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다 할 특징도 없고 화장한 흔적 같은 것도 없으나 꽤 생길 만큼 생긴 축에 드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닌 본래의 미를 제치고 깃발처럼 솟은 궁핍의 찌꺼기가 한창 나이의 얼굴에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마치 이화명충에 시달릴 대로 시달려 성숙 이전에 생장을 정지당해버린 초본식물과도 같은 인상이 들었다. 또한 궁핍의 계속이 한 여자의 아름다움을 한쪽서부터 차근차근 먹어들어 음충스러운 노파로 급속히 변모시켜가는 일관작업의 과정을 도해圖解까지 곁들여 열람하고 있는 기분이어서, 저게 바로 타인의 형식을 빌려 나타난 자화상이 아닌가하고 박은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 P91

보아하니 권 씨의 구두 닦기 실력은 보통에서 훨씬 벗어나 있었다. 사용하는 도구들도 전문 직업인 못잖이 구색을 맞춰 일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 위엔 앞치마 대용으로 헌 내의를 펼쳐 단벌 외출복의 오손에 대비하고 있었다. 흙과 먼지를 죄 털어낸 다음 그는 손가락에 감긴 헝겊에 약을 묻혀 퉤퉤 침을 뱉어가며 칠했다. 비잉 둘러가며 구두 전체에 약을 한 벌 올리고 나서 가볍게 솔질을 가하여 웬만큼 윤이 나자 이번엔 우단조각으로 싹싹 문질러 결정적으로 광을 내었다. 내 보기엔 그런정도만으로도 훌륭한 것 같은데 권 씨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그만한 일에도 무척 힘이 드는지권 씨는 땀을 흘렸다. 숨을 헉헉거렸다. 침을 퉤퉤 뱉었다. 실상 그것은 침이 아니었다. 구두를 구두 아닌 무엇으로, 구두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발에다 꿰차는 물건이 아니라, 얼굴 같은 데를 장식하는 것으로 바꿔놓으려는 엉뚱한 의지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신들린 마음에서 솟는 끈끈한 분비물이었다. 권 씨의 손이 방추紡錘처럼 기민하게 좌우로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도금을 올린 금속제인 양구두가 번쩍번쩍 빛이 나게 되자 권 씨의 시선이 내 발을 거쳐 얼굴로 올라왔다.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 P135

램이 옳다면 디킨스가 그른 것이고, 디킨스가 옳다면램이 그르게 된다. 가급적이면 나는 랩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디킨스의 궁둥이를 걷어찰 만큼 나는 떳떳한 기분일 수가없었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부자는 경멸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빈자는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 당연히그래야만 옳은 것으로 알았다. 저 친구는 휴머니스트라고 남들이 나를 불러주는 건 결코 우정에 금이 가는 대접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정부가 베푸는 제반 시혜가 사회의 밑바닥에까지고루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다방에서또는 신문지상에서 이미 갈 데까지 다 가버린 막다른 인생을 만날 적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긁어모으느라고 지금쯤 빨갛게 돈독이 올라 있을 재벌들의 눈을 후벼 파는 말들로써 저들의딱한 사정을 상쇄해버리려 했다. 저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배운 우리의 의무이자 과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임을 나는 솔직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분노란 대개 신문이나 방송에서 발단된 것이며 다방이나 술집 탁자 위에서 들먹이다 끝내는 정도였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껌팔이 아이들을 물리치는 한방법으로 주머니 속에 비상용 껌 한두 개를 휴대하고 다니기도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볼펜이나 신문을 파는 아이들을 한목에 싸잡아 가짜 고학생이라고 간단히 단정해버리기도 했다. 우리 - P141

는 소주를 마시면서 양주를 마실 날을 꿈꾸고, 수십 통의 껌값을 팁으로 던지기도 하고, 버스를 타면서 택시 합승을, 합승을하면서는 자가용을 굴릴 날을 기약했다. 램의 가슴을 배반하는 디킨스의 머리는 매우 완강한 것이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우리의 입과 손발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괴리는 우리로서는 사실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도리어 나는 그날 밤새껏 램의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잠을 온전히 설치고 말았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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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입에서는 말끝마다 긴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마 잘될 거라고, 그 사람들이 약속을 그렇게 헌 고무신처럼 벗어던지지는 않을테니 너무 상심 말라고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유행성 이하선염에 걸린 듯이 턱을 잔뜩 감싸 쥔채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직은 그렇게 될 것이 거의 틀림없을 정도의 확실한 소문이 아니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 맨 처음 발설한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이런 판국인데 일이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를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렇다고 한가하게 앉아서 사람들이나 위로해주는 아버지의 여유작작한 모습은 옆에서 봐도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쉬쉬하면서 다른 어른들에게도 낮은 소리로 얘기할 것을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신경통을 앓는 수족으로 하루나 이틀 후의 일기쯤 앞당겨 예감하는 늙은이들처럼 몸의 어느 부분이, 예를 들어 심장이 울렁거리고 자꾸 오줌이 마려워지는 긴장을 견디며 비극을 치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신변에 접근해오는 위협을 반사적으로 알아차려 재빨리 촉각을 곤두세우는 어떤 하등동물의 생리처럼 우리는 몸을 사리면서 조심스럽게 대기하고 있었다. 어른들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으늑한 구석 자리에 엎드려 숨을 할딱이며 우리는 그날이 오기를 끈덕지게 기다렸다.  - P54

철거일의 아침이 천천히 밝았다. 집이 헐리는 날인데도 여느때와 같이 둥근 해가 뜨고 우물에서는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게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모든 사람이 슬픔에 짓눌려 넋을 잃고 있는데도 여느 아침이나 다름없이 배가고프고 변소에 가고 싶어지는 게 도대체 창피스럽고 미안해서 죄인처럼 잠자코 견디어야 하는 답답한 하루였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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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을 밟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면 경주네 주막집 유리창이 환히 보였다. 까치발을 디디면 경주의 자그만 몸뚱이가길 쪽으로 난 그 유리창을 닫아버리려고 끄응끙 기를 쓰는 광경이 더욱 잘 보였다. 할멈의 앙상한 팔 하나가 벽과 창문 사이 좁은 틈바귀에 꽉 물려 추욱 늘어져 있었다. 경주는 그 팔이 차지한 공간마저 아주 지워버리려고 허리를 꾸부정히 하고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창문을 밀어붙이는 것이었고, 그동안에도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할멈의 모습은 전연 안 보였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이미 해를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막집 유리창 속에는 다른 또 하나의태양이 아직도 남아 삽시에 집채를 불사를 듯이 세찬 빛살을 사방에 함부로 번득이고 있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라고 째지는 소리를 지르며 경주는 더욱 힘주어 밀어붙였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처럼 앙상한 팔뚝을 악착같이 물고 흔드는악마의 주둥이 같은 시커먼 공간은 한 치도 더 좁아지지 않았 - P27

고, 높고 길고 날카롭게 울리는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도 여전했다. 그걸 듣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살구라도 씹은 듯이 벌레먹은 어금니가 시려서 견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귀를 막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아!"
저녁놀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녹아 까맣게 사라질 때까지 두 모녀의 실랑이는 그치지 않았다. 할멈의 울음은 긴 여운을 끌며 깜깜한 하늘로 끝없이 퍼져나갔다. 드디어는 경주도 제 분을 못 이겨 땅바닥에 퍼질러 앉으며 할멈과 비슷한 소리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점점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처음은 경주네 어머니가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게 슬퍼서 큰 소리로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창문이 닫히고 경주네 어머니의 모습이유리창 저편에 가려진 뒤로는 덩굴의 한 부분 같은 팔뚝 하나가틈바귀에 남아서 아프다고 소리쳐 운다. 얼마 후면 놀빛에 번쩍이는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로 울고, 나중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서로 상처를 핥아줘가며 사람보다 훨씬 크고 긴 목청을 어둡도록 뽑는다. 이쯤 되면 그 소리는 조금도 서럽지 않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정한 가락과 장단에 맞추어 주기적으로 즐기는 기쁨의 노래같이도 생각되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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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집

우리가 마악 길을 건너려는 순간에 모퉁이 저쪽 보이지 않는곳에서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으므로 나는 얼른 계집애의 손을 놓아버렸다. 볏단을 잔뜩 싣고 느릿느릿 구르던 달구지한 대가 길옆에 가까스로 비켜설 만큼의 여유를 두고 노랗게 쌍불을 켠 트럭의 행렬이 질주해 왔다. 달구지를 뒤따르며 길바닥에 흘린 나락을 쪼아먹고 있던 한 떼의 병아리가 날개를 파드락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내장산 일대의 공비들과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의 토벌대였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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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간은 컴퓨터와 완전히 다른 존재다. 인간은 놀라울정도로 깊이 사고하면서도 어떤 때는 직감에 따라 빠르게 결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위험과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어떤 것이 위협인지 가늠할 수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 경험 법칙을 휴리스틱 heuristics (제한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직관으로 판단하는 의사 결정 방법.옮긴이)이라고 한다. 이런 지름길은 항상 들어맞거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상황에 적용하기에 ‘적절하고‘ 상대적으로 인지에 에너지가 많이 들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점은 휴리스틱이 거의 본능적이어서 사고 과정이 특 - P44

정 결론으로 향하는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충동을잘 활용해서 종종 빠른 결정이 생사를 가르기도 하는 선사시대수천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더미묘한 사고가 필요하다. 휴리스틱은 유용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도전과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 해결할문제가 지정학이든 건강관리든, 무의식적인 본능이 판단을 내리도록 할 수 없으며,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반사는 재앙에 이르는왕도다. 오늘날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는대부분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고 간단한 해결책이 있지도 않다.
오히려 다양한 명도의 회색지대에 존재하며,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중요한 문제들은 뚜렷한 최적의 해결책이 없으며, 새로운 정보를 참고해서 고찰하고검토하며 결정해야 한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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