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빈롱에서였다. 때때로 슬픔에 잠길 때면 어머니는 이륜마차에 말을 맨 다음 나를 태우고, 건기의 밤하늘을 보러 들판으로 가곤 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어머니를 소유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하늘에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폭포처럼, 침묵과 부동의 물기둥처럼 빛이 쏟아져 내렸다. 대기는 푸르고, 손에 잡힐 듯했다. 푸른빛, 하늘은 그 반짝이는 빛으로 끊임없이 맥박 치고 있었다. 밤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고, 눈이 닿는 곳까지 강의 양쪽으로 펼쳐진 들판을 온통 비추고 있었다. 밤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밤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였다. 밤의 소리는 들개들의 소리였다. 그들은 신비를 향해 짖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밤이 만들어 낸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이 마을과 저 마을에서 서로 화답하며 짖어 댔다. - P98

 나는 말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난 아무 때고 결혼할 수 있어요."어머니는 그렇지 않다는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 그녀는 말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알려지고 말아. 여기선 절대로 불가능해."
그녀는 나를 보면서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를 좋아해 줄까?" 나는 대답했다. "그럼요. 여하튼 그들은 나를 좋아해요." 그러자 어머니가 했던 그 말.
"네가 그런 아이이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거겠지."
그녀는 또 묻는다. "단지 돈 때문에 그 남자를 만나는거니?" 나는 머뭇거리다 오로지 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다시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 내 말을 믿지 않는눈치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너 같지는 않았어. 나는 너보다는 열심히 공부했어. 나는 아주 진지한 아이였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나이 들도록 그렇게 살다 보니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잊고 말았지만." - P111

그녀가 운 것도 배가 첫 번째 작별의 고동을 올렸을 때였다. 배의 트랩이 올려지고 예인선이 배를 끌어당겨서.
배가 육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그때였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었다.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이었고, 또이런 종류의 연인들은 눈물을 흘려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작은오빠의 눈에 띄지 않게 그녀는 괴로워했다. 그들 사이의 습관대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의 큰 승용차가 거기 있었다. 길고 걷은 승용차. 그 앞자리에는 흰옷을 입은 운전기사가 앉아 있었다. 그 승용차는 해운회사의 주차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모습 때문에 그녀는 그의 승용차를 알아볼 수 있었다. 뒷자리에 보일 듯 말 듯 앉아 있는 게 바로 그였다. 그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풀 죽어 있었다. 그녀는 맨 처음 배에탔을 때처럼 난간에 팔을 괴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그가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검은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승용차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항구가 시야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육지도 사라졌다. - P131

그녀의 기억 속에서 수많은 밤과 밤 사이에 흐릿해져 버린 그날 밤에 대해, 갑자기 그녀는 확신이 들었다. 한 어린 소녀가 그 배 위에서 밤을보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순간,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아래 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퍼졌을 때,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음악은 어두운 여객선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무엇과 관계가 있는지 알 수없는 하늘의 지시처럼,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명령처럼,
그 음악은 울려 퍼졌다. 소녀는 일어섰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달려가 자살하려는 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려는것처럼. 그리고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콜랑의 그 남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현듯 예전에 자신이 콜랑의 남자에 대해 가졌던 감정이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런 종류의 사랑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제 그는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야기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이제야,쇼팽의 음악이 큰 소리로 퍼지는 지금 이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작은오빠가 죽은 후에야 그의 불멸을 기억해 냈듯이. - P133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녀가 말했다. "나예요. 안녕하세요."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억양을 기억해 냈다. 그는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공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오빠에 대해서도 알고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파리 노플르샤토에서1984년 2월~5월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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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라게르시 동굴에서 보인 식인 행위의 흔적에 대해서는 지난 20년동안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물라 게르시 동굴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에서 보인 뼈 손질 흔적은 크라피나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보이는 흔적과달랐기 때문입니다. 물라 게르시에서는 사람의 치아 흔적이 분명하게나 있는 손가락뼈도 발견되었습니다. 장례 의식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과 장례 의식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20세기 전반에 고인류의 식인 행위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20세기 후반에는 고인류의 식인 행위가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이 논쟁 속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식인 행위에 대한 배경을 밝혀낸 것이 고기후 연구입니다. 12만 년 전 남프랑스의 기후를 연구하면서 네안데르탈인에게 닥친 큰 시련이 알려졌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네안데르탈인은 수만 년 동안 빙하시대를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눈 덮인 계곡에서도 매머드나 순록처럼 큰 몸집의 동물을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빙하시대에 몸집이 큰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큰 몸집이필요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다부진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지탱하기 위해 하루 평균 3,000~5,000칼로리 정도를 먹어야 했던것으로 추정됩니다. 3,000~5,000칼로리는 프로 운동선수의 하루 필요열량과 맞먹습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수렵 적응을 해오던 네안데르탈인에게 큰 시련이닥친 것은 13만 년 전 기온이 잠깐 상승했던 무렵입니다. 이때 평균 기온은 현재보다도 섭씨 2도가량 높았습니다. 기온이 따뜻해졌는데 어째서 시련이 되었을까요? 광활한 초원 지대는 눈 깜짝할 새에 우거진 숲으로 변했습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매머드같이 거대한 몸집의 동물보다는 토끼같이 작고 빠른 동물에게 유리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게 고기를 제공했던 몸집 큰 동물들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매머드 대신 토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물라 게르시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치아에는 성장기에 영양부족을 겪은 흔적이 보입니다. 굶주림 끝에 네안데르탈인이 선택한 방법은 같은 네안데르탈인을 먹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P124

빙하기는 유례없는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 빙하기를 살아남지못한 고인류 집단도 많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에게 정복당했다는 주장도, 네안데르탈인의 인구가 줄어들어서 현생인류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절멸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네안데르탈인의 인구가 줄어든 이유에는 열악한 환경이 있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출생률 저하로 절멸했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열악한 환경의 결과입니다. 출생률의 저하에는 환경이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네안데르탈인뿐만이 아닙니다. 에티오피아의 헤르토Herto 에서는 20만 년전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로 알려진 고인류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머리뼈에 섬세한 칼자국이 나 있습니다. 단지 머리뼈 속의 두뇌를 먹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머리뼈를 바가지 모양으로 다듬어 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칼자국입니다. 돌칼로 다듬은 흔적은 어른의 머리뼈에서도, 아이의 머리뼈에서도 보였습니다.
식인의 흔적에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 신나게 먹는 희희낙락한 모습이 아니라 이것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게 되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절박한 마음으로 먹는 비장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았던 그들이 우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P126

량부아가 특별한 병을 앓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라는 새로운 종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섬 왜소화현상island dwarfism으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졌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거의 200만 년 전부터 고인류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자바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도네시아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중 한 집단이 섬에 갇히게 되면서 섬 왜소화 현상으로 인해 몸과 머리가 작아졌고 6만 년 전의 작아진 모습의 새로운 종으로 진화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는 섬 왜소화로 몸집이 작아진 코끼리가 발견되는 한편 섬 비대화로 몸집이 커진 쥐도 발견됩니다. 포식자가 없어진 환경에서 몸집이 커지는 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좋은 먹을 것이 줄어들어서 몸집이 작아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살던 호모 에렉투스 중 일부가 플로레스섬에 고립되어 섬 왜소화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진 새로운 화석종 호모 플로레시엔시스가 되었다면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sumatra 의 토바Toba 화산이 폭발한 시기와 맞물리게 됩니다. 7만5,000년 전에 일어난 토바 화산의 폭발은 인도네시아와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P131

작은 몸집과 작은 머리의 고인류는 우리가 여태껏 생각해 왔던 인류의 다양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합니다. 작은 머리로 석기를 만들어쓰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벽화를 그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20세기의 답은 결단코 ‘아니요‘였습니다. 고인류학계 대부분이 받아들인 정설에 따르면 벽화와 같이 고도의 인지 능력이 있어야 하는 행위는호모 사피엔스의 특유하고 독특한 행위였기 때문에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급의 몸과 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머리가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추상적 사고,
창의력, 복잡한 도구의 제작, 예술 등이 작은 머리로도 가능하다면 도대체큰 머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머리가 커야만 가능하다고 생각되던일이 작은 머리로도 가능하다는 발견은 새로운 질문을 만듭니다. 인류의 큰 머리가 생물학적으로 특별한 것은 분명합니다. 맹장처럼 이전 기능을 상실하고 이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하기에는 큰 머리가 너무 대단합니다. 사람처럼 큰 머리를 만들기는 쉽지 않습니다. 큰 머리를 만들고 유지하려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머리가 커지는 것은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경향 중 하나입니다. 그동안 환경은 점점 척박해져 갔습니다. 큰 머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빙하기의 척박한 환경에서 확보해야 했습니다. 큰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기를 출산하는 과정은 지극히 힘들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큰 머리를 돌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큰 머리는 심지어 쉬고 있는 동안에도 기초대사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렇게 제작비와 유지비가 엄청난 비싼 장기를 빙하기라는 힘든 환경에서 계속 유지할 만큼 중요한 두뇌는 어떤기능을 했을까요? 도구를 만들고 예술 활동을 하고 고도의 인지 기능을수행하기 위해 큰 머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큰 머리는 어떤 기능을하는 것일까요? - P137

심리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사회적 두뇌 가설을 주장합니다. 사회적인 동물일수록 머리가 크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의 머리는 부피가를 뿐만 아니라 그 안을 채우는 뇌세포가 쭈글쭈글한 주름을 이루면서 표면적을 최대한 늘렸습니다. 지극히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이 서로에 대한 정보와 서로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꺼내 쓰는 장기로서 큰 두뇌가 진화했다는 가설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뇌가 작은 고인류 집단은 복잡한 사회연결망이 없었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큰 두뇌를 생물학적으로 연구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 두뇌와 다른 동물 두뇌를 비교하여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조직, 단백질, 유전자를 찾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큰 두뇌도 설명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는 지금 큰 머리와 지혜, 문화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왔던 관념이 해체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사람다운 지혜와 문화를 만들어 낸 사람다운 머리는 큰 머리가 아니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머리라는 가설이 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다양한 인류를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P139

그런데 스페인, 이탈리아 등 남유럽까지 확산된 지역에서 발견되는 네안데르탈인 화석은 네안데르탈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유럽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은 육식만 한 것이 아니라 채식도 충분히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동물성 먹거리를 거의 섭취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인골을 발굴하면 깨끗하게 손질한 후에 분석하게 됩니다. 물론치아도 포함됩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치아를 깨끗하게 닦아서 손질했습니다. 치석도 당연히 닦아냈습니다. 칫솔을 사용해서 깨끗하게 솔질한 다음 드러난 치아의 모양을 관찰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닦아낸 치석에 중요한 단서가 있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치석에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이 그동안 개발된 것입니다. 고인류학 연구자층이 넓어지면서 이전에는 버렸던(?) 자료에서 중요한 정보를 추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치석도 그중 하나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게되었습니다.
스페인의 엘 시드론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치석을 분석한 결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치석에 있는 자료를 분석해 보니 버섯, 잣, 이끼 등 다양한 식물성 먹거리의 DNA가 발견된 것입니다. 물론 동물성 위주의 식생활을 했던 네안데르탈인의 치석 자료도 풍부합니다. 벨기에의 스피 네안데르탈인의 치석을 분석한 결과 이들이 예상대로 동물성 단백질 위주의 식생활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면 같은 유럽에서 살면서도 스피 네안데르탈인은 동물성 식생활을, 엘시드론 네안데르탈인은 식물성 식생활을 했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면 될까요? 그보다는 각 네안데르탈인 집단의 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식생활을 하지는 않았다는 결론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스페인의 엘살트El Salt 동굴에 남겨진 네안데르탈인의 똥 화석을 분석한 결과 어떤 네안데르탈인은 채식 위주로, 어떤 네안데르탈인은 육식위주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같은 집단에 속한 네안데르탈인이라도 서로 다른 식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은 이들이 먹거리에 서로 다른 취향 내지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 P149

네안데르탈인의 두뇌 용량은 현생인류보다 큽니다. 두뇌 용량의 증가는 물론 인류 진화 전반적으로 보이는 특징입니다. 그리고 큰 두뇌 용량은 일반적으로 우수한 인지 능력과 연관됩니다. 그렇지만 네안데르탈인의 두뇌 용량이 크다고 해서 현생인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결론을내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안데르탈인의 큰 두뇌는 달리 해석되었습니다. 두뇌 용량은 크지만 두뇌 세포가 현생인류처럼 촘촘하고 빼곡하게 배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막상 인지 능력은 현생인류보다 못하다는 해석이 대두되었습니다. 큰 두뇌 용량은 추운 지방에서 살기 위한 적응이라는 해석도 나왔습니다. 또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이 주로(평균적으로 몸집과 머리가 큰 남자이었기 때문에 두뇌 용량이 큰 것으로 관찰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모두 하나하나 설득력이 있고 가능성이없지는 않은 해석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설명이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보다 못하다‘는 전제를 결론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제시되었다는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이 뒤떨어진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은 많은연구에 의해 도전받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벽화를 그렸습니다. 맹금류를 사냥하여 발톱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몸에 걸쳤습니다. 죽음을 슬퍼하고 죽은 이를 위해 장례를 치렀습니다. 꽃잎을 뿌리면서 죽은이를 애도했습니다. 사슴 발가락뼈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습니다. 이 모두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안데르탈인은 할 수 없고 현생인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행위입니다. - P151

이들의 유전자 정보는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무엇보다유전적인 다양성이 낮았습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현생인류보다는 멸종 위기에 부닥친 고릴라의 유전자와 엇비슷한 정도의 다양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0~20명으로 이루어진 집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Y염색체보다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서 보이는 다양성이 컸습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다양한 곳에서 왔다는 뜻입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이동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서 2만 년 전까지도 살고 있던 데니소바인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유럽 반대쪽에서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더 비슷했습니다. 이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는 대표적인 머리뼈 몇 개를 놓고 또 다른 고인류 화석종과 비교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에 대한 연구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연구가 점점 진행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네안데르탈인의 모습도 그에 따라 변화해 왔습니다. 단순히 이랬다 저랬다하는 게 아니라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을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네안데르탈인은 지극히 ‘사람다운‘ 고인류 종이었습니다. - P153

하지만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데니소바인은 과연 존재했을까요? 여태껏 데니소바인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이제 와서 이게 무슨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데니소바인은 뼈가아닌 유전자로만 존재하는 고인류입니다. 새끼손가락뼈 반 마디와 이빨 몇 점만 가지고 데니소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뉴스 매체 등에 등장하는 데니소바인의 얼굴은 발견된 얼굴뼈 위에 근육의 추정치를 덧입혀서 과학적으로 추정한 복원 모형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도에 가깝습니다. 데니소바인이 실제로 존재했던 인류 집단인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개체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A형, B형, O형과 같은 혈액형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혈액형은 유전자를 바탕으로 합니다. 지역별로 많이 분포하는 혈액형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O형은 중남미에 많고 B형은 중앙아시아에 많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혈액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B형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특정 지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B형 혈액형인‘ 이라는 집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전자가 널리 퍼졌었다고 해서 데니소바인이 널리 퍼졌다는 이야기가 바로 성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데니소바 유전자‘가 있다고 해서 ‘데니소바인‘이라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데니소바인‘이라는 집단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유전자가 곧 집단이 아니고 곧 종도 아닙니다. 데니소바인이 네안데르탈인처럼 맨눈으로 구별할 수 있는 형질을 가진 집단인지는 앞으로의 연구로 확인해 나가야 합니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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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학창 시절의 행복은 짧았다. 어머니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환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아들이 많고 모두 공부를 잘해 주위에서 부러워하던 우리 집에 불행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희호야, 졸업하고 1년만 내 곁에 있다가 전문학교 가거라."
어머니의 간청으로 나는 전문학교 입학 준비를 중단했다. 졸업식장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두려움과 꿈을 접어야 하는 설움에 마음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답답하고 슬펐다. 나는 곧바로 서산 집으로 내려갔다. - P21

안간힘을 쓰며 발악하던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 앞에 무너졌다.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후 1,348 일을 버티다 항복한 것이다. 나는 학교 사무실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다. 가르치던 학생 10여 명을 일본인 교장과 선생들이있는 학교를 피해 자취방으로 소집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음을 설명해주고 애국가를 가르쳤다. 당시 애국가는 지금의 안익태 작곡이 아닌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에 우리말 가사를 얹은 애절한 곡조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삽교 거리를 행진했다. 확성기가 있는 소방서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일본의 항복을 알렸다. 그리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서툴고 소박했지만 무척 감동적인 해방 퍼레이드였다. 해마다 8. 15가되면 난 그날을 회상한다. 일본의 공권력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로서 매우 위험한 즉흥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아이들 중 나중에 삽교에서 사진관을 하던 제자가 있다. 1972년 유신 직후 우리 가족이 거의 유폐되다시피 해서 집이 적막강산일 때, 그가 큰 셰퍼드 한 마리를 보내주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캡틴이라고 이름 짓고 1982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10년 넘게 가족처럼 지냈다. - P27

사범대학에서 내 별명은 독일어 중성을 뜻하는 ‘다스das‘ 였다. 그동안 여자들만의 학교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교육을 받아온 나는 갓 남녀공학이 된 국립대학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의 의식과 맞부딪쳤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정학과 외에는 여학생이 서너 사람에 불과했다. 점심시간이면 여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빈 교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빈 교실을 찾으면 거기서 여학생끼리 모여서 조용히 먹었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에서조차 수줍어 고개를 잘 들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남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마음껏 호연지기를 뽐냈다. 이 불공평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볼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사이다를 준비해 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당연히 안방이나부엌이었다. 그리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언제나 뒷자리차지이며 이등 시민이었다. 남녀공학 체험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남학생들조차 덩달아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여학생들을 대표해서 묵은 관습을 조금이라도 깨뜨리려고 노력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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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검은 승용차 안으로 들어간다. 차 문이 다시 닫힌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나른함이, 일종의 피로가 갑자기 온몸에 퍼진다. 강 위의 불빛이 흐려지면서 보일 듯 말듯하다. 가볍게 귀가 먹먹해지고, 사방에 안개가 퍼진다.

나는 더 이상 원주민용 버스로 여행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리무진이 나를 학교에 데려가고 기숙사에 데려다 줄 것이다. 나는 시내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장소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서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내가 행한 모든 것, 내가 포기한 모든 것, 좋은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가 쟁취한 모든 것을, 그리고 그 버스, 나와 늘상 우스갯소리를 하던 버스 운전기사, 뒷자리에 앉아 후추 담배를 씹어 대던 할머니들, 짐 선반 위의 어린애들, 사덱의 우리 식구들, 그 식구들의 혐오, 그들의 놀라운 침묵, 그 모든 것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 P43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묻는다.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거야?" 그녀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곳, 그 방안에서, 생전 처음으로 그는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그는 이미 그녀가 결코 자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기 전에, 글쎄, 잘 모르겠어요 하고 말한 뒤, 그녀는그가 말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는 말한다. 그는 외롭다고,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처참하리만큼 외롭다고. 그녀가 그에게 말한다. 그녀 역시 외롭다고.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아무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날 따라온 것이군." 그녀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아직까지는 아무하고도 그 사람 방에까지 가 본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제발 나에게 아무 말도 말아 주세요. 그냥 늘 하던 것처럼, 당신이 독신자 아파트로 데려오는 다른 여자들을 다루듯이 행동해 주세요. 그녀가 그에게 애원한다. 제발 그런 식으로 대해 달라고. - P48

나는 지금 내가 줄곧 기다려 왔고 또한 오직 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그런 슬픔 속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나는 항상 얼마나 슬펐던가. 내가 아주 꼬마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도 나는 그런 슬픔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의 이 슬픔도 내가 항상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나와 닮아 있기 때문에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 어머니가 사막과도 같은 그녀의 삶 속에서 울부짖을 때부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예고해 준 그 불행속에 떨어지고 마는 내 연인이라고. - P57

우리의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 거의 1년 반 동안 우리는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한 번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는 두 사람이 공유하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해서는 결코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만 얘기를 나눌 것이다. 늘 같은 감정으로.
나는 그가 프랑스에 체류했던 것이 숙명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도 시인한다. 그는 파리에서는 모든 것을 돈으로 샀다고 한다. 여자도, 친구도, 지식도, 그가 나보다 열두 살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를 두렵게 만든다.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그가 잘못 생각하는 대로, 그가 나를 사랑하는대로, 그에 합당한 동시에 진지한, 일종의 연극적인 감정속에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 P62

그가 값을 치른다. 돈을 세어서 쟁반 위에 놓는다. 우리 가족 모두가 지켜본다. 첫 번째 식사 때 그는 77피아스트르를 지불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머니는 미친듯이 웃고 싶은 것을 참는 눈치다. 우리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무도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아무리 식사 대접을 잘 받아도 고맙다고 말할 줄을모른다. ‘안녕‘ 이라든지 ‘잘 가‘, ‘어떻게 지내?‘ 따위의 말도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는 결코 오가는 법이 없다.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앞으로도 결코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들에게는 그가 투명인간인 것처럼,
그들의 눈에 보이고 그들의 귀에 들리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것처럼. 그런 일들은 바로 그가 나에게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돈이 필요해서 그와 함께 있는 거라는 인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며, 그래서 그는 이 사랑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내 모든 행동을 다 견뎌야만 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백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속 침묵을 지키거나 내 연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큰오빠의 태도는 바로 그런 사실에 대한 확신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에 대한 큰오빠의 태도를 따라 한다.  - P64

돌로 된 가족이다. 어떤 접근도 불가능한 두꺼운 퇴적물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가족이다. 날마다 우리는 자살을, 혹은 살인을 기도한다. 우리는 서로 말을 걸지도 않지만 보지도 않는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려 버린다. 바라본다는 것은 한순간 그 대상을 향한, 그 대상에대한 호기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불행에 빠지는 행위이다. 누군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시선에 합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그는 불명예스러운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라는 단어는 허영이다. 이 집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휘는 수치와 자만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집단이건 혹은 다른 어떤 종류의 집단이건, 공동체라는 형태를 한 모든것은 우리에겐 증오의 대상이자 지저분한 그 무엇이다. 우리 가족은 삶을 살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원적인 수치심 속에 빠져 있다. 우리 형제들의 이야기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리 세 사람이 사회가 목 졸라 죽인 우리 어머니, 그 선량한 여인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우리는 어머니를 절망에 빠뜨려 버린 이 사회의 한편에 비켜서 있다. 그토록 다정하고, 그토록 남을 쉽게 믿는 우리 어머니에게 사람들이 저지른 짓들 때문에, 우리는 삶을 증오하고, 우리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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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따뜻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몸의 털입니다. 털이 없는 것 또한 땀을 증발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0만 년 전의 호모속 고인류는 더운 지역에서도 태양이 작열하는 낮 시간대에 활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과연 털이 없었는지는 화석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간접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louse 입니다.
이는 짐승의 털에 빌붙어 사는 곤충입니다.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이 역시 털에서 알을 낳고 살다가 죽습니다. 사람에게 빌붙어 사는 이는 세종류인데 머리털, 몸, 사타구니 털 등 사는 곳에 따라 서로 다른 종입니다. 사람의 머리에서 발견되는 이는 머리털에 살면서 두피에 쌓인 먹거리를 먹습니다. 머리털에 사는 이(머릿니)와 몸에 사는 이(몸니)는 같은 종(페디쿨러스 휴마너스Pediculus bumanus)이면서 다른 아종이지만 사타구니에 사는 이 사면발니)는 아예 다른 속(티루스푸비스Pbubirus pubis)입니다.
한 몸에 살고 있는 머릿니와 사면발니가 서로 다른 속에 속할 정도로다르다는 점에서 고인류가 털이 없는 맨몸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온몸에 털이 있었다면 머리털과 사타구니 털 사이에도 털이 있었을것입니다. 그렇다면 머리털에 있는 이와 사타구니 털에 있는 이가 다른종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는 생태계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온몸에 털이 있는 인류의 사촌 침팬지와 고릴라에게는 온몸에 서식하는 이가 한 종입니다. 침팬지에게서 발견되는 이(페디큘러스 스캐피Pediculusclaelfi)는 페디쿨러스속에 속하는 종이고, 고릴라에게서 발견되는 이(티루스 고릴라이Phthirus gorillae)는 티루스속에 속하는 종입니다.
머리털과 사타구니 털 사이에 털이 없다면 이의 입장에서 머리와 사타구니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대륙과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서식지가 되어버린 머리와 사타구니에는 서로 다른 종이 살 수 있습니다. 머릿니는 500~600만 년 전부터 사람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침팬지와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기한 시점입니다. 그렇다면 머릿니는 인류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동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릿니와는 달리 사면발니는 330만 년 전부터 인류에게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사면발니는 고릴라에게서 보이는 이와 가까운 종입니다. 인류와 고릴라는 800만 년 이전에 갈라졌는데 고릴라의 이와 가까운 사면발니가 330만 년 전부터 인류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인류와 고릴라가 가까웠음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고릴라를 잡아먹었거나 고릴라가 자고 난 숙소를 사용한 인류에게 옮겨 가서 사면발니라는 새로운 계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 P53

사람의 몸에서 발견되는 몸니는 사실 몸에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이가 잘 살 수 있을 만한 털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몸니는 사람이 입는 털옷의 털에서 살면서 사람의 피부에 쌓인 먹을 것을 가져가서 먹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몸니는 털옷이 생긴 다음에야 생겼을 것입니다. 머릿니와 몸니 계통이 언제 갈라졌는지 알 수 있다면 털옷은 적어도 그 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니와 머릿니의 유전체를 비교해 보니 10만 년 전에 분기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사실 이는 믿기 어려운결과입니다. 인류가 빙하기에 살기 시작한 것은 200만 년 전인데 털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겨우 10만 년 전일 리는 없습니다.
190만 년 동안 옷이 없이 맨몸으로 추운 빙하기를 견뎌냈을까요? 몸니와 머릿니가 10만 년 전에 분기했다는 유전학 계산이 틀렸을까요? 유전학의 분기점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전제한다면 지금 사람의 몸니는 그렇게 오래전에 생기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털옷 없이 어떻게 고인류가 맨몸으로 추운 유라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 P56

쾨니히스발트는 기간토피테쿠스의 어금니 크기와 턱뼈 크기만으로 생전 그의 몸집이 어마어마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어금니의 크기로 전체 몸집을 추정하는 일은 완전히 허무맹랑한 시도는 아닙니다. 이빨과 턱뼈의 크기만 가지고 몸집 전체의 크기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금니의 면적은 그 종이 먹는 양과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니는 먹거리를 한입에 넣을 정도로 알맞은 크기로 자르는 일을 맡고, 어금니는 한입 크기의 먹거리를 잘게 부수는 일을 맡습니다. 몸집이 크면 더 많이 먹어야 하고 그러려면 어금니가 더 많은 먹거리를 처리해야 합니다. 적어도 영장류만 놓고 보았을 때 어금니가 서로 맞물리는 면의 넓이와 몸집 크기는 비례합니다. 많이 먹는 종은 어금니 면적이 넓고 몸집도 큽니다. 적게 먹는 종은 어금니가 작고 몸집도작습니다. 이러한 비례 관계는 현존하는 많은 동물의 평균치를 통해서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P67

파란트로푸스의 큰 어금니는 큰 몸집을 보여주는 자료가 아니라 어쩌면 척박했던 환경을 보여주는 자료인 셈입니다. 고릴라 어금니의 2배 크기라고 해서 반드시 고릴라 몸집의 2배라는 관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간토피테쿠스와 메간트로푸스도 거인이 아닐 수 있을까요? 기간토피테쿠스의 큰 어금니 역시 고릴라보다 큰 몸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릴라보다 훨씬 더 척박한 먹거리를 많이 먹어야 했음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간토피테쿠스가 영양이 부실했다는 놀라운 내용은 진즉 발표된 바가 있습니다. 영미권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중국의 고인류학자 장인원은 1987년에 기간토피테쿠스의 앞니를 조사한 결과 상당수가 법랑질 형성 부전 enamel hypoplasia 을 보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영장류는 자랄 때 치아도 만들어집니다. 성장기에 영양이 부족하면 치아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부족한 영양 때문에 치아의 법랑질(에나멜질)이 만들어지다 말다 하면서 법랑질에 가로로 줄이 생기게 됩니다. 이 줄은 한번 만들어진 다음에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장기 동안 겪었을 영양부족을 알려주는 좋은 지표입니다. 어른 인골의 앞니에 법랑질 형성 부전을 나타내는 금을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랄 때 극심한 영양부족을 겪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랑질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기간토피테쿠스는 자랄 때 먹거리가 부족했을 것입니다. 고릴라만큼 많이 먹어야 하는 기간토피테쿠스는 그 먹거리를 구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기간토피테쿠스는 고릴라만큼의 몸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영양이 부족하고 열악한 먹거리를 많이 먹어야 했던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 P72

물론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두 발 걷기와 사냥은 인류의 진화사에서 한 무대에 동시에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두 발걷기는 사람의 다른 어떤 특징보다도 훨씬 더 일찍 등장했으니까요. 330만년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를 비롯하여 초기 고인류는 두 발로 걸었지만 두발 걷기 외에는 인류의 특징을 갖추지 않았다는 가설이 주류입니다. 그렇다면 사냥과 육식은 언제 인류사에 등장했을까요? 고인류의 역사에서 동물성 먹거리가 등장한 시점을 알리는 자료는 약 26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화석종과 함께 발견된 동물 뼈에 남아 있는 칼날 자국입니다. 하지만 이때의 고인류는 그다지 크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돌을 깨서 날을 세운 찌개는 살아 있는 짐승을 잡는 사냥도구라기보다는 사체 처리에 쓰였습니다. 상위 포식자가 한 차례 먹고난 다음 하이에나와 같은 사체 처리반과 경쟁하여 두꺼운 뼈를 깨고 그안에 있는 골수 혹은 두뇌를 먹은 것입니다. 돌로 만든 최초의 도구는 살아 있는 짐승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는 짐승의 사체를 처리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 P76

전력으로 도망치는 동물을 잡는 사냥은 20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됩니다. 고인류는 약 500만 년 전에 기원하여 300여만 년 동안 줄곧 아프리카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런 고인류가 약 200만 년 전에 유라시아로 퍼져나갔습니다. 어째서였을까요? 기후가 변하면서 몸집이 큰 짐승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옮겨 갔고, 이들을 사냥감으로 삼던 고인류 역시 유라시아로 쫓아 퍼져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때 고인류 호모 에렉투스의 사냥 도구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였습니다.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저몄는지, 죽어 있는 짐승의 사체에서 뼈를 깨고 골수를 파 먹었는지는 뼈에 남아 있는 돌날의 흔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돌날의 흔적은 V자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지만 짐승의이빨 자국은 U자 모양으로 끝이 둥급니다. 그래서 뼈에 남아 있는 흔적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돌날의 흔적인지 이빨의 흔적인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고인류가 돌로 만든 도구로 뼈를 손질한 흔적과 짐승이 이빨로 뼈를 갉아 먹은 흔적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에는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뼈에 남아 있는 두 흔적 중 어떤 것이 먼저 새겨진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승 이빨의 흔적 위에 돌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맹수가 한번 먹고 난 사체를 고인류가 뒤늦게 접수했다는 뜻입니다. 그럴 경우 고기나 내장을 취했을 가능성보다는 뼈를 깨서1차 포식자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골수를 먹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돌날의 흔적 위에 짐승 이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는 어떨까요? 그것은 돌로 만든 도구로 직접 사냥해서 고기와 기타 내장을 먼저 처리한 다음에 하이애나같은 2차 포식자가 왔가는 뜻입니다.호모에렉투스의 아슬리안 주먹도끼는 사냥하고 고기를 저미는 데 이용되었고 호모 에렉투스는 상위 포식자로서 뛰어난 사냥 기술을 보유한 것로 알려졌습니다. - P77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난 사냥꾼으로서 점차 발달한 사냥 기술로 고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면, 두뇌가 커지면서 필요로 하는 고열량의 먹거리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고인류학자 줄리 레스닉Julie Lesnik은 이에 대한 기발한 해답으로 곤충식을 제시합니다. 인류가 곤충식을 통해 고칼로리를 확보했다는 주장입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곤충을 먹는다고 하면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제대로 된‘ 먹거리가 없었기 때문에 기근에 나무껍질을 먹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곤충을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둘 다 지극히 유럽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도 불과 수 세대 전까지 메뚜기를 잡아먹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곤충식을 하는 문화권이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른 먹거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곤충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먹거리의 하나로 곤충을 먹습니다.
곤충식을 일상의 식생활로 여기는 문화권은 주로 열대 지역에 분포합니다. 사실 인류 진화사에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류는 열대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식생활에서 곤충식이 먹거리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열대의 환경이 주는 다양한 생물을 골고루 섭취하는 열대 지역에서 곤충은 다양한 먹거리의 일부일 뿐입니다. 열대에서 멀어지면서 생태계의 다양성이 줄고 먹거리의 종류 역시 감소합니다. 곤충식에 대해 역겨움이나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열대 지역의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유럽중심주의의 소산이 아닐까요? - P80

이 최근의 연구 성과들이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두 발 걷기, 두뇌 용량, 사냥도구의 제작과 사용이 패키지를 이룬 ‘사냥 가설‘은 그자체로 뛰어난 논리적 정합성을 갖춘 것처럼 보였으며 20세기까지 주류가설로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두 발 걷기‘가 떨어져나가고 이제는 두뇌 용량과 사냥, 도구 제작 간의 연결고리조차 끊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고기를 얻을 수 있는 큰 짐승을 사냥할 수밖에 없다는 기존의 공식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또 다른 시각이 생기고 있습니다.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한 행동으로서 사냥이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은 채집을 통해 식물성 먹거리를 확보했다는 경제 분업 가설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물성 먹거리의 확보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면 사실상 이러한 분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곤충 등 다양한 동물성 먹거리와 씨앗, 구근류, 해산물 등으로 고칼로리 고단백질의 먹거리 섭취가 가능해지면서 두뇌는 점차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호모 에렉투스만이 아니라 약 200만 년 전에 살았던 모든 고인류가 공통적으로 겪은 진화입니다. 어른 침팬지보다 큰 머리를 가지고 있는 고인류가 서로 살아가는 방식을 보고 따라 했을 광경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 P83

불은 포유류가 소화하기 힘든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게 합니다. 포유류는 생채소를 이루는 섬유소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초식동물조차도 날것의 식물을 직접 소화할 수 있는 효소를 가지고있지 않습니다. 대신 초식동물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식물을 소화해냅니다. 그중 하나는 미생물입니다. 장내에 미생물을 키워서 그들의 도움으로 식물을 소화합니다. 또한 소나 양은 네 개의 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소화할 수 없는 식물을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서 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먹은 음식을 토했다가 다시 삼키기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되새김질입니다. 하지만 불에 익히면, 보잘것없는 위 한 개만 가지고도 채소를 소화할 수 있습니다. 불은 그야말로 제2의 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86

식물성 먹거리나 동물성 먹거리 모두 익혀서 먹으면 영양분을 훨씬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지만, 익힌 음식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농경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고 곡류 위주의 식생활을 하면서부터입니다. 곡물에 물을 붓고 끓여서 먹으면 맛도 좋고 소화도 잘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곡류에 물을 부어 끓인 음식은 무엇보다도 이유식으로 최고였습니다.
농경이 자리 잡으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데에는 곡물로 만든 이유식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유식 덕분에 모유 수유 기간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유 수유 기간에 정지되었던 배란주기가 다시 시작되고 임신이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한 명의 가임 여성 기준으로 4~5년이었던 출산 터울이 2~3년으로 줄어듭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 P89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고인류 호모 에렉투스 역시 화식에 의존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비싼 장기 가설 expensive-tissue hypothesis‘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인류학자 레슬리 아이엘로Leslie Aiello 가 두뇌와 소화 장기는 모두 비싼 장기라는 점에 착안하여 내놓은 가설입니다. 비싼 장기라는 것은 제작비와 유지비가 모두 많이 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비싼 장기인 두뇌와 소화 장기를 둘 다 크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한쪽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포기해야합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은 두뇌 대신 소화 장기를 선택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은 수백만 년의 진화 과정에서 두뇌 용량이 조금 커지기는 했지만 소화 장기는 훨씬 더 컸고 많은 기능을 했습니다. 비록 소화 장기자체는 화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몸통뼈, 등뼈, 골반뼈의 크기를 통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에 비해 호모속은 몸통이 좁고 골반뼈 역시 키에 비해 좁은 편입니다. 사람의 소화기관은 비슷한 몸집의 영장류가 가진 소화기관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호모속은 두뇌용량을 놀라울 정도로 키웠습니다. 소화기관 대신 다른 비싼 장기인 두뇌를 선택한 것입니다. 작은 치아, 작은 소화기관을 가지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과 같은 먹거리를 먹는다면 큰 두뇌와 큰 몸집을 유지할 만큼의 열량을 도저히 섭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익혀 먹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 P91

고인류를 먹잇감으로 삼았던 포식자는 누구였을까요? 브레인의 연구에 등장하는 표범을 꼽을 수 있습니다. 표범은 먹잇감을 잡으면 높은나무 위로 끌고 올라갑니다. 기껏 잡은 먹잇감을 노리는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고 먹잇감이 도망갈 수도 없으니 여러모로 이득입니다. 나무위에서 천천히 먹고 난 나머지 잔반(?)은 나무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게됩니다. 남아프리카의 동굴 입구 근처에는 동굴에 고인물 때문에 큰 나무가 자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표범이 먹고 남은 뼈들이 떨어진 나무 아래는 동굴로 연결됩니다.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 동물 뼈와 발견된 고인류 화석 뼈는 다트가 생각했듯 킬러 유인원 고인류가 동물을 잡아먹고 남긴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나무 위에서 맹수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동물의 뼈가 나무 위에서 떨어진 다음 쌓여서 생긴 유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맹수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동물 중에 고인류도 있었던 것입니다.
결자해지일까요? 킬러 유인원 가설을 내놓은 레이먼드 다트가 발견한 타웅 아기 역시 평화롭게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 아기의 머리뼈에는 눈구멍뼈도 남아 있습니다. 눈구멍뼈에는 세모난 구멍이 나 있습니다. 고인류학자 리 버거 Lee Berger는 이를 맹금류의 발톱이 남긴 자국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금류의 행동학 연구가 쌓이면서, 타웅 아기가 맹금류에 의해 들려져서 먹잇감이 된 다음 남은 뼈가 나무 아래로 떨어져 화석이 되었다는 가설을 무시할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 P114

일련의 연구 결과가 보여주는 인류 조상의 모습은 공격적이고 살상무기를 휘두르는 킬러 유인원이 아니라, 맹수와 맹금에게 잡아먹히는 먹잇감입니다. 인류의 기원은 공격성을 지니고 태어나 무기를 휘두르며 돌진하는 포식자에게서 찾을 수 없습니다. 작은 몸집으로 두 발로 서서 걷다가 맹수를 만나면 나무 위로 도망가고, 미처 피하지 못해 먹이가된 나약한 모습이 지금 지구 위를 뒤덮은 사람의 기원이었습니다.
그동안 인류학계에서는 초기 인류의 모델로서 침팬지만을 주목해 왔습니다. 침팬지의 공격성은 사람의 공격적인 남성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계통상 가장 가까운 유인원은 침팬지만이 아닙니다. 침팬지속에는 두 종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침팬지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노보입니다. 보노보에 대한 연구는 뒤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침팬지보다 앞에 나서지 않고 공격적이지 않아 사람의 관심을 덜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노보에 대한 연구 결과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보노보는 침팬지와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침팬지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라면 보노보는 느긋하고 평화적입니다. 침팬지는 수컷이 주로 연대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보노보는 암컷이 연대합니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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