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매일 이 방들을 살피고 먼지를 턴답니다. 다시 오시고 싶거든 말씀만 하세요. 내선 전화를 거시면 되지요. 언제든 안내하겠습니다. 하녀들은 여기 못 오게 했습니다. 오로지 저만 출입하는곳이지요." 다시금 기분 나쁘게 다정한 말투였다. 얼굴에 머금은 미소는 가식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주인어른이 출타하시고 혼자 외로울 때면 이 방에 와서 앉아 계시고 싶은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방이니까요. 이 방을 보면 그분께서그렇게 오래전에 떠나셨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요? 잠시 외출했다가 저녁이면 곧 돌아오실 것 같지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말라 있었다. "비단 이 방뿐만이 아닙니다. 거실, 홀, 정원 곁방까지 전 여러곳에서 그분을 느낀답니다. 어떤가요, 마님께서도 그렇죠?" 댄버스 부인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어느덧 속삭임에 가깝게 낮아졌다. "때로 이 복도를 따라 걷노라면 그분께서 바로 뒤에서 따라오신다는 기분이 들죠. 그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저는 그 발소리를 확실히 알고 틀림없이 구분해낸답니다. 또 홀 위쪽 발코니에서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개들을 부르던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요. 저녁 식사 하러 계단을 내려가는 그분의 옷자락 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어요" 부인은 여전히 나를 응시한 채 잠시 말을 멈추더니 느릿느릿 덧붙였다. "어쩌면 그분께서 지금도 우리를 보고 말을 걸고 계신 것은아닐까요? 죽은 사람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와 산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모르겠어요." 내 목소리는 어색했고 이상하게 톤이 높았다. 평소의 내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전 때로 그런 생각을 한답니다. 그분께서 맨덜리로 되돌아와 당신과 드윈터 씨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 P265
맥심의 할머니는 간호사가 하는 대로 가만히 참고 있었다. 피곤한 듯 눈을 감았는데 그러니까 훨씬 더 맥심과 비슷했다. 젊었을때의 할머니는 어땠을까? 키 크고 잘생긴 부인이 주머니에 설탕을 넣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마구간을 누비는 모습이 그려졌다. 꽉 졸라맨 허리에, 목깃이 높게 달린 옷을 입었겠지. 2시까지마차를 준비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일이었다. 할머니는 벌써 40년 전에 남편을, 그리고 15년 전에는 아들을 떠나보냈다. 마침내 죽음이 찾아올 마지막 날까지 간호사와 함께 이 벽돌집에서 살아야 한다. 노인들의 심정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아이들이 어떤 두려움과 희망, 믿음을 가지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어제까지 아이였으니 기억이 생생한 것이다. 하지만 눈이 먼 채 숄을 두르고 저렇게 앉아 있는 맥심의 할머니는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는 걸까? 비어트리스가 하품을 하며 연신 시계를 보는 것을 알까? 우리가 그저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찾아온 것이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자, 이걸로 석 달 동안은 양심의 가책을 안 받아도 돼‘라고 혼잣말하리라는 걸 알까? 가끔은 맨덜리를 떠올릴까? 내가 앉는 식당에 앉았던 것을 기억할까? 할머니 역시 밤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셨을까? 모든 것을다 잊어버린 채 그저 조용하고 파리한 얼굴로 소소한 통증과 소소한 불편만 느끼는 것일까? 햇살이 따뜻하면 기뻐하고 바람이 차면 질색하면서? - P282
식당으로 내려가 내 자리에 앉은 채 식탁 맞은편에 앉은 맥심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자리에 레베카가 앉아 생선 포크를 집어드는 모습을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고 프리스가 들어와 ‘파벨 씨가 전화하셨습니다. 마님‘이라고 전하는 모습을, 이어 레베카가 홀깃 맥심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맥심은 아무 말없이 식사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레베카는 미묘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지우기 위해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으리라. 처음에는 마지못해 짧게 대꾸하던 맥심은 결국에는 레베카가 유머를 섞어 전하는 하루 일과, 어딜 갔었고 누굴 만났고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다음번 요리를 다 먹을 때쯤이면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미소 지으며 식탁 위로 손을올려 아내의 손을 잡았겠지.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요?" 맥심이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고 먹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그러니까 한 60초가량이 흐르는 동안 나는 레베카와 나를 동일시한나머지 멍청하게도 나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몸과 마음 모두로 이제는 지나가버린 시절을 경험한 셈이었다. "생선 요리를 먹는 대신 당신이 얼마나 신기한 행동을 했는지알아요?" 맥심이 말했다. "처음에는 마치 전화벨 소리를 듣는 듯귀를 기울이더군. 이어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나를 흘낏 쳐다봤소.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지. 이 모든 행동이 한순간에 일어난 거요. 가장무도회에서 할 행동을 연습이라도 하는 거요?" 그는 웃으면서 나를 건너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다면, 그 짧은 순간 동안 그는 과거의 맥심이었고 나는 레베카였음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까? "마치 범죄자 같은 표정이군. 무슨 일이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 잘못도 안 했다고요."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 P309
초상화에 나온 드레스는 내 옷과 완전히 똑같았다. 부풀린 소매, 좁은 몸통과 리본,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챙 넓은 모자는 물론이고 구불거리며 얼굴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까지도 똑같았다. 그렇게 흥분된 것은, 또 그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손짓을 한 뒤 손가락을 입에대어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이더니 발코니를 건너 내 쪽으로 왔다. "북을 좀 쳐주세요. 그리고 ‘캐럴라인 드윈터이십니다‘라고 큰소리로 말해주세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거든요." 그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뺨이 달아올랐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얼마나 유치한, 하지만 유쾌한 한바탕 놀이인가! 아직도 몸을 웅크리고 복도에 숨어 있는 클래리스에게 나는 미소를 보냈다. 다음 순간 북소리가 홀에 울렸다. 그소리를 기다리던 나조차도 순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캐럴라인 드윈터이십니다!" 북 치는 악사가 외쳤다. 나는 계단 앞쪽으로 걸어 나가 그림 속 소녀처럼 모자를 손에들고 서서 미소 지었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박수 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 P329
모든 면에서 올았다.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게 던진 말, 설마 그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빈 저택의 공허함이 괴로운 나머지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온 거야‘라는 그 말은 밴호퍼 부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이성적이고 진실한 말이었다. 맥심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나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신혼여행도 이곳 맨덜리에서의 생활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남자고 나는 그의 어린 아내이고 그리고 그는 외로웠다는 사실뿐이다. 그는 내게 조금도 속해 있지 않다. 온전히 레베카의 것이다. 아직도 레베카 생각을 한다. 레베카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댄버스 부인 말대로 레베카는 아직도 이 집 안에 있다. 서쪽의 침실에, 서재에, 거실에, 홀 위쪽 발코니에 정원 곁방에도 아직 레베카의 비옷이 걸려 있지 않은가. 정원에, 숲에, 해변의 돌집에도 레베카의 발소리가 복도를울리고 그 향수 냄새가 계단에 어려 있다. 하인들은 여전히 그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는 레베카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는다. 레베카가 좋아했던 꽃들이 방에 놓인다. 그 침실 옷장에 걸린 옷들, 화장대 위의 머리빗, 의자 아래의 슬리퍼, 침대 위의 가운...... 레베카는 아직도 맨덜리의 안주인이다. 여전히 드윈터 부인이다.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이 다 보존되어 있는 이곳을 비틀거리며 헤매는 불쌍한 바보에 불과하다. 맥심의 할머나는 울부짖었지. ‘레베카는 어디 있는 게야? 레베카를 보고 싶어. 레베카를 대체 어떻게 한 게야?‘ 할머니는 나를 모르고 관심도 없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니까 난 맥심에게도, 맨덜리에도 속해 있지 않으니까 처음 만났을때 비어트리스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직설적으로 말했지. ‘당신은 레베카와 너무도 다르군‘ 늘 예의 바른 프랭크는 내가 레베카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했고 내 질문들을 싫어했어. 그리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던진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지. 그렇습니다. 제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라고.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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