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학창 시절의 행복은 짧았다. 어머니의 원인을 알 수 없는 병환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아들이 많고 모두 공부를 잘해 주위에서 부러워하던 우리 집에 불행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다.
"희호야, 졸업하고 1년만 내 곁에 있다가 전문학교 가거라."
어머니의 간청으로 나는 전문학교 입학 준비를 중단했다. 졸업식장에서 나는 많이 울었다. 어머니의 병환에 대한 두려움과 꿈을 접어야 하는 설움에 마음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답답하고 슬펐다. 나는 곧바로 서산 집으로 내려갔다. - P21

안간힘을 쓰며 발악하던 일본은 결국 원자폭탄 앞에 무너졌다.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후 1,348 일을 버티다 항복한 것이다. 나는 학교 사무실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다. 가르치던 학생 10여 명을 일본인 교장과 선생들이있는 학교를 피해 자취방으로 소집했다. 나는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음을 설명해주고 애국가를 가르쳤다. 당시 애국가는 지금의 안익태 작곡이 아닌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 Auld Lang Syne>에 우리말 가사를 얹은 애절한 곡조였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삽교 거리를 행진했다. 확성기가 있는 소방서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일본의 항복을 알렸다. 그리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서툴고 소박했지만 무척 감동적인 해방 퍼레이드였다. 해마다 8. 15가되면 난 그날을 회상한다. 일본의 공권력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로서 매우 위험한 즉흥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아이들 중 나중에 삽교에서 사진관을 하던 제자가 있다. 1972년 유신 직후 우리 가족이 거의 유폐되다시피 해서 집이 적막강산일 때, 그가 큰 셰퍼드 한 마리를 보내주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캡틴이라고 이름 짓고 1982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10년 넘게 가족처럼 지냈다. - P27

사범대학에서 내 별명은 독일어 중성을 뜻하는 ‘다스das‘ 였다. 그동안 여자들만의 학교에서 비교적 민주적인 교육을 받아온 나는 갓 남녀공학이 된 국립대학에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깊이 뿌리박힌 가부장제와 남존여비의 의식과 맞부딪쳤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정학과 외에는 여학생이 서너 사람에 불과했다. 점심시간이면 여학생들은 도시락을 들고 빈 교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빈 교실을 찾으면 거기서 여학생끼리 모여서 조용히 먹었다. 남녀공학에서 여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에서조차 수줍어 고개를 잘 들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남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마음껏 호연지기를 뽐냈다. 이 불공평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볼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사이다를 준비해 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때 여자들의 자리는 당연히 안방이나부엌이었다. 그리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언제나 뒷자리차지이며 이등 시민이었다. 남녀공학 체험은 여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남학생들조차 덩달아 나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여학생들을 대표해서 묵은 관습을 조금이라도 깨뜨리려고 노력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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