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에게 내 이야기는 자신과 상관없는 공간에서 방출되는 쓸모없는 기호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정말로 그곳에 갈 기회가 생길 때에야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 P180

릴라는 바로 그 순간 훗날 ‘경계의 해체‘라고 이름 붙인 그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릴라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보름달이 뜬 바다 위로 하늘에서 거대한 태풍이 시꺼멓게 몰려오면서 빛이란 빛은 모조리 집어삼키고, 달의 경계를 침식하며 그 빛나는 원반의 형체를 망가뜨려 거칠고 비정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릴라는 리노가 분해되는 모습을 마치 실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보고 느끼고 상상했다. 리노는 릴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던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언제나 여유 있고, 정직하고, 신뢰 가는 유쾌한 모습. 아주 어릴 때부터 언제나 릴라를 즐겁게 해주고, 도와주고, 보호해주었던 사랑하는 오빠의 옆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날 거칠게 폭발하는 폭죽과 얼어붙을 듯한 추위, 매캐한 연기와 독한 유황 냄새 속에서 무엇인가가 리노의 유기적 구조를 훼손했다. 엄청난 압력으로 리노를 짓누른 나머지 그의 윤곽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를 구성하는 물질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나와 그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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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 P29

지나는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기중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도 죽음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땀을 많이흘린 다음 두 손목에 물을 살짝 적시지 않고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기도 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서 죽기도 했고 기침하다 숨이 막혀 죽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 체리를 먹다 씨가 목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기도 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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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기 전 볏과 식물은 다른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줄기 끝에 성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식물들은 줄기 끝에 있는 이 성장점에서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위로 성장해간다. 이런 상황에서는 포식자가 줄기 끝을 먹어치울 경우 식물의성장과 생존을 담보할 성장점까지 포식자의 뱃속으로 몽땅 삼켜져 버리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이 문제를 볏과 식물은어떻게 해결했을까?
대단히 현명하게도 볏과 식물은 성장점을 낮은 곳에 만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볏과 식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성장점이 땅바닥에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볏과 식물은 무작정 줄기를 뻗어 나가지 않고 줄기 밑동 부분에 있는 성장점에서부터 시작해 잎을 위로 차근차근 밀어올린다.
이 방법을 쓰면 포식자가 게걸스럽게 잎을 먹어치워도 성장하는 데 문제가 없다. 포식자는 그저 잎사귀의 끄트머리만 먹을 뿐 핵심인 성장점에는 손상을 입히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교통사고로 자동차 범퍼가 찌그러지고 백미러가 부서질지언정 엔진과 주요 부품에는 손상이 가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 - P201

‘논‘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살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들어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업 (Three Field System)이라 부르는 농사법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감자와 콩 같은 여름작물을 생산하는 밭, 밀을 재배하는 밭, 작물을 기르지 않고 휴경하는 밭으로 나누어 주기적으로 돌려가며 농사짓는 방식이다. 3년마다 한 번씩 농사를 쉬지 않으면 지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밀은3년에 한 번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실제로 유럽의 전원 풍경을 보면 드넓은 밭이 펼쳐지고 마을은먼 곳에 어렴풋이 보이는 식이다. 삼포식 농업을 하며 살아가자면 드넓은 경작지가 필요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아시아의 마을과 마을 사이는 거리가 짧은 편이다. 이것은 벼를 재배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부여받은 덕분이다.
아시아는 유럽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시아에서는 해마다 논에 벼를 재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이모작도 가능했다. 지금도 벼를수확한 뒤 밀이나 보리를 재배하는 식으로 이모작을 하는 곳이 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했으나 아시아에서는 1년간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는 셈이다. 사실 일반 작물은 이렇게 연작할 수 없다. 벼처럼 재뱌할 수 있는 작물은 드문 편이다. - P241

농사를 지어 농작물을 수확하면 토지는 갈수록 척박해진다. 작물이 흡수한 땅속 양분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 특정 작물을 연이어 재배할 경우 결국에는 작물 재배 자체가 어려워진다.
미네랄 균형이 무너지면서 식물이 내뿜는 유해물질의 영향으로토양이 메마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찍이 농경을 시작한 지역은토지 사막화로 문명이 붕괴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중국의 농경문화를 지탱해준 두 가지 작물, 벼와 대두는 자연을 별로 파괴하지 않는 ‘착한 작물‘이다. 논에 벼를 재배할경우 산을 타고 상류에서 흘러들어온 물로 영양분을 보충할 수있다. 이때 남은 미네랄과 유해물질은 물에 씻겨 내려간다. 그 덕분에 같은 농경지에서 매년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
대두는 콩과 식물이다. 콩과 식물에는 박테리아와 공생해 공기속 질소를 흡수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대두는 질소가 줄어들어 척박해진 토지에서도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더구나 다른 작물을 재배했던 땅에 대두를 심어 키우면 대두가지력 회복을 도와 토지를 기름지게 만들어준다. - P249

오늘날 인류는 전 세계적으로 온갖 다양한 식물을 재배한다. 만약 식물의 최대 존재 목적이 ‘씨앗 확산‘에 있다면 지구 구석구석까지 영역을 확장한 식물이야말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생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간에 의해 재배되는 작물들은 하나같이 살뜰히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인간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씨를 뿌리고 물과 비료를 주며 정성껏 식물을 돌본다.
최종 목적을 달성한 식물이 인간의 기호에 맞게 형태와 성질을 바꾸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도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인간이 식물을 제멋대로 개량한 게 아니라 식물이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변신해온 것일 수도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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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리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돈을 빌려달라고 할 줄 알고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리노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리노는 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고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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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 아침에도, 그는 그녀에게 가고 있었다(심부름꾼이 전날 저녁에 왔으나 그때 그는 없었다). 도중에 있는 학교까지 바래다주려고 딸과 함께 갔다. 습기를 머금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지금 기온은 3도인데, 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구로가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 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단다.」 - P336

그들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하고 속여야 하며 서로 다른 도시에서 살며 자주 만날 수 없는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을까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이 견딜 수 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는 머리를 감싸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좀 더 있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때는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그 끝이 아직 멀고 멀어, 이제야 겨우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시작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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