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 아이사카 토마, 이소담 역, 다산북스(2023)

소녀 동지여 적을 쏴라

줄거리
주인공 세라피마는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마을을 급습한 독일군에 의해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고향을 잃는다. 자신도 나치에게 사살되기 직전, 저격병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이리나에게 구출되지만, 아군이라고만 믿은 이리나의 손에 엄마의 시신을 모욕당한다. “싸울 것인가, 죽을 것인가?” 이리나가 제시하는 이분법을 받아들인 세라피마는 그의 제자가 되어 저격병이 되기로 결의한다. 어머니를 쏜 독일 저격병을 처치하기 위해, 그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모욕한 원수 이리나를 죽이기 위해. 이리나가 교관으로 있는 여성 저격병 훈련학교에서 세라피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녀들과 만난다. 모두들 독일군에게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그때 이리나가 제시한 싸움과 죽음의 선택지 사이에서 싸우는 쪽을 선택한 자들이다. 뜨거운 전우애를 나누며 훈련을 마친 세라피마는 어엿한 저격병으로 거듭나고 동료들과 저격소대를 이룬다. 주인공은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서 100명에 달하는 적병을 해치우는 전과를 세우지만, 전쟁의 끔찍함과 여성을 향해 가해지는 폭력을 마주하면서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이 전쟁이란 결국 독재국가끼리 벌이는 괴상한 살육일 뿐이란 것을, 그리고 전쟁 아래서 가장 큰 폭력에 놓이는 것은 여성이라는 것을. 그리고 세라피마는 원수를 갚는 것을 넘어 자신이 싸우는 진정한 동기를 발견한다. 그것은, 여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페이지
p.89
˝나는 기점을 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걸 전장에서는 잊으라고도 했지. 기점조차 없어서야 시작도 할 수 없어.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저격병의 특이성은, 명료한 의사로 적을 노리고 쏘는 것에 있다. 현대 전쟁에서는 기관총병∙포병∙폭격수∙군함을 타는 해병에 이르기까지 각종 병과는 집단성과 그에 따른 익명성의 그늘에 숨을 수 있다. 그러나 너희 저격병은 그럴 수 없어. 항상 자신이 무엇을 위해 적을 쏘는지를 놓치지 마라. 그건 곧 근본적인 목표를 잃는 것이다. 그다음은 죽음이다.

pp.102-103
저격병에게 사격은 단순히 주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시간은 그 밖의 모든 과정에 투자한 결과를 내보이는 ‘극점‘에 지나지 않는다. 세라피마는 그런 사고방식과 기능을 습득했다. 다른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pp.127-128
˝여성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나라가 더 진보한 나라라고?˝
˝방어전을 치르고 있다는 조건하에선 그게 맞아. 강의 때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면 알겠어. 남녀평등의 권리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이론 훈련에서 현대 외국 여성에 관해서 배웠잖아. 파시스트 독일은 여성을 부엌에 밀어 넣고, 미국 여성은 치어리더가 되었어. 그러나 우리 소련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나라임을 인정한 거야. 기회만 있으면 영웅도 되고 장군도 될 수 있어. 나는 그걸 실현해 보일 거야.˝
세라피마가 보기에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물론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국가에 몸과 마음을, 생명을 바칠 수 있다. 국가로서의 소련에 훌륭히 공헌함으로써 국력을 높이고, 그렇게 가치를 인정받은 여성은 빛날 수 있다는 것. 분명 그것은 파시즘이 성차별을 배경으로 삼아 전쟁터에서 여성을 멀리 떨어뜨리려는 사상의 반대 지점에 있다. 여성을 남성 병사의 치어리더로 쓰는 미국의 발상과도 다르다. 그렇지만 결국 이것은 더욱 동질성을 강요하는 사상이지 않을까.
그러나 여성이 징병의 대상이 아닌 이상, 여성 병사 개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전쟁에 뛰어든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pp.145-146
˝너희에게 숙제를 냈었지. 네 사람 모두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답해라.˝
처음으로 지명된 샤를로타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여성은 전쟁 앞에 희생되는 약자가 아니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자임을 증명하겠습니다.˝
이리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야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이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 같았다. 그러나 이리나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세라피마에게 이리나의 시선이 왔다.
˝저는 여성을 지키기 위해 싸웁니다.˝
이것이 세라피마가 찾은 가장 정확한 대답이었다.

pp.155-156
˝너도 사냥꾼이었으니까 기억하지? 사격하는 그 순간에 도달하는 경지. 내면이 한없이 무無에 가까워지고 끝없는 진공 속에 나만 있는 기분. 그리고 사냥감을 쏘는 순간의 기분. 거기에서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감각.˝
세라피마는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만 안다고 생각했던,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각을 타인이 언어화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모습만으로도 아야는 대답을 들은 것으로 이해했다.
˝사격하는 순간에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군대나 동료, 그런 개념은 싫어. 그건 나를 그 순간의 순수함에서 멀어지게 하니까. 하지만 같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개념에 물들고 말아. 나는 내가 달라지는 게, 꼭 녹스는 것만 같아서 너무 싫어.˝

p.212
˝아르스카야 상등병 동지. 어떤가. 자신만은 정상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성공했는가?˝

p.220
병사와 사냥꾼을 나누는 것은, 적을 죽이겠다는 명확한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다.

p.304
˝다 괜찮아. 너는 잘했어. 너는 그러면 돼.˝
˝되긴 뭐가 돼. 당신이, 당신이 나를 바꿔놓았어…….˝
˝그래. 내가 너를 바꿔놓았다. 저격병으로 키웠지. 너는 적을 쏴라. 망설이지 마라. 한곳에 머무르지 말고 너만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격병으로서 적을 쏴라, 세라피마!˝
세라피마는 신음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 가슴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이바노프스카야 마을에 있었을 때, 자신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죽인 사람의 숫자를 자랑하고 있다. 그리하라고 이리나가, 군대가, 국가가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면 할수록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나를 지탱하던 원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송두리째 소련 군인의 것으로 교체된 걸까?
자신이 괴물에 가까워진다는 실감을 분명 느꼈다. 그러나 괴물이 아니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흥분이 가신 후, 세라피마는 게으르게 잠만을 탐했다. 쪽잠만 자며 보낸 사흘 동안의 잠을 보충하려는 것처럼 자는 내내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차라리 악몽에 괴로워하는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p.515
싸우겠는가, 죽겠는가.
싸우겠다고 대답한 자에게는 싸움을 가르치고, 세라피마처럼 죽음을 바라는 자는 일으켜 세웠다. 양쪽 다 거부한 자에게는 다른 길을 가르쳐주었다. 타냐에게, 또 저격학교에서 퇴소한 동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류드밀라 파블리첸코가 가지라고 말했던 삶의 보람. 이리나는 여성을 구하려고 했다. 세라피마보다 일찍, 그리고 더욱 깊은 의미로 똑같은 삶을 선택했다.

pp.534-535
세라피마가 전쟁에서 배운 것은 800미터 너머의 적을 쏘는 기술도, 전장에서 갖게 되는 인간의 처절한 심리도, 고문을 견디는 법도, 적과의 힘겨루기도 아니다.
생명의 의미였다.
잃은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할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운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솔직한 진실. 오로지 이것만을 배웠다. 만약 그 외에 무언가를 얻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

분류(교보문고)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일반

기록
2024.02.15(木) (초판 1쇄)

다.

한 줄
걸판과는 다르다! 걸판과는!

오탈자 (초판1쇄)
못 찾음

확장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소련의 저격수. 결혼 전 본명은 류드밀라 미하일로브나 벨로바(Lyudmila Mikhailovna Belova)이며 잘 알려진 성씨인 파블리첸코는 사실 첫 번째 남편이였던 알렉세이 파블리첸코의 성씨다. 무척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이혼 후에도 류드밀라는 성씨를 바꾸지 않고 유지했다.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저격수 36명을 포함한 독일군 309명을 사살하여 뛰어난 실력을 보였는데 이는 여성 저격수로서 역대 최고 기록이다. 이러한 전적 덕분에 Lady Death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는데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여사신, 죽음의 여사, 죽음의 부인/숙녀 정도다.
전쟁으로 겪은 수많은 트라우마와 첫번째 남편으로 인해 생긴 상처, 사랑하던 사람들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그녀의 강고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평생 우울증과 PTSD, 그리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는데 이는 아마도 그녀의 단명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한다.

걸즈 앤 판처 - 미즈시마 츠토무(2012)
‘만화나 게임 등에서 흔히 병기(兵器)를 든 여성의 이미지가 오용되는 방식을 비판하고 “젊은 여성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 페티시즘의 대상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라 말하며, 그러한 자극적 대중문화와 이 소설이 궤를 달리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책을 구입한 사람의 서평에 적힌 ‘걸판과는 다르다! 걸판과는!‘이라는 문구가 너무나 강렬했다. 내가 밀리터리 종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볼 생각은 없는 애니인데 꽤 잘 만들었다는 평이다. 다르다고는 했지만 초판 한정 일러스트 캐릭터 카드 8종을 준다고 하니… 뭐 어쩔 수 없나.

저자 - 逢坂冬馬(1985-)

원서 - 同志少女よ、敵を撃て(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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