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판다의 엄지

영웅이 생애의 정점에서 자신의 야망을 접는 일은 좀처럼 없다. 승리는 끝없이 새로운 승리를 부르고, 그러다가 파멸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않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더 이상 정복할 새로운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한탄했고, 지나친 영토 확장을 시도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에 갇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1859년)을 집필한 후에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자연 선택설을 선전하거나, 자신의 이론을 인류의 진화에까지 확장시키는 작업을하지 않았다. (그는 1871년이 되어서야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을 발간했다. 「종의 기원』 이후 처음 발간된 그의 저서는 영국과 외국의 난초류 곤충류에 의해서 수정하는여러 고안에 대하여(On the Various Contrivances by Which British and Foreign Orchids Are Ferrilized by Insects)」(1862)였고 이 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 P21

 그렇지만 이상적인 설계는 진화를 논하기 위한 논거로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상적인 설계는 전능한 조물주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명한 신이라면 결코 택하지 않았을 기묘한 배치라든가 별스러운 해결방법이야말로 진화를 입증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현명한 신이라면결코 택하지 않았을 경로, 역사에 속박되어 어쩔 수 없이 진행된 자연의과정을 추적하는 편이 훨씬 유리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다윈만큼 잘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발터 마이어(Ernst WalterMayr, 1904~2005년)는 다윈이 진화론을 옹호하면서 끊임없이 최소한의 의미를 가지는 생명체의 여러 부분이나 지리 분포에 관심이 많았음을 잘보여 주고 있다. 내가 자이언트판다(Ailuropoda melanoleuca)와 그 엄지의 문제에 주목하게 된 것도 바로 그 점이다. - P24

나는 판다의 뛰어난 재주에 몹시 감탄했다. 그리고 달리는 기능으로적응한 계통의 후손이 어떻게 앞발을 그처럼 잘 쓸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2개의 앞발로 대나무의 줄기를 쥐고, 유연하게 보이는 엄지와 나머지 발가락들 사이로 줄기를 통과시켜서 잎을 훑어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무척 당황했다. 일찍이 나는 다른 손가락과 마주볼 수 있는 능란한 엄지야말로 인류의 번영을 이끈 특징의 하나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장류의 선조에게 나타난 이 중요한 유연성을한층 향상시키면서 계속 유지시킨 반면, 대부분의 다른 포유류들은 발가락을 특수화시키는 과정에서 그것을 희생시켰다. 식육목에 속하는동물은 달리고, 찌르고, 할퀴어 댄다. 내가 키우는 고양이는 심리적으로나를 조종할 수는 있어도, 혼자서 타자기를 치거나 피아노를 연주하는일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판다의 엄지 이외의 발가락의 수를 세어 보았다. 나는 그 결과에 또 한번 놀랐다. 나머지 손가락은 4개가 아니라 5개였다.
그렇다면 ‘엄지‘는 독립적으로 진화한 여섯 번째 발가락인가? 
••••••
판다의 엄지는 그것을 보강하는 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기민함의 근원이 되는 근육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근육들은 요골종자골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새롭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다윈의 난초류의 꽃의 각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것들은 이미 알려진 일부 구조가 새로운 기능으로 바뀐 것이다. - P25

그런데 판다의 뒷발에도 앞발만큼은 아니지만 앞발의 요골종자골에 상응하는 것으로 경골종자골이라는 뼈가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경골종자골은 새로운 ‘발가락‘을 지탱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그 크기가 커졌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는다. 데이비스는 "이 2개의 뼈가 함께 성장하게 된 것은, 한쪽만 성장하는 경우에대한 자연 선택의 반응으로, 단순한 유형의 유전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손가락처럼 여러 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신체의 부분은 각각에 대응한 유전자의 작용으로 하나씩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엄지를 위한 유전자라든가, 당신의 발의 엄지를 만들기 위한 유전자, 가운뎃손가락을 위한 유전자는 없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부분은 그 전부가 보조를 맞추어 발육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요소에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은 그밖의 다른 요소에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일으킨다. 손의 엄지를 크게 바꾸면서 발의 엄지를 변형시키지 않는 것은 양쪽을 함께 성장하게 만드는 것보다 유전적으로 복잡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전체적인 협조가 깨지고 손의 엄지에만 특전이 주어지므로, 연관된 여러 다른 구조가 커지지 않도록 억눌러야만 한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단 하나의 유전자가해당 손가락과 발가락의 발생을 조절하는 영역에서 그 성장 속도를 증대시키면 된다.) - P28

어떤 기관이 원래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관이 현재 그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같은 원리로 만약 어떤 사람이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계를 만들 필요가 있을 때, 낡은 바퀴나 스프링, 활차 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작은 변화만을 가해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경우에, 이런 부품들을 조립해서 완성된 그 기계는전체로서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계 전체에 걸쳐, 모든 생물의 거의 모든 부분은 조금씩 변화하는 조건에 맞추어 여러 목적에 이용되면서, 먼 옛날 저마다 독특하고 진기한 형태를 가진 무수한 종류의 생물 기계 속에서 훌륭하게 기능해 왔다.
- 다윈 - P32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윈은 정반대의 일을 했다. 그는 기이한 것이나 불완전한 것을 찾았다. 갈매기는 경이로운 설계의 예라고 생각할 수있을 것이다. 이미 진화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날개의 공학적 설계는 형태를 빚어내는 자연 선택의 뛰어난 힘을 반영하는 것으로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함으로는 진화를 입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완전한 것은 굳이 역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의 설계상의 완전함은 그 완전무결한 공학적 설계에서 신(神)이라는 조형자의 존재를 찾아온 창조론자들이 옛날부터 즐겨 주장한 논거인 것이다. 공기역학의 경이로움을 보여 주는 새의 날개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 그대로 (신이) 창조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다윈은 만약 생물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현재의 생물에 선조의 여러 단계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의미를 갖지 않는 과거의 흔적들, 즉 무용한 것, 기묘한 것, 특이한것, 불균형한 것들이 역사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징후인 것이다. 그것들은 세계가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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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에게 내 이야기는 자신과 상관없는 공간에서 방출되는 쓸모없는 기호의 집합체일 뿐이었다. 정말로 그곳에 갈 기회가 생길 때에야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 P180

릴라는 바로 그 순간 훗날 ‘경계의 해체‘라고 이름 붙인 그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릴라는 그때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보름달이 뜬 바다 위로 하늘에서 거대한 태풍이 시꺼멓게 몰려오면서 빛이란 빛은 모조리 집어삼키고, 달의 경계를 침식하며 그 빛나는 원반의 형체를 망가뜨려 거칠고 비정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릴라는 리노가 분해되는 모습을 마치 실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보고 느끼고 상상했다. 리노는 릴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던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언제나 여유 있고, 정직하고, 신뢰 가는 유쾌한 모습. 아주 어릴 때부터 언제나 릴라를 즐겁게 해주고, 도와주고, 보호해주었던 사랑하는 오빠의 옆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그날 거칠게 폭발하는 폭죽과 얼어붙을 듯한 추위, 매캐한 연기와 독한 유황 냄새 속에서 무엇인가가 리노의 유기적 구조를 훼손했다. 엄청난 압력으로 리노를 짓누른 나머지 그의 윤곽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를 구성하는 물질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나와 그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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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세월이 길지 않을 때에는 혼란스러운 감정의 바탕에 있는혼란의 실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그제, 길어봤자 한 주 전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내일을 기다린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에는 관심이없다.
아이들은 어제의 의미, 엊그제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내일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고 지금이다. 여기가 길이고, 우리 집 현관이고, 이 사람이 엄마이고, 아빠이고, 지금은 낮이거나 밤인 것이다. - P29

지나는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후두염, 파상풍, 출혈성 티푸스, 가스, 전쟁, 기중기, 돌담, 노동, 폭격, 폭탄, 결핵에서 화농까지 목숨을 앗아가는 단어들로 가득 찬 그런 세상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일들도 죽음의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땀을 많이흘린 다음 두 손목에 물을 살짝 적시지 않고 급하게 차가운 수돗물을 들이켜다 죽기도 했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돋아나서 죽기도 했고 기침하다 숨이 막혀 죽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잘 익은 체리를 먹다 씨가 목에 걸려 죽는 일도 있었고 미제 껌을 씹다 무심코 삼켜 죽기도 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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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기 전 볏과 식물은 다른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줄기 끝에 성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식물들은 줄기 끝에 있는 이 성장점에서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위로 성장해간다. 이런 상황에서는 포식자가 줄기 끝을 먹어치울 경우 식물의성장과 생존을 담보할 성장점까지 포식자의 뱃속으로 몽땅 삼켜져 버리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이 문제를 볏과 식물은어떻게 해결했을까?
대단히 현명하게도 볏과 식물은 성장점을 낮은 곳에 만들기 시작했다. 실제로 볏과 식물을 유심히 살펴보면 성장점이 땅바닥에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볏과 식물은 무작정 줄기를 뻗어 나가지 않고 줄기 밑동 부분에 있는 성장점에서부터 시작해 잎을 위로 차근차근 밀어올린다.
이 방법을 쓰면 포식자가 게걸스럽게 잎을 먹어치워도 성장하는 데 문제가 없다. 포식자는 그저 잎사귀의 끄트머리만 먹을 뿐 핵심인 성장점에는 손상을 입히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교통사고로 자동차 범퍼가 찌그러지고 백미러가 부서질지언정 엔진과 주요 부품에는 손상이 가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까. - P201

‘논‘시스템과 벼라는 작물은 적은 농지로 많은 사람이 먹고살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예를들어 16세기 섬나라 일본은 같은섬나라인 영국과 비교해 6배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업 (Three Field System)이라 부르는 농사법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감자와 콩 같은 여름작물을 생산하는 밭, 밀을 재배하는 밭, 작물을 기르지 않고 휴경하는 밭으로 나누어 주기적으로 돌려가며 농사짓는 방식이다. 3년마다 한 번씩 농사를 쉬지 않으면 지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밀은3년에 한 번밖에 수확하지 못했다.
실제로 유럽의 전원 풍경을 보면 드넓은 밭이 펼쳐지고 마을은먼 곳에 어렴풋이 보이는 식이다. 삼포식 농업을 하며 살아가자면 드넓은 경작지가 필요했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아시아의 마을과 마을 사이는 거리가 짧은 편이다. 이것은 벼를 재배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부여받은 덕분이다.
아시아는 유럽과는 상황이 달랐다. 아시아에서는 해마다 논에 벼를 재배할 수 있었고 심지어 이모작도 가능했다. 지금도 벼를수확한 뒤 밀이나 보리를 재배하는 식으로 이모작을 하는 곳이 있다. 유럽에서는 3년에 한 번 밀을 재배했으나 아시아에서는 1년간 쌀과 밀을 모두 수확할 수 있는 셈이다. 사실 일반 작물은 이렇게 연작할 수 없다. 벼처럼 재뱌할 수 있는 작물은 드문 편이다. - P241

농사를 지어 농작물을 수확하면 토지는 갈수록 척박해진다. 작물이 흡수한 땅속 양분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또 특정 작물을 연이어 재배할 경우 결국에는 작물 재배 자체가 어려워진다.
미네랄 균형이 무너지면서 식물이 내뿜는 유해물질의 영향으로토양이 메마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찍이 농경을 시작한 지역은토지 사막화로 문명이 붕괴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중국의 농경문화를 지탱해준 두 가지 작물, 벼와 대두는 자연을 별로 파괴하지 않는 ‘착한 작물‘이다. 논에 벼를 재배할경우 산을 타고 상류에서 흘러들어온 물로 영양분을 보충할 수있다. 이때 남은 미네랄과 유해물질은 물에 씻겨 내려간다. 그 덕분에 같은 농경지에서 매년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
대두는 콩과 식물이다. 콩과 식물에는 박테리아와 공생해 공기속 질소를 흡수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대두는 질소가 줄어들어 척박해진 토지에서도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더구나 다른 작물을 재배했던 땅에 대두를 심어 키우면 대두가지력 회복을 도와 토지를 기름지게 만들어준다. - P249

오늘날 인류는 전 세계적으로 온갖 다양한 식물을 재배한다. 만약 식물의 최대 존재 목적이 ‘씨앗 확산‘에 있다면 지구 구석구석까지 영역을 확장한 식물이야말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생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간에 의해 재배되는 작물들은 하나같이 살뜰히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인간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씨를 뿌리고 물과 비료를 주며 정성껏 식물을 돌본다.
최종 목적을 달성한 식물이 인간의 기호에 맞게 형태와 성질을 바꾸는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도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인간이 식물을 제멋대로 개량한 게 아니라 식물이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변신해온 것일 수도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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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리노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가 평소처럼 돈을 빌려달라고 할 줄 알고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리노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리노는 자기 어머니가 사라졌다고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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