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뇌 - 초등 읽기/쓰기의 힘
김영훈 지음 / 스마트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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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재능은 50%만 유전되고, 읽기와 쓰기 같은 학업 능력은 20%만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 즉, 언어 발달은 '유전자'보다는 '경험'과 '학습'이 더 큰 원인이다.

'미국인 부모'라고 해서 영어를 잘하게 되는 유전자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미국인이라도 자란 환경이 '한국'이라면 '한국어'가 유창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영어를 잘하는 부모를 가졌다고 해서 영어 단어가 저절로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공부'의 정의를 보자. '공부'는 대체로 '연구'와 그 어원을 공유하며, '학문'이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학문'이나 '기술'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바로 '이름짓기'다.

인간의 학문은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대상을 관찰하고, 이를 분류하여 특정 개념으로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바로 '학문'이다.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자. 생물은 동물과 식물로 나눌 수 있다. 동물은 움직이며 먹이를 찾고, 식물은 고정된 채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얻는다.

이제 동물이라는 범주를 더 나눠 보자. 동물은 척추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뉜다. 척추가 있으면 척추동물, 척추가 없으면 무척추동물이다. 무척추동물에는 곤충, 달팽이, 해파리 같은 생물이 포함되고, 척추동물에는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등이 있다. 척추동물에는 젖을 먹여 새끼를 기르는 포유류가 있다. 고양이, 개, 사자, 인간 등이 그 예다. 이처럼 생물학은 동물과 식물에서 시작해 점점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분류를 통해 생물들의 체계를 정립하고 이름을 붙인다.

모든 학문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예를 들어,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그 현상에 '만유인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만유인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 사이에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결국 학문은 모두 '분류학'이다. 학자들은 체계와 현상을 찾아 명명하고, 학생들은 이러한 체계를 익히는 것이다.

중학교 수학에서는 수, 무리수, 유리수, 소수 등의 분류가 있고, 피타고라스의 정리, 근의 공식, 지수 법칙 등 여러 가지 법칙들이 존재한다. 이 법칙들도 모두 이름을 붙이고 그 의미를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수학에서는 그 이름이 왜 붙었는지, 그 법칙과 공식의 유도 과정과 정의가 가장 중요하다.

사회 교과서에는 '헌법과 국가기관'이라는 목차가 있다. 사회라는 과목은 인권과 헌법으로 나뉘고, 헌법에서 국가기관으로 분류되며, 그 안에서 국회,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등으로 다시 세분화된다.

대부분의 시험은 이러한 명명된 체계들을 묻는다. 혹은 그 명명된 이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묻는다. 국어, 역사, 사회, 과학 모두 그렇다.

이러한 명명된 것들을 익히고, 익힌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시험'이다. 그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이 '공부'다. 그런데 공부가 '유전자'일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어떤 과목이든 상관없이 '체계화하고 언어화'하는 데 익숙한 뇌가 결국 '우수한 학습능력'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독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을 예로 들어보자. 이 책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습관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다룬다. 책의 구성은 목차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렇다면 목차는 어떻게 분류되어 있는가?

  1. 개인적 승리

    • 주도적이 되어라

    • 목표를 명확히 하라

    • 소중한 것부터 하라

  2. 대인관계 승리

    • 상호 이익을 모색하라

    • 먼저 이해하고 이해시켜라

    • 시너지를 만들어라

  3. 지속적인 성장

    • 끊임없이 쇄신하라

이 책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습관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가지고, '개인적 승리', '대인관계의 승리', '지속적 성장'이라는 세 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의 명명에 대해 세부 사항을 정의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체계를 잡고, 세부적인 사항을 분류하며 명명한다.

이렇게 분류하고 체계를 잡고 명명하는 모든 과정은 인간의 학문을 익히는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체계화하고 명명하는 데 익숙한 뇌의 학습 능력은 어떨까? 당연히 우수할 것이다.

또한 글은 '문단'마다 들여쓰기를 통해 구분하고 그 '각 문단'은 소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 소주제들은 다시 모여 하나의 주제를 만들고 그 주제가 하나의 꼭지를 달성한다.

즉, 좋은 글을 읽는 것은 '체계잡힌 사고'를 자연스럽게 익히는 일이다.

학문이 아니더라도, 목표를 달성하고자 할 때는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다. 최초의 목적이 필요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하며, 그 체계에 맞는 명명이 필요하다.

비록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질 수 있다. 마치 노래를 배우지 않았어도 그냥 잘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영어에 노출되면 영어 어휘가 늘어나고, 한국어에 노출되면 한국어 어휘가 늘어나는 것처럼 단순한 방식으로 향상될 수 있다.

다만, '인지능력'이나 '집중력', '인내력' 등의 다양한 변수가 필요하지만, 독서가 습관이 되면 이러한 능력들도 쉽게 훈련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가 학업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체계적인 사고방식, 즉 프로세스를 갖추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에 맞는 여러 명사를 익히는 것이 두 번째다.

결국 '독서'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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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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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다. 다만 희랍어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되었기에,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의미만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를 잃는 주인공을 닮았다. 소리는 잃지만 의미만은 남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백년도 안 된 '한글 소설'을 읽고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천년도 넘은 '한문 소설'을 읽으며 의미를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어떤 문자는 '소리'를 담고, 어떤 문자는 '의미'를 담으며, 어떤 것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리'보다 '의미'가 '의미'있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사상을 탐구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과 '플라톤'의 말은 '의미 문자'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한강 작가 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희랍어의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소리를 잃으면 의미를 얻는다. '시소'라는 단어에는 분명 'ㅅ'이 두 번 들어 가지만, 첫번째 시옷과 두번째 시옷을 발음 할 때, 혀의 위치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문자로만 존재하던 '소리'가 그 모양을 들추고 나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과연 '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잊고, 소리에 집중하느라 의미를 잃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는 희랍어를 연구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 문자 처럼 말이다. 다만 '소리'를 잃은 침묵한 문자인 '희랍어'를 통해 여자는 잃어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내면을 마주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의 빛을 잃으며 어둠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의미'를 상실한 '소리'가 말과 글로 전달되며 진실하게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치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은,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가진 것에 대한 깊은 탐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짧다. 선 없이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처럼 문장과 문장이 구분없이 전체 화풍을 완성한다. 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언어다. 서양 철학과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다. 다만 희랍어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사어'가 되었기에,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고 의미만 남아 있다.

마치 시간이 흐르며 목소리를 잃는 주인공을 닮았다. 소리는 잃지만 의미만은 남아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때로 우리는 백년도 안 된 '한글 소설'을 읽고도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천년도 넘은 '한문 소설'을 읽으며 의미를 알 수 있는 바와 같다. 어떤 문자는 '소리'를 담고, 어떤 문자는 '의미'를 담으며, 어떤 것이 더 우수하다고 할 수없지만 어떤 경우에는 '소리'보다 '의미'가 '의미'있는 경우도 있다.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익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사상을 탐구하는 일이다. '공자'의 말과 '플라톤'의 말은 '의미 문자'로 남아 있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희랍어 시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제 한강 작가 님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희랍어의 시간을 다시 읽었다. 그 순간 이 책이 나에게 전하는 의미가 더 선명해졌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소리를 잃으면 의미를 얻는다. '시소'라는 단어에는 분명 'ㅅ'이 두 번 들어 가지만, 첫번째 시옷과 두번째 시옷을 발음 할 때, 혀의 위치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된다. 이미 익숙해져 문자로만 존재하던 '소리'가 그 모양을 들추고 나온다. 그러한 깨달음은 과연 '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의미에 집중하느라 소리를 잊고, 소리에 집중하느라 의미를 잃는다.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어가는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의 빛이 만나는 이야기다. 주인공 여자는 희랍어를 연구하며 점차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다. 그 문자 처럼 말이다. 다만 '소리'를 잃은 침묵한 문자인 '희랍어'를 통해 여자는 잃어가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내면을 마주한다. 남자는 시력을 잃어가며 세상의 빛을 잃으며 어둠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진실을 발견한다. 이 둘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소리'를 통해 소통한다. '의미'를 상실한 '소리'가 말과 글로 전달되며 진실하게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치 않는다. 이 책을 덮으며 마음속에 남은 묵직한 여운은, 결국 우리 모두 언젠가는 잃어버릴 것들을 마주하며 가진 것에 대한 깊은 탐구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짧다. 선 없이 그림을 그리는 수채화처럼 문장과 문장이 구분없이 전체 화풍을 완성한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는 점차 의미를 분명히 한다. '소리'와 '형상'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남자와 여자는 점차 의미를 분명히 한다. '소리'와 '형상'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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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러브, 좀비 (리커버)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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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서재' 어플리케이션에 들어가면 항상 이 '소설'이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몇 번을 모르쇠하다가 선택했다. 모르쇠했던 이유는 '표지' 때문인데 어쩐지 '좀비'와 '로맨스' 적절히 섞인 소재가 아닐까 해서다.

소설이 단편집이었다는 사실은 첫 단편이 끝나고 조금 지나서 알았다. 단편소설인지, 장편의 한 챕터가 끝났는지 모르고 두 번째 소설을 읽었다. 내용은 연결되지 않았다. 단편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짧게 시간이 날 때마다 읽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만의 방식이 있는데, 장편 소설은 짧게 끊어 읽지 않는다. 소설을 읽어야 할 시간을 정하고 자세히 읽는다. 규칙을 정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행동을 하다보니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이들은 '다독'하다보면 빠르게 플롯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소설을 읽다보면 특히 '외국 소설'의 경우에는 이름이 다 비슷비슷하기도 하고 관계가 얽혀 있다보면 누가 누군지 자꾸 헷갈린다. 그런 경우에는 누군가가 정리해 둔 관계표를 검색해 놓고 보면서 읽거나 직접 관계표를 작성하며 읽기도 한다.

단편의 경우에는 관계라고 할 것이 없다. 캐릭터 등장이 적고 에피소드도 복잡하지 않다. 간단히 짧게 몇 분 씩 끊어 읽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예은 작가의 '칵테일, 좀비, 러브'는 이 단편집에 나오는 한 소설이 이름이다. 아버지가 좀비가 되는 괴기한 내용의 소설인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밌는 소설은 아니였다.

소설에는 부모의 불행을 막기 위한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단편은 '소포'없이 봐야하기에 자세히 설명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소설을 읽으며 조금더 내용을 풀어서 장편으로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물'과 '숲'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오컬트적인 소설도 흥미롭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젠가 읽었던, '구의 증명'이 떠올랐다. 글의 문체는 '무라카미 하루키' 같다 느껴지기도 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다만 이 소설집을 읽으며 '작가'의 문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에 그렇다고 보여진다. 소설은 모두 각자 다른 사람이 쓴 글처럼 개성있다.

소설은 '짧고 가벼워' 짜투리 시간에 읽기 좋았다. 다만 소설에 '아버지'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아서... 현 '아버지' 역을 맡은 1인으로써.. 조금 생각이 복잡해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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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 브라더스 -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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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겪어봄직한 사소한 이야기다. 작가를 잊고 있다가 다시 확인하니,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의 글이다. '작가'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잊혀질 만큼 누군가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된다.

예전 친구와 '영화'나 '소설'의 관전 포인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대체로 재미있다는 평을 받은 작품은 모두에게 비슷한 재미를 줄 것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네이버 평점'이 나의 견해와 다른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대체로 그 작품에 대한 가늠이 가능하기도 했다.

다만 친구와 내가 느끼는 '재미있는 작품'의 기준은 꽤 달랐다. 친구의 경우, '해피앤딩' 작품을 좋아한다. 모든 갈등이 시원하게 해결되며 영화가 끝나는 작품을 선호한다고 했다. 실제 어떤 작품은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꼬와두었던 모든 갈등을 너무 싱겁게 해결해 버리며 마무리 해 버린다.

그런 작품에 나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우리 삶에서 그처럼 어떤 시점으로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에게 나는 그런 '해피앤딩'은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것 보다 더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이어진 친구의 주장은 이랬다. 현실을 표현하려면 '현실'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얻지 못하는 비현실을 '대리만족'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도 그렇다. 나의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지나치게 '선과 악'이 구분된 경우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분명하지 않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 '살인자'라는 인물에 대해 '악'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를 옹호하고 싶진 않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만의 선을 행하고 살아간다. 어떤 행위이던 거기에 당위성이 스스로에게 부여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동하지 않는다. 고로 어떤 의미에서 모든 행동은 '선'을 동반한다. 악이 왜 악이 됐는지, 행위자의 선은 어떻게 '악'으로 비춰지는지, 그것을 관찰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포인트는 '관계'에 관한 포인트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는 '허준'이다. 허준을 볼 때도 여러 포인트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관계'다. 완전히 외지에서 온 '허준'이라는 인물이 '유의태', '유도지', '임오근', '구일서', '안광익'이라는 인물과 꾸준하게 인연을 맺어간다. 이 과정에서 서로서로가 '잘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렇게 인물이 얽히며 인연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있다.

'프리즌브레이크'나 '포레스트 검프'를 비롯해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소설은 이렇게 인연이 얽혀지는 관전 포인트를 담고 있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이런 의미에서 굉장히 취향저격한 소설이다. 모든 일이 각본처럼 목표를 향해 흘러가지도 않고 적당히 비극과 희극이 섞여 있으며 관계가 얽혀진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이 소설이 지극히 작가 경험담이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진실을 넘어서는 허구는 존재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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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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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Blaise Pascal)은 17세기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의 아버지는 파스칼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아버지 역시 세무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 '수학'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서 수학을 가르치지 않으려 했다.

수학이 너무 재밌기에 아들이 다른 공부를 잊어버릴까 걱정해서였다. 요즘 학생과 학부모가 들으면 기가 찰 이야기다. 그러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파스칼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형을 그리며 수학의 규칙을 독자적으로 발견하며 수학적 탐구를 이어나간다.

그는 단순히 수학에만 관심이 많았던 건 아니다.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세계 최초의 계산기 중 하나를 발명했다.

파스칼은 젊은 시절 어떤 사건을 겪고 삶과 신앙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이때 파스칼은 '신앙을 믿는 것'에 대해 흥미로운 철학적 물음과 답을 내린다.

"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모른다. 다만 믿는 것이 더 선택이라면 나는 기어이 신을 믿도록 하겠다."

그의 초년시절이 지식에 대한 탐구시기였다면 그의 삶 후반부는 철학적 성찰에 대한 탐구 시기였다. 그는 과학과 신앙, 수학과 신을 동시에 탐구했다. 그렇게 그의 저서 '팡세'에 인간의 고통과 한계,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다룬다. 단순히 '숫자'에가 아니라 존재에 의문을 가지며 여러 도덕적 딜레마에 대하해 철학적 '물음'을 찾고 답을 구했다.

그의 삶을 보면 수학, 과학, 철학, 신앙 등을 통합하는 대통합적 철학을 찾고자 했다. 그의 철학적 화두와 답은 여러 통찰을 담고 있다.

앞서 말한 '팡세'가 대표적인 그의 철학을 담은 저서다. '팡세'는 프랑스말로 '생각들'이라는 의미다. 이 저서에 그가 가졌던 철학적 단상과 성찰이 모여 있다. 다만 이 책은 '파스칼'이 출판을 목적으로 작성한 글은 아니다. 팡세는 자신의 생각을 이곳 저곳에 기록하고 메모하곤 했는데 사후에 사람들의 그의 생각들을 묶어 출판물로 제작한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신앙'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면 '믿어 손해 보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접근으로 신앙에 대한 탐구를 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이며 이를 초월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얼핏 이렇게 보기에 '파스칼'이라는 인물이 '고뇌하는 천재 철학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파스칼은 굉장히 인간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꽤 괜찮은 유머감각을 가졌고 주변 인물들과 수다떠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가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여겼던 것처럼 그는 자신에 대해 절대적인 잣대를 두지 않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소박한 삶을 꿈꾸고 인간의 고통이 허영심과 세속적인 욕망에서 온다고 여겼다. 그럼 의미에서 그의 철학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소박한 행복을 찾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으로 현대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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