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기 전 볏과 식물은 다른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줄기 끝에 성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식물들은 줄기 끝에 있는 이 성장점에서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위로 성장해간다. 이런 상황에서는 포식자가 줄기 끝을 먹어치울 경우 식물의성장과 생존을 담보할 성장점까지 포식자의 뱃속으로 몽땅 삼켜져 버리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이 문제를 볏과 식물은어떻게 해결했을까? 대단히 현명하게도 볏과 식물은 성장점을 낮은 곳에 만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볏과 식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성장점이 땅바닥에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볏과 식물은 무작정 줄기를 뻗어 나가지 않고 줄기 밑동 부분에 있는 성장점에서부터 시작해 잎을 위로 차근차근 밀어올린다. 이 방법을 쓰면 포식자가 게걸스럽게 잎을 먹어치워도 성장하는 데 문제가 없다. 포식자는 그저 잎사귀의 끄트머리만 먹을 뿐 핵심인 성장점에는 손상을 입히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교통사고로 자동차 범퍼가 찌그러지고 백미러가 부서질지언정 엔진과 주요 부품에는 손상이 가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 - P201
‘논‘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살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들어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업 (Three Field System)이라 부르는 농사법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감자와 콩 같은 여름작물을 생산하는 밭, 밀을 재배하는 밭, 작물을 기르지 않고 휴경하는 밭으로 나누어 주기적으로 돌려가며 농사짓는 방식이다. 3년마다 한 번씩 농사를 쉬지 않으면 지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밀은3년에 한 번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실제로 유럽의 전원 풍경을 보면 드넓은 밭이 펼쳐지고 마을은먼 곳에 어렴풋이 보이는 식이다. 삼포식 농업을 하며 살아가자면 드넓은 경작지가 필요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아시아의 마을과 마을 사이는 거리가 짧은 편이다. 이것은 벼를 재배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부여받은 덕분이다. 아시아는 유럽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시아에서는 해마다 논에 벼를 재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이모작도 가능했다. 지금도 벼를수확한 뒤 밀이나 보리를 재배하는 식으로 이모작을 하는 곳이 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했으나 아시아에서는 1년간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는 셈이다. 사실 일반 작물은 이렇게 연작할 수 없다. 벼처럼 재뱌할 수 있는 작물은 드문 편이다. - P241
농사를 지어 농작물을 수확하면 토지는 갈수록 척박해진다. 작물이 흡수한 땅속 양분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 특정 작물을 연이어 재배할 경우 결국에는 작물 재배 자체가 어려워진다. 미네랄 균형이 무너지면서 식물이 내뿜는 유해물질의 영향으로토양이 메마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찍이 농경을 시작한 지역은토지 사막화로 문명이 붕괴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중국의 농경문화를 지탱해준 두 가지 작물, 벼와 대두는 자연을 별로 파괴하지 않는 ‘착한 작물‘이다. 논에 벼를 재배할경우 산을 타고 상류에서 흘러들어온 물로 영양분을 보충할 수있다. 이때 남은 미네랄과 유해물질은 물에 씻겨 내려간다. 그 덕분에 같은 농경지에서 매년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 대두는 콩과 식물이다. 콩과 식물에는 박테리아와 공생해 공기속 질소를 흡수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대두는 질소가 줄어들어 척박해진 토지에서도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더구나 다른 작물을 재배했던 땅에 대두를 심어 키우면 대두가지력 회복을 도와 토지를 기름지게 만들어준다. - P249
오늘날 인류는 전 세계적으로 온갖 다양한 식물을 재배한다. 만약 식물의 최대 존재 목적이 ‘씨앗 확산‘에 있다면 지구 구석구석까지 영역을 확장한 식물이야말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생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간에 의해 재배되는 작물들은 하나같이 살뜰히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인간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씨를 뿌리고 물과 비료를 주며 정성껏 식물을 돌본다. 최종 목적을 달성한 식물이 인간의 기호에 맞게 형태와 성질을 바꾸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도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인간이 식물을 제멋대로 개량한 게 아니라 식물이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변신해온 것일 수도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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