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지능은 타고난 재능에 학습이 더해져 형성됩니다. 지능은 학습을 통해 개발되기 때문에 지능검사로 그런 능력이 오롯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학습에 의해 길러진 것인지 구별하기도 어렵고 사실 굳이 구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영재에게 필요한 것은 정서적 안정과 사회성 향상

창의성은 모호한 개념이다. 

그리고 탄탄한 과학적 기초지식을 갖추는 것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 


1) 창의성 교육만 중시한 나머지 암기, 반복, 문제풀이 등을 소홀히 하는 것은 좋지 않다. 

2) 아무리 뛰어난 영재라도 기초 지식을 머릿속에서 숙성시킬 시간이 필요하다. 

3) 가능하면 다양한 소양을 갖추도록 한다.

4) 친구와 동료가 필요하다. 

5)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지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는 칭찬을 잘해준다. 신뢰할 수 있는 부모가 된다. 시도하는 것을 격려하고 지원한다. 


영재들에게 필요한 지혜

- 어리석은 일을 기꺼이 견디게 하라.

- 지적 자극보다 정서발달이 중요하다.

- 성취동기를 지나치게 강요하지 마라.

- 긍정적인 자아 형성을 유도하라.

- 협력하도록 격려하라.

- 감정을 소통하라.

- 특별한 친구를 만들어라.

- 잘못된 행동보다 그 행동의 동기에 주목하라.

- 불합리한 체벌은 피하라. 

<영재 공부> by 제임스 웹


영재에게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것이 정서적 안정, 끈기, 정신적 맷집, 책임감, 승부욕, 인내심, 사회성, 남을 존중하고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기 같이 실력자로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 모두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칭찬은 해주되, '나는 보통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영재들은 대개 감성이 예민하고 자아가 강하고 행동에 나름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가급적 야단치기를 자제하는 것이 좋다. 

야단칠 때에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를 버럭 내거나 짜증내는 것은 피해야 한다. 6세 이상은 되도록 야단치지 않는 것이 좋다. 칭찬과 격려가 약이다. 특히 아이가 영재라면 예민하고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야단맞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동의 동기를 먼저 살펴, 단순 짜증이거나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될 때 쳐야 한다. 자존심 상하는 막말을 해서는 안 된다. 


영재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

- 완벽주의 수정하기

- 관심영역 확장하기 독서를 통해

- 신체활동 시간 늘리기


영재들의 공통점은 굉장한 학습에너지와 관심있는 것에 집중하고 파고드는 강한 몰입도

더 나아가 학습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겸손, 경험에 대한 개방성(다양한 관심), 승부욕, 인내(끈기), 체력


==> 이 책은 20여년간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한국대표단을 담당했던 송용진 교수가 지켜본 수학영재들을 위주로 영재들에 대해 쓴 책이다. 이 책은 영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모든 영재들이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것), 영재들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친구와 동료가 필요하며 균형잡힌 교육(인문학적 소양, 음미체에 대한 소양 등), 기초적인 판단력과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한다. 

아래의 지형범 교수의 책과 다소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같다. 특히 아래 책에서 영재의 특성이라고 언급된 과흥분성이나 사회적 부족이 모든 영재의 특성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그리고 좀더 일반적인 아이들처럼 지낼 수 있도록 정서와 사회성 발달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지형범 교수는 영재들의 학교 적응이 어려우므로 조기진학, 월반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송용진 교수가 주로 접한 영재들은 그만한 사회성과 정서적 안정을 이루어 학업적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닌가(사회성과 정서적 안정이 부족한 영재들은 미성취영재로 남아 송용진 교수에게까지 오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 저자의 견해가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고 사실은 어느 정도 겹친다고 하겠다. 즉, 영재의 전반적 특성으로 과흥분성, 완벽주의, 편벽과 고집 등이 있지만, 그러한 부분은 자라면서 적절한 지도를 통해 고쳐질 수 있고 정서발달과 전인적 교육을 받는다면 학업적으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는 두 저자 모두 생각을 같이하는 것 같다. 다만 위 책은 주로 수학영재들과 우리나라 영재교육, 특히 수학올림피아드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너무 고도영재들을 다루고 있어서 뒷 부분 사실 우리 아이와는 상관없단 생각에 대강 감탄하며 읽게 되었다.   



* 고도영재들이 보여주는 특징들

: 고도로 발달된 감각특성

: 과흥분성

: 기억능력 

: 발달된 인지능력과 추론능력

: 아주 빠른 자아의식

: 완벽주의 경향

: 편벽과 고집

: 감수성과 존재론적 고민


고도영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몰입이므로,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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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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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나는 계약직 은행원으로 일하다 대학원에 가고 싶어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영문과 수업을 듣게 된다. 

그 수업의 젊은 강사인 그녀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가 쓴 에세이도 몰래 구해 읽고,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학생들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그녀는 용산구 참사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고 나도 용산구 주민이라 이를 기억한다. 그녀는 나에게 따라가고 싶은 빛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33쪽) 

ㅡ 김연수의 소설(이토록 …)에서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 나온 것 같다. 안타까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중략)

나는 그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종종 상상해보곤 했다. 

(중략)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음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42-43쪽)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44쪽) 

ㅡ 수많은 선배들을 보면서 힘을 얻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하고. 그녀들의 마음 또한 복잡할 것이고, 나 또한 후배들에게 그런 빛이 되어주지는 못하리라는 좌절감도 든다. 


<몫> 

1990년대 말 대학가의 운동권과 여성주의 운동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그때 대자보를 쓰고 집회에 나갔던 나의 선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대부분 말과 글,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라 어느덧 그들이 욕하던 기득권이 되어 있지. 나 또한 자유롭지 않고. 


<일 년> 

그녀는 회사 정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알게 되고 같이 일하게 된 계약직 다희를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그녀와 가깝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다 멀어진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답신> 

나를 챙겨주던 언니는 고등학생 때 접근한 선생과 이른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선생은 좋은 사람이 아니기에,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기에, 그러나 언니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다가 나는 언니가 답답하고 형부가 미워서 형부를 다치게 하고 마는데, 언니는 재판에서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여 나는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언니 가족과도 절연하게 된다. 출소 후 뒤늦게 언니의 사랑을 깨닫고 돌이켜본다.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175쪽) 그리고 지금은 스물셋이 된 언니의 아이(나의 조카)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ㅡ 형부가 너무나 혐오스럽게 그려져서 나도 화자에 이입해서 함께 분노하게 되었던 소설. 등장인물들의 감정묘사가 특히 섬세하다고 느껴졌다. 


<파종> 

나는 이혼 후 아이 소리를 데리고 열다섯 살 위인 오빠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오빠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대신에 나를 돌봐주었는데, 나이를 먹어서 나와 소리까지 함께 돌보며 텃밭을 가꾼다. 소리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아이었는데, 오빠로부터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고 나서는 달라지게 된다.  오빠는 이후 병으로 죽게 되었고, 나와 소리는 그로부터 5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내지만, 나는 소리의 자퇴 결심을 듣고 소리의 상실감을 이해하고 나의 상실감도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나와 소리는 다시 그 텃밭을 가꾸며 오빠를 그리워한다. 


<이모에게>

엄마를 대신해서 나를 돌봐주었던, 엄마보다 스물두살이나 더 많던 이모에게. 이모는 나를 예뻐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엄격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사람이어서, 나에게도 그런 모습을 강요했다. 나는 그런 이모에게 애증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이모 같은 어른으로 자라나 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파일럿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모를 만나지만, 현실은 꿈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이모와의 재회는 다시 불편하고 화가 나는 경험이 되지만. ”이모가 용기를 내서 말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이모는 칭찬하는 법을 몰랐으니까. (중략) 그래서 나는 이모의 마음을 알았다. 이모가 사실은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대견해한다는 걸. 직접적인 칭찬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해지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모가 그렇게 말하자 목이 메었다.(254쪽)“  ”이모를 은근히 무시하고 하대하는 아빠의 모습에 분노하면서도 나는,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은 언제나 이모를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뭐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군다고 삐딱하게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모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내 모습을 부정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모의 몇 벌 되지 않는 옷가지들을 만지면서 나는 그것 또한 나의 모습임을 인정했다. 그러한 판단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과는 무관하다는 사실도.“(263쪽) 

ㅡ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에게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시하고 낮게 보는 마음에 대하여, 그리고 뒤늦게 그 사랑을 깨닫는 것에 대하여, 이 작품집에서는 자주 그리고 있다. <답신>에서 나의 언니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모에게>에서 나의 이모에 대한 태도에서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우경의 어머니 기남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면서도 괘씸하다. 그러나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기남은 딸 많은 집 다섯 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식모로 다른 집에서 크다가 독립하여 이혼남과 결혼하여 그의 전처 소생인 진경과 직접 낳은 우경을 기른다. 진경은 연구원이라지만 우울을 이기지 못하여 알콜중독이 되었고, 우경은 언니를 경멸하고 가족을 경멸하더니 미국으로 혼자 건너가 재미교포와 결혼을 하고 홍콩에 살면서 기남을 초대한다. 우경은 영 성격이 좋지 않다. 자기 집에서 일하는 시터 제인에게도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기남은 홍콩을 헤매다가 딸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우경이 자신보다도 시어머니와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더 의존하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손자 마이클과의 대화를 통해 따뜻함을 느끼고 그 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할머니, 부끄러워요? 

“……응, 그런가봐.”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다정하구나.”

“맞아요. 엄마가 그랬어요. 마이클은 너무 다정해. 한국 할머니처럼.”

“정말?”

“근데 너무 다정하면 안 된대요.

마이클이 잠시 기남을 보다 말을 이었다.

”너무 다정한 건 나쁜 거래요.“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318-319쪽) 


———-

어쩌다보니 최은영의 소설들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녀의 인물들이 너무 ‘약하다’는 평을 듣는 것 같기도 하지만,

나 또한 심약하고 흔들리는 사람이다보니, 그녀가 그리는 인물들을 너무나 알겠고 

그가 그리는 섬세한 심리에 나의 감정이 함께 요동치기도 한다.

소설은 윤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것을 건드리는 것이 소설의 기능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라,

조심스럽게 읽는 이의 윤리의식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그녀의 소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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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 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새로운 엘리트 만들기
셰이머스 라만 칸 지음, 강예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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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파키스탄과 아일랜드의 자수성가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다가 미국의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세인트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불평등 문제를 연구하다가, 졸업 후 10년만에 모교인 세인트폴로 돌아가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조사한 것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처음 학교 기숙사에 배정받았을 때 예상과는 달리 기숙사에 온통 소수인종만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품고, 학교에서 만나게 된 엄청난 부와 특권을 가진 상류층 친구들을 보며 충격을 받는다. 그는 '소수 학생 기숙사에서 느꼈던 놀라움과 엘리트 학우들 사이에서 느꼈던 불편함'으로 인하여(19쪽) 불평등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되었다. 

'왜 엘리트 학교교육이 어떤 이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인데, 어떤 이들에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해 성취해야 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 왜 어떤 배경의 학생들에겐 학교생활이 너무 편안하고 쉬운 일인데, 어떤 학생들에겐 끊임없이 악전고투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는가?'(19-20쪽) 


미국은 개방성과 접근성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수용하고, 그 범위를 넓혀왔지만, 그럼에도 미국사회의 불평등 수준 또한 높아졌다.(21쪽) 엘리트 대학의 입학생들은 인종적으로는 점점 다양해지고 있지만 동시에 점점 부유한 학생들로 채워지고 있다.'개방성과 불평등이 함께 증가하는 이런 이중적 변화' 우리는 '개방성을 다양성으로, 다양성을 인종적 다양성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문제는 계급이다.'(24쪽) 그런데 한 사람의 미래 소득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변수 중 하나가 바로 교육 수준이다. 학력은 부를 쌓는 데 중요하다.(25쪽) 

사실 엘리트 학교들은 특권층 부잣집 도련님들의 집합소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의 재능 있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되고자 노력해 왔다.(25쪽) 이러한 노력들은 '재능에 따른 능력주의를 확립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타고난 적성을 평가하고자 하는 SAT 같은 시험들 역시 이런 이상에서 나온 것이었다.'(26쪽) 

그러나 이 나라의 부와 권력에 대한 엘리트의 지배력은 점점 더 공고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능력'(merit)이란 게 결코 선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대단히 맥락 의존적이다. 능력에 대한 정의는 문화적, 제도적 맥락에 따라 변화해왔다.(26-27쪽)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을 만들어 낸 마이클 영은 1940년대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영국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역량이 허락하는 한 최상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교육체계를 도입하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곧 그런 교육이 고취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상에 대한 일종의 기술관료적 접근에 냉소적인 입장이 되었다. 즉, 능력주의는 역량의 냉혹한 과학화요 재능의 관료화라 생각했던 것에 대해 혹평하는 의미에서 고안해 낸 말이었던 것이다. 

능력주의는 사회 적재적소에 개개인을 선발해 쓸 수 있도록 사회 구성원들의 재능을 식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27쪽), 이 같은 방식이 불러온 파장은 꽤나 모순된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성과 외의 요인을 고려한 차별시정조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고, 이미 부유한 자들의 지속적인 소득 증가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과라는 게 단순히 개인적 특성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결과의 차이를 사람들이 만든 조건의 산물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른 산물로 보이게 만들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구분(차별점)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29쪽)

저자는 세인트폴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능력주의적' 특성을 심어주는지 보여준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보이는 능력은 실상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학교는 개방성을 내세우지만 여전히 부유한 학생들이 지배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이 능력주의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화되면서, 이 결과는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적성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저자가 세인트폴에서 발견한 것은 '특권의식의 오만함이 아니라 특권의 편안함이었다.'(30쪽)

'그들은 세인트폴 같은 곳에 입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노력이며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누구나 자신들처럼 될 수 있으며 계급 상승의 가능성은 이 나라에서 언제나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동료들을 둘러보면서 그들이, 자신들이 옳다는 걸 입증해주는 경험적인 증거라고 여긴다.'(37쪽) 

'나는 세인트폴의 교육이 특권의식 대신 점점 더 특권을 길러주는 쪽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엘리트들은 특권, 즉 그들을 유리하게 만들어주는 자아의식과 상호작용 양식을 개발한다. 스스로를 훨씬 더 개별화된 존재로 생각하며, 현재 자신의 위치가 자신이 해온 노력의 산물이라고 본다.'(37쪽) 

그들은 노력과 재능에 열린사회에 대해 배우고, 한편으로 위계에 대해서도 배운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당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도 상호작용해야 하는데, 대등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친밀감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위계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다. 위계가 너무 고정되어 있거나 존재감이 크면 닫힌 사회여서 노력과 재능이 아무 의미 없어지므로 위험하고 정당성이 없어진다. 따라서 학생들은 위계가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지 제한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는(공정한 것이라는) 감수성과 그런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법을 배운다(39쪽) 

그러나 이미 특권을 가진 학생들에게도 세인트폴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교에서 자신의 자리를 배워나갈 때 학생들은 그들이 받은 유산이 아니라 경험에 의존한다. 특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개발하고 길러가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함양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처신할지에 대한 감각이다. 이런 특권의 실천에 있어 핵심은 편안함, 즉 거의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도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문화에 대해 열린 취향, 잡식성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배타성은 위계적 열린사회에선 오히려 패자의 표식이다(제한된 취향, 지식, 기질 때문에 새롭게 열린 세상의 과실을 얻지 못한다는 논리로). 이러한 특권은 체화되어 기회의 차이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기술, 재능, 역량 같은 것으로, 즉 '그 사람 그 자체'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성공에 필요한 것들을 선천적으로 갖춘 듯 보인다. 이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차별점들을 자연화함으로써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불평등을 은폐하는 데 일조한다.'(41쪽) 

 

1856년 뉴햄프셔 주 콩코드의 단독주택에서 시작한 세인트폴은 그 전에 있었던 영국식 기숙학교와는 달리 학생들의 독립성을 제한하고 공동체의 성장을 장려하는 학교였다. 이들의 목적은 '신사들'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엄격한 도덕성 관리 및 보호와 유년기의 연장. 사실은 도시 빈곤과 이주민 유입이라는 위협에서 벗어나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세인트폴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과 역량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는 부유한 미국인들이 돈을 버는 방식이 변화한 이유가 적잖이 작용한다. 이전에는 자본소득이 압도적이었다면, 오늘날 미국 최고 부자들의 수입 절반 이상은 임금 소득이다. 능력주의가 발흥한 것이다. 세인트폴은 여전히 연간 학비로 4만 달러 이상을 쓸 수 있는 가정이 2/3 이상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엘리트 학교들은 오늘날 자신들의 배타성을, 재능을 기반으로 최고 중의 최고를 뽑기 위한 것으로 프레임화한다.'(77쪽) 중산층은 사라져가고 있고, 인생의 기회들은 부모의 부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되지만. 엘리트 기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외 계층을 환영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다(78-79쪽) 이런 능력주의 안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성공을 각고의 노력과 재능의 산물로 설명하고, 특권의식에서 나오는 성장盛裝들을 거부한다. 그러나 엘리트층은 배제나 보호주의 없이도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재생산해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심각하게 정형화된 불평등이 어떻게 능력주의 안에서 유지되고 은폐되는지. 특권의 이런 굉장한 속임수는 이 세상이 더 개방되어 가지만, 그럼에도 더 불평등해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직원들ㅡ 영원히 그들 아래 있을 사람들ㅡ과 친밀감을 구축하는 법을 배우면서, 학생들은 계급이라는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상호작용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이런 상호작용을 배우면서 엘리트들은 하층계급을 다루는 것이 불가피해질 미래를 준비하며, 이와 동시에 사회적 경계들이 가짜이거나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중략) 학생들은 그들이 목격한 사소한 불평등의 조각이거나 사회적 유동성의 부재를 "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개인적 서사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이해할 경우 직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동성의 부재는 사회적 삶 전반을 지배하는 특징이 아니라 예외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이 학교의 일원으로서 노력하는 삶을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예외 말이다.(123쪽) 


학생들의 기저에 흐르는 자존감은 자기 인식을 형성한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며, 자신들에게 모든 걸 투자한 공동체의 결과물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의 표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표식은 특권이 틀림없지만, 학생들은 그들이 이 학교에 선발된 것과 들어와서 하는 일들이 모두 자신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하는 데 신경을 쓴다. 요컨대, 그 표식은 그들의 성격을 구성하는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세상을 아예 갖다 바쳐 놨다고 보는 게 적절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받은 소수들 가운데 위치한 그들의 자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따낸 것이라고 믿는다.(138-139쪽) 


특권은 '위계질서에 대한 존중과 위계적 관계 내에서의 친밀감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수반한다. 이런 난관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우면서, 학생들은 이 학교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의 중요성을 배우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자리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는 일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학생들은 세상을 평등의 공간으로 여기기보다 가능성의 공간으로 여기도록 배운다. 즉, 자유주의적인 틀을 채택하면서, 평등은 아니지만 '공정한 기회'는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누군가 도달하는 곳은 대부분의 경우 그 자신이 해낸 일의 결과이다.ㅡ 학생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위계상 더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것이다(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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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지음, 서정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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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란 무엇인가. 

정의와 공평이란 무엇인가. 

예일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정경대에서 경제학 석사, 옥스포드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예일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 미국의 엘리트라고 부를 수 있는 대니얼 마코비츠는 이 책을 통해 21세기 미국 엘리트들의 생활양식과 그 세습에 대해 쓰고 이를 비판한다.

그가 그린 미국사회의 모습은 현재 우리 사회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책에서는 한국의 교육열이 더욱 심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엘리트의 자리는 극소수이고 그 자리를 유지하거나 그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교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엘리트 자리에 올라가서 받는 소득은 교육 투자에 비해 더 막대하다(불평등한 분배). 그러므로 엘리트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고, 자녀들에게도 교육을 통해 엘리트 자리에 올라가도록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그리하여 교육이라는 세금 없는 증여를 통해 엘리트 세습이 이루어진다. 

엘리트가 되어도 삶은 불행하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생을 갈아 넣고(과거에는 귀족의 여유가 자랑이었으나, 오늘날은 쉴 새 없이 바쁜 것이 자랑이 되어버렸다) 자녀들에게도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교육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엘리트가 되지 못한 중산층은 (산업 및 소득구조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 비해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엘리트 대비 소득 비율도 줄어들었다. 자녀들에게도 위와 같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여력이 없으므로 엘리트가 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이처럼 일자리는 점차 고소득 엘리트와 저소득층으로 양극화되었고 중산층은 줄어들었으며, 자녀들의 교육 성과도 대물림되었다. 일자리, 교육을 고려하여 끼리끼리 모여 살다 보니 지역 간 소득격차와 계층 간 격리도 심해졌다. 더구나 능력주의는 위와 같은 격차를 오로지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정당화하여 엘리트가 되지 못한 중산층 및 하층 사람들의 노력이 부족할 뿐이라고 비난하는 논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과거의 귀족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답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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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귀족주의(aristocracy)가 물러난 자리에 능력에 따른 기회와 평등을 주는 듯한 능력주의(meritocracy)가 등장했다. 고된 노력과 기량, 합당한 보상이라는 이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더 이상 약속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중산층 어린이는 부유층 어린이에게 뒤쳐지고, 중산층 성인은 직장에서 명문대 졸업자에게 밀려난다. 중산층에겐 기회가 차단되고, 능력 부족이라는 비난마저 가해진다. 

능력주의는 엘리트에게도 해롭다. 엘리트 세습을 위해 자녀 교육에 수천 시간과 수백만 달러를 투자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받은 교육자원도 최대한 활용한다. 과거의 귀족과 달리 불안하고 정통성이 없는 엘리트를 무자비하고 일생 동안 지속되는 경쟁으로 끌어들이며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소득과 지위를 얻으라고 부추긴다. 

부패한 엘리트 자체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와 경제 구조가 문제이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혜택을 집중시키고 해로운 불평등을 고착한다. 부와 특권의 집중과 세습을 대대손손 유지하는 메커니즘이자, 원한과 분열을 불러일으키는 계층 제도가 된 것이다. 

능력주의는 점점 심화해 한 세대 전에는 눈에 띄지 않던 새롭고 억압적인 계층질서를 낳고 있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 엘리트들은 소득, 부, 권력뿐만 아니라 산업, 공식적인 영예, 개인적인 존경까지 독점한다. 능력주의는 중산층을 사회적, 경제적 혜택에서 철저하게 소외시키며, 동시에 엘리트를 계층을 지키기 위한 파괴적인 경쟁으로 끌어들인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고통은 능력주의가 불완전하게 구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주의 그 자체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현재 사회 이동을 억제하는 요소에 가깝다.오늘날의 능력주의 교육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엘리트 계층의 목표를 충족하는 도구나 마찬가지다. 직업은 엘리트 대학에서 특별한 교육을 받은 대졸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결과 직업은 학교에서 형성된 불평등을 확대하고 심화한다. 노동시장은 갈수록 특별한 교육과 값비싼 훈련을 받은 인력을 우대하는 추세로 변화한다. => 로스쿨도 마찬가지. 

능력주의는 결과의 배제뿐 아니라 기회의 배제까지도 유발하며 능력주의식 가치관은 물질적 피해도 모자라 도덕적 모욕까지 안긴다. 

능력주의는 엘리트에게도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때 사회 전반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던 교육과 직업이 현재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숫자가 너무 적은 엘리트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중산층에 타격을 입힌 바로 그 힘이 엘리트 계층에도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자녀를 양육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한다. 갈수록 자녀 교육에 재산뿐 아니라 기량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추세다. 그리하여 엘리트 밀레니얼 세대는 특권을 얻기 위해 일생동안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에도 꺽이지 않는다. 그러나 늘 긴장하고 지친 상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자각한다. 자신들이 받는 혜택에 주눅 들고 당황한 상태다. 과도한 특권을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학교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계층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를 벌일 수 있도록 양육될 뿐 아니라 교육되고 지도되고 훈련되고 형성되며 포장된다. 이들은 집단 불안에 빠져 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이다. 

통합된 매커니즘은 그야말로 소득과 지위를 집중시킨다. 그와 동시에 능력경쟁 대문에 중산층은 실질적인 혜택을 얻을 기회를 빼앗기고 엘리트들은 과도하고 치열하게 헛된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계층을 오해, 갈등, 불화는 물론 야전에 휘말리게 한다. 조직적인 계층 갈등을 조장해 사회적, 정치적 생활을 망가뜨린다. 

중산층은 능력주의가 고착시킨 이상과 제도에 대한 적의와 불신을 갖는다. 이러한 적대감은 소외에서 비롯되고 각종 소수자를 포용한다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오른 것도 그런 적대감 덕분이다. 트럼프주의에 실린 적대감과 거부 정책은 능력주의 계층 체계의 맨 밑 계층이 겪는 정신적 부담감을 반영한다. 

한편 불안에 떠는 엘리트 계층은 자기회의를 물리치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중산층의 습관과 가치관을 경멸한다. 성과뿐만 아니라 탁월한 자질을 치켜세우는 한편 평범함을 폄하한다. 이러한 태도는 중산층의 적대감을 한층 더 부추기는 동시에 엘리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떨어뜨린다.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능력주의의 덫에서 탈출하는 것은 사실상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중산층은 원래 위치를 되찾아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에 적극 동참하게 될 것이다. 엘리트계층은 지위와 부가 축소되는 대신에 귀중한 여가와 자유를 얻음으로써 참된 자아를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능력주의로 말미암아 억압적이고 불신이 만연해진 사회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치적 의지를 모아. 구조적 힘에 대한 정치적 인식을 지렛대 삼아 정치적으로 강력한 변화의 힘을 키우고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 경제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면 된다. 양쪽 계층 모두 연대에 동참해 능력주의가 다른 계층에 끼치는 부담에 공감하고 그 부담을 분담해 고통을 완화해야 한다. 


1부: 능력 충만한 엘리트의 시대 

엘리트 귀족의 탄생 

- 능력주의는 교육을 혹독하고 치열하며 엘리트들이 참여하는 경쟁의 장으로 바꿔놓는다. 

능력주의로 말미암아 교육은 초일류 교육을 받고 최고 명문학교와 대학입학, 그리고 학점 경쟁에서 승리한 극소수 계층에게 집중된다. 

- 능력주의는 자격요건이 엄청나게 까다롭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며 엘리트 계층을 지탱하는 일자리를 만들어냄으로써 직업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능력주의는 기량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며 한정된 최상위 근로자에게 직업과 소득을 집중시킨다. 

- 너무 치열해진 교육. 1970년대 이후. 혹독하고 의욕적이고 성공적인 훈련을 통해 탄생한 엘리트들. 그리고 이는 능력 위주의 직장 생활을 통해 이어진다. 법률, 금융, 경영 계통의 터무니없이 긴 근무시간. "능력주의는 열심히 일하는 것, 즉 분주함을 가치와 필요성을 인정받았다는 표식이자 명예의 증표로 만든다." 초고도 숙련 근로자들이 생산을 장악함과 동시에 중간 숙련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종속 근로자와 상위 근로자가 완전히 분리되고, 새로운 유형의 종속 근로자가 호황을 누린다. 암담한 직업과 멋진 직업의 구분이 뚜렷해지고 있다. 

중산층 직업에서 상위 직업으로의 소득 이전 때문에 경제 불평등이 심화된다. 

사람들은 강화되고 개선된 능력주의를 경제 불평등의 해결책으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능력주의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능력주의의 이상 그 자체에 저항해야 한다. 


중산층의 몰락과 엘리트의 자기 착취

- 엘리트 대학 졸업자들이 최고 직업을 독점하는 동시에 초고숙련 근로자에게 유리한 신기술을 고안해 최고 직업은 더 훌륭해지고 나머지 직업은 더 열악해지는 것이다. 능력으로 얻은 근로소득 덕분에 엘리트 부모의 엘리트 교육 독점 현상은 세대가 바뀔수록 점점 더 심화된다. 

- 능력주의가 판을 치자 중산층은 하층으로 전락해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장점과 사회적 지위까지 박탈당했다. 임금 정체라는 경제적 타격을 입히는 데 그치지 않고 중산층 근로자를 쓸모없는 존재로 선언함으로써 도덕적 모욕까지 포붓는 셈이다. 그 같은 모욕을 표면화하고 승인하며, 더 나아가 중산층에게 스스로의 전락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 능력주의의 소득과 지위에 대한 양면 공격은 중산층의 파괴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지역사회에서 중산층 일자리가 사라질 때는 소득뿐 아니라 결혼과 출산도 감소하며 사망률이 상승한다. 가정은 해체된다.  


다가오는 계층 전쟁

- 지역 간 임금의 양극화. 도시와 농촌의 교육 격차. 

- 민주주의 정서로 말미암아 공공부문의 보수는 정체되거나 낮아지는 반면,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 때문에 민간부문 엘리트 직종의 보수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공공부문보다 민간부문에 종사하는 상위 근로자들이 몇 배 더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 민간과 공공 부문 보수 격차. 엘리트 관료는 민간 부문에 유입된다. 정부 부서는 그 같은 유인 때문에 관료들을 민간 기업과 연결해주는 '위장 취업 기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정부는 중산층을 좌지우지하며, 엘리트들의 의견에는 그대로 따라간다. 능력주의는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일하는 부유층을 지배 계층으로 격상시킨다. 

- 편견은 다른 악덕과 달리 능력주의의 도덕적 토대를 공격하며 전반적으로 혜택이 능력보다는 개인의 특권에서 비롯된다는 우려를 낳는다. 능력주의는 편견을 극단적으로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불평등이 확대되고 불안정성을 낳는 가운데 불평등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엘리트의 삶을 지배하는 번지르르하고 취약한 정체성 정치는 어김없이 엘리트의 능력주의적 기반에서 비롯된다. 한편 능력주의는 엘리트가 정체성 정치의 측면으로 설명되지 못하는 불평등을 맹목적으로 멸시하거나 무자비한 태도로 대하도록 유도한다. 중산층과 근로계층에 대한 경멸에는 정치적 올바름이 적용되지 않는다. 

- 일류대학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진심으로 발휘해 흑인과 여성과 동성애자 학생들에게 그들을 그 자체로서 환영하며 그들의 진짜 자아를 지지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류 대학은 중산층 학생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주의적인 이상과 사업 모델 때문에 중산층 학생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워 없애고 그들을 엘리트로 만들어야 한다. 

-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정당화되면 엘리트들은 정체성 정치에 대해 끊임없이 우려하는 동시에 빈둥거리는 근로 계층과 중산층을 수많은 방식으로 모욕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 

- 능력주의로 인하여 배제되는 중산층은 엘리트에 적개심을 갖고 포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상처입은 자존감은 근로 계층과 중산층의 가치관을 타락시키는데 그 양상은 엘리트의 도덕적 타락과 거의 일치한다. 엘리트가 정체성 정치에 치중하는 반면 나머지 미국인은 토착주의를 수용한다. 기득권층을 비난하고 포퓰리즘을 수용하는 것이다. = 백인 중산층의 토착주의: 백인으로서 특권을 누려본 적 없는 중산층은 백인의 특권이라는 정체성 정치의 언어를 들으면 반발하게 된다. 스스로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백인 중산층의 포퓰리즘: 전문 지식과 제도에 대한 뿌리 깊고 보편적인 불신. 능력주의는 기량과 전문 지식을 엘리트와 동일시함으로써 지식과 교육의 가치를 받아들여 소외와 수모를 내면화하는 중산층 근로자들을 모욕한다. 그리하여 중산층들의 반감은 슈퍼리치가 아니라 전문가 계층을 겨냥한다. 

- 트럼프: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위기의 중산층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 엘리트 교육과 상위 노동력을 연계하는 매커니즘으로 이를 통해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는 혜택을 유지하고 정당화한다. 고도의 교육을 받은 혁신가들은 상위 근로자들의 우월한 기량에 맞춰 일과 생산을 재구성한다. 이들은 막대한 소득을 활용해 자녀 교육에 비정상적인 투자를 한다. 이들의 자녀들은 차세대 혁신가와 상위 근로자가 된다. 이 같은 되먹임 고리는 엘리트 기량을 창출하는 동시에 엘리트 기량이 생산성을 발휘하고 그 기량을 소유한 상위 근로자가 높은 보수를 받는 환경을 유지한다. 

- 상위 노동력은 상당히 복합적이고 우발적인 사회, 경제환경의 그늘 안에서만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그 근원에는 과거의 경제 불평등이 깔려 있다. 

- 능력의 매력은 환상이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의 기량은 이전의 경제 불평등, 가치나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 순환 논리의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량을 기반으로 할 때만 가치를 지닌다. 능력은 자연스럽거나 보편적인 덕목이 아니라 앞서 존재한 불평등의 결과물이다. 능력은 인적 자본의 착취를 정당화하고 부당한 분배를 눈가림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다. 


2부: 능력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일하는 부유층 

- 생산적인 일과 긴 근무시간은 일하는 부자들의 엘리트다움을 규정하는 요소다. 분주함은 그 자체로 '명예 훈장'이 되었다. 오늘날 경제 불평등을 심화하는 원동력은 빈곤이 아니라 부의 집중이다. 상위 불평등의 심화. 이러한 상황 전개로 가장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은 저소득층이 아니다. 그보다는 소득의 몫은 감소한 데다 세금 부담은 늘어난 중산층 전반이 가장 큰 피해자다. 중산층에는 언론인, 교수, 교사, 중간관리자, 공무원, 공학자뿐만 아니라 전문의가 아닌 의사들도 포함된다. 능력주의의 마력은 중산층이 점점 더 커지는 손해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긍정하도록 함으로써 그 수수께끼를 해소한다. 능력주의가 경제불평등의 심화를 정당화한다. 

엘리트 교육과 신분 세습 

- 엘리트 부모가 자녀의 인적 자본 개발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부모 중 한쪽이 엘리트 직장을 그만두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 

- 학업 성취도의 소득별 차이. 능력주의 모형에 기반을 둔 아동기 초기의 교육은 엄청나게 집중적이며 몰입적이고 개인적이다. 

- 부유층의 효율적인 자녀 교육 관행은 학령기에도 계속된다. 자녀와의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적극적인 여가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교육에 대한 막대한 직접 투자를 형성. 책을 읽히고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박물관을 구경하고 스포츠 훈련을 받는 시간이 더 많다. 부유층과 중산층의 연간 자녀 교육비 격차는 최근 수십 년 사이 급증하였다. 엘리트 사립학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천문학적인 돈을 들인다. 집중적이고 고도로 맞춤화된 교육에 유리하다. 공립학교도 경제력에 따른 거주지 분리현상의 심화와 더불어 지역마다 여건이 다르다. 공립학교 학생에 대한 불공평한 투자가 주정부 차원에서 시작되고, 민간에서도 상당한 추가 기금을 받는다. 부모들로부터 모금받는 금액도 상당하다. 현재 미국의 가장 부유한 공립학교는 사립학교처럼 자원 집약적인 방식으로 학생들을 교육하며 다른 곳보다 더 풍부하고 수준 높은 교사와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에 따라 받는 교육의 가치가 달라진다. 

- 취학 연령 자녀에 대한 미국 엘리트의 비정상적인 투자는 정규교육에 국한되지 않고 방과 후 심화학습 활동에 이루어진다. 과학, 수학 캠프, 코딩, 로봇공합클럽. 학습 과외, 시험 대비 프로그램. (한국의 사교육이 가계 지출 총액의 12%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도 버젓이 등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지출 규모-과외 비용으로 시간당 600달러를 넘는-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다) 

- 이러한 교육과 훈련은 효과적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부유층 학업 성취도와 중산층의 격차는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격차보다 더 큰 폭으로 벌어졌다. SAT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암울한 직업과 번지르르한 직업

- 부유층의 교육투자는 고등학교, 대학교, 한참 후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오늘날에는 1960년에 비해 전반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엘리트 대학의 입시 경쟁은 한층 더 치열해졌다. 최상위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경쟁 역시 치열하다. 100~200개의 유명 엘리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미국 일류대학 재학생의 1/3을 차지한다. 간단한 고찰만으로도 최상위 고등학교를 나온 최상위 가정의 학생이 엘리트 대학 재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학은 능력 상속을 확대해 부유층 자녀와 중산층 자녀의 교육 불평등을 확장하고 심화한다. 

- 대학은 부유한 가정 출신 학생의 교육에 점점 더 집중할 뿐만 아니라 부유층이 받는 교육에도 갈수록 더 많은 보조금을 대주고 있다. 

- 대학원과 전문대학원 교육은 능력 상속을 연장한다. 이는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며 엘리트 직업인들 사이에 그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실무훈련보다 대학학위가 취업과 승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 훈련과 교육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부유한 어린이들은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어린이들을 교육 단계마다 체계적으로 앞서나간다. 부유한 어린이의 인적 자본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이들의 걸출한 성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그런 투자는 아동기 이후 청년기와 성년기까지 능력주의적인 선별 기준과 맞물려 과도한 투자와 뛰어난 성과를 한층 더 강화하고 연장한다. 그리하여 차세대 상위 근로자 절대 다수가 현 세대 상위 근로자의 자녀로 채워지는 결과를 낳는다. 엘리트 부모는 능력주의의 표준 관행과 수단을 회피하기보다 활용함으로써 자녀가 받을 혜택을 지킨다. 오늘날의 왕조는 능력 상속을 토대로 구축된다. 

  그러나 학문적 자질을 갖춘 저소득층과 중산층 가정의 학생은 대학 졸업까지 경제적 장벽에 부딪힌다. 그리하여 학업 성취도가 충분한데도 대학교육을 추구하지 않거나 마치지 않는 경우가 나타난다.

- 능력에 따른 불평등이 부와 성과를 결합한다. 신흥 능력주의자들은 고성과자로 양육되어 능력 경쟁을 장악한다. 

- 인적 자본은 물적 자본이나 금융 자본과는 반대로 소유자가 탕진하지 못하도록 심리적, 경제적, 법적으로 구조화된다. 그리고 상위 근로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구조, 엘리트 교육의 관행과 기관은 부모에게서 인적 자본을 물려받은 자녀가 그것을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지원할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것을 돕는다.

- 소득과 지위 획득 수단에 대한 엘리트 가정의 독점이 확대되고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 어린이에 대한 엘리트 교육과 엘리트 직업을 가질 기회가 차단되는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양상은 능력주의적인 가치의 퇴보가 아니라 구현이다. 

- 부유층이 학교 교육에 과도한 투자를 할 때는 평범한 중산층이 받는 교육과 학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 엘리트 교육의 결함은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의 내적 역학에서 비롯된다. 학교 교육이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학교 성적이 그토록 많은 것을 결정하는 상황에서는 비범한 사람들만이 교육의 도구적인 기능을 무시하고 그 본질적인 가치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평범한 가치관과 역량만 갖춘 학생들은 능력주의의 보상에서 끊임없이 눈을 떼지 못할 수밖에 없다. 

- 엘리트 학교 교육은 자기만의 진짜 관심사를 추구하고픈 욕구를 이겨내고, 대신 능력주의 체제에 의해 부과된 목표만을 추구하도록 악착같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세심하게 조율된다. 엘리트 아동기를 능력에 따라 성공이 보장되는 자아를 구축하기 위해 의식적인 활동을 펼치는 시기로 규정한다. 

- 부모의 해롭지 않은 무관심과 어린이의 자유로운 활동은 지속적인 감시와 치열한 노력으로 대체되었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가정생활의 초점을 자녀 교육에 맞춘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초조하게 준비한다. 부유층 가정은 이제 차세대의 인적 자본을 구축하기 위한 투자와 생산의 현장이 되었다. 

- 능력 불평등은 중산층에게서 할 일을 빼앗고 중산층의 명예를 박탈한다. 혜택을 집중하고, 차별을 개인의 기량과 노력이 부족하고 기준에 미달한다는 말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 능력주의의 덫은 엘리트를 숙명의 소용돌이 안에 가둔다. 오늘날의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 번지르르한 직업이 경제적인 기능을 다하려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엄청난 기량을 쌓아야 할 뿐 아니라 과로를 꺼리지 말아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고된 노력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여가를 대신해 노력이 명예의 지표가 되었다. 엘리트 문화의 변화는 상위 근로자 특유의 고통(탈진과 소외)으로 이어진다. 능력 경쟁과 보상의 내적 논리는, 능력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경제구조는 소외된 자기 착취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상위 근로자는 계층만 높은 징집병에 가깝다. 신분 상승의 대가로 강도 높고 소외된 노동을 선고받고, 자신이 거둔 성공의 부수적인 피해자들이다. 


3부: 새로운 귀족과 나머지의 사회

직업, 가정, 소비까지 총체적인 격차 - 

- 오늘날 능력주의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20세기 중반의 모호한 계층 구분은 사라지고 엘리트와 중산층 사이 명확한 단층선이 존재한다. 중산층은 축소되고 있다. 불평등은 엘리트 계층을 내적으로 결속하는 동시에 외부와 차단한다. 철저하게 다른 경향, 관행, 세계관. 두 계층은 서로 만나는 일이 드물고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만 교류한다. 

-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끼리끼리 결혼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가정 내에서 자녀를 키우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이혼하는 일이 드물다. 자녀는 왕조적 세습의 부담을 진다. 이들의 성취는 부모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형제자매 간의 경쟁이 훨씬 더 치열하다.

- 엘리트 가정의 성역학. 경제구조는 이상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엘리트 교육에 필요한 개인의 몰입에 어머니를 양육에 묶어 놓는 성별규범까지 더해지면서 그 같은 경향은 정당화된다(엘리트 층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 상위 직업에 요구되는 장시간 근무는 양육은 고사하고 임신에도 방해가 된다. 따라서 오늘날 엘리트 여성은 베블런의 생각처럼 유한계급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자녀 교육에 집중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다. 

- 정치적으로는 진보이나,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 

- 엘리트다운 소비. 저가 제품은 중산층의 소비를 장악하고 있다. 대출회사의 빠른 성장. 반면 사치품은 부유층의 소비 생활을 장악해나갈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아상에도 점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화려하고 독특하며 사치스러운 사물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 사치의 확대. 

- 교육의 분리. 주거의 분리. 임대료와 집값 상승.

- 능력주의는 계층 체계를 만들어 집단을 분리한다.

- 기대수명과 건강상태, 받는 치료 수준의 차이. 


슈퍼 엘리트 경제

- 1970년대부터 중산층은 돈을 빌려서 소비하기 시작했다. 

- 금융 분야에서의 혁신은 초숙련 인력을 끌어들이면서도 중간 정도로 숙련된 근로자를 금융 분야에서 내몰았다. 이와 같이 상위 근로자에게 막대한 소득을 안겨주는 숙련 편향적 기술은 뜬금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 체제에서 비롯되었다. 초고도로 숙련된 금융근로자들의 등장으로 혁신이 일어났고, 이 같은 혁신은 엘리트의 기량 수준으로만 활용할 수 있었다. 능력을 갖춘 인재 공급이 증가해 인재 자체의 수요도 늘어난다. 

-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부유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는 특별한 교육과 초고도로 숙련된 엘리트들이 직장에서 받는 엄청난 소득을 연결짓는다. 그리고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면서 엘리트 사이의 교육 광풍도 정당화된다. 강압적이고 치열한 교육. 직장에서의 분위기가 집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이러한 특별한 교육에 몰두하면서 노동시장의 기량 숭배가 정당화된다. 

- 능력주의가 혁신을 부추긴다.

- 미국과 독일의 교육, 기업이 노동시장에서 투자와 혁신을 집중하는 분야는 서로 다르다. 교육이 분산되는 곳에서는 기업이 중간 숙련 근로자에게 투자를 집중하며 기술 프리미엄을 떨어뜨린다.

- 사회가 사다리라면 정상에 도달할 기회는 두 가지 면에서 불평등할 수 있다. 

  1) 사다리의 어느 칸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더 높은 칸에 도달할 확률이 좌우된다. 교육기회. 엘리트 학교에 진입할 가능성. 노동시장의 수요.

  2) 사회적, 경제적 사다리 칸의 간격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 소득과 지위의 절대적인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이 두 가지 효과는 사회 이동성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 엘리트층의 특권과 중산층의 배제.  

=> 능력주의가 능력주의자들에게 유리한 혁신을 유도하면 엘리트는 똘똘 뭉치고 나머지 사람을 배제한다. 배타적 교육과 기량 숭배로 능력 있는 개인들이 선호된다. 능력주의자들의 두 움직임 사이 되먹임 고리는 계층으로서의 능력주의 엘리트 집단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 능력주의적 불평등 배후에 있는 핵심매커니즘은 개인의 순수한 선택, 즉 아이들을 교육하고 열심히 일하며 혁신하는 선택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선택이 쌓이고 강화되면 전체가 해를 입을 수 있다. 개인의 노력과 윤리만 강조하면 사람들의 행동에 있는 근본적인 구조를 간과하고 정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 

- 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이 공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상업과 직업을 억압하며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중산층을 만들어내지 않아 성장이 더딘 것처럼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을 심화하는 되먹임 고리는 인적 자본이 풍부한 국가의 모습으로, 경제를 상위 근로자에게 의존하는 구조로 왜곡하고, 그러한 방향으로 혁신을 유도하며, 상위 근로자들에게 부와 권력을 몰아준다. 


능력과 공정성은 신화다. 

=- 엘리트 기량은 경제적 불평등의 산물이다. 상위 근로자의 노동력은 엄청난 불평등 때문에 교육과 일자리를 엘리트의 기량을 우대하는 식으로 왜곡될 때만 큰 생산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막대한 생산성으로도 그 토대가 되는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없고, 엄청난 생산성 자체가 경제 불평등의 부산물이라고 인식할 때 기량과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 근로자의 성과에 대한 좀 더 공정하고 정확한 평가방식을 생각해보면 그 생산성에 의문이 생긴다. 상위 근로자의 존재로 생산 패턴이 전반적으로 변화할 때. 일반적으로 막대한 생산성을 보일 수 있지만 대안적 척도에 따르면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음. 동료들이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든지. 

= 불평등에 의한 혁신이 숙련도 편향적 생산 체제를 만드는 능력주의 세상에서 엘리트 근로자가 생산하는 이익은 오히려 비엘리트 노동자가 발휘해야 할 생산성을 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마땅하다. 

- 이런 양상은 계층을 물려주기 위해 효과적이지만 엄청나게 비용이 많이 드는 메커니즘을 구축한다. 엘리트는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이고 소모적이며 불안정한 노력으로 내몰린다. 그 과정에서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은 사회의 연대를 저해하고 민주주의적인 자치를 타락시킨다. 


결론 -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능력주의의 폐해가 폭로된다면 부자와 그 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에 관심을 품게 될 것이다. 잃어버린 소득을 되찾고 지위를 회복하려는 중산층의 열망, 진정한 자유를 회복하려는 엘리트의 열망 

=> 과연 그렇게 연대할 수 있을까 나는 의문이 들지만... 


- 능력주의에 따른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는 포괄적인 조정이 필요하다. 

1. 최고급 교육에 집중하는 교육방식은 개방되고 포용성을 가져야 한다. 최고 명문학교와 대학에서라도 입시 경쟁이 완화되어야 하며 훈련이 덜 소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 현재 암울한 직업과 폼 나는 직업으로 분리된 일이 경제 생산의 중심에 선 중간 숙련도급 근로자에게 되돌아가야 한다. 엘리트 근로계층에 집중된 생산이 중산층에 골고루 분산되어야 한다. 

- 엘리트 학교에 주어지는 기부금 세금 면제 혜택을 광범위한 대중을 받아들여 교육시키는 학교에만 제공해야 한다. 교육 개방성을 통해 부유층이 아닌 엘리트를 대폭 늘려 가치를 떨어뜨린다. 

- 중간 숙련도급 근로자의 생산을 촉진하는 모형을 채택한다. 규제 프로세스를 단순화하고, 세금을 활용해야 한다. 현재 조세 구조는 중순련 근로자의 고용을 억제하고 초숙련 근로자의 임금을 높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사회보장급여세에 대한 소득 상한을 제거하고 정부의 기존 생산 보조금을 없애야 한다.  

- 인적 자본과 생산력이 점점 더 숫자가 줄어드는 엘리트 계층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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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직업
니시카와 미와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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