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리를, 광장을 기대했다. 대신 내가 서 있는 곳은 더러운 강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계단의 꼭대기이다. 강가에 도착한 것이다. 결국, 세인트폴 성당과 가까워진 셈이다. 그러나 넓디넓은 템스 강이 나와교회 사이로 흐르고 있다.
나는 서서 일종의 공포와 외경 속에 강을 바라본다. 브라이어에서 템스 강을 따라 걷던 기억이 난다. 강이 둑을 침식하고흔드는 것같이 보이던 기억이 난다. 난 저 강이, 마치 나처럼, 미치도록 빨라지고 싶어 한다고, 넓어지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넓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독처럼 퍼져 나간다. 강바닥이 부서진 물건들로 어지럽다. 짚, 나무, 잡초, 종이, 천조각, 코르크와 기우뚱한 병들이 보인다. 강이 움직인다. 강이아니라 바다처럼 움직인다. 파도가 친다. 그리고 선체에 부딪히면서, 강변에 철썩 떨어지면서, 강변에 솟아 있는 계단과 벽과나무 부두에 부딪히면서 강은 쉬어 버린 우유처럼 거품을 가득문다. - P556

「내게도 내 배 아파 낳은 아기가 하나 있었는데 죽었다고 그 숙녀, 수의 어머니가 왔던 즈음에 말이야」 부인이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내가 말했지. 이 근처에서 다시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을 들을 거야. 아기들은 잘 죽거든. 그러니 누가 이상하단 생각을 했겠어••••••?」목소리에 무언가가 있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한다. 부인이내가 떠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손을 뻗어 내 엉킨 머리를 어루만진다. 「됐어, 이젠 휴. 그래. 넌 이제 안전하단다. 그리고 어루만지던 손길이 멈춘다. 부인이 내 머리털 한 줌을 쥐고 있다. 부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오른다. 「참 재미있지.」부인의 목소리가 달라진다. 「네 머리 말이야. 난 네 눈이 갈색이고 피부는 하얗고 허리와 손은 가늘 거라 생각했어. 오직 네 머리만이 내가 상상하던 이상으로 더 금발이구나•••••• 말이 갑자기 뚝 끊긴다. 손을 뻗으며 부인은 고개를 움직였다. 가로등 불빛과, 변색한 은 같은 달에서 나오는 달빛이 부인얼굴을 비추면서 갑자기 부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부인의갈색 눈과 창백한 피부, 통통한 입술. 그리고 갑자기 나는 깨닫는다. 저 입술은 한때는 훨씬 더 통통했으리라••••••. 부인이 입술을 적신다. 「아가.」 부인이 말한다. 「나의, 나의 소중한 딸••••••.
부인이 다시 잠시 주저하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 P589

「좋아하지, 그렇지?」 여전히 엉덩이를 돌리며 베이컨 간호사가 말했다.「아니라고? 네가 좋아한다는거 우리 모두 들었는데 뭘
그러자 간호사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우성치며 날 바라보는얼굴에서, 전에는 보아도 이해하지 못했던 심술궂은 표정을 다시 보았다. 이제는 물론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예전에 모드가 크림 부인의 집에서 크리스티 의사에게 했을 말이 짐작이 갔다. 모드가 그 일을 얘기했을 거란 생각이, 나를 미쳤다고 몰기 위해 젠틀먼 앞에서 그 일을 얘기했을 거란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심장이 멎는 듯했다. 브라이어를 떠난 뒤로는 심장멎을 일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 최악 같았다. 화약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막 성냥으로 그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몸부림치고 비명 지르기 시작했다. - P661

우리는 젠틀먼이 어슬렁거리며 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틀먼은 휘파람을 불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더니 입스 씨의 가게 문 앞에서멈추어 섰다.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더니 열쇠를 끄집어냈다. 계단에 대고 오른발, 그다음엔 왼발에서 먼지를 떨어냈다. 그러고는 자물쇠에 열쇠를 찌르고 주위를 무심히 둘러본 뒤 안으로들어갔다.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태도였다.
젠틀먼을 지켜보는 내내 몸이 떨려 왔다. 그러나 묘한 기분이들었다. 「저런 악마 자식! 내가 말했다. 죽여 버렸으면, 쏴버렸으면, 달려가 얼굴을 후려쳤으면 싶었다. 그러나 정작 모습을보자 두려워졌다.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졌다. 마치 아직도 여기가 크리스티 의사의 병원이고, 당장에라도 끌려가 흔들리고 묶이고 물에 쑤셔 박힐 것 같아 무서워졌다. 숨이 탁탁 걸리면서 숨소리가 이상하게 났다. 찰스가 알아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P705

석스비 부인의 방에 불이 켜지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사람 형체가 나타났다. 바로 석스비 부인이었다! 심장이 급격히 쿵쾅대기 시작했다. 석스비 부인의 머리가 희어 보였고 낯익은 검은 태피터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손에 등불을 들고내게서 얼굴을 돌린 부인이 턱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방 안 저멀리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인이 뒤로 물러남에 따라 그 사람은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자아이였다. 허리가 무척 가늘었고••••••. 그 여자아이를 보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석스비 부인이 그 아이 뒤쪽에서 방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여자아이는 브로치와 반지들을 빼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유리창 앞까지 왔다. 창틀의 가로막대 위에 팔을 걸치고 손목에 이마를 대고 서더니 조용해졌다. 오로지 손가락만이 창문의 레이스를 일없이 당기며 움직이고 있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다. 머리는 곱슬곱슬했다. 나는 생각했다. <그럴 리 없어>그리고 석스비 부인이 다시 입을 열자 여자아이는 얼굴을 들었고 가로등 불빛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자아이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말이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거의 1분 동안이나 먼지투성이 거리와 어둠을 가로질러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던 것 같다. 여자아이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아이는 계속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았고 마침내 눈 색깔이 기억났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서서 한 발 물러나더니 등불을 집었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불꽃을 낮추는 동안 석스비 부인이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손을 올려 여자아이의 옷깃 뒤쪽 고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이 어두워졌다. - P708

찰스의 말이 눈물에 녹아든 소금처럼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울어!」 내가 말했다. 「제발 인생에서 딱 한 번만 울음을 멈춰 봐, 안 그러면 맹세컨대 널 때릴 테야! 어서 말해, 모드가어떻게 했어?」찰스가 숨을 들이쉬더니 손을 주머니에 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아무것도요.」 찰스가 말했다. 「하지만 제게 이걸 주셨어요. 앉아 있던 탁자에서 가져온 거예요. 마치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시던데요. 그리고 키 큰 남자가 시계 뚜껑을 닫자 모드 양이 절 떠밀었어요. 키 큰 남자가 제게 1파운드를 주었고, 제가 받아 들자 빨간 머리 여자애가 절 내보냈어요. 모드 양이 제가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눈이 이글이글거리시더라고요. 그러나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그냥 이것만 주셨고, 이걸로 모드 양이 아가씨에게 뭔가 뜻을 전달하려 했다고 생각해요. 오, 아가씨! 절 바보라고 불러도 좋아요. 하지만 하느님 맙소사, 전 그뜻까지는 정말 몰라요!」
찰스가 내게 물건을 넘겨주었다. 모드가 무척 작게 만들어놓았기에 그걸 풀고 알아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알아본 뒤에는 손에 쥐고 돌리고, 또 돌렸다. 그리고 일어나 멍청히 바라보았다.
「이게 다야?」 내가 말했다.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카드였다. 브라이어에서 모드가 가지고 놀던 프렌치 덱의 한 장이었다. 하트 2였다. 기름때가 묻고 접힌 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나 붉은 하트 하나에 아직도 모드가 발로 밟아 생긴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P722

내가 경멸에 몸을 떨며 말했다. 이제 와서 젠틀먼의 강요로그랬을 뿐이라고 말하려는 거야?」「정말로 강요당했어!  •••••• 하지만 네가 의미하는 그런 식은아니었어」
내가 말했다. 「네가 남을 속이는 사기꾼이 아닌 척하시겠다?」 모드가 말했다. 「넌 안 그래?
모드가 재차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 눈빛에 다시 거의 부끄러움에 휩싸이며 나는 눈길을 돌려 버렸다. 잠시 후 나는 좀 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싫어했어. 네가 등을 돌리면 그 사람과 있을 땐 웃지도않았어.」
난 웃었다고 생각해?」「왜 아니겠어? 넌 배우잖아••••••. 지금도 연기하고 있는 거잖아!」「내가?」여전히 내 얼굴에 눈을 고정하고 여전히 내게 손을 뻗고 있지만 간신히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손을 멈춘 채 모드가 말했다. 빛이 온통 우리에게만 들었고, 부엌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모드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더럽혀져 있거나 멍들어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젠틀먼을 싫어했다면, 왜 그렇게 했던 거야?」「다른 방법이 없었어」 모드가 말했다. 「내 삶이 어떤지 봤잖아. 난 내가 되어 줄 네가 필요했어「그래서 네가 여기 와서 내가 되려고!」 모드는 아무 대꾸도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우리가 젠틀먼을 속일 수도 있었어.
네가 내게 말만 해주었다면. 어쩌면 우리가••••••「어떻게?」「어떻게든. 뭐라도, 나도 몰라••••••.」모드가 고개를 저었다. 모드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얼마나많이 포기할 수 있었을까?」 - P738

세상에, 뺨은그러나 젠틀먼은 다시 코웃음을 쳤다. 「말해 봐.」 젠틀먼이 모드에게 말했다. 「네가 언제 처음으로 친절해지는 법을 배웠는지. 수가 뭘 알든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야?
왜 그렇게 붉히시나! 아직도 그건 아니야? 석스비 부인을 보는거야? 석스비 부인의 생각에 네가 마음 쓴다는 말 따윈 하지마! 어이구, 너도 수만큼 나쁜 년이야. 떨기는! 좀 더 용감해지시지, 모드. 네 어머니를 생각해.」
모드는 심장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제 모드는 젠틀먼에게 꼬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젠틀먼이 그 모습을보더니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석스비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 역시 젠틀먼의 말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모드처럼 다이아몬드 브로치 아래 가슴에 손을 대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젠틀먼의 시선을 느끼고 얼른 모드를 흘낏 본 뒤 손을 떨어뜨렸다.
젠틀먼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건 뭐지?」 젠틀먼이 말했다.
「뭐가 뭔데?」 존이 말했다.
석스비 부인이 움직이며 말했다. 「자 그럼, 데인티••••••「오!」 젠틀먼이 말했다. 「오!」 젠틀먼은 탁자 근처를 걸어가는부인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흥분하여 부인에서 모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손을 머리에 올리더니 이마에 내려온 머리털을 세게 뒤로 잡아당겨 넘겼다.
「이제 알겠군.」 젠틀먼이 말했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웃음이 뚝 그쳤다. 「오, 이제야 알겠어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모드가 젠틀먼에게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그러나 눈길은 내 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리처드,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젠틀먼이 모드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좀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내가 바보였어! 오, 정말 대단한데! 언제부터알고 있었어? 네가 발로 걷어차고 욕을 퍼부었던 것도 당연하지! 심통을 부린 것도 당연해! 부인이 널 그냥 내버려 둔 것도! 늘 그 점이 놀라웠어. 불쌍한 모드!」 젠틀먼이 몹시 웃어댔다.
「그리고, 오, 석스비 부인, 정말 안됐군요!」「그만해요!」석스비 부인이 말했다. 「제 말 알겠어요? 그 얘기가 나오게 두지 않겠어요!」 부인도 젠틀먼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불쌍한지고.」 여전히 껄껄거리며 젠틀먼이 다시 말했다. 그러고는 외쳤다. 입스 씨, 당신도 이 일을 알고 계셨나요?」 입스 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뭘 알아?」 존이 물었다. 두 눈이 검은 점 두 개 같았다. 존이나를 보았다. 「뭘 안다는 거야?」「나도 몰라.」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몰라」 모드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 P746

「너무하는데, 안 그래? 경찰들이 말했다. 「굉장히 심각하군. 어디 얼마나 심각한지 보자고
경찰들은 젠틀먼의 머리를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목의 맥박을 짚어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추악한 살인이야. 자, 누구 짓이지?」모드가 움직였다. 혹은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존이 더 빨랐다.
「저 여자 짓이에요.」 존이 주저 없이 말했다. 부인에게 맞은뺨이 시꺼메져 있었다. 존이 팔을 들어 가리켰다. 
「저 여자짓이에요. 제가 봤어요.」 존은 석스비 부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존의 행동을 보고, 말도 들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말하는 게 다였다. 「뭐••••••?」 그리고 모드 역시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뭐••••••?> 혹은 <잠깐••••••!>이라고그러나 석스비 부인이 젠틀먼의 옆에서 일어났다. 태피터 드레스가 피에 흠뻑 젖어 있었고, 가슴에 매단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루비 브로치로 변해 있었다. 손끝에서 손목까지 온통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대중지에 나오는 살인자 사진 같은 모습이었다.
「제가 한 짓입니다.」 부인이 말했다. 「제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는 걸 하느님은 아실 겁니다. 그러나 제가 한 짓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이 여자아이들은 결백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선아무것도 모릅니다. 이 아이들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 P757

그리고 나는 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부인의 얼굴에서 이미 용기와 열정과 활기가 반은 사라져 있었다. 부인은 웅성대는 사람들을 멍하니 둘러보고 있었다. 나를 찾는다는 생각에 나는 일어나 손을 들었다. 그러나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도 부인은 앞서처럼 계속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찾는 것처럼 눈길이 계속 방 안을 떠돌다가 마침내 한곳에 고정되더니 눈빛이 분명해졌다. 나는 부인의 시선을 따라가 방청객열 뒤쪽에서 여자아이 하나를 찾아내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막 베일을 내리는 중이었다. 모드였다. 보리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그 순간에는 마음이 활짝 열렸다가, 전의 일이 모두 떠오르면서 다시 마음이굳게 닫혔다. 모드의 모습이 비참해 보였다. 별일이라는 생각을했다. 모드는 혼자 앉아 있었다.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내말은 내게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석스비 부인에게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측 변호사가 나를 불러 악수를 하며 유감이라고 말했다. 데인티가 울며 내 팔에 기대어 걸었다. 내가 다시 석스비 부인을 보았을 때 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모드 쪽을보자 모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P770

그러나 물은 필요 없었다. 데인티가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나는 데인티를 잡고 가까이 당긴 뒤 데인티의 옷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삐걱대는 용수철 위로•날름쇠가 올라가고 볼트가 풀려 튀어 오르면 녹슨 자물쇠가 덜덜 떨 듯이 나도 그렇게 떨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가 말했 - P792

다.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말로 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안다는 것조차 너무 버거웠다! <내 어머니, 모드의 어머니!> 믿을 수가 없었다. 브라이어에서 보았던, 상자 안의 잘생긴 숙녀의 초상화를 떠올렸다. 모드가 닦고 손질하곤 하던 비석을 떠올렸다.
모드를, 그리고 석스비 부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젠틀먼을 떠올렸다. <오, 이제야 알겠군!> 젠틀먼은 그렇게 말했다. 이제 나도알게 되었다. 석스비 부인이 감옥에서 그토록 내게 말하고 싶어하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에 대해 견디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왜부인은 이 비밀을 그토록 오래 간직했던 것일까? 왜 내 어머니에대해 거짓말을 했을까? 어머니는 살인자가 아니라 숙녀였다.
막대한 재산을 가진 숙녀였고, 어머니는 그 재산을 나누어••••••.<나에 대해 견디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생각하렴.> - P793

「데인티」 내가 헐떡이며 말했다. 「데인티, 부인은 분명 알고있었어. 분명히 내내 알고 있었어. 날 젠틀먼에게 붙여 거기로보낸 것도 분명히 부인이야. 결국은 젠틀먼이 날 어떻게 할지알면서도 •••••• 오!」 목소리가 쉬기 시작했다. 부인이 날 거기로보냈어. 그래서 젠틀먼이 날 거기 두고 자기 딸 모드를 데려오게 하려고 부인이 내내 원했던 건 단지 모드뿐이었던 거야. 날안전하게 지켜주다가 포기해 버렸어. 다 모드를, 모드를••••••.
그러나 그 뒤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칼을 쥐고 나서던 모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를 미워하게 내버려 두었던 모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를 가장 해친 이가 누군지 알면서도 내가 모르게 하기 위해 자기가 나를 해친 것이라 믿게 하던 모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 P794

나는 숨을 멈췄다. 웅얼대는 소리가 멎었다가 다시 들려왔다.
내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고, <정말로> 들려오고 있었다. 서재에서 나는 소리였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엔 정말로 집에 유령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어쩌면, 어쩌면••••••나는 문으로 가서 떨리는 손을 얹고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선 채 눈을 깜박였다. 방이 변해 있었다. 창문에 붙어 있던 페인트는 모두 벗겨지고, 바닥의 놋쇠 손가락은 뽑혀 있었다. 책꽂이에는 거의 책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벽난로에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문을 열었다. 릴리 씨의 낡은 책상이보였다.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불빛 속에 모드가 보였다.
모드는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뺨을 손바닥에 올린 채 손가락을 눈 쪽으로 반쯤 굽히고 있었다. 불빛 덕에 모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손은 장갑 없이 맨손이었으며, 소매는 걷어붙였고, 손가락은 잉크 얼룩으로 시커멨다. 나는 선 채로 모드가 글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종이는 이미 글자들로 빽빽했다. 모드가 종이에서 펜을 떼더니 마치 그다음엔 무엇을 써야 할지 잘모르겠다는 듯이 펜을 돌리고 또 돌렸다. 다시 모드는 숨결 아래로 웅얼거렸다. 모드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써 내려갔다. 그러고는 잉크병에 펜을 담갔다.
그러면서 눈가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들었다. 자신을 지켜보는 나를 보았다.
모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 움직임도 없어졌다. 소리지르지도 않았다.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앉아 있었다. 얼굴에 놀랐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내가 한 걸음을 뗐다. 그러자 모드가 잉크 묻은 펜을 내려놓고 일어났고, 펜이 종이 위로 그리고 책상 위로 구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모드의 뺨이 창백해져 있었다. 모드가 의자 등을잡았다. 마치 손을 떼면 넘어지거나 기절할 것 같다는 태도였다. 내가 다시 한 걸음을 더 떼자 모드는 의자를 더욱 강하게 쥐었다.
모드가 말했다. 「날 죽이려고 온 거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모드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알았다. 단순히 놀라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포심에서 창백해져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끔찍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쏟았던 눈물로 얼굴이 아직도 축축했다. 다시 눈물이 떨어지면서 더욱 축축해졌다.
「오, 모드!」 내가 말했다. 「오, 모드!」 - P804

나는 모드에게서 책을 받아 활자를 들여다보았다. 내게는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책을 내려놓고 서가로가서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역시 똑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또 다른 책을 꺼냈다. 이 책에는 그림이 들어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울 만한 그림들이었다. 그림 하나에는 벌거벗은 여자아이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모드를 바라보았고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넌 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말했다. 그게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내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아무것도 몰랐어.」 모드가 말했다.
「다 알고 있었어! 넌 내가 너한테 키스하게 했어. 다시 키스하고 싶게 만들었어! 그동안 내내 넌 여기에 들락거리면서••••••」갑자기 말이 막혔다. 모드가 내 얼굴을 보았다. 나는 서재 문앞에 와서 모드의 오르락내리락하던 숨죽인 목소리를 듣던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스타일스 부인 그리고 웨이 씨와 함께 타르트와 커스터드를 먹는 동안, 신사들에게, 젠틀먼에게 책을 읽어 주던 모드를 생각했다. 나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너무나 강하게 옥죄어 와서 가슴이 아팠다.
「오 모드」 내가 말했다. 「내가 알기만 했어도! 널 생각하면나는 울기 시작했다. 「네 삼촌을 생각하면 •••••• 오!」 내 손이 빠르게 입으로 올라갔다. <내> 삼촌!」 그 생각에 너무나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 나는 여전히 책을 쥐고 있었다. 이제 나는 책을 바라보고는 마치 책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떨어뜨렸다. - P811

 단지<단지 널 사랑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무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모드가 아직도 당당할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내가 과연...... 어쨌거나 내겐말할 필요가 없었다. 모드는 내 표정에 쓰인 그 말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모드의 얼굴색이 바뀌고 시선이 차분해졌다. 모드는손으로 눈을 가렸다. 손가락 때문에 이마에 검은 얼룩이 더 많이 생겼다. 여전히 얼룩이 참기 어려웠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밀어 모드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엄지에 침을 묻혀 모드의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저 잉크와 모드의 하얀 살결만을생각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나 모드는 내 손을 느끼더니 아주 조용히 있었다. 엄지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모드의 뺨으로 움직여 갔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손으로 모드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모드가 눈을 감았다. 뺨이 부드러웠다. 진주와는 달랐다. 진주보다 따뜻했다. 모드가 고개를 돌려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부드러웠다. 잉크 얼룩이 모드의 이마에 검게 남아 있었다. 결국엔 잉크일 뿐이란 생각을 했다. - P814

모드가 등불을 집어 들었다. 방이 어두워지고, 비는 여전히유리창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드는 나를 벽난롯가로 데려가 앉힌 뒤 옆에 앉았다. 모드의 비단 치마가 갑자기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모드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종이를 평평하게 폈다. 그리고 자기가 쓴 글자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시작했다. - P815

마지막으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네 가지가 있군요. 1. 미친 듯 읽어라. 모든 작가는 기본적으로 열정적인 독자여야 해요. 그래서 자신이 느꼈던 멋진 독서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즐길 수 있도록 제공하고 싶어 해야죠.
2. 되도록 날마다 일정한 분량의 글을 써라. (앞서 말했듯이 저는 평일에는 1천 단어씩 써요. 주말에는 글을 안 쓰고요.) 만약영감이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면, 영감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쓴 글이 쓰레기라 할지라도 나중에 더 낫게 고칠 수 있죠. 그게 바로 세 번째예요. 3. <다시> 써라! 잘라내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4. 계속 노력하라. 거절을 두려워하면 안 돼요. 제 처음 소설은 열 곳에서퇴짜를 맞았어요. 자신에게 맞는 출판사를 찾아내야 하고, 그과정에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죠. - P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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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한글날 기념식 담화부터 철자법을 바꾸라고 요청했습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나 기자회견을 보면 당시 맞춤법에 대해 ‘불편하다‘와 ‘어렵다‘ ‘보기 좋지 않다‘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1953년 4월 27일에 당시 백두진 국무총리가 훈령 제8호로 "우리 한글은 철자법이복잡 불편하니,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하여는 준비상 관계로 다소 지연되더라도, 정부용 문서에 관하여는 즉시 간이한 구 철자법을사용하도록 함이 가하다"고 했고, 이후 1953년 5월 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한글 간소화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 그렇게 대통령이 하도 강력하게 지시를 하니까 정부가 대통령의뜻을 받아서 "앞으로 한글 맞춤법은 폐지하고 기음 철자법을 사용한다. 우선 정부만이라도 이걸 사용한다", 이게 국무총리훈령 8호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것은 표시가 없어요. 그리고 당시 문화계의 반대 성명이 있었으니 이걸 1차 파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나온 기사나 자료를 봐도 구식 기법의 실체는 구체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주장하는 구식 철자법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실제로 간소화안을 가만히 보면 그 안에 모순이 꽤 많습니다. 뭔가 체계적으로 통일성이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 P280

●●● 한글 맞춤법통일안은 한글학회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한글 간소화 방안에 반대한 것은 자연스럽다 할 수 있지만, 당시 국어국문학회가 한글 간소화 방안을 선두에 서서 반대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궁금합니다.
◆◆◆ 국어국문학회가 반대한 이면을 들여다보면, 맞춤법을 이 대통령의 권력에 의해 바꾼다는 데 대한 반항도 있지만 그거보다 더 강했던 것은 독재자 이승만을 기회만 있으면 규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국어국문학회의 회원들은 그때 거의 20대로 젊고 혈기 발랄한데, "독재를 보고는 참을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선두에 섰습니다.
지금 회고해보면 당시 국어국문학회에서 발표한 한글 간소화의 반대 성명서를 내가 썼어요. 국어국문학회에서 나보고 쓰라 했지요.
그래서 내가 반대성명서를 쓸 적에 <한글 간소화 방안 이유 편에대한 반대라 해서 학술적으로 반대하겠다는 그런 의미에서 썼어요. - P287

2-3. 한일 국어학자의 교류와 한일사전의 발간
●●● 1960년대에 국어국문학회가 주도하여 한국 국어학자들과 일본한국어학자들과의 교류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 한일 국어학자의 첫 번째 교류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선생님께서 국어국문학회 대표로서 이 교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던 것으로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어떤 계기로 이루어진 것인지요?
◆◆◆ 일본과 우리말 학계와의 첫 접촉은 1962년 10월, 임의단체인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명의의 초청장이 용케 인정돼서 덴리대 조선학과교수가 내한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방일해 많은 학자들을 만나게 되었고요. 단순한 접촉이지만, 유학생 교환, 평가높은 한일사전 완성으로 전개하는 등 교류의 결실을 맺어갔었지요. - P317

◆◆◆ 1966년 4월에 덴리대 안길보가 내한(4월 30일~5월 9일)하여 서울 ‘평화당 인쇄‘에서 사전을 조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7월에 조판을 완료한 후, 옵셋 인쇄용 청쇄로 가져가서 델리 양덕사에서초판을 발행하게 되죠. 이렇게 출판된 사전은 《조일신문》 (1967년 2월25일) 석간에 의외로 상세히 보도되었어요. <최초의 ‘본격적인 조선어사전>이라는 제하에 덴리대 《현대조선어사전》 출판을 보도하면서고려대 김민수 교수는 그 일로 두 번이나 방일했다고 밝혔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어 매일신문사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는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수상이 드물어서 편자인 대학에서도 무슨착오일 것이라고 의아해 했다고 해요.
●●● <현대조선어사전>> 편찬과 관련한 말씀을 들으니, 이 사전의 편찬은 1960년대 초 한일 문화 교류의 상징적인 결과물이라고 해야 할 것같습니다. 일본 신문에서 이 사전의 출판소식을 크게 전하고 선생님의 참여를 특별히 밝힌 것이나, 이 사전이 일본의 권위 있는 출판문화상을받게 된 것은 이 사전의 의의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이사전이 해방 후 한국어의 국제적 보급을 위한 활동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라는 사실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라 생각합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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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하려던 이야기는 이런 게 아니다. 아직 아니다.
나는 일어나 거의 1분 가까이 삼촌의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고는 방을 떠난다. 나는 왔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용하게 나간다. 계단으로 가서 다시 서재까지 간 뒤 일단 서재에 들어서자 문을 잠그고 등을 켠다. 이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공포와 기대감으로 속이 메스껍다. 그러나 시간은 정신없이 흐르고 나는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 나는 서가로 가로질러가 책장의 유리문 걸쇠를 푼다. 「걷힌 커튼」이다. 삼촌이내게 처음 준 책부터 시작한다. 책을 집어 펼쳐서 삼촌의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면도기를 들어 단단히 쥐고는 면도날을 완전히 빼낸다. 빼기가 빽빽하지만 마지막 1인치는 덤비듯튀어나온다. 결국 면도날의 본질은 베는 것이다.
하지만 힘이 든다. 지독하게 힘이 들어 거의 되지가 않는다.
생전 처음 단정하고 보호막이 벗겨진 종이에 금속을 대는 것이힘이 든다. 책이 비명을 지를까 봐, 그래서 내가 발각될까 봐 거의 겁에 질린다. 그러나 책은 아무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마치 갈가리 찢기길 갈구해 왔다는 듯이 <한숨을 쉰다>. 그리고 한숨 소리를 듣자 면도날을 쥔 손에 더욱 속도가붙고 내 행동은 더욱 능숙해지고 현실이 된다. - P435

「건드려 봐요」 내가 말한다. 「건드려 봐요, 그리고 죽어 버려요. 제 안엔 독이 있어요.」
리처드의 손이 내 목에서 1인치 떨어진 곳에서 멈춘다. 나는눈도 깜빡 않고 리처드와 시선을 마주친다. 리처드가 몸을 곧추세운다. 입이 기묘하게 뒤틀리다가 경멸 속에 말려 올라간다.
「제가 당신을 원한다고 생각했나요?」 리처드가 말한다. 「그랬나요?」 거의 쉭쉭거리듯 말을 내뱉는다. 물론 수가 듣게 될지도 모르니 너무 큰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리처드가 홍분해 머리털을 귀 뒤로 넘기며 내게서 떨어진다. 발에 가방이•거치적대자 걷어차 버린다. 「제기랄.」 리처드가 말한다. 외투를벗고 소매의 고리를 잡아당기고 사납게 소매를 풀기 시작한다.「꼭 그렇게 빤히 쳐다봐야 하겠습니까?」 옷에서 팔을 빼며 리처드가 말한다. 「당신은 안전하다고 제가 이미 얘기하지 않았나요? 당신과 결혼해서 제가 당신보다 더 기뻐하고 있다고 혹시라도 생각하신다면••••••.」 리처드가 침대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 기쁜 척해야만 하지요.」 언짢은 말투로 리처드가 말한다. 그리고 이건 결혼에서 기쁜 일로 통하는 부분에 속하지요. 잊으셨나요?
리처드가 담요를 걷어 매트리스 위 시트를 내 엉덩이 부근까•지 드러낸다. 「비켜 보세요.」 리처드가 말한다. 내가 옆으로 간다. 리처드가 앉아 어색하게 몸을 돌린다. 리처드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낸다. 주머니칼이다. - P440

「정말 비참한 경우로군요. 의사가 말한다. 「그러나 저희가부인에게 갖은 노력을 다해서 저희를 믿으셔도 됩니다. 저 비정상적인 상상들을 떨쳐 내도록 만들겠습니다••••••.」「비정상적이라고요?」 리처드가 말한다. 그리고 다시 몸을 떤다.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아, 선생님. 리처드가 말한다. 「아직도 잘 모르시는군요. 그뿐이 아닙니다. 그 점만은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그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정말입니까?」 의사가 말한다. 다른 한 의사가 연필을 든 채 잠시 손을 멈춘다.
리처드가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리처드가하려는 말을 깨닫고 재빨리 얼굴을 리처드의 얼굴 쪽으로 돌린다. 리처드가 내 행동을 알아차린다. 내가 저지하기도 전에 리처드가 입을 연다.
「수전.」 리처드가 말한다. 「네가 네 주인을 대신해 수치심을느끼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너 자신에 대해선 아무런 수치도느낄 필요 없어. 네겐 아무 죄도 묻지 않으마. 내 아내가, 광기속에서, 네게 강제하려 했던 그 모든 관심들을 네가 불러일으키거나 조장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리처드가 자기 손을 깨문다. 의사가 빤히 바라보다가 몸을돌려 나를 본다.
「스미스 양.」 몸을 좀 더 가까이 기울이며 첫 번째 의사가 묻는다. 「저 말이 정말인가요?
나는 수 생각을 한다. 지금 만들어 내야 할 모습의 수가 아니라. 저 벽 너머 방에 있는 수를 생각한다. 나를 배신하고 만족하고 있는, 드디어 자기 집, 런던에 있는 음침한 도둑의 소굴로 돌아갈 생각에 기뻐하고 있는 수를 생각한다. 내 위에 타고 앉은 수를 생각한다. 머리를 늘어뜨리고, <나의 진주••••••>.
- P453

「기다려요」 수의 말이 들린다.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말한다. 「신사님들! 신사님들!」 기묘하게 격식을 차려 말한다.
의사들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건네고, 수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러자 의사들의 목소리가 차가워진다. 리처드가 뒤로물러난다. 마차 지붕이 기울고 출입구가 올라가 보인다. 그리고 수의 모습이 보인다. 두 남자의 손에 팔을 잡히고 간호사에게 허리를 붙들려 있다. 망토가 어깨에서 떨어지고 모자는 기울었으며 머리칼은 핀에서 제멋대로 빠져나와 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표정이 이미 사나워져 있다.
수의 눈이 내게 고정되어 있다. 나는 리처드가 내 팔을 잡고손목을 강하게 누를 때까지 돌처럼 굳어 앉아 있다.
「말해요.」 리처드가 속삭인다. 「제기랄.」 그러자 내가 분명하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외친다.
「오! 불쌍한 우리 마님!」 고동색 점이 찍힌 수의 갈색 눈이 휘둥그레진다. 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오! 오! 이런 모습을 보니 제 가슴이 미어져요!」 - P458

이제 날이 어두워진다. 혹은 하늘색이 어두워지고 우리는점차 목표한 도시에 가까워진다. 유리에 검댕 자국들이 그려진다. 풍경이 조금씩 초라해진다. 오두막은 나무집으로 바뀌기 시잘하고 어떤 집은 유리와 판자가 깨어져 있다. 정원은 잡초발으로 바뀌어 간다. 곧 잡초마저 도랑으로, 도랑은 검은 운하로, 황량한 길로, 돌이나 흙이나 재로 된 둔덕으로 바뀐다. 하지만아직까지 나는 생각한다. <재마저 네 자유의 일부야> 그리고나도 모르게 어떤 흥분의 불길이 이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곧, 흥분은 불안으로 바뀐다. 나는 늘 런던이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정원에 서 있는 집 같은 곳이라고 생각해 왔다. 런던이 우뚝 서 있고, 정돈되어 있으며 깨끗하고 하나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상상했다. 이렇게 중간 중간 끊어져 있고, 마을과 교외 등으로 뻗어나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완결된 곳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제 쭉 펼쳐진 축축한 붉은 땅과 쑥 들어간 도랑들이 보인다. 반쯤 세워진 집과 반쯤 만들어진 교회가 보인다. 유리창없는 창문과 석판을 올리지 않은 지붕과 튀어나온 나무 기둥들이 보인다. 살을 발라 놓은 뼈 같다.
이제 유리에 달라붙은 검댕이 너무 많아져 마치 내 베일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차가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 느낌이 싫다. 회색 거리, 검은색 거리처럼 단조로운 거리를 수없이 지나기 시작하고, 나는 절대 저 거리들을 구별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문과 창문이 지붕과 굴뚝이, 말과 마차와남자와 여자가 엄청나게 뒤섞여 있다! 광고판과 요란한 간판들이 엄청나게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다. <스페인식 블라인드><납관>, <지방&면 부산물>, 온통 글자들이다. 글자들이 6피트높이로 적혀 있다. 글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친다. <가죽및 도구점>, <세 놓음>, <브러엄과 멋진 사륜마차 점>, <종이 염색점>, <완벽 지원>, <세 놓음!>, <세놓음!>, <자발적 출자>.
런던 전체가 글자투성이다. 나는 글자를 보다가 눈을 가려버린다. 다시 눈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내리막길로 들어선 뒤다.
검댕이 짙게 내린 벽돌담이 기차 주변에 솟아 객실에 어둠을 드리운다. 그러고 나서 더러워진 유리로 이루어진 커다란 반원형지붕이 나타난다. 주위로 연기와 김이 피어오르고 새들이 날개를 친다. 우리가 탄 기차가 몸을 떨다 끔찍하게 멈춰 선다. 다른엔진들이 비명을 지르고 문이 쿵 하고 울리고 수천 명이 통로를 가득 메운다.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패딩턴 종착역입니다.」 리처드가 말한다. 「내리시지요 - P463

 그러나 리처드는 내게서 손을 빼고 팔짱을 낀 채 무척 편안하게 서 있다. 리처드는 웃고 있지만 웃음이 기묘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백발의 여자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근처로 온다. 여자는 바스락거리는 태피터 옷을 입고 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고 반짝거린다. 내 쪽으로 와 앞에 서더니 내 얼굴선을 잘 보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본다. 여자가 입을움직이고 입술을 적신다. 시선은 아직도 내게 고정되어 있고 끔찍하도록 열심이다. 여자가 뭉툭한 붉은 손을 내게 뻗자 나는움찔하고 물러난다. 리처드」 내가 말한다. 그러나 리처드는 아직도 가만히 서 있을 뿐이고, 여자의 너무나 끔찍하고 너무나 기묘한 표정에 나는 압도당한다. 나는 가만히 서서 여자가 서투르게 내 베일에 손을 뻗게 내버려 둔다. 여자가 베일을 뒤로젖힌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자 눈빛이 더욱 이상하게 변한다. 여자는 마치 자기 손가락 뒤의 내 얼굴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같다는 태도로 내 뺨을 만진다.
여자가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리처드에게 말한다. 목소리가나이 혹은 감정에서 나오는 눈물로 탁하다.
「잘했어.」 여자가 말한다. - P470

「저 여자」 나는 여자에게 눈길을 주며 말한다. 여자는 아직도 말없이 비누와 머리솔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이 뭐든 <저여자> 말대로 한다고?
「이 경우엔 그렇지. 리처드가 의미심장하게 말한다. 그리고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리자 리처드가 말을 잇는다.「내 말 잘 들어, 모드, 이 계획은 모두가 석스비 부인의 생각이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석스비 부인이 꾸몄어. 그리고 나는악당이긴 해도, 석스비 부인을 속일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사기꿈은 못 돼」
리처드의 얼굴이 정직해 보인다. 그렇지만, 전에도 나는 리처드가 정직해 보인다 생각한 적이 있다. 「거짓말이야.」 내가 말한다.
「아니 이건 진실이야.」
「저 여자의 계획이라니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저 여자가 당신을 브라이어로, 내 삼촌에게 보냈다고? 그리고 그전엔 파리로? 호트리 씨에게로?
「부인이 날 당신에게 보냈어. 당신에게 가기까지 아무리 경로가 복잡했어도 상관없어. 부인이 없었다면, 어찌어찌 같은 경로를 거쳤다 해도 끝이 어떻게 날지 몰랐을 거야. 그저 당신을 지나쳤을 수도 있어! 아마 많은 남자가 이미 그랬을 거야. 그 사람들은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주는 석스비 부인이 없었으니까.」나는 저 둘 사이 공간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내재산에 대해 알고 있었군.」 내가 잠시 뒤 입을 연다. 「그럼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단 얘기네. 저 여자가 알았던 게•••••• 누구지? 삼촌? 우리 집의 하인?」「부인은 널 알았어, 모드, 널, 세상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널 알고 있었어」여자가 마침내 시선을 들어 다시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난 네 어머니를 알았지. 여자가 말한다. - P486

좀 그만해「생각할 거야.」 내가 대답한다. 「언제나처럼 어머니 생각을할 거야. 멍청이로!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 내 아버지가 신사라고 했지? 저들이 날 이 오랜 세월 동안 고아로 살게 했어. 아버지가 아직도 살아있어? 이제까지 아버지가 한 번도••••••?」「모드, 모드」 리처드가 문 앞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며 한숨을 쉰다. 「네 주위를 둘러봐.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생각해 봐. 당신은 내가 당신을 브라이어에서 구해 와 오늘 아침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게, 이제까지의 그런 위험을 무릅썼던게, 그저 당신에게 가족의 비밀을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고, 그게 다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내가 말한다. 이제 내가 아는 게 뭐지? 나에게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내게 말해 주기만 한다면 •••••• 그러나 석스비 부인이 다가와 내 팔을 가볍게 만진다.
「잠깐만, 아가야.」 부인이 굉장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한쪽 눈을 반쯤 감는다. 「잠깐만, 그리고들어 보렴. 아직 내 이야기를 모두 듣지 않았단다. 아직 좋은 소식이 남아 있어. 완전히 녹초가 된 숙녀가 있었다는 거, 기억하지.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아버지와 오빠와 불량배가 있고, 아기가 있고,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말을 했지. <아기에게 뭐라고 이름을 지어 주죠? 당신의 이름, 메리앤으로 지어 주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숙녀는 아기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느니 자기가 아기를 저주하고 말겠다고 말했지. 기억하니, 아가? 그 불쌍한 여자가 말하더구나. <숙녀의 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제게 한번 말씀해 보세요. 숙녀가 된다는 게 자기 파멸 외에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전 아기에게 평범한 이름을 주고 싶어요 보통 사람의 딸처럼요. 평범한 이름을 가지게 하고 싶어요.> <그럼 직접 평범한 이름을 지어 주세요.> 내가 말하지•••••• 아직까진 사실 숙녀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생각뿐이었어. <그럴래요>숙녀가 말해. 예전에 제게 친절하게 대했던 하녀가 하나 있어요. 아버지나 오빠보다도 훨씬 친절했어요. 그 하녀 이름을 따서 아기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요. 그 하녀 이름으로 아기 이름을 지어 줄래요. 그 하녀 이름은••••••「<모드>」 내가 비참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다시 고개를숙인다. 그러나 석스비 부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어 나는 고개를든다. 표정이 기묘하다. 침묵이 기묘하다.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흔든다.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잠시 망설였다가 말한다.
「<수전>」 - P499

섹스비 부인이 한 말들을 이해하겠지, 모드?」 리처드가 내손가락 사이로 보려 애쓰며 말한다. 「한 아기가 다른 아기가 되었어. 네 어머니는 네 어머니가 아니고, 네 삼촌도 네 삼촌이 아없어니야. 네 인생은 네가 살아야 했던 인생이 아니라, 수가 살아야했던 인생이었어. 그리고 수는 네 인생을••••••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눈앞에 자기 인생이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 리처드가 말하는동안, 나는 나의 인생을 본다. 정신 병원, 내가 지녔던 나무 막대기, 브라이어에서 입었던 아름다운 드레스들, 구슬이 달린줄, 안경을 벗은 삼촌의 눈, 책들, 책들••••••. 인생이 깜빡이며 지나가다 사라지고, 진흙탕에 빠진 동전의 반짝임처럼 사라지고어쩔 수 없어진다. 나는 몸을 떨고 리처드는 한숨을 쉰다. 석스비 부인이 고개를 젓고 혀를 찬다. 그러나 내가 저들에게 얼굴을 보여 주자, 둘 다 뒤로 물러선다. 나는 저들 생각처럼 울고 있지 않다. 나는 웃고 있고, 끔찍한 웃음에 사로잡혀 있고, 내표정이 무시무시해 보이는 게 분명하다.
「오, 하지만 이건 너무 완벽하잖아!」 나는 내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가 너무나 간절히 원해 왔던 바로 그것이잖아! 왜 그렇게 보지? 뭘 뚫어져라 보는 거야? 여기 여자애가하나 앉아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 애는 죽었어! 물에 빠져 죽있다고! 천길만길 아래 가라앉아 있다고. 그 애에게 팔과 다리가 있고 살과 옷이 덮여 있다고 생각해? 머리털이 있다고 생각해? 하얗게 드러난 뼈밖에 안 남았어! 백지장처럼 하얗다고! 그 애는 책이야. 글자들이 떨어져 나와 둥둥 떠다니는••••••」 - P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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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정부에게 아무 말도 건네고 싶지 않다. 뻣뻣한 드레스에 살이 베이고 숨이 가빠 오고, 장화에 발목이 쏠려 아프다.
모직 장갑이 피부를 따끔따끔 찔러 와 나는 결국 손에서 장갑을 벗어 버린다. 가정부는 이를 혼자 흐뭇해하며 바라본다. 성질머리 있네, 그렇죠? 가정부가 말한다. 가정부는 뜨개질 바구니와 먹을거리 한 꾸러미를 가지고 있다. 롤빵 몇 개와 소금과 완숙한 흰 달걀 세 개가 들어 있다. 가정부는 달걀 두 개를 치마위로 굴려 껍데기를 깬다. 달걀흰자는 회색이고, 노른자는 말라서 가루처럼 떨어진다. 반드시 그 냄새를 기억해 둘 것이다. 가정부는 세 번째 달걀을 내 무릎 위에 놓는다. 나는 먹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어 마차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게 한다. 「쯧쯧」가정부는 이걸 보고 혀를 찬다. 그리고 뜨개질 거리를 꺼내지만고개를 숙이고 잠에 빠진다. 나는 비참함과 분노 속에 꼿꼿한 자세로 가정부 옆에 앉아 있다. 말은 천천히 나아가고, 여정은 너무나 길어 보인다. 가끔 나무 사이를 지나간다. 그러면 내 얼굴이 유리창에 반사된다. 피처럼 어둡게 보인다. - P269

나는 손을 줄 생각이 없다. 여자가 내 손목을 잡고 팔을 들어올린다. 내 손은 작고 관절 부위가 통통하다. 나는 감촉이 좋지않은 정신병원 비누로 씻는 데 익숙해져 있다. 손톱이 정신 병원의 먼지로 새까맣다. 삼촌이 내 손가락 끝을 잡는다. 손에 잉크 얼룩이 한두 개 보인다. 삼촌이 고개를 젓는다.
삼촌이 말한다. 「그래, 내가 만약 내 책에 천박한 손길이 닿길바랐다면 분명 스타일스 부인에게 간호사를 데려오라 했을 거다. 저런 거친 손을 부드럽게 하라고 장갑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가 네 손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으며, 여길 봐라, 우리가 장갑이라곤 모르는 아이들의 손을 어떻게 부드럽게 하는지 말이다. 남자는 한 손을 외부 주머니에 찌르더니 무언가를 풀어낸다. 책에 쓰는 용품 가운데 하나이다. 책장이 안 넘어가게 눌러 두는, 비단으로 탄탄하게 감아 둔 금속 구슬 줄이다. 남자는 그걸로 고리를 만들더니 무게를 가늠해 보는 듯하다.
그러고는 내 옴폭한 손가락 관절들 위로 잽싸게 내려친다. 그리고 스타일스 부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내 다른 손을 잡고 한 번 더 되풀이한다.
구슬들이 채찍처럼 따끔하다. 그러나 비단 덕분에 살이 찢어지지는 않는다. 첫 방을 맞고 나는 마치 개처럼, 고통과 분노와 순수한 놀라움에서 날카롭게 비명을 올린다. 그리고 스타일스부인이 내 두 손목을 놓아주자 나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흐느끼기 시작한다.
흐느끼는 소리에 삼촌이 얼굴을 찌푸린다. 삼촌은 구슬을 주머니에 도로 넣고 손을 귀에 올린 뒤 바르르 떤다.
「조용히 해라. 꼬마야! 삼촌이 말한다. 나는 몸이 떨리고, 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스타일스 부인이 내 어깨 살을 꼬집고, 나는 더 크게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삼촌이 구슬을 다시 꺼내고 마침내 내가 조용해진다. - P274

「이 제목 보이느냐, 꼬마야? 다가오지 마라! 너보고 읽으랬지, 껑충대며 날뛰라곤 안 했다.」그러나 책이 너무 멀리 있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 눈물이 다시 고이는 걸 느낀다.
「하!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삼촌이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말해 줘야겠구나! 시선을 깔아라, 이 아가씨야, 바닥을 봐라. 아래로! 더! 네 신 옆에 있는 그 손 보이느냐? 그 손은 내 명령으로 검안사, 즉 안과의사의 조언을 받아 거기만들어 놓은 거다. 이 책들은 희귀한 것들이고, 모드 양, 일반인이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 손가락을 한 번 넘어만 봐라. 그럼 널 이 집의 하인 부리듯이 부려 버리겠다. 그리고 다시 한번만 더 그러면, 피가 날 때까지 눈에 채찍질을 하겠다. 그 손이가리키는 곳이 이곳에서 무지의 한계선이다. 때가 되면 넘게 될것이다. 그러나 내 명령에 따라서이고, 네가 준비가 되었을 때다. 알겠느냐, 흐음?」 알 리가 없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미 충분히 조심스러워졌기에 마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삼촌이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서가에 책을 똑바로 놓으며 잠시 시간을 지체한다. - P276

내가 유순해진 것은 채찍질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인내심의 잔인함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친 자의 인내심만큼 끔찍한 것은 없다. 나는 미치광이들이 끝이 없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보아 왔다. 밑이 새는 컵에서 다른 밑이 새는 다른 컵으로 모래를 나르거나, 닳아 올이 풀린 드레스의 땀수를 세거나, 햇살 속의 먼지를 세거나, 그리고 그 합계를 보이지 않는 장부에 적어 넣는 일을 말이다. 만약 저들이 여성이 아니고, 신사였고 부유했다면, 그랬다면 아마도 저들은 학자나 존경받는 고문으로 통했을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이건 물론, 삼촌의 특정 분야에 대한 열정을 완전히 알게 되면서 나중에야 든 생각이다. 그날 나는 어린 나름으로 그 열정의 표면만 슬쩍 곁눈질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어두움이 보이고그 침묵이 느껴진다. 사실상 그 어두움과 침묵이 바로 물이나왁스처럼 삼촌의 집을 채우고 있는 어둠과 침묵이다.
만약 내가 대항해 싸운다면, 나는 저 안으로 깊이 끌려 들어갈 것이고, 그 안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항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저항을 완전히 멈추고, 그 끈적끈적하고 소용돌이치는물살 속으로 몸을 내맡긴다. - P286

리버스 씨의 계획은 이러하다. 리버스 씨는 런던에서 브라이어로 여자아이를 하나 데려와 내 하녀로 넣을 생각이다. 그 아이를 이용한 뒤엔 속여 먹으려 한다. 리버스 씨가 마음에 둔 아이가 하나 있는데, 꼭 내 나이에 나처럼 금발이라고 한다. 일종의 도둑인데 자기 일에 지나치게 주도면밀하지도, 지나치게 똑똑하지도 않다고 한다. 리버스 씨는 유산을 살짝 떼어 주겠노라 약속함으로써 아이를 안심시킬 생각이라고 말한다. 가령, 이삼 천 정도를 약속하는 거죠. 더 요구할 만큼 야망이 있는 아이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그 아이는 원래 도둑들이 그러하듯, 그릇이 작습니다. 또, 무릇 도둑이 모두 그러하듯, 자신을 실제보다 더 대단하게 여기기도 하지만요.」 리버스 씨는 어깨를 으쓱한다. 결국, 아이 몫은 얼마가 되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 아이가 얼마를 요구하든 리버스 씨는 동의할 테니까. 그리고 단 한푼도 못 만져 볼 테니까. 아이는 나를 순진하다 여기고, 나를 유혹하는 데 자기가 돕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는 우선 나를 설득해 내가 리버스 씨와 결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리버스 씨가 다음 단어, <정신 병원>이라는 말을 꺼내기 전에 잠시 망설인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정신 병원으로 날 보내는 것을 돕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것은 그 아이가 될 것이다. 아이는 저항할 것이다. 그리고 리버스 씨는 아이가 저항하길 바란다! 아이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더욱 정신 병원의 간수들은 이를 광기의 한 형태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병원의 더욱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요, 릴리 양」 리버스 씨가 결론을 내린다. 간수들이 당신 이름을 붙이고, 당신 어머니의 딸로서, 그리고 당신 삼촌의 조카로서의 당신의 내력을 들이댈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을 당신으로 규정하는 모든 것들이 그 아이에게 가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하녀가 망토를 들어 벗겨 주듯그 사람들이 당신 어깨에서 삶의 무게를 내려 주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모든 굴레를 훌훌 벗어던진 채, 남의 눈도 의식할것 없이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겁니다. 새로운 인생을향해서요. 그리고 거기서 당신의 마음에 꼭 드는 당신 자신으로다시 갈아입는 겁니다.」 - P336

데나는 그 아이가 근처에 있다는 점과 아이에 대한 궁금증으로 밤새 자다 깨다 한 터이다. 삼촌에게 가기 전에 당장 그 아이를 보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것 같다. 마침내 일곱 시 반경에 하인용 계단으로 통하는 복도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스타일스 부인이 웅얼대는 소리가 들린다. 「다 왔습니다. 내방문을 똑똑하고 두드린다. 어떻게 서 있어야 하나? 나는 벽난롯가에 가 선다. 말할 때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릴까? 아이가 그걸 알아차리려나? 아이가 긴장해 숨을 죽일까? 나는 숨을 죽이고 있다. 이윽고 몸에 열이 난다. 얼굴에도 피가 몰릴 것이다.
문이 열린다. 스타일스 부인이 먼저 들어오고, 잠시 망설이다아이도 내 앞에 와 선다. 수전, 수전 스미스, 수키 토드리, 속이기 쉬운 아이, 내 인생을 가져가고 자유를 가져다줄 아이.
예상보다 날카롭게 보여 깜짝 놀란다. 나는 아이가 나와 닮았으리라 생각했다. 아름다우리라 상상했다. 그러나 아이는 작고 마르고 점투성이에 머리는 모래색이다. 턱이 무척 뾰족하다. 눈은 나보다 더 어두운 갈색이다. 눈빛은 너무 솔직하고 또 너무 교활하다. 아이는 딱 한 번 탐색의 눈길로 내 드레스와 장갑, 슬리퍼, 스타킹에 놓인 자수를 본다. 그러고는 눈을 끔벅인다. 훈련받은 내용을 생각해 보는 모양이다. 급하게 무릎 굽혀 인사를 한다. 인사를 잘해 내 기뻐하고 있음이 눈에 보인다. 아이는 나에 대해서도 기뻐하고 있다. 아이는 나를 바보라 생각한다. 그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난다. 나는 생각한다. <넌 나를 파멸시키려 브라이어에 온 거야. 나는 앞으로 한 발 나가 아이의 손을 잡는다. <얼굴을 붉히지 않아? 떨거나 눈을 내리깔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는 내 시선을 되받고 아이의 손가락, 손톱을 물어뜯은 차고 단단한 손가락은 너무나 차분하게 내 손에 머물러 있다. - P361

<넌 나를 삼켜 버리려고 브라이어에 온 거야> 내가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나는 수전이 그래 주길 바란다. 수전이 그래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스스로 내 인생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내 인생을 쉽게 내던진다. 등불 심지가 심지 주위의 유리를 더럽히려 연기를 내뿜는것과, 혹은 거미가 벌벌 떠는 나방을 꽁꽁 묶으려 은실을 내뿜는 것과 비슷하다. 수전 주위로 자리 잡고 꽉 조여 가는 실을 상상한다. 수전은 전혀 모르고 있다. 너무 늦은 뒤에야 붙잡힌 것을 알게 될 터이고, 그다음에야 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어떻게 수전을 나로 만들어 놓았는지 알게 될 터이다. 수전은 지금으로선 그저 피곤하고 불안하고 지루할 뿐이다. 나는 정원을거닐러 나가며 수전을 데려가고, 수전은 느릿느릿 뒤를 따른다. 우리는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수전이 멍한 시선으로 하품을•하고 눈을 문지른다. 수전은 손톱을 깨문다. 그러다 내 시선을느끼고 그만둔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선 그끝을 씹는다. - P368

아프지 않고, 그래서 나는 소리 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덕에 여러 가지 기묘한 느낌들을 한꺼번에 느낀다. 금속이 갈리는느낌, 내 턱을 잡고 있는 수의 악력, 부드러운 숨결. 수가 이를갈며 내 입안을 자세히 보고 있는 동안, 오로지 수의 얼굴만이보인다. 그래서 나는 수의 눈을 바라본다. 이제야 한쪽 눈에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좀 더 어두운 갈색 점이 박혀 있음을 안다. 뺨 선을 본다. 부드럽다. 귀를 본다. 단정하게 생겼고, 둥근 귀고리며 펜던트를 달기 위해 귓불을 뚫었다. 「귀를 어떻게 뚫었어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렇게 물으며 손끝으로 옴폭 파인곳을 만진다. 「뭐긴요, 아가씨, 바늘로 하는 거죠.」 수가 말한다. 그리고 얼음 조각으로요••••••.」 골무가 계속해 이를 갈아낸다. 수가 웃음 짓는다. 「제 이모가 이 일을 하세요.」 수가 일하면서 말을 건넨다. 「아기들에게 해주죠. 그리고 절 위해 해주셨어요. 거의 다 됐어요! 하!」 수가 좀 더 천천히 갈다가 손을 멈추고 이를 만져 본다. 그리고 다시 문지른다. 물론 아기에게 해주는 게 좀 어려운 일이긴 하죠. 실수로 골무가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음. 그런 식으로 해서 잃은 경우가 제가 아는 것만도 여럿이에요.」 잃었다는 게 골무인지 아기인지 잘 모르겠다. 수의 손가락이,
그리고 내 입술이 축축해진다. 나는 침을 삼키고, 또 삼킨다. 내혀가 움직여 수의 손에 닿는다. 갑자기 수의 손이 너무 크고 너무 이상하게 보인다. 그리고 나는 변색해 있을 은을 생각한다. 내 숨에 은이 젖고 미끄러워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고, 맛이느껴지는 듯하다. 아마도, 수가 내 이에 대고 조금만 더 오래 작업을 했어도 나는 일종의 공황상태에 빠졌으리라. 하지만 이제 골무가 점차 느려지면서 곧 수가 손을 멈춘다. 수는 자기 엄지로 다시 이를 만져 보고는 내 턱을 다시 손으로 잡았다가 물러난다. - P381

리처드가 줄지어 선 골풀을 따라 비틀대며 나를 데리고 간다.
우리는 강급이와 벽 근처에서 강을 따라 걷는다. 발걸음이 멎은뒤 리처드가 손을 내 어깨에 얹고 나를 꽉 잡는다.
「오, 모드」 리처드가 다시 말한다. 「전에 여기 왔을 땐, 당신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그 비슷하게 마음이 약해진 거라고생각했지요. 하지만 이건•••••!
나는 리처드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리처드가 웃는 게느껴진다. 웃지 마세요.」 내가 떨면서 말한다. 「웃지 말라고요.」
「웃는다고요? 제가 더 못되게 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텐데요. 신사의 구미에 맞는 재미란 이런 종류의 일들로 더욱 박차가 가해지는 법이란 걸 당신도 아실 테지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다 아는 일 아닙니까. 저는 제가 악당인 만큼까지 신사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도덕률을 따르니까요. 사랑에 빠져 자신의 앞길을 망치는 건 당신의 자유입니다. 제가상관할 바도 아니고요••••••. 그렇게 몸부림치지 좀 마십시오. 모드! 나는 리처드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 리처드는 나를 좀 더 꽉 잡더니 자기에게서 몸을 살짝 뒤로 빼게 해준다. 하지만 내 허리를 잡는다. 「사랑에 빠져 자신의 앞길을 망치든지말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리처드가 다시 말한다. 하지만 저를 제 돈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여기에서 비참하게 시간을 보내게 하다니요. 우리의 계획, 우리의 희망, 당신의 밝은 미래를 뒤집어 버리다니요. 안 될 말씀입니다. 절대로요. 당신이 우릴 이렇게 여기에 묶어 두는 사소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 지금은요. 자, 이제 수를 깨웁시다••••••. 제가 장담하지만이렇게 몸부림치시면 당신만큼이나 저도 피곤합니다! •••••• 수가 깨어나 우리를 찾아내게 합시다.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여줍시다. 제 쪽으로 좀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주 좋아요. 제가 당신을 이렇게 잡겠습니다. 그래서 수가 결국 우리를 연인으로 생각하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끝을 보도록 하지요. 이제, 그대로 서 있으십시오.」 - P411

「잘 모르겠어.」 내가 말한다. 「내가 내 마음을 확실히 알 수만있다면 좋을 텐데!」하지만 사랑하신다면, 주저하다간 그분을 잃어요!」 수가 말한다.
나는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수의 시선이 너무나 의식되어 눈길을 돌린다. 수는 내게 맥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떨리고 꿈을꾸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게 리처드의 키스는 손바닥에 화상을 입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수가 알아 버린다. 내가 리처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얼마나 내가리처드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되었는지를.
수가 하얗게 질린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수가 속삭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가 말한다. 내게 무슨 선택이있겠어?」
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서 돌아서 닫힌 예배당 문을잠시 바라볼 뿐이다. 나는 창백한 수의 뺨을, 턱을, 귓불의 바늘자국을 바라본다. 다시 내게로 돌아섰을 때 수는 표정이 바뀌어 있다.
리버스 씨와 결혼하세요.」 수가 내게 말한다. 리버스 씨는 아가씨를 사랑하시잖아요. 그분과 결혼하세요, 그리고 뭐든지하라는 대로 하세요.」

수는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나를 속이기 위해, 나를 해치기위해 브라이어에 왔다. <수를 봐> 내가 혼자 중얼거린다. <저렇게 천하고 갈색 머리에 경박한 꼴이라니! 도둑, 조그만 핑거스미스>나는 슬픔과 분노를 삼켜 왔던 것처럼, 욕망도 삼켜버리겠노라고 생각한다. 수 때문에 과거에 붙들리고 미래를빼앗긴 채, 좌절하고 억눌리며 살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 P417

 나는 생각한다. <수는 부끄러워하는 거야>그래서 내가 입을 연다.
「내가 정말 정신없이 잤지.」 굉장히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안 그래?」
수의 눈꺼풀이 떨린다. 「그러셨어요.」 수가 대답한다. 「악몽도 꾸지 않으시고 말이죠 「악몽은 안 꿨어. 꿈을 하나 꾸기는 했지만 내가 말한다.
하지만 그 꿈은•••••• 그 꿈은 무척 달콤했어. 그 꿈에 네가 나왔던거 같아, 수••••••
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수가 홍조를 띠는 것을 보면서, 입 맞추던 순간 수의 입술이 누르던 힘이, 우리의 격렬하고 불완전하던 키스의 이끌림이, 밀어 올리던 수의 손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나는 수를 속일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수를 속일수 없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 나는 말할 것이다. <넌 나를 착하다고 생각하지. 난 착하지 않아. 하지만 난 너와 함께라면, 착해지도록 노력할 수 있어. 이건 리처드의 계획이었어. 우린 그 계획을 우리 걸로 만들 수 있어••••••>「아가씨 꿈에서요?」 마침내 수가 내게서 떨어지며 말한다.
「아닐 거예요, 아가씨. 제가 아니에요. 리버스 씨일 거예요. 보세요! 저기 계시잖아요. 담배를 거의 다 태우셨네요. 아가씨는 저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수는 한 번 말을 더듬는다. 하지만 그다음 계속 말을 잇는다. 「저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좀 기다려 보시기만 하면요. -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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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토를 두르세요.」 내가 말했다. 이제 빗발이 잦고 거세졌다. 모드는 내가 두건을 씌우고 끈을 묶어 주는 동안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만약 내가 모드를 무덤에서 데리고 나가지않았다면 모드는 흠뻑 젖을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비틀거리는 모드를 데리고 작은 예배당문으로 갔다. 문은 녹슨 사슬과 맹꽁이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 위로 썩은 나무 현관이 돌출되어 있었다. 거센 빗방울을 맞자, 현관 나무가 떨렸다. 치마 밑단이 흙탕물로 시커메졌다. 우리는 예배당 문에 어깨를 딱 붙인 채 서로 가까이 서 있었고, 비는 곧게, 화살처럼 곧게 내렸다. 화살 천 개와 불쌍한마음 하나 모드가 말했다.
「리버스 씨가 내게 청혼했어, 수.」모드는 독송을 하는 여자아이처럼 생기 없게 말했다. 그리고모드가 이 말을 하기를 그토록 열심히 기다려 왔음에도, 대답을 하는 내 목소리도 모드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내가 말했다.
「어머, 모드 아가씨.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 - P182

「모르겠어.」
「모르시다니요? 어떻게 그런 일을 모르실 수가 있으세요? 리않으세버스 씨가 다가오는 걸 보실 때면 가슴이 콩닥거리지요? 그분 목소리에 가슴이 설레고 손길에 몸이 떨리지 않으세요? 밤에는 그분 꿈을 꾸지 않으세요?」
모드는 도톰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게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뜻이야?」 「당연하죠! 그럼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모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손을한데 모으고 젠틀먼이 어제 입술을 댔던 손바닥 부분을 다시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모드가 그곳을 어루만지는 게 아니라 문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의 키스를 소중히 여기고있던 게 아니었다. 모드는 젠틀먼 입이 닿은 자리를 화상 입은것처럼, 가려운 것처럼, 가시 박힌 것처럼 느꼈고, 입술이 닿았던 곳을 문질러 그 기억을 지우려던 것이었다.
모드는 젠틀먼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다. 모드는 젠틀먼을두려워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모드는 눈을 뜨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가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모드가 전율했다. 
「리버스 씨는 나를 원하셔. 청혼을 하셨고, 나를 자기 아내로 맞으실 생각이야.」
「그러면 싫다고 하세요.」
모드는 내 말이 안 믿긴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 역시 내가한 말이 믿기지 않았다. - P186

나는 거의 일어설 뻔했다. 하마터면 문 쪽으로 갈 뻔했다. 하인 역할을 하는 데 그토록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드를 보았다. 얼굴에 혈색이 하나도 없었다. 모드가 말했다. 「하지만 마거릿이나 다른 아이들이 문 앞으로 오면 어떻게 해요?」「그 사람들이 뭐 하러 그러겠습니까?」 젠틀먼이 말했다. 그리고 그런다한들 무슨 소리를 듣겠습니까? 우리가 아무 소리없이 조용히 있을 텐데 말이죠. 그러면 하인들은 다시 가던 길로 갈 겁니다.」 젠틀먼이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좀 봐줘, 수.」젠틀먼이 음흉하게 말했다. 「연인들을 위해 좀 봐줘. 넌 연인이있었던 적 없어?」 젠틀먼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진, 거의 나가려던 중이었다. 하지만 돌연 <자기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젠틀먼은 왕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사기꾼에 불과했다. 끼고 있는 반지는 가짜였고, 가지고 있는 은화니 금화니 모두가 가짜였다. 젠틀먼보다는 내가 더 모드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모드 침대에서 모드와 함께 잤다. 나는 모드가 나를 자기 누이동생처럼 사랑하게 했다. 젠틀먼은 모드를 겁내게 할 뿐이었다. 나는 원한다면 모드가 젠틀먼에게서 마음을 돌리게 할 수도 있었다! 결국에 젠틀먼은 모드와 결혼할 터였고, 그거면 충분했다. 원할 때마다 젠틀먼이 모드에게키스할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하지만 모드가 질질 끌려 다니며 겁먹게 놔두고 싶진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빌어먹을. 어찌되든 3천 파운드는 받을 거잖아!>
그래서 내가 말했다. 「저는 릴리 아가씨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아가씨 삼촌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그리고 스타일스 부인이 알기라도 하면 전 여기를 떠나야 한답니다.」
젠틀먼은 나를 보고 인상를 썼가. 모드는 나를 전혀 보고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모드가 고마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 P191

젠틀먼이 옳았다. 빌어먹을 젠틀먼. 모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젠틀먼이 마음씨와 가스관에 대해 무엇이라 지껄이든, 모드는 상냥하고 친절했으며 다정함과 아름다움과 선함 그 자체였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젠틀먼의이야기는 옳았다. 어떻게 빈손으로 버러에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석스비 부인이 한몫 잡게 해줘야 했다. 어떻게 부인과입스 씨, 그리고 존에게 가서 내가 계획을 박차고 나왔으며 3천파운드를 날려 버렸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유라고는 단지••••••.
이유는 뭐? 단지 내 마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와서?
아마도 그 말을 들으면 부인이나 입스 씨, 존 모두 내가 용기가없어서 실패했다고 말할 터였다. 내 앞에서 비웃을 터였다! 내게는 명성이 있었다. 나는 살인자의 딸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 가운데 고운 마음씨는 포함되어 있지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손 치자. 그렇다고 어떻게 모드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 P201

「당신은 진주예요.」 내가 말했다. 모드는 그토록 하얬다. 「진주예요, 진주, 진주]

어둠 속에서 말하기는 쉬웠다. 행동하기도 쉬웠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침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회색 빛줄기를 보며 내가 지난밤에 한 일을 떠올리자 <하느님, 맙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드는 여전히 자고 있었고 눈살을 찌푸리고있었다. 입이 벌어져 있었다. 입술은 말라 있었다. 내 입술 역시말라 있었다. 손을 올려 내 입술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손을 뗐다. 모드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몸 안쪽에서부터 전율이 일었다. 이 전율은 지난밤 내가 모드와 몸을 맞대고 움직였을 때 나를, 우리 둘을 휘어잡았던 전율의 유령이었다. 〈갖다.〉 버러의 여자아이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 남자가 널 가졌어?> 사람들은 그것이 재채기처럼 다가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채기는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전혀 관계없었다••••••.
나는 기억을 되살리며 다시 몸을 떨었다. 손가락 끝을 혀에댔다. 날카로운, 식초 같은, 피 같은 맛이 났다.
돈 맛이 났다.
두려워졌다. 모드가 살짝 움직였다. 나는 모드에게서 시선을돌린 채 일어났다. 내 방으로 갔다. 아픈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술에 취한 모양이었다. 아마 저녁 식사 때 마신 맥주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어쩌면 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손과 얼굴을씻었다. 물이 너무 차가워 바늘에 찔리는 느낌이었다. 다리 사이도 씻었다. 그리고 옷을 입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모드가 깨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모드에게 갔다. 커튼 사이공간으로 모드를 바라보았다. 모드는 베개에서 일어나 잠옷 끈을 매고 있었다. 지난밤 내가 풀어 놓은 끈이었다. - P213

그 순간, 마침내, 나는 젠틀먼이 꾸민 더러운 음모의 대상이 바로 나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울부짖었다.
「이 돼지 같은 자식아!」 다시 몸을 비틀어 젠틀먼 쪽으로 다가가려 하며 내가 외쳤다. 이런 망할 놈! 오!」 젠틀먼은 사륜마차 출입구에 서 있었다. 마차가 살짝 기울어있었다. 크리스티 의사는 나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고, 의사의얼굴이 험악해졌다.
「제 병원에서는 그런 말을 쓰시면 안 됩니다. 리버스 부인.」 의사가 말했다.
「이 남색꾼 새끼.」 내가 의사에게 말했다. 「저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저놈이 거짓말하고 있는 걸 모르겠어? 당신이 데려가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나는 여전히 발버둥쳤고, 의사는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의사 너머로, 흔들리는 사륜마차로 눈길을 주었다. 젠틀먼은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젠틀먼 너머로 모드가 앉아 있었다. 미늘창 가리개사이로 들어온 빛줄기가 모드를 비추고 있었다. 모드의 얼굴은 말랐고, 머리털은 부스스했다. 입고 있는 드레스는 하녀들 드레스처럼 낡아 있었다. 모드의 눈은 거칠었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 뒤로 보이는 모드의 시선은 차갑고 단단했다. 대리석처럼, 놋쇠처럼 단단했다.
진주처럼 단단했고, 진주 속 모래처럼 단단했다.
크리스티 의사는 내가 모드를 보는 것을 보았다.
「뭘 보고 계시는 겁니까?」 크리스티 의사가 말했다. 「부인의 하녀를 아실 텐데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드는 할 수 있었다.
모드는 평소와 다른 목소리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쌍한 우리 마님. 오! 이런 모습을 보니 제 가슴이 미어져요!」

당신은 모드를 숙맥이라고 생각했다. 숙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계집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년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 P258

7

처음에, 나는 내가 매우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이다.

나는 피로 미끈거리는 탁자를 상상한다. 어머니에게서 흘러나온 피이다. 무척 흥건하다. 너무나 홍건해서 피가 잉크처럼 흐른다는 생각이 든다. 피가 그 아래 바닥에 흐르는 걸 막으려고 여자들이 도자기 그릇을 받쳐 놓았고, 그래서 어머니의 비명사이사이로 흐르는 고요함을 <똑!똑!> 하는 소리가 채우고 있다. 어쩌면 시계가 엇박자로 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엇박자소리 뒤편으로 다른 비명들이 좀 더 약하게 들려온다. 미치광이들이 질러 대는 비명과 간호사들이 고함지르고 야단치는 소리이다. 여기는 정신 병원이니까. 어머니는 미치광이이다. 사람들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지 못하게 하려고 어머니를 탁자에 끈으로 묶어 놓았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려고 턱도 끈으로 벌려 놓았다. 내가 나올 수 있도록 다리 역시 끈으로 묶어 벌려 놓았다. 내가 태어나도 끈은 그대로 어머니를 묶고 있다. 어머니가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까 봐 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머니 가슴에 올려놓자 내 입은 젖을 찾아간다. 나는 젖을 빨고, 병동은 나를 중심으로 침묵에 잠긴다. 아직까지도 〈똑!똑!> 하고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만이 들린다. 내 인생 최초의 몇 분을, 어머니의 최후의 몇 분을 세어 나가는 소리이다. 곧, 헤아리는 소리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가슴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다시 올라간다. 그리고 영원히 가라앉는다.
그걸 느끼고 나는 더욱 거세게 젖을 빤다. 그러자 여자들이 나를 어머니에게서 떼어 낸다. 그리고 내가 울자, 여자들이 나를 때린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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