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화와 인위적 기근을 밀어붙이던 스탈린은 자기도 모르게 히틀러의 권력 강화에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스탈린이 소련에서 집단농장을 시작하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회원국 공산당들에게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class against class‘ 노선을 따르도록 했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피해야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만 인류 진보를 이끌 자격이 있으며,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사기꾼이자 ‘사회주의 파시스트‘였다. 그들은 나치를 포함해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모든 당과 연합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적은 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었다.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이 - P123

처음에 히틀러는 국내 정치에서 반유대주의보다 반공주의를 더 중시했다. 독일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그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분쇄해야 했다. 1933년에는 독일인 약 20만 명이 구금되었는데, 대부분은 정권에 대항하는 좌익으로 간주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자행한 테러의 목적은 제거가 아닌 위협이었다. 구금된 이들 중 태반은 나치가 ‘보호감호‘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짧은 기간을 거친 후 석방되었다. 공산당은 선거에서 차지해왔던 81석을 획득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의 모든 자산은 국가에 압수되었다. 1933년7월이 되자 독일에서 나치 이외의 다른 정당 가입은 불법이 되었다. 11월, 나치는 나치 후보자만 출마해 승리할 수 있는 의회 선거를 개최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아주 빠르게 일당 독재국가로 만들었는데, 스탈린이 구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다년간 소련을 제외한곳에서는 가장 강력한 공산당이었던 독일 공산당이 몇 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이곳의 패배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먹칠을 했다. - P126

히틀러가 떠오르면서 소련은 스스로를 유럽 문명의 수호자로 내세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 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유럽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반파시스트‘로 재정의하고, 사회민주주의자 및 다른 좌파 정당과 협력해야 했다. 유럽내 공산주의자들은 선거 연합인 ‘인민 전선‘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자 및 다른 좌파 정당과 연대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로써 한동안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 타도가 아닌 민주주의와의 타협에 힘써야했다. - P130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 P132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협력해 일본의 진격에 맞서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동료 공산당에 대한지원과 더욱 중요한 문제인 소련 안보에 대한 고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원칙에 따라 인터내셔널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지만, 스탈린은 국경 지대의 안정을 위해 국민당 정부에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소련의 카자흐스탄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회교도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는 신장에서도 스탈린은 ‘탈이념적 접근법‘을 선택했다. 그는 그 지역 군벌인 차이를 돕기로 하고,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공병과 광부들을 보내고는 보안 유지를 위해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도 파견했다.
세계적으로는 독일과 일본의 관계 회복으로 일본, 독일, 폴란드의소련 본토 포위가 완성되는 듯했다.  - P135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 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돌격대는 히틀러가 개인적인 권위를 내세워 적을 그리고 유권자를 위협하고 결국 1933년에 집권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돌격대가 즐겨 벌이던 시가전은 총통이 된 히틀러에게는 정치인 시절만큼 쓸모 있지 않았다. 룀은 히틀러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두 번째 혁명‘의 필요성을 1933년과 1934년에 언급했다. 또 독일 군대 재건이라는 히틀러의 계획에는 잘 맞지 않는 개인적야심을 키우기도 했다. 룀은 자신의 돌격대가 독일 군대보다 나치 정신을 더 잘 보여준다고 말했고, 독일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싶어했다. 300만 명에 달하는 그의 돌격대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0만 명밖에 허용되지 않던 독일 군대를 수적으로 압도했다. 히틀러는 이러한조약의 의무를 깨려 하면서, 군을 준군사 조직으로 대체하거나 병합하는 대신 독일 군대를 재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 P144

히틀러와 고위 장성들의 관계 개선은 친위대의 돌격대 제압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부에 룀을 없애준 일로 머리를 숙여야 했다. 1934년까지 히틀러가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주요국가기관은 군대뿐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돌격대를 확대하는 대신 군을 재건할 계획임을 밝히자, 상황은 급변했다. 몇 주 후 독일 대통령이 사망한 뒤, 군부는 히틀러의 국가원수 취임을 지지했다. 히틀러는 한 번도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지도자(퓌러)‘라는 직함을 선호했다. 1934년 8월부터 독일 병사들은 히틀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약속하는 선서를 했고, 선서 이후에는 그를 ‘나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같은 달 후반 국민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직함은 ‘지도자 겸 제국 총통‘으로 확정되었다. 1935년 3월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독일의 의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징병제를 다시도입했으며, 독일 군대 재건에 들어갔다. - P146

수용소행을 선고받거나 오래 복역해야 했던 부농들은 시베리아나 카자흐스탄, 소련 동부나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이들이일본의 침략을 지지하지 않을까? 1937년 6월 내무인민위원회는 시베리아로 추방당한 부농들이 "반란 세력 건설을 위한 방대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고했다. 외세의 지원과 전쟁을 가정하면, 부농들은 당연히 소련에 맞서 싸우리라 여겨졌다. 그들은 내부의 적이 될 터였다. 억압적인 정책 하나가 다른 억압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추방당한 부농들은 소련 체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추방당한 곳은 고향에서는 너무나 멀고 위협적인 외세, 즉 팽창 중인 일본 제국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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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인민위원회에 따르면 일본이 후원하는 "러시아 일반 군사 연합"은 일본 침략 시 부농 추방자들을 선동할 계획을 세웠다. 1937년 6월 지역 내무인민위원회는 "러시아 일반 군사연합"과의 공모 혐의가 있는 사람을 일제히 검거, 처벌할 권한을 받았다. 작전 대상은 추방당한 부농과 이들을 지휘할 전 러시아 제국 장교였다. 당연히 부농이 장교들보다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렇게 시베리아 추방지에서의 부농 학살이 시작되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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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33년 초반 몇 주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굶주림이 맹위를 떨칠때, 스탈린은 농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공화국의 국경을 봉쇄했고, 농민이 구걸하지 못하도록 도시를 폐쇄했다. 1933년 1월 14일 소비에트 시민은 도시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려면 국내용 여권을 휴대해야했다. 농민들은 그런 여권을 받지 못했다. 1933년 1월 22일 발리츠키는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공화국을 탈출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국가 경찰에게 농민의 탈출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농민에 대한 장거리 기차표 판매가 금지되었다.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는 농민 난민이 실제로는 빵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집단농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폴란드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살아 있는 선전 기관 역할을 해 "반혁명 음모"에 가담한다는 것이었다. 1933년 2월 말이 되자 약 19만 명의 농민이 체포된 후 고향마을로 이송되어 굶주려야 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자신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그것은 감시탑, 폐쇄된 국경,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노동, 그리고 한없이 이어지는 듯하다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 거대한 기아 수용소를닮은 요새였다. - P94

 언론과 외국 기자단의 활동을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굶주림을 파괴 공작과 동일시한 당 노선 때문에 공식적인 도움이나 동정을 받지 못했으며, 극심한 가난과 불공평한 계획 때문에 경제활동에도 참가할 수 없었고, 규제와 경찰 저지선 때문에 다른 국민과 단절돼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홀로 죽어갔다. 그들의 가족들도 홀로죽었으며, 마을 전체가 고립된 채 죽어갔다. 20년 후,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기근이야말로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는 ‘원자화된‘ 현대사회 형성 과정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주장했다.  - P96

나중에 ‘인종 청소genocide‘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국제변호사 라파렘킨은 우크라이나의 사례를 일러 "소련 인종 청소의 고전적 사례"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 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 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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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 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그의 정책은 수만 명을 처형으로, 수십만 명을 탈진으로 죽게 했고, 수백만명을 굶주림의 위험에 빠뜨렸다. 물론 공산당 내부의 반발을 우려하긴 했지만, 스탈린에게는 엄청난 정치적 재능과 총독들의 자발적인지지,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를 예견하며 미래를 만든다고 주장하는 관료체제가 있었다. 그 미래는 공산주의였다. 중공업이 필요하며, 따라서 집단농장이 필요하고, 결과적으로 소련 사회의 최대 집단인 농민을 통제해야 하는 공산주의 말이다. - P63

처벌을 위한 농민 대량 추방은 소비에트 경제의 강제노동 대량 이용과 맞아떨어졌다. 1931년 특별 정착지와 강제수용소는 ‘굴라크‘라는 단일 시스템으로 통합되었다. 소련인들 스스로 ‘강제수용소 제도‘라 부른 굴라크는 농업 집단화와 함께 시작되었고 집단화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476개의 수용소 단지에 수용되게끔 1800만 명이 선고를 받았고, 150만 명에서 300만 명이 감금 도중에 사망했다. 자유농민은 노예 노동자가 되어, 스탈린이 소련 근대화에 필요하다고 믿었던 거대 운하, 광산, 공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 P66

소련령 우크라이나 농촌사회 대부분은 여전히 종교 공동체였다.
젊고 야심만만하며, 공인된 종교인 공산주의 무신론에 이끌린 많은젊은이는 우크라이나 대도시나 모스크바 또는 레닌그라드로 떠났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권이 자신들의 동방 정교회를 탄압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신자였고 상당수는 집단농장과의 계약을 악마와의 거래로 받아들였다. 사탄이 공산당원이라는 탈을 쓰고 이 땅에 나타났으며, 그의 집단농장이 고문과 저주를 불러올 명부를 기록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새로운 농기계센터는 게헨나의 전초기지처럼 보였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우크라이나의 일부 폴란드 농민은 집단화를 종말론적 관점으로 봤다. 어느 폴란드인은 집단농장에 참가하지 않는 이유를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팔고 싶진 않단다." 이러한 독실함을 이해하는 당원들은 자신들이 스탈린의 제1계명이라 부른, 집단농장은 먼저 국가에 음식을 공급한 후 인민에게 공급해야 한다는 계명을 선전했다. 농민도 익히 알고 있던 성경의 제1계명의 패러디라고 할 수 있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부농이 굴라크로 강제이주하면서 우크라이나 마을은 원래 있던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 P69

소련 서부에서의 집단화가 불러온 혼란은 폴란드가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낳았고, 소련 동부에서의 무질서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소비에트 중앙아시아, 특히 무슬림이 대부분인 소비에트 카자흐스탄에서 집단화는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한 혼란을 불러왔다. 집단화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인 사회 변혁을 요구했다. 카자흐스탄 국민은 농민이 아니라 유목민이었고, 소비에트 현대화의 첫 단계는 그들을 정착하게 하는 것이었다. 집단화가 시작되기 전에, 유목민들은 먼저 정착 농민부터 되어야했다. ‘정착화‘ 정책은 목동이 가축을 갖지 못하게 했고, 따라서 생존수단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낙타나 말을 타고 국경을 넘어 중국의 무슬림 지역인 신장(또는 투르키스탄)으로 이동했고, 그래서 스탈린은 그들이 중국의 내분에 관여하는 핵심 외세인 일본의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72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 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써"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폴란드는 1932년 7월 불가침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현상유지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우크라이나 농민의 운명도 스탈린이 좌우하게 되었다. 융통성 없는 열정으로 무장한 스탈린은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은) 8월, 자신의 최측근들에게 집단화에 부족한 것은 올바른 법적 근거뿐이라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에도 재산을 보호하는 법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농업 생산량 전부를 국유재산으로 선포하고, 식량 무단 수집은 모두 절도로 간주하며, 이러한 절도는 즉결 처형으로 처벌한다면 국가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 따라서 굶주리는 농민이 얼마 전까지 자기 땅이었던 곳의 밭고랑에서 감자 껍질을 주우면 총살당할 수도 있도록 해야 했다. 스탈린은 이 법률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것같다. 하지만 당연히 그 결과 기세등등한 국가가 저지르는 온갖 폭력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는 모두 사라졌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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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건 지독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 P66

우리는 다 같이 쓸쓸하고 허한 소리로 웃었다. 웃음 끝에 그가 도통한 표정으로 한마디 더 했다.
"욕먹을 소리지만 이런저런 세상 다 겪어 보고 나니 차라리 일제시대가 나았다 싶을 적이 다 있다니까요. 아무리 압박과 무시를 당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민족, 내 식구끼리는 얼마나 잘 뭉치고 감쌌어요. 그러던 우리끼리 지금 이게 뭡니까. 이런 놈의 전쟁이 세상에 어딨겠어요. 같은 민족끼리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형제간에 총질하고, 부부간에 이별하고, 모자웬수지고, 이웃끼리 고발하고, 한핏줄을 산산이 흩트려 척을 지게 만들어 놓았으니.…."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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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안방에선 올케가 오빠 다리의 총구멍에 심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 종아리는 바싹 말랐는데 총구멍은 생생하고도 깊었다. 심으로 박은 일 센티 너비의 가제는 그 안에서 서리서리 끝도 없이 풀려 나왔고, 새것을 집어넣을 때도 꾸역꾸역 한없이 들어가는것 같았다. 지켜보는 동안의 숨 막히는 고통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저 구멍이 차라리 심장을 관통했더라면, 하는 생각을안 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그 생각은 뜨겁고도 오싹했다. 밖에서 뭘 보았느냐고 오빠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못 보았다고 대답했다. - P11

그날 밤 이후 다시는 우리 식구 말고 딴 사람을,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만난 적이 없었지만 이 도시가 진공상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날 밤만이 아닐 것이다. 인민군대는 아마 매일 밤그렇게 스며들어 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 도시엔 반반한 집 튼튼한 건물도 많은데 하필이 빈촌에 주둔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붉은 군대는 단지 이 도시를 거쳐 갔을 뿐 그들이 있어야할 전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남쪽에 있을지도 모른다. 신문도, 방송도, 떠도는 말도 접할 길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안 죽었다는 것밖에는 앞으로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었다. 전선이 일단은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갔다는 확실한 증거는 그날 밤 전찻길까지 나가서 본 광경이 전부였다. 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면 우리는 인민공화국의 하늘 아래 있으련만 그 실감은 나지 않았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내 알바 아니게 내 식구 생각만 하겠노라고 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돈을 벌어서 내 식구호강시키며 살겠노라고 미리 빼기는 오빠를 직시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노릇이었다. 쉽게 말해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살겠다는 건데 딴 사람도 아닌 우리 오빠 입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면 배신감이었을지도모른다.
오빠는 나에게 천성의 생각하는 갈대였다. 그런 그가 지금 살찐 돼지가 되려고 열심히 자신과 식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말이 많아지면서 표정도 과묵하던 때의 준수한 모습은 간데없이, 소심하고 비루해지고 있었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오빠 같은 한낱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함부로 넘나들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있을까. 오빠가 얼굴을 잃고 돌아왔다고 해도 지금의 오빠보다는 유사성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 같았다. 허구한 날 오빠는 다시 꿈꾸지 않기를 꿈꾸고, 엄마는 오냐오냐 맞장구를 쳐대며 즐거워했지만, 엄마의 태도도 서른 살 먹은 아들의 포부를 듣는 태도라기보다는 세 살 먹은 어린애의 재롱을 보는 태도에 가까웠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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