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힘 -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 데이원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읽다가 어떤 글은 '육성'으로 감탄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이 문장이 그랬다.

'생각할 거리가 없으면 글을 읽고, 생각할 거리가 많으면 글을 써라'

머리가 텅 빈 것 같을 때에는 글을 읽어, 생각 거리를 채워두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글로써 해소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읽는 행위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쓰는 행위는 배설하는 행위와 같다. 나의 블로그 명칭이 '해우소'인 이유는 '온갖 배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배설의 행위는 '걱정'과 '근심', '불안', '다짐', '계획', '일상', '정리' 등 다양한 내용들이 있다.

원래 모든 것이 그렇다. 모두가 고귀한 척하고 살아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배설물을 먹고 산다. 우리가 먹는 식물은 흙 속의 양분을 빨아들여 자란다. 그 양분은 지렁이와 같은 미물의 배설에서 시작한다. 질소, 인, 칼륨과 같은 식물에게 필수적인 영양소는 이처럼 지렁이의 배설에서 비롯되고 산소조차 이 식물이 내뿜는 '배설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호흡하고 먹는 것이 '동물'이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섭취한다.

순환은 끝이 없다. 죽은 동물과 식물의 잔해는 또다른 생명의 양식이되고, 우리가 배설한 모든 것도 누군가의 생명을 키운다. 우리가 마시는 물조차 한때 누군가의 몸을 지나간 흔적이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다. 고귀함이란 고로 착각이다. 깨끗함이란 것도 착각이다. 우리는 결국 배설의 순환 위에 서 있을 뿐이며 먹고 싸고 먹고싸는 순환의 일부일 뿐이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는 이런 먹고 싸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로 많이 먹으면 많이 쓸 수 있고, 많이 쓰면 많이 읽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독서파만관 하필유여신'이라고 했다. 이는 책 만권을 읽고 붓을 들면 신들린 듯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 글을 쓰면 큰 걱정 없이 장문의 글이 쏟아져 나온다. 일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물이 고통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는 '창작하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속 창작'에서 비롯된다. 머리가 복잡할 때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펜과 종이로 그것을 받아내면 꽤 괜찮은 창작물들이 된다. 고로 많이 읽으면 많이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만 한다고 저절로 양질의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책을 읽을 때, 조금더 능률이 높은 방식으로 책을 읽는 나만의 방식이 하나 있다. 바로 '쓸 것'을 염두하고 읽는 것이다. 그저 흘려 보내듯 읽는 습관은 음식을 흘리며 먹는 것과 같다. 음식을 소화하지 않으면 배설할 수 없다. 고로 음식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쓸 거리'를 염두하며 읽는 것이다. 글을 읽다고 좋은 문구를 찾아간다. 실제로 나의 글 중 일부는 '인용구'로 도입을 시작한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구가 나오면 그 문장으로 운을 뗀다. 이후 문구에 대한 나의 생각을 쏟아낸다. 그러다보면 '책 저자'의 바톤을 이어 받아 함께 추가 창작해내는 듯한 생각에 빠진다. 그렇다보면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연결 시켜 볼 수 있다.

어떤 책의 경우에는 저자와 생각이 다른 경우도 많다. 다독을 하다보면 생각이 다른 저자들의 글을 읽게 되는데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진다. 즉 양쪽의 논리를 모두 읽어보고 더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쪽의 방향으로 사고가 정리된다.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철학이 만들어지면 다음 도서를 읽을 때는 그 철학을 기반으로 작가의 생각과 비교해가며 읽을 수 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옳다가, 어떤 경우에는 그르다는 모순적인 관점이 만들어진다.

환경 문제에 관한 관점도 그렇다. 환경에 대해 우려하는 관점의 책을 읽고, 이후에는 그에 반하는 책을 읽는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책을 읽고, '보수'적인 책을 읽는다. 그러다보면 글의 리뷰가 왔다갔다 하며 자기논리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모순 조차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 들인다.

세상에 '정확한 한쪽'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더 큰 모순을 만들어낸다. 이는 흔히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어떤 논리는 단지 '진영 논리'에 의해 '반대'하거나, '찬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 서 있는 쪽이 '보수'라고 하더라도 '진보'적인 정책에 공감할 수 있고, '진보'라고 하더라도 '보수'적인 정책에 공감할 수 있다.

즉 모순을 피하려다보면 어차피 모순을 맞이한다. 고로 독서를 할 때는 '그럴 수 있다.'라는 마음과 '정말 그러한가'라는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가지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의심스러운 것 믿어보는 용기도 필요하다.

과거 한 강의에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달 정도를 글을 쓰니,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렇다. 보통 자신의 인생을 글로 쓰면 책이 몇권이 나온다는 사람들도 실제 글을 써보면 한 권 분량을 채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또한 글에 대한 소재가 고갈됐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을때가 매일 글쓰기 습관을 가진지 3달즈음 됐을 때다. 그럴때는 모든 것을 글감으로 보고 접근하면 좋다. 봤던 영화, 읽은 책, 겪은 이야기 등이 그렇다. 즉 많은 인풋이 많은 아웃풋을 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두 번째 교과서 x 궤도의 다시 만난 과학 나의 두 번째 교과서
궤도.송영조 지음, EBS 제작팀 기획 / 페이지2(page2)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두 번째 교과서'

사실 따지고 보자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어쩌면 중학교에서 혹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이야기다.

'뉴턴의 운동법칙'이라던지, '멘델의 유전법칙', '다윈의 진화론' 등

이 재미있는 '과학'을 지금 당장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준다면 기겁을 할지 모른다. 어쩌면 성인이 된 많은 사람들이 한때는 '스트레스'였을 과학을 즐기는 이유는 '컨텐츠'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어떤 책을 읽을 때, 내가 가장 먼저하는 일은 '그 주제'에 강력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해부학자의 세계'라는 책을 보기 전에 간단한 '서칭'으로 해부학에 관해 찾아본다거나, '매너의 역사'를 읽기 전에는 관련 글이나 영상을 찾아본다.

이렇게 호기심이 한번 작동하고 나면, 글을 읽는다는 느낌이 아니라, 글이 뇌속으로 '사르르'하고 녹아드는 경험을 한다. 책에 한껏 몰입하면 관련된 호기심이 더 일어나고 그러면 조금더 다른 시각을 찾아 비슷한 주제의 글을 쉽게 읽게 된다.

어쩌면 학창시절에 과학이 재미없었던 이유는 '호기심'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호기심'이 발생하면 '하지말라!'라고 명령해도 하게 된다. 반면 '하라!'라고 하는 것에는 '호기심'이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교육의 '하라!'는 명령은 너무 어린 시기에 찾아오고 거기에 대한 반발심으로 '호기심'이 어린 시기에 사라진다. 성인이 되고 아무도 '하라!'라고 명령하지 않는 시기가 오면서 어른들은 결코 하지 않았던 '과거의 추억'을 취미로 갖곤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당장 원리를 모르면서 사용하는 것들이 많다. 당장 사용하는 '배터리'도 그렇다.

'왜 그렇게 되는 거지?' 하는 작동원리를 궁금해 하기도 전에 그것이 주는 달콤함에 중독되어 버린다. 아이들은 어째서 배터리가 방전되고 충전되는지, 그 원리를 궁금해 하지 않고, 스크린 터치는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궁금해 하지 않으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고구마 줄기 캐듯, 한 호기심은 다른 호기심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그 첫 호기심을 발동시키고 그것에 관심을 두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과학은 '원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사고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더 중요하긴 하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지 않고, '원래 그런거야'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맹신'을 낳는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비판적 시각도 갖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에 대한 흥미는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작가 '궤도'는 그런 의미에서 '과학'을 대중적으로 쉽게 재밌게 소개한다. 책은 여백도 많고 쉽게 읽힌다. 그의 책을 한참 읽고 있는데 8살 아이가 본인도 읽고 싶다고 처음 세 장을 읽었다. 꽤 어려운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놀랍게도 책의 내용을 '대략'은 알고 있었다.

뉴턴이 누구이며 어떤 걸 발견했는지를 책을 읽고 나에게 묻는다. 그 뒤로 어떤 일을 보면 '뉴턴'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닐스보어 등의 이야기가 간혹 나오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들의 발견한 과학적 발견에 둘러 쌓여 살면서도 한 번도 아이들에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마 학교에서 '가르치겠지'하는 방관이 있을지 모른다. 다만 과학은 '학교'에 갇혀 있기에 너무나 그릇이 크다. 과학은 '학교'나 '교과서'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곳곳에 있다는 것을 '궤도의 다시 만난 과학'이라는 책을 접하고 아이와 이야기하며 많이 느낀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너의 역사 -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턴가 '예의'를 말하면 '꼰대'라는 말을 듣는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설혜심' 교수는 책 들어가는 서두에 '매너'에 대한 주제로 책을 쓰는 행위가 '꼰대'임을 천명하는 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실제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스스로 '젊은 사람'들과 소통이 자유로운 '열린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자 하는 '어른'들이 늘면서, 혹은 스스로 '젊은 마인드'를 갖고자 하는 '어른'들이 늘어나면서 '꼰대'는 젊은 층끼리 '어른'을 비하할 때 쓰는 은어에서 지금은 어른들 조차 그 언어에 갇히게 되는 듯하다.

책은 동양에서 말하는 '예의'가 아니라 서양사를 기준으로 '매너'와 '에티켓'를 서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지금까지 품격있는 인간이 갖춰야 할 다양한 지침들을 소개한다.

이 소개들을 읽다보면 아무리 '고대'나 '중세'라고 해도 지금의 예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지침의 경우에는 '저런 걸 굳이 적어서 교육해야 하나' 싶은 것들도 있다. 그만큼 당연한 매너와 예의들이 과거부터 조금씩 쌓아 올려져 지금이 됐음을 알 수 있다.

'매너'와 '에티켓'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에티켓과 매너라는 것은 모를 때는 모를 수 있지만, 한 번 알고 나면 계속해서 신경쓰게 된다. 고로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통해 상대의 삶과 사고방식을 알 수 있는 꽤 유용한 비언어적 수단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본인이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오른쪽으로 걷는 경향이 있다. 가령 둘이 걸어가게 되면 항상 오른편에 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군대'에서 배워진 습관이다. 군대에서는 언제나 '상급자'가 오른편에 선다. 이는 통솔의 개념과 닿는다. 군대에서는 2인 이상이 함께 걸어 갈 때, 가장 상급자 혼자 거수경례를 한다. 오른손을 올리는 과정에서 오른쪽 손이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습관은 군전역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데 '상급자' 개념이 아니라 '보호자' 개념으로 바뀐다. 가만히 걸어가다보면 대체로 아이는 차도에서 멀도록 손을 잡아주고 여성과 걸어갈 때도 밖으로 서서 걸어가는 경향이 많다.

꽤 적잖은 예의는 사실 '군'에서 배운다. 가령 압존법도 그렇다.

'할아버지! 아빠께서 밥 먹으라고 하셨어요.'

이 말의 큰 오류는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설정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아빠보다 더 높기 때문에 할아버지 앞에서 아빠를 낮춰야 한다. 이런 '꼰대스러움'은 20대 초반 군입대한 남성들 사이에서 꽤 유의미하다. 거의 대부분의 군대에서 벌어지는 '갈굼(?)'은 이처럼 예의에 관한 부분이 많다. 군선임이 식사를 하기 전에 숟가락을 들지 않는다거나 선임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때, 재빨리 그것을 건내 받는 것, 전화를 받을 때, '여보세요?'하고 받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사회생활'을 할 때,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

'네, ㅇㅇㅇ 입니다'하고 신원을 바로 밝히는 것이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 이는 사업이나 직장생활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군대가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런 '매너', '에티켓'에 관한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실 때, 항상 나를 옆에 세워 두셨다.

'엄마가 설거지할 때는 항상 옆에서서 말동무를 해주는 거야'

그때 말씀하셨던 기억은 30년 가까이 됐지만 지금도 누군가 설거지를 하면 슬그머니 나와서 옆에 서게 된다.

그 밖에 누군가가 짐을 들고 있을 때, 후딱 손을 비워 준다거나 자동차를 탈 때, 뒷좌석에 앉지 않는 예의도 있다. 약속시간에 항상 10분 일찍 도착해야 한다거나, 먼저 인사를 건내야하는 간단한 예의도 있다. 전화를 끊을 때 항상 상대가 끊을 때까지 기다린다던지, 헤어질 때는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는 것도 그렇다.

이런 예의는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바가 없다. 책을 따로 사서 보는 일도 없다. 그저 말과 말로 전달될 뿐이다. 설혜심 작가의 '매너의 역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유럽 중심의 '매너'를 말한다. 당연히 현대 대한민국의 '매너'와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유교적 예의라는 기본틀을 가진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매너들이 많다.

아마 'MANNER'라는 말자체가 '방법'이라는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를 대하는 기본적 방법이기 때문인듯 하다. 동양과 서양할 것없이 공통적인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매너'는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인 무언가가 아니다.

이러한 자연발생적 문화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인류가 왜 매너를 발명해 냈고 그것을 유지해내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매너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꼰대'라고 폄하하고 폄하 받을 일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기본 교양이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쌓고 가정에서는 교양을 쌓아야 한다. 이처럼 지식교양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조화에 필수적이다. 한쪽만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소흘히 할 수 없다. 교양을 '꼰대스러움'으로 치부하는 오늘의 풍조에서, '매너와 교양'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개인과 가정, 사회 모두에게 중요한 듯 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빠르게 실패하기 (15만 부 기념 에디션)
존 크럼볼츠.라이언 바비노 지음, 최현성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고 '글' 쓰다보면 꽤 재밌는 제안이 오는데, 어떤 경우에는 '진행비'를 제안하고 어떤 경우에는 책만 지원한다.

'블로그 운영'에 관한 '강연 제안'이 오거나 '책읽기'강연, '글쓰기'에 대한 제안, '마음챙김'에 관한 제안도 있다. '신문 컬럼' 제안, '유튜브 출연 제안', '출간 제안' 등도 그렇다. '독서'는 너무 흔하지만, 여기에 '글쓰기'가 함께 있다보니 주제 넘게도 '팔로워'나 '이웃'이 늘어나고, 장문의 '고민'이 메일로 오거나, '손편지'를 받는 팔자에도 없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많은 제안 중 흥미로운 제안에는 '응'하고 그렇지 않은 제안은 거절한다. 거주가 '제주'라 활동은 제한적이다. 다만 생각치 못한 경험은 삶의 양념이 된다. 비록 '사비'가 들어간다고 해도 '가치'가 있다면 '돈'과 상관없이 움직일 의사도 내비친다.

'얼마인가요?'하는 물음은 꽤 난감한데 시장 가치로 적정 금액을 제시하면 그냥 응한다. 독서활동을 파생으로 얻게 된 부가소득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없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쌓인 50 미네랄로 'SCV' 한 기를 더 투입 생산하는 바라고 여긴다.

사람은 어떤 부분에 가능성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냥 할 뿐이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바는 없다. 단지 할 뿐이며 그것이 형태를 다르게 하여 나에게 '기회'를 만들어 준다면 눈치를 살피다 '악셀레이터'를 밟을 준비를 할 뿐이다. 어쨌건 이 습관은 아무리 해도 손해가 아니기에 그렇다. 기회가 오지 않아도 '손해'가 거의 없는 완전한 습관이지 않을까 싶다.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완독' 후 바코드 아래편의 '도서 금액'을 확인하는 것이다. 책은 아주 가성비 좋은 매체다. 2만원 정도 하는 금액에 거의 10시간을 취미 생활할 수 있다. 스스로를 고요한 환경에 두도록 하고, 사고의 '질'과 삶의 '질', 주변 사람의 '질'을 바꾸게 한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가능하고 취미를 즐기면서 다수에게 '대단하세요.'하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게임'이나 '영화감상', '음악감상', '유튜브 보기'처럼 그냥 취미 생활을 할 뿐인데 다수가 이처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취미는 많지 않다. 습득한 취미의 활용이 넓고 투자대비 얻은 소득이 많으며 '인류' 최고 석학들과 생각을 공유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하와이'로 갈 수 있고, 조선시대나 로마시대로 갈 수 있다. 전장의 군인이 되거나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으로 살아 볼 수 있고, 왕이 되어 볼 수도 있이며, 화학자나 수학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도 모두되어 볼 수 있다.

이등병부터 병장까지 경험한 군대의 경험이 '삶의 토양'이 되듯 다양한 삶을 간접 경험하여 꽤 다각적인 시야를 얻을 수 있다.

저자들은 '소비자'에게 꽤 정성으로 대해준다. 심지어 '도서관'은 그 방대한 자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이후 대중이 '영상'으로 만나게 될 컨텐츠를 먼저 보게 된다. 이렇게 그 든든함을 한그릇 먹고 가격표를 살핀다.

2만원?

책, 이것은 바닥에 공짜로 굴러다니는 '진리'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프 임파서블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트 헤이그'의 소설은 얼마전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통해 처음 접했다. 소설의 주제는 '후회, 상실, 운명' 따위다. 과거 선택 대한 후회는 '라이프 임파서블'과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공통점이다.

소설 소재는 작가 개인적인 경험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우울증과 불안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적 있다. 책 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에는 그가 ADHD를 겪었다고 소개한다. 이런 경험은 그의 작품여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글은 짧은 소주제가 빠르게 연결되어 있어 짧은 집중력으로도 긴 독서 시간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매트 헤이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강조하는 바가 있다.

'과거, 그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가정은 흥미를 위한 서사적 장치라기보다 스스로를 치유하고 동시에 비슷한 기억을 가진 많은 이들을 치료하기 위한 장치다.

그는 자신이 쓸모 없다고 느끼는 많은 순간을 겪는다. 그런 경험은 소설에 잘 투영된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주인공 '로라'는 여러 삶을 선택하면서도 결국 완벽한 삶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결국 불완전하고 불행하다고 느꼈던 현재의 삶'도 오류를 수정했던 다른 삶과 마찬가지일 뿐이라는 것이다. 두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다.

'세상에 완벽한 우주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불완전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던진다. '라이프 임파서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내용이 전개된다. 우리의 삶은 단순히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선택의 결과는 분명 다른 미래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것이 무결함은 나타내진 않는다.

예전 축구를 잘하는 한 친구가 말했던 적 있다. 자신이 찬 공이 완벽하게 자신이 원하는 곳에 떨어지는 이유는 '일단' 걷어차고, 이후 '만족'하기 때문이란다.

마치 그 모든게 의도한 것처럼 선택 후에 '받아들임'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후회와 상실은 피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다양성'을 대체롭게 즐길 수 있는 자세다. 우리는 어떤 완전한 선택을 하더라도 분명 후회하고 '상실감'을 느낄 것이다. 나비효과처럼 내가 뱉은 작은 말이 꾸준히 파장을 만들어 누군가의 수명을 조금은 줄이고, 조금은 늘렸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든 선택을 통제하고 '완전'으로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흔적'이라는 과정을 만들어 간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미래와 주변에 영향을 끼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오물이 조금 묻었지만, 그또한 내몫이다'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72세의 은퇴한 수학교사 그레이스가 아들과 남편을 잃고 후회와 자책의 삶을 살다가, '기억이 날듯, 말듯한 옛 직장동료'가 남긴 '스페인 이비자 섬의 집 상속을 받으며 벌어지는 일이다.

소설의 어떤 부분에 따르면 '수학'이란 명료하게 '답'을 내려 놓는다. '옳다.', '그르다.' 수학에는 여러가지 해석에 의한 다양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맞거나 틀리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그녀의 삶이 '오답'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수학'보다는 '시'에 가깝다.

'시'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도 '아름답다'고 감상할 수 있고 정해진 답이 없는 무수한 우주만큼의 답안이 가능해진다. 2+2가 4라는 결론은 '수학적으로 완전'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2+2는 2진법으로 답을 내리면 100이되고 3진법에서는 11이 되진법에서는 10이 된다.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수학'조차 그 해석에 의해 무한으로 가능해진다.

결국 모든 것은 '해답'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