대한 정서,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대한 정서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있어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참 어리석었다고 느꼈다. 1968년생이면 소설의 배경을 전혀 겪지 않은 나이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를 그 배경에 완전히 함께 하도록 완전한 배경을 묘사해 낸다.

겪어보지 않고 어쩜 이렇게 섬세한 묘사를 해냈을지, 과연 그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등장인물들은 나이를 먹는다. 이들은 일상에서 역사의 배경에 하나 둘 놓여진다. 전혀 이질감 없이 일상으로 맞딱드리는 '역사'는 그저 '삶'과 '생존'에 지나가는 배경 중 하나다. '역사'를 배우고 공부하고, 읽으면서 그속에 있는 '일반인들의 삶'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이 겪게 되는 현실적인 고민과 생각. 또한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이데올로기'와 '여러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이 단순한 '정보'처럼 나눠 인식할 수 없다는 깨달음도 듣게 됐다.

본 글은 '협찬'에 의해 작성 됐으나 진심 가득!! 과연 정말 최고의 소설이다.

빨리 2권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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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
유래혁 지음 / 포스터샵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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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족관'은 보육시설에서 자란 '류이치'가 불가사이한 한 소녀를 만나며 겪는 일을 그려낸다. 배경은 특이하게 '일본'이다.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 배경이 모두 일본이다. 평소 '일본 문학'을 즐겨 보던 터라 이질감없이 다가왔다. 이국적인 이름과 배경, 간결한 문체는 실제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만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작가 소개를 살폈다. 작가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이 맞는지, 어떤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인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유래혁' 작가의 글이다. 이 소설은 도저히 빠르게 읽을 수 없었다.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감성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다. 어떤 문장을 만나면 몇 번을 다시 읽고 곱씹었다.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이 소설이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점이 믿겨지지 않았다.

주인공 '류이치'는 열 일곱 고등학생이다. 그는 시설에서 생활했다. 카노코와 다이스케라는 친구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남자 아이다. 특별할 소재 없이 시작한 소설은 주인공이 버스에서 '한 소녀'를 만나며 극적으로 내용 전환이 된다. 소녀는 난데없이 '너 시설에서 살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시설에서 지낸다는 걸, 너무 쉽게 알아챈 그녀를 '류이치'는 기억해 둔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여자 아이의 첫인상이다. 이 첫인상은 당황스럽게 시작했으나 더 당황스러운 무언가를 남겼다. 그의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뒤로 류이치는 '이름' 없는 그녀를 잊을 듯, 잊지 못했다. 오래 남은 첫인상의 당황스러움과 다르게 그녀는 빠르게 흔적을 지웠다. '이름' 없는 것에 대한 망각. 그것이 더 자연스럽고 빠르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소설은 말한다.

이름 없는 것에 대한 망각.

'지나치는 인연'에 대한 기억을 가만히 곱씹어 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다. 잘 모르지만 인류가 최초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 품사는 '명사'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대상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 붙인 것은 사용하기 위해서고 기억은 그것을 유용하게 돕는다. 결국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억'의 책임을 해방한다. 그러지 않은가. 만났던 누군가의 이름을 잊고난 뒤 성격, 추억, 목소리는 더 빠르게 잊혀진다.

몇 주 후에 잃어버린 지갑은 학교 사물함에 되돌아와 있었다. 자신의 지갑에는 '시간과 장소'를 적어놓은 글귀와 함께 말이다. 류이치는 이름 없는 그녀의 글씨를 막연히 믿는다. 장소로 이동했을 때, 그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신비한 아이였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이름 없음'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녀는 누군가의 지갑을 훔쳤다. 그들의 기억과 이름을 훔쳤다. 그 도화지 같은 밑그림에 상상의 물감을 덧칠하길 좋아했다. 그녀가 하나 둘 모아둔 훔친 지갑은 한 가득이나 있었다. 그녀는 류이치에게 당췌 알 수 없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류이치에게도 누군가의 이름 하나를 선물한다. 훔친 지갑 속의 누군가의 이름을 하나 둘 씩 나눠 가진 그들은 정말 그들이 된 것 처럼 흉내도 된다.

소설은 가볍게 시작했다가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설레임을 스쳤다가 우울하고 슬프게 끝난다. 여러 감정을 짧은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단순히 재미를 느끼는 것 뿐만 아니라 서정적인 문체와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수족관'이라는 이름 아래로 폴라로이드 필름 형태의 수채화가 표지에 붙어 있다. 책을 읽다가 덮을 때마다 유심히 그 수채화를 살피게 된다. 실제 필름 혹은 옆서인듯 수채화는 손으로 그 외각의 음각을 만질 수 있다. 소설의 감성과 너무나 잘 맞는 표지를 몇 번이나 손으로 더듬거리며 읽는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밍밍한 맛'으로 느껴지던 디자인이 소설을 읽지, '포근'하게 느껴진다. 소설은 짧지만 분명 읽고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모든 결말을 다 알고 난 뒤에 다시 읽을 소설의 재미도 분명하게 기대된다. 결국 이 소설은 두 번 읽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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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지우개 바우솔 작은 어린이 23
서석영 지음, 김소영 그림 / 바우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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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에는 '겨자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예수가 천국을 빗대어 한 말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발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겨자씨는 처음에는 아주 작지만 나중에는 새들이 집을 짓고 쉴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굳이 '불교' 용어로 따지고 들면 '카르마'가 되려나...

비록 작은 '무엇'이지만 그것은 '시작'의 형태일 뿐이다. 그것이 심어진 뒤에 그것은 반드시 최초의 미약함을 가볍게 넘어서는 창대함이 될 수 있다. 걱정도 그렇다. 작은 씨앗처럼 심어질 때 그 미약함이 우습지만 점차 나를 집어 삼키는 우주가 된다.

아이에게 '걱정지우개'라는 소설을 읽어 주었다. 소설은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를 선물 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마법 같은 '아이템'으로 머릿속 걱정을 말끔하게 지워주면 너무 좋겠지만 역시 쉽지는 않다. 세상 걱정없는 사람 없다.

무려 6년이나 된 예능 중에 '거기가 어딘데'라는 예능이 있다. '지진희, 차태현, 조세호, 배정남'. 이 출연자들이 '오만 사막'을 횡단하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이 예능을 몹시 좋아한다. 이 예능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특히 '오만'에 있는 '사막'을 횡단하는 편만 돌려 본다. 여섯 편으로 나눠진 이 예능만 보기 위해 한 OTT를 매월 결제하기도 한다. 이 예능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예능이 가진 균형 때문이다. 나의 기억을 한없이 돌이켜보면 어느새 무념무상의 상태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나의 옷은 찢어진 청바지에 땀냄새가 잔뜩 묻은 작업복일 때도 있었고 서류 가방을 한 손에 쥔 양복일 때도 있었다. 어떤 순간에는 머리만큼 무거운 군화발과 군복일 때도 있었다. 끝없이 걷던 그 추억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나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다윈이나 빌게이츠, 아인슈타인은 모두 걷기를 좋아했다. 이들은 중요한 회의나 창의력이 필요한 순간에 걷기를 했다. 걷다보면 어느새 생각은 정리되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 남는 경지가 온다. 그 경지가 오면 비로소 내가 했던 '걱정'이라는 것도 게으른 몸이 만드는 '환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초등학교 1학년 추천도서다. 아이를 위한 '봉사'가 아니라, 나또한 깨닫는 바가 있다. 예수는 '겨자씨'를 보고 '천국'을 말했다.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보고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그러나 어찌 겨자씨와 해골물이 예수와 원효대사를 가르쳐 깨우치게 했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깨닫는 것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이태백이 바라본 달과 닐 암스트롱이 바라본 달은 같은 달이 아니다. 그들은 분명 같은 달을 바라봤으나, 분명 다른 달을 바라보았다. 그 둘이 그것을 보고 얻은 '감상'은 '달'이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달'에게서 얻은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누군가는 낙엽을 보고도 눈물을 흘린다. 문자 하나, 그림 하나 없이도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다. 반대로 누군가는 문자 하나 그림 하나 없이도 사람을 웃길 수 있다. '아동용 도서'를 보고도 충분히 성인이 배울 수 있다.

부모는 간혹 '희생'이라는 말과 함께 연상된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희생'이란 자신을 '없애'는 일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없애고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함께 하는 것이다. 아이의 동화를 보며 독후감을 쓰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읽고 나또한 느끼는 바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결국 아이를 위해 시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어야 한다.

'걱정지우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자신의 사라진 걱정이 다시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걱정을 지우는 지우개를 반드시 누군가에게 선물해야 한다. 아이의 교육에 좋은 말은 틀림없이 어른에게도 좋다. 우리는 어린 시절 매우 좋은 교육을 받고 점차 잊고 살아간다. 고로 성인이 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동화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걱정을 없애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걱정을 없애는 일.

그 이기적인 이타심이야말로 내가 그간 글을 통해 꾸준히 말했던 '이타심'의 본질이다. 소설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의 걱정을 없애고 타인의 걱정을 없애주는 일. 그것은 나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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