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알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댄버스 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들이댔다. "물론 그렇겠죠. 이제 알았나요? 당신은 절대 그분을 이길 수 없어요. 그분은 아직도 이곳 안주인이에요. 진짜 드윈터 부인은 바로 그분이지요. 그림자이고 유령인 건 그분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아무도 원치 않아 내쳐진 잊혀져버린 존재가 바로 당신이에요. 자, 그런데도 맨덜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왜 그분께 맨덜리를 맡기고 떠나지 못하지요?"
나는 창문 쪽으로 물러섰다. 다시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다. 댄버스 부인은 내 팔을 붙잡았다.
"왜 가지 않는 거예요? 우린 아무도 당신을 원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도 마찬가지죠. 당신을 원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분을잊지 못하니까요. 드윈터 씨는 그분과 함께 이 집에 홀로 있고 싶어 해요. 교회 지하 묘지에 누워 있어야 할 사람은 그분이 아니라당신이에요. 죽어야 할 사람은 드윈터 부인이 아니라 당신이라고요"
댄버스 부인은 창문을 열고 나를 그쪽으로 밀었다. 흰 안개 때문에 형체가 희미해진 테라스가 내려다보였다. "저 아래를 봐요. 정말 쉽지 않겠어요? 어째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목이 부러진다 해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거예요. 아주 빠르고 편한 방법이죠. 물에 빠져 죽는 것과는 달라요. 왜 당장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안개가 창밖을 가득 채웠다. 끈적거리고 습한 공기가 내 눈에, 콧구멍 안에 밀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을 꼭 잡았다.
"두려워 마세요. 밀어버리지는 않을 테니. 당신 옆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혼자서도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대체 당신이여기 맨덜리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살아갈 이유가 별로없는거죠? 지금 당장 뛰어내려 끝장을 내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요."
테라스의 꽃봉오리들이 보였다. 수국이 잔뜩 무리 지어 있었다. 돌바닥은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폭신할 듯했다. - P381

"물론 그대로 둘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드윈터 씨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잠수부는 보트 주위를 돌다가또 다른 한층 더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실 문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꽉 잠겨 있고 선창도 닫혀 있더랍니다. 돌을 하나 주워 선창을 깨고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물이 가득 차긴 했어도 안쪽도 멀쩡하더라는군요.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놀라서 숨이 넘어갈 뻔했다고 합니다."
설 대령이 말을 멈추고는 누구 엿듣는 사람이 없나 확인하려는듯 등 뒤를 돌아보았다. "선실 바닥에 반듯이 누운 시체가 보였다는 겁니다. 물론 뼈만 남은 시체였지요. 하지만 사람이 틀림없다고합니다. 머리통과 팔다리가 보였다고 하니까요. 그는 바로 물 위로 올라와 제게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장 이렇게 달려온 겁니다."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다음에는 충격을 받아, 마지막으로는 공포에 휩싸여 그를 응시했다.
"혼자 배를 탔던 게 아닌가요?" 나는 속삭였다. "누군가 함께 있었다는 얘기군요? 아무도 모르게?"
"그런 것 같습니다."" - P408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레베카가 이겼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의 손 아래 있는내 손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우리 사이에는 늘 레베카의 그림자가 있었소. 그놈의 그림자가우리 둘을 갈라놓곤 했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가슴속에 늘 자리 잡고 있는데 어떻게 당신을 이렇게꼭 껴안아줄 수 있었겠소? 죽기 전에 나를 바라보던 레베카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오. 그 비열한 미소가 또렷하오. 레베카는이미 그때 이런 일을 예상했던 거요. 결국에는 자기가 이긴다는걸 알고 있었소"
"맥심" 내가 속삭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얘길하고 싶은 거예요?"
"그 보트, 그 보트가 발견되었소. 오늘 오후에 잠수부가 찾아냈다는군"
"저도 들었어요. 설 대령이 알려주었죠. 당신은 잠수부가 선실에서 보았다는 그 시체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요."
"결국 레베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뜻이죠. 누군가 함께 바다에나갔던 거예요. 이제부터 그자가 누군지 찾아내야죠. 그럼 되는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소."
"전 당신과 함께예요. 제가 당신을 도울 거예요"
" 레베카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없소. 레베카 혼자였소"
나는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얼굴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선실 바닥에 있는 시체가 바로 레베카요." - P412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졌다. 레베카가 마침내 장막에서 걸어 나와 살아 있는 인물로 나타났다. 말에게 채찍을 내리치던 레베카 승리감에 도취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발코니에 몸을 기대던 레베카해변에서 깜짝 놀란 표정의 벤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은 친절해. 다른 사람과 달라 날 정신병원에 넣지 않을 거지?"라고했었다. 밤에 그 숲길을 따라 걸어온 다른 사람, 키 크고 늘씬한다른 사람이 있었다. 뱀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맥심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전히 서재를 이리저리 오가면서말이다. "결혼한 지 닷새째 되는 날 결국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았소. 몬테카를로의 언덕 위로 올라갔던 때를 기억하오? 거기 다시 서서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던 거요. 그 여자는 거기 앉아 깔깔 웃어댔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소.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지.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추악한 얘기였소. 그제야 난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어떤 괴물과 결혼한 것인지 알았소. 혈통과 두뇌, 미모라고? 오 맙소사!" - P423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말이야, 맥스, 당신은 물론이고 세상 그누구도 그 애가 당신 자식이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해. 그 아이는당신 성을 물려받고 여기 맨덜리에서 자라겠지. 당신이 할 수 있는일은 하나도 없어. 당신이 죽고 나면 맨덜리는 그 아이 것이 되지이 역시 당신이 막지 못하는 일이야. 그 아이가 유일한 상속인일테니.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맨덜리를 위해 후계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내 아들이 밤나무 아래에서 유모차를 타고 잔디밭에서 목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행복의 계곡에서 나비 잡는 모습을당신도 즐겁게 지켜봐야 해. 내 아들이 날이 갈수록 커가는 것, 당신이 죽으면 이 모든 게 그 아이 소유가 되리라는 것은 맥스, 당신인생 최대의 악몽이 아니겠어?‘
그 여자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담뱃불을 붙이고 창가로 가서 섰소, 그리고 웃어대기 시작했지. 한참을 그치지 않고 웃었소. 영원히 그렇게 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 ‘오, 하느님, 정말이지 얼마나 기막히게 재미있는지! 자,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 말뜻을 당신도 이해했겠지? 멍청한 주민들, 눈먼 소작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 늘 바라마지않던 일이라고 주인 나리에게 축하 인사를 하겠지. 난 완벽한 어머니가 되는 거야. 이제까지 완벽한 아내였던 것처럼.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를 거야. 아니, 추측조차 못 할걸‘
그 여자는 창가에서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았소. 미소 띤 얼굴로 한 손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른 한 손은 담배를 쥐고 있었지.
내가 죽여버렸을 때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소. 총알은 정확히그 몸을 관통했다오. 그 여자는 금방 쓰러지지 않았소.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며 한동안 서 있었소......"
이어 맥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져 속삭임으로 변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이 차디찼다. 나는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 누워 잠자는 재스퍼의 등을, 가끔씩 바닥을 살짝 내리치는 그 꼬리를 쳐다보았다.
"난 생각을 못 했소." 그는 무감각한 목소리로 지친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이 총에 맞으면 그토록 피가 많이 흐른다는 걸 말이오." - P434

"부인께서는 그렇게 진실을 요구했고 전 알려드렸습니다. 어떤환자들에게는 그편이 더 좋은 법이지요. 괜히 복잡하게 말해봤자 좋을 게 없거든요. 댄버스 부인인지 드윈터 부인인지 하여튼 그 부인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분이 아니더군요 여러분도 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인께서는 침착했습니다. 전혀 충격을 받지않더군요. 이미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료비를 내고 나갔지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파일함을 닫고 서류철도 덮었다. "제 진단 소견은 이랬습니다. 그때는 통증이 경미한 수준이었지만 곧 견디기 어렵게 될 것이고 서너 달 후에는 모르핀을 맞아야 한다고요. 이미 수술할 때가 지났으므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모르핀을 맞으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벽난로 위의 시계가 째깍거렸고 소년들이 테니스를 쳤다. 하늘에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 P572

"줄리언 대령이 진실을 눈치챈 것 같소?"
나는 내 안경 너머로 맥심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분명 알았을 거요 분명히 맥심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 해도 절대로 아무 말 안 할 거예요. 절대로"
"그야 그렇겠지"
그는 지배인에게 다시 술을 시켰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구석 자리에서 말없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레베카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 거요. 마지막 허세였지. 내가 자기를 죽이게 만들고 싶었던 거요. 모든 것을 다 내다보았겠지.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웃어댔던 것이고 죽으면서도 그렇게 웃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거야"
나는 침묵했다. 그저 브랜디소다를 마셨을 뿐이다. 이제 다 끝났다. 다 정리가 되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맥심의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질 일은 없다.
"마지막으로 한 방 먹인 셈이지. 가장 멋진 한 방이었소. 지금도 나는 레베카가 이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오" - P583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하늘을 보았다. 점점 밝아지는 것 같았다. 태양이 떠오르는 듯 붉은 기가 돌았다. 붉은 기는 조금씩 퍼져갔다.
"오로라는 겨울에 보이는 거지요? 지금 같은 여름에는 안 보이지요?"
"저건 오로라가 아니오. 저건 맨덜리요"
나는 흘낏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맥심 맥심, 저게 뭐죠?"
그가 속도를 냈다. 차는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올라간 상태였다. 래니언은 이제 발밑에 있었다. 왼쪽에는 가느다란 은빛 강줄기가흘렀다. 9킬로미터 떨어진 케리스로 가면서 점점 더 넓어질 강줄기였다. 이제 맨덜리로 가는 길이 펼쳐졌다. 달이 없었다. 머리 위쪽 하늘은 완전히 깜깜했다. 하지만 지평선은 깜깜하지 않았다.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빛이었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과 함께 불탄 재가 날아왔다.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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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매일 이 방들을 살피고 먼지를 턴답니다. 다시 오시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내선 전화를 거시면 되지요. 언제든 안내하겠습니다. 하녀들은 여기 못 오게 했습니다. 오로지 저만 출입하는곳이지요."
다시금 기분 나쁘게 다정한 말투였다. 얼굴에 머금은 미소는 가식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주인어른이 출타하시고 혼자 외로울 때면 이 방에 와서 앉아 계시고 싶은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방이니까요. 이 방을 보면 그분께서그렇게 오래전에 떠나셨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요? 잠시 외출했다가 저녁이면 곧 돌아오실 것 같지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말라 있었다.
"비단 이 방뿐만이 아닙니다. 거실, 홀, 정원 곁방까지 전 여러곳에서 그분을 느낀답니다. 어떤가요, 마님께서도 그렇죠?"
댄버스 부인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어느덧 속삭임에 가깝게 낮아졌다. "때로 이 복도를 따라 걷노라면 그분께서 바로 뒤에서 따라오신다는 기분이 들죠. 그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저는 그 발소리를 확실히 알고 틀림없이 구분해낸답니다. 또 홀 위쪽 발코니에서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개들을 부르던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요. 저녁 식사 하러 계단을 내려가는 그분의 옷자락 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어요"
부인은 여전히 나를 응시한 채 잠시 말을 멈추더니 느릿느릿 덧붙였다. "어쩌면 그분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고 말을 걸고 계신 것은아닐까요? 죽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와 산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모르겠어요." 내 목소리는 어색했고 이상하게 톤이 높았다. 평소의 내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전 때로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그분께서 맨덜리로 되돌아와 당신과 드윈터 씨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 P265

맥심의 할머니는 간호사가 하는 대로 가만히 참고 있었다. 피곤한 듯 눈을 감았는데 그러니까 훨씬 더 맥심과 비슷했다. 젊었을때의 할머니는 어땠을까? 키 크고 잘생긴 부인이 주머니에 설탕을 넣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마구간을 누비는 모습이 그려졌다. 꽉 졸라맨 허리에, 목깃이 높게 달린 옷을 입었겠지. 2시까지마차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할머니는 벌써 40년 전에 남편을, 그리고 15년 전에는 아들을 떠나보냈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올 마지막 날까지 간호사와 함께 이 벽돌집에서 살아야 한다. 노인들의 심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아이들이 어떤 두려움과 희망, 믿음을 가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제까지 아이였으니 기억이 생생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먼 채 숄을 두르고 저렇게 앉아 있는 맥심의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걸까? 비어트리스가 하품을 하며 연신 시계를 보는 것을 알까? 우리가 그저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자, 이걸로 석 달 동안은 양심의 가책을 안 받아도 돼‘라고 혼잣말하리라는 걸 알까?
가끔은 맨덜리를 떠올릴까? 내가 앉는 식당에 앉았던 것을 기억할까? 할머니 역시 밤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셨을까? 모든 것을다 잊어버린 채 그저 조용하고 파리한 얼굴로 소소한 통증과 소소한 불편만 느끼는 것일까? 햇살이 따뜻하면 기뻐하고 바람이 차면 질색하면서? - P282

식당으로 내려가 내 자리에 앉은 채 식탁 맞은편에 앉은 맥심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자리에 레베카가 앉아 생선 포크를 집어드는 모습을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프리스가 들어와 ‘파벨 씨가 전화하셨습니다. 마님‘이라고 전하는 모습을, 이어 레베카가 홀깃 맥심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맥심은 아무 말없이 식사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레베카는 미묘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으리라. 처음에는 마지못해 짧게 대꾸하던 맥심은 결국에는 레베카가 유머를 섞어 전하는 하루 일과, 어딜 갔었고 누굴 만났고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다음번 요리를 다 먹을 때쯤이면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미소 지으며 식탁 위로 손을올려 아내의 손을 잡았겠지.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맥심이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고 먹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그러니까 한 60초가량이 흐르는 동안 나는 레베카와 나를 동일시한나머지 멍청하게도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몸과 마음 모두로 이제는 지나가버린 시절을 경험한 셈이었다.
"생선 요리를 먹는 대신 당신이 얼마나 신기한 행동을 했는지알아요?" 맥심이 말했다. "처음에는 마치 전화벨 소리를 듣는 듯귀를 기울이더군. 이어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나를 흘낏 쳐다봤소.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지. 이 모든 행동이 한순간에 일어난 거요. 가장무도회에서 할 행동을 연습이라도 하는 거요?" 그는 웃으면서 나를 건너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다면,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과거의 맥심이었고 나는 레베카였음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마치 범죄자 같은 표정이군. 무슨 일이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잘못도 안 했다고요."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 P309

초상화에 나온 드레스는 내 옷과 완전히 똑같았다. 부풀린 소매, 좁은 몸통과 리본,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챙 넓은 모자는 물론이고 구불거리며 얼굴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까지도 똑같았다. 그렇게 흥분된 것은, 또 그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손짓을 한 뒤 손가락을 입에대어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더니 발코니를 건너 내 쪽으로 왔다.
"북을 좀 쳐주세요. 그리고 ‘캐럴라인 드윈터이십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해주세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거든요."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뺨이 달아올랐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얼마나 유치한, 하지만 유쾌한 한바탕 놀이인가! 아직도 몸을 웅크리고 복도에 숨어 있는 클래리스에게 나는 미소를 보냈다. 다음 순간 북소리가 홀에 울렸다. 그소리를 기다리던 나조차도 순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캐럴라인 드윈터이십니다!" 북 치는 악사가 외쳤다.
나는 계단 앞쪽으로 걸어 나가 그림 속 소녀처럼 모자를 손에들고 서서 미소 지었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박수 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 P329

모든 면에서 올았다.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게 던진 말, 설마 그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빈 저택의 공허함이 괴로운 나머지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온 거야‘라는 그 말은 밴호퍼 부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이성적이고 진실한 말이었다. 맥심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나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신혼여행도 이곳 맨덜리에서의 생활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남자고 나는 그의 어린 아내이고 그리고 그는 외로웠다는 사실뿐이다. 그는 내게 조금도 속해 있지 않다. 온전히 레베카의 것이다. 아직도 레베카 생각을 한다. 레베카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댄버스 부인 말대로 레베카는 아직도 이 집 안에 있다. 서쪽의 침실에, 서재에, 거실에, 홀 위쪽 발코니에 정원 곁방에도 아직 레베카의 비옷이 걸려 있지 않은가. 정원에, 숲에, 해변의 돌집에도 레베카의 발소리가 복도를울리고 그 향수 냄새가 계단에 어려 있다. 하인들은 여전히 그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는 레베카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는다. 레베카가 좋아했던 꽃들이 방에 놓인다. 그 침실 옷장에 걸린 옷들, 화장대 위의 머리빗, 의자 아래의 슬리퍼, 침대 위의 가운...... 레베카는 아직도 맨덜리의 안주인이다. 여전히 드윈터 부인이다.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이 다 보존되어 있는 이곳을 비틀거리며 헤매는 불쌍한 바보에 불과하다. 맥심의 할머나는 울부짖었지. ‘레베카는 어디 있는 게야? 레베카를 보고 싶어. 레베카를 대체 어떻게 한 게야?‘ 할머니는 나를 모르고 관심도 없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니까 난 맥심에게도, 맨덜리에도 속해 있지 않으니까 처음 만났을때 비어트리스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직설적으로 말했지. ‘당신은 레베카와 너무도 다르군‘ 늘 예의 바른 프랭크는 내가 레베카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했고 내 질문들을 싫어했어. 그리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던진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지. 그렇습니다. 제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라고.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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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내내 사회의 가치에 반기를 들었던 예술가들은 주로 서양의 시각 언어를 이용했는데, 그런 작품을 본 서양 비평가들 중 일부는 그것을 모방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서양의 시각언어가 힘이 있었던 것은 그저 그것이 금지된 것이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쓰는 것은 계산된 행동이자 유의미한 행동이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만화를 그냥 베꼈다거나 미켈란젤로가 고전 조각을 그냥 베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중국 전위화가들이 서구 양식을 그냥 베끼기만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형식은 비슷하고, 언어는 모방적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 P161

전통 중국 회화는 스승을 모방함으로써 훈련했다. 독창성은 노년을 위해서 남겨 두는 것, 그때도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살짝만 바꾸는 것이었다. 전통 회화의 역사는 풍성하지만 느린데 비해, 전위는 맹렬한 속도로 전진한다. - P166

최근 서양에서 구더신의 작품이 포함된 전시회가 끝났을 때, 작품을 포장하던 사람들이 구의 작품을 포장지와 혼동하는 바람에 실수로 그의 작품을 내버렸다. 「내 작품이 그렇게 폐기된 게 좋습니다. 세상에는 보존하고 연구해야 할 예술 작품이 안 그래도 많아요. 나까지 예술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습니다. 구더신의 이 말에 나머지 두 명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에게 비개인성이란 거의 무의식적인 충동이다. 중국 예술가들이 서양 예술가들의 끔찍한 자기 과대평가와 자기 중심주의라고 여기는충동의 정반대에 있는 충동이다. - P167

6월 4일 이후 장과정의 정체성은 바뀌었다. 장은 말했다. 「학살직전에는 정말 시끄러웠습니다. 시위 함성에 귀가 멀 듯했죠. 그러다 탱크가 왔고,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그 침묵이 탱크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장과 경은 학살 피해자의 모습을 커다랗게 그런 뒤 밤중에 그림을 육교에 내걸었다. 「당신도 만약 길 건너편에서 누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면, 앞뒤 잴 것 없이 건너가서 살인자를 막으려 들겁니다. 그런 거였죠.」 장의 말이다. 이후 두려워진 그들은 시골로 내려가서 숨었고, 내내 언제라도 붙잡혀 투옥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유명 뉴스 진행자가 더없이 무표정한 태도로 학살을 보도하는 것이 유달리 역겹게 느껴졌다고 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 여성에게 할 말을 적어 주는 사람이야말로 중국인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 같았다. 「뉴스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고, 따라서 그 여자는 사방에 있었죠. 나는 그녀에게, 나아가 모든 중국인이 그녀를 통해서 정부를 이해한다는 사실에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그녀에게 접촉했습니다. 돈을 줄 테니까 백과사전의 한 대목을 읽어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하필 백과사전이었던 것은 그녀의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닌, 완벽하게 중립적인 텍스트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그녀는 중간에 낀 사람들을 통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그녀를 속이는 데성공했습니다. 백과사전의 물 항목을 읽어 주면 그 낭독을 물과 꽃에 관한 전시회에서 쓸 예정이라고 말했죠. 중국 정부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던 그 여자는 결국 내가 고른 텍스트를 읽어 주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 일에서 엄청난 힘을 경험했습니다. 비공인 예술가로체포 위험을 겪어 온 내가 국가의 공식 상징을 이렇게 쉽게 조작할수 있다니. 그리고 그 일은 우리 사회에서 돈의 위치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쉽다는 게 얼떨떨했습니다. 이렇게 술술 풀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 P169

우리는 문화 혁명이 중국 지식인에게 끔찍한 시기였다고 단정하기 쉽다. 많은 지식인이 살해되었고, 아니면 광산이나 공장이나 시골 농장으로 보내져서 강제 노역을 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러시아 사람들이 스탈린을 언급할 때나 루마니아 사람들이 차우세스쿠의 이름을 들었을 때 드러내는 진저리 치는 혐오감을 접할 수없다. 전위 미술계 내에서도 마오 주석에 대한 애정은 비록 양가적일지언정 확고부동하다. 「반대했던 사람들마저도 어느 정도는 그를 믿었으니까요」 어느 늦은 밤 차를 마시면서 한번은 라오 리가말했다. 그는 혁명 초기에 반혁명 분자로 몰렸던지라 혁명 기간을거의 감옥에서 보냈다. 「마오는 아주 설득력 있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지식인들은 정말 스스로를 한심한 존재로 느끼게 됐습니다. 문화 혁명 때 사람들은 순수하고 완벽한 사회를 건설할 생각에 푹빠져 있었죠. 나는 그들의 그 이상에 반대했고 맞서 싸웠습니다만, 그리고 지금이라도 똑같이 싸우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상업주의 사회에는 그에 필적하는 이상이 없다는 겁니다. 방향이 틀린 이상이라도 아무런 이상이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 P174

그러나 내가 슬쩍 분노를 떠보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마오 주석을 부정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전위 예술가들의 대리인인 홍콩의 딜러 존슨 장은이렇게 말했다. 「불행한 유년기 같은 겁니다. 사람이 평생 그 기억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고 남에게 그것을 경험하게 만들어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기억을 깡그리 저버린다면 가식적이거나 불완전한 인간이 되겠죠.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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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끝이었다.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두 번 다시 그 일을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내 쪽을 보고 미소 지었고 손잡이에 걸쳐져 있는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 미소는 내가얻어낸 보상이었다. 재스퍼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보상이듯이 말 잘 듣는 개라면 만족하고 엎드려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재스퍼가 되었다.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핫케이크를 한 장 집어 반으로 나눈 뒤 개들에게 주었다.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온몸의 기력을소진한 듯 피곤했다. 맥심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신문에만 열중한채 다음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핫케이크를 자르느라 손가락에 버터가 묻어 엉망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손수건이 나왔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골똘히 그 레이스 달린 작은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리스가 홀의 돌바닥에서 그걸 집어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비옷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손수건을 뒤집어보았다. 옷에서 보푸라기가 묻어 지저분했다. 오랫동안 그 비옷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쪽 끝에 길고 비스듬한 R 자가 W 자와 함께 겹쳐서 수놓여 있었다. 다른 글자들을 압도하는 바로 그 R이었다. R 자의 꼬리는 수건 바깥까지 뻗쳐나가려는 듯 길었다. 하찮은 손수건 한 장이었으므로 원래 주인은 대충 뭉쳐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렸으리라.
그러니까 나는 그 손수건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후 처음으로 그비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레베카는 길고 늘씬하고 어깨가 나보다넓었다. 내게 그 옷은 너무 크고 길었으며 소매가 손까지 내려왔다. 단추 몇 개는 떨어지고 없었다. 레베카는 단추가 없어도 신경쓰지 않았다. 망토처럼 어깨에 두르거나 앞자락을 연 채 헐렁하게입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을지도 모른다.
손수건 위에 분홍색이 묻어 있었다. 립스틱 자국이었다. 이 손수건으로 립스틱을 문질러 지운 뒤 뭉쳐서 이 주머니에 넣었던 것이다. 나는 버터 묻은 손을 그 손수건에 닦았다. 그러자 희미한 향기가 올라왔다. 어디선가 맡아본 향기였다. 나는 눈을 감고 기억을더듬었다. 알 듯 모를 듯했다. 금방 들이마셨던, 내 손에 묻은 향기같았다.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손수건에 희미하게 남은 냄새는 행복의 계곡에 핀 흰진달래 꽃잎에서 나는 바로 그 향기였다. - P182

"프랭크, 당신이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왜 제가 그런 질문을던졌는지 이상하겠죠. 쓸데없이, 심지어는 잔인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다고 여길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다만가끔씩 저만 불리한 입장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곳 맨덜리에사는 것도 낯설고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생활해야 하는 것도힘들고요. 오늘 오후처럼 답방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제대로 해낼까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죠. ‘대체 맥심은 뭘 보고 저 여자랑 결혼한 걸까?‘라고 말하는 듯 말이에요.
그러면 저 스스로도 자신이 없어져요. 해서는 안 될 결혼을 했다는 생각,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와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저 여자는 레베카와 정말 다르군‘이라고 생각한다는 걸 저도 안다고요"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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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러시아인들이 갖고 있는 새로운 능력 중 제일 중요한 것은 적응성이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더빨리 더 바람직한 형태로 스스로 얻어 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안다. 한편 이들이 갖지 못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성공을 견주어서 판단하는 데 배경이 될 큰 그림, 그리고 성공에는 책임이 따를지도 모른다는 인식이다. 옛 소련은 이데올로기적 수사에 장악된 나라였고, 결국에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의미를 잃었다. 한편 오늘날 젊은세대의 유력한 구성원들과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이들은 민주주의를 자본주의의 완곡어법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자본주의란 누구나 무엇이 되었든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스스로 낚아채야 하는 체제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세월이 십오년 전이었다면, 이들 중 많은 사람은 기성 체제를 악으로 여기고 그에 대항하여 싸웠을지도 모른다. 아르톰 트로이츠키는 약간 씁쓸한 듯이 내게 말했다. 「영웅적인 시절은 끝났습니다. 나도 만약 현재의 젊은 세대로 태어났다면 영웅적으로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 P143

새로운 러시아의 혼돈을 낳는 진정한 원인은 경찰의 허약함도, 마피아의 압도적인 영향력도, 헌법 수정의 어려움도, 옐친의 불안정함도, 악화하는 인플레이션도, 서구 정부들의 순진한 원조 분배정책도, 식량 부족도 국영 공장의 비효율성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그동안 모두가 공익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받아 왔던 사회에서 이제 모두가 자신만을 챙기면 된다고 보는 가치 체계가 득세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하고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수많은 의제들이 우연한 상황에 따라 잠시 이렇게 정렬했다가 다시 저렇게 정렬했다가하는 나라에서는 일관성이 생겨날 수 없다는 것, 진짜 문제는 그것이다. - P144

소련 시절 러시아 정교회는 조직이라는 평판을 누렸지만(그도교회가 KGB에 연루하기는 했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깡그리 사라졌다. 교회는 이제 푸틴이 내세운 의제들에 공공연히 힘을 실어 준다. 1991년에는 러시아 인구 중 자신을 신자로 규정한 사람이 3분의 1이었지만 2015년에는 그 수가 4분의 3이 넘었다. 그러면서도 인구의 4분의 1가까이는 종교가 사회에 보다 질을 더 많이 끼친다고 생각하며 신자 중에저도 3분의 1은신을 정말로 믿진 않는다고 답변했다. 하물며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는 푸틴의 지도력을 <기적>이라고 칭송하면서 푸틴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주의는 법치의 붕괴와 세상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총대주교는 개인 자산이 40억 달러쯤 된다고 하고 3만 달러짜리 시계와 모스크바의 펜트하우스를 자랑한다고 한다. 그는 또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을 상업적 용도로 대여해 준다.
푸틴은 정교회 오토바이 갱단인 <노치니예 볼키>와 자주 함께 사진을찍었다. <성스러운 러시아>라는 또 다른 정교회 스킨헤드 갱단의 지도자 이반 오스트라콥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 러시아의 적은 사방에 있다.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의 악마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우리의 신성한 장소를 보호해야 한다. 경찰은 그런 공격에 대처할 여력이 없다. 내가 체첸전쟁에서 싸우고 돌아왔을 때, 조국은 매춘, 마약, 사탄숭배자 등등 더러운것들 투성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종교가 오름세를 탔다.> 그 갱단은 록밴드 푸시라이엇에게 선고된 가혹한 처벌에 항의하던 시위대 중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는데, 애초에 푸시라이엇이 체포된 것은 모스크바의 한 성당에서 연 공연에서 푸틴에 반대하는 기도를 올렸기 때문이다. 갱단은 자신들이 중상을 입힌 사람에 대해 <그는 우리의 신성하고 성스러운 것들을 모욕했다>라고 말했다. - P148

푸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2011년과 2012년 선거 후에 항의 시위를 조작했다. 주동자는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 활동가 일리야 야신, 좌파 전선 지도자 세르게이 우달초프, 반부패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 지역의회 의원 보리스 넴초프 등이었다. 2015년, 나발니와 우달초프는 가연금에 처해졌다. 넴초프는 모스크바의 한 다리에서 등에 총을 맞고 죽었는데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이는 것에 항의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린 지 몇 시간 후였다.
모스크바 정치 기술 센터의 게오르기 치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 편> <국가의 반역자들>이라는 이분법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위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거스르는 꼴이 되니까요.」 한때 활발한 시위자였던 33세의 니키타 데니소프는 이렇게 말했다. 「시위 행진이 아무 소용 없을뿐더러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라는 것만 알게 되었죠. 29세의 옐레나 보브로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거리로 나섰지만, 접한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뿐이었어요 권력자들뿐아니라 친구들과 친척들에게서도 냉담함이 러시아의 국민 오락이 된 모양이다. - P152

우연히 이 광경을 지켜본 웬 서양인이 내게 어깨를 으쓱하면서중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해 공개적으로 싸우는 시도가 늘 이렇게 실패로 돌아간다고 그래서 참 안됐다고 말했다. 그 서양인은 중국에서 국가에 반대하는 모든 예술가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유선거와 헌법을 지지할 것이라는 서양인다운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논리는 중국과 중국인을 오해한 데서 나온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경우, 그런 결론은 요점 파악에 실패한 판단이었다. 사실 쑹의 이발은 대성공이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여기에는 과거에는 현재에는 민주주의 시위에 활발히 나선 이른바<지하 세계> 전위 예술가들도 포함된다- 중국에 서양식 민주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한갓 실수일뿐더러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는 믿음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다. 중국인들은 중국을 좋아한다. 그들은 물론 서양의 돈과 정보와 힘을 갖고 싶어하지만, 중국의 문제에 서양의 해법을 적용하기는 원치 않는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도 알고 보면 중국식 해법의 추진을 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동양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원하지 않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그게 관례라고 내게 말해 준 예술가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 P155

중국에서는 개인으로서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급진적인 일이다. 그런 태도는 중국인들이 늘 똑똑히 의식하고 있으며 대단히 자랑스러워하는 5000년 역사, 그들이 자주 (그리고 가끔은 격렬하게)수정하지만 결코 내버리진 않는 역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다. 중국의 전위 예술계 멤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독립적인 개인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칠 정도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것은우스꽝스러운 짓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 예술적 기예란 그들이서양식의 천박한 사익 추구라고 여기는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에서 나온다. 그들의 어떤 행동이 서양인의 눈에는 중국의 획일적 전통으로부터 의절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통을 살살 부추겨서 더욱 진화시키려는 요량으로 한 발짝만 멀어진 것에 가깝다. 중국은 많은 문제와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기능하고 있으며, 지식인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중국인들에게는 그 사실이 서양의 민주주의 개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상 파괴적인 예술가들조차도 덩샤오핑 정부에 몸서리칠지언정 그체제의 작동에는 대체로 놀랄 만큼 만족해한다. 중국 전위 예술계의 반항적 행동도 그 체제 내에서 유효할 뿐, 서양의 체제 내에서 해석되도록 기획된 것이 아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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