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주인을 닮는다고들 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주가 되어가는 것이다. 말들은 주인의 내면에 자신을 녹아들게 한다. 감정의 위장이다. 목장에 있는 말들은 오랫동안 망가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다. 그들은 얼굴에, 몸의 자세에, 각자의 독특한 움직임에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다닌다. 이 신체적 표현은 말들이 즉각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두려움과 그 사촌들 분노와 짜증과 고통은 재소자들의 걸음걸이에, 그들의 어깨와 목에, 굽은 등에 실리고 눈썹 밑 그림자에 숨어 그들로 하여금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게 만든다.
- P22

어떤 재소자들은 작위적인 자신감으로 위장한 채 움직인다. 팔을 크게 휘두르며 팀원들에게 버럭버럭 지시를 내리는 식이다. 반대로 몸에 생기라고는 한 방울도 안 남은 것 같은 이들도 있다. 암초에딱 붙어사는 조그만 해양생물처럼, 물컹물컹한 무정형의 몸이다. 움직임 또는 움직임의 부재는 그 자체로 감정이 담긴 이야기다. 모든걸 숨김없이 드러낸다. 상처받은 인간들과 한때 야생이었던 말들 간의 이 밀폐된 관계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오면서 재앙을 만들어냈다. 가난에, 가족사에, 그리고 교정 시스템에 얻어맞은 거친 남자와 여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매일같이 그 고통을 말들에게 전하며 목장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이고 풀을 뜯을 때조차 이 말들은 눈과 귀로 모든것을 보고 감지한다. 말은 위험을 인정하고 우두머리를 따르면서 살아남는다. 맞서 싸우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말이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자연스러운 습성이다. 해가 될 만한 곳으로부터 무리를 떼어놓고, 심각한 위험이 감지되면 스피드라는 타고난 능력을 사용해 안전을도모함으로써 우두머리는 우두머리가 된다. 피하거나 싸우기. 그런데 외부와 차단된 이 목장의 높다란 흙벽돌담 안에서, 수천 년에 걸쳐 유전된 그 본능이 뒤집히고 말았다. 달아날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움직일 때마다 분노를 발산하는 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 말들은 싸우기를 택한 것이다.
- P23

플로르와 새라는 감정이 북받쳐 먹먹해한다. 아래 속눈썹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이 목장에서 두 암말에게 손끝 한번 대지 못한 채 지내온 시간이 얼마인가. 그리 크지도 않은 목장인데 말이다.
여기서는 모든 인간, 모든 동물이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루나와 에스트렐라는 고립되고 외상을 입은 채 너무 오랫동안 방치돼있었다. 그렇게 사는 게 어떤 건지, 플로르와 새라는 잘 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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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처음엔 내게 도움을 청하는 여느 목장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말을 훈련하고 마주를 교육하는 건 지난 이십 년간 내 업이었다. 문제 있는 말에 얽힌 일화는 지겹도록 들었다. 잘 들어보면 이야기에 쏙 빼놓은 부분들이 있고, 말하는 이 스스로 깨닫지 못한 부분도 십중팔구 있다. 하지만 나는 아주 미세한 움직임 - 한쪽 귀를 쫑긋거린다든가 숨이 가빠진다든가 하는- 도 말이 소통하는 신호임을 안다.
마주들이 이런 미묘한 언어를 일찍이 알아챘더라면 안 좋은 경험들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 요청은 달랐다. 말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얘기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쓰레기를 뒤지는 말, 약탈하는 말, 피에 굶주린 말이라니. 진짜일 리 없다고 생각했고, 진짜라면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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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군의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타인과 만나 상호작용하는 일상 그 자체가 사실상 ‘공연‘의 성격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nan은 공연을 "개인이 특정 관찰자 집단 앞에서 계속하는 모든 활동, 그리고 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공연에 장애인이 참여하는 경우를 모두 문제라고 말하기는어렵다. 사회적 행위자인 장애인도 당연히 공연에 참여해 연기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공연에서는 자신이 그 공연에 동원되었다는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아무런 역할도 없이, 개성이나 존재감도 없이 특정 집단(장애인, 노인, 환자, 빈자, 노숙인 등)이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만 도구처럼 활용된다. 이런 종류의 공연에서 이 집단은 철저하게 추상화, 익명화, 기호화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쌍함‘을 전달하는 요소들, 즉 빈곤함의 정도, 장애의 심각성,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연으로만 존재가 설명된다.
장애인을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수행하는 사람의 존재는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특정한 목표에 맞춰 알려진다. 나와 어머니가 참석했던 후원회는 국회의원 본인과 ‘천사 같은‘ 장애인들을 만나고 왔다는 모임 주최자의 존재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무대였다. 나는 월 10만 원을 받는 대가로 공연에 동원되었을 뿐이다(물론 후원을 받는 사람은 그 정도의 역할은 해줘야 하기 마련이다.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 정치인들에게 목욕 봉사나 경제적 후원을 받는 장애인은 무력하게 누워 있는 익명의 존재로 등장하지만, 우리는 어떤 정치인이 그와 같은 공연을 펼쳤는지는 그에 대한 평가와 관계없이 강렬하게 기억한다. - P42

인간은 신체를 훼손당할 때 인격체로서의 존엄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인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 특유의 욕망과 선호, 희망, 자율성으로 구성되는 개별적 인격성을 인정받지못할 때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크게 훼손당한다. 장애, 질병, 빈곤 등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단으로 삼아 철저히 익명화(기호화)하는 방식으로 연출하는 공연은 결국 이들을 실격당한 존재로 만든다. 당신과 내가 장애, 질병, 빈곤, 인종, 나이 등을 이유로 누군가의 동정이나 혐오를 받기쉬운 처지에 있고, 그러한 처지 이외에는 존재의 고유성을 철저히상실한 상태로 타인의 공연에 동원되었다면, 우리의 삶도 쓰구이야마유리엔의 비극과 (멀리서나마)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더큰 문제는 나와 당신이 그 ‘피해자의 삶에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가해자와도 연결되어 있다.
- P44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을 때는 수치심을 느끼지만,
절벽 끝에 매달렸을 때는 스스로를 관찰하는 반성적 (성찰적) 시선을잃기 때문에 수치스러울 겨를이 없다. 이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가 일치한다. 오로지 하나의 감정, 한 명의 존재, 유일한 현실만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압도한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는 ‘그래, 이 정도면카메라 기자들이 촬영할 테니 여론을 움직여 결국 우리의 뜻을 관철할 수 있겠지. 지금 내 자세는 충분히 불쌍해 보일까?‘와 같은 자기 성찰적 기획의 결과일 수 없다. 자식을 벌레같이 보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지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을 통제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녀만을 향했을 것이고, 자녀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목표에만 정향되었을 것이다.
- P47

모욕의 순간을 자주 경험해야 했던 사람은 그런 상황에 노련해질수록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가 일치하는 경험에서 멀어진다.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쌓는 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어떤 ‘타자‘에게 온전히 몰입하거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분노 혹은 감동하거나, 특정한 현실에 완벽하게 실재하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아름다운 음악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관찰하고, 섹스를 하는 순간에도 굽어진 내 다리가 추하게 보이지는 않을지 의식하며, 아름다운 뮤지컬을 보면서는 의자에 푹 파묻힌 내 어깨가 굽어 보일까 염려한다. 식당에서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들을 때도 내가 ‘적절하게‘, ‘품격 있게‘, ‘지적으로‘ 반론을 펼치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한다. 격렬한 집회와 시위의 한가운데서도 내가 혹여 ‘비합리적인 요구를 품위 없이‘ 주장하지는 않는지 성찰한다.
- P49

어떤 종류의 선의의 거짓말은 상대방을 기만하지 않고도 그를 배려한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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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우라.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철저히 관계 속에 존재해요."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나는 이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생각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쓴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카르마가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 말을을 안다. 우리의 행복은 전적으로, 철저히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있다. 가족, 친구, 이웃, 게다가 우리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무실 청소부까지도 모두, 행복은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접속사다.
그럼 행복까지의 거리는 아직도 먼 걸까? 나는 행복을 찾아낸 걸까? 난 지금도 터무니없이 많은 수의 가방을 갖고 있으며, 갑자기 중병에 걸린 것 같다는 걱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그래도 가끔 행복한 순간이 있기는 하다. W. H. 오든의 충고처럼, 나는 "출 수있을 때 춤추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오든은 춤을 잘 춰야 한다고는말하지 않았다. 내게는 고마운 일이다.
내가 100퍼센트 행복한 건 아니다. 아마 50 대 50에 가깝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모든 걸 고려했을 때, 그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다.
그래, 결코 나쁘지 않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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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제프리가 슬라우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것 같다. 물론 그는 자신이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절대 고백하지 않을 테지만, 죽음과 특정 장소 사이의 관계는 원래 복잡하다. 때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이 닥쳤을 때(예를 들어 자식을잃었을 때),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즉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장소를 바꾸면, 자신을 짓누르는 이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조금가벼워질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하지만 꼭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남은 것이라고는 그 장소밖에없기 때문에. 그럴 때는 그곳을 떠나는 것이 배신처럼 느껴진다. 내가 보기에는 제프리가 그런 경우인 것 같다. 그는 슬라우를 사랑하지않지만, 아내를 사랑했다. 여기서,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는 버크셔의 이 마을에서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이곳에 계속 머무른다.
- P425

그럼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계속 씨앗을 심으면 될 것같다. 사실 중요한 건 씨앗을 심는 것이지 수확이 아니다. 많은 철학자가 지적했듯이, 행복은 부산물이다. 너새니얼 호손이 말했듯이, 행복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
그렇다면 어떤 장소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애쓰는 대신 캐나다의 저술가 로버트슨 데이비스의 충고를 가슴에새기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에 관한 걱정을 그만두고 자신의 불행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편이 더 낫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저분하고 낡은 슬라우가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 이젠 더 이상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리는 버크셔의 마을이 아니라 누가 뽑아주기를 기다리는 불행의 보물 창고다.
- P440

카페인과 니코틴을 충분히 섭취한 엠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대화에 합류한다. "인도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요?" 내가 묻는다.
"자동차 경적 소리, 인력거, 머리에 단지를 이고 가는 여자들, 고함을 질러대는 사람들, 사원의 종소리가 좋아요. 인도식 발음도 좋아요.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죠. 전부 다 좋으니까."
그녀가 열거한 것들이 대부분 소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인도는 귀를 위한 연회장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인도가 점점 부유해지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번영의 소리보다 더 끔찍하게 단조로운 건 없는 법이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단조로운 소리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는 야외 시장에서 행상인들이 가락을 붙여 외쳐대는 소리나 저임금으로 노동자들을 부려먹는 공장에서 재봉틀이 리듬에 맞춰 탁탁 돌아가는 소리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현대적인 고속도로에서 자동차들이 획휙 지나가는 단조로운 소리 역시 제3세계의 도로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 즉 경적 소리와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빚어내는 교향곡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 P479

그날 저녁 나는 테라스로 나간다. 공기는 부드럽고 서늘하다. 나는 판자촌을 바라본다. 사실 테라스에 서면 필연적으로 그곳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이들 몇이 쓰레기 더미를 헤집으며 몇 푼이라도 받고 팔 수 있을 만한 물건을 찾고 있다. 인도에서 몇 년을 지내다 보면그런 광경을 보고도 무덤덤할 만큼 단련이 된다. 하지만 마음의 갑옷이 아무리 두껍고 단단해지더라도 항상 그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것이 있게 마련이다.
- P487

몇 년 전, 행복 연구가인 로버트 비스워스 디너가 캘커타의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빈민 중의 빈민인 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행복 점수를 기록했다(물론인터뷰 대상자들이 스스로 점수를 매겼다), 그러고는 캘리포니아주 프리몬트의 노숙자 수백 명을 대상으로 같은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캘커타의 빈민들이 캘리포니아의 빈민들보다 상당히 행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캘리포니아의 노숙자들이 음식과 숙소를구하기가 더 쉽고, 보건 서비스도 더 잘 받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비스워스 디너는 이처럼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것은 캘커타의 노숙자들이 비록 물질적인 부라는 측면에서는 가진 게 거의 없을지라도 가족, 친구 등과 사회적으로 강한 유대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인도에는 진정한 의미의 노숙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살 집이 없는지는 몰라도 가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또한 캘커타의 빈민들이 미국의 빈민들보다 행복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자신이 쌓은 업이나 운명이나 신들 때문에 지금 자신이 가난하게 산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가난이 자기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개인적인 실패, 성격적인 결함의 탓으로 돌린다.
- P490

 "욕망은 슬픔의 근원이지만, 행동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의욕을 주는 욕망이 없을 때, 어떻게 하면 행동의 마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바로 이거다. 힌두교, 아니 대부분의 동양 종교는 모든 몸부림이,
심지어 행복을 위한 몸부림조차도 자멸을 불러올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미 실패한 것이 되어 게임이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좀비처럼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도 역시 실패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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