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933년 초반 몇 주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굶주림이 맹위를 떨칠때, 스탈린은 농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공화국의 국경을 봉쇄했고, 농민이 구걸하지 못하도록 도시를 폐쇄했다. 1933년 1월 14일 소비에트 시민은 도시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려면 국내용 여권을 휴대해야했다. 농민들은 그런 여권을 받지 못했다. 1933년 1월 22일 발리츠키는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공화국을 탈출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국가 경찰에게 농민의 탈출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농민에 대한 장거리 기차표 판매가 금지되었다.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는 농민 난민이 실제로는 빵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집단농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폴란드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살아 있는 선전 기관 역할을 해 "반혁명 음모"에 가담한다는 것이었다. 1933년 2월 말이 되자 약 19만 명의 농민이 체포된 후 고향마을로 이송되어 굶주려야 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자신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그것은 감시탑, 폐쇄된 국경,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노동, 그리고 한없이 이어지는 듯하다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 거대한 기아 수용소를닮은 요새였다. - P94

 언론과 외국 기자단의 활동을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굶주림을 파괴 공작과 동일시한 당 노선 때문에 공식적인 도움이나 동정을 받지 못했으며, 극심한 가난과 불공평한 계획 때문에 경제활동에도 참가할 수 없었고, 규제와 경찰 저지선 때문에 다른 국민과 단절돼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홀로 죽어갔다. 그들의 가족들도 홀로죽었으며, 마을 전체가 고립된 채 죽어갔다. 20년 후,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기근이야말로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는 ‘원자화된‘ 현대사회 형성 과정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주장했다.  - P96

나중에 ‘인종 청소genocide‘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국제변호사 라파렘킨은 우크라이나의 사례를 일러 "소련 인종 청소의 고전적 사례"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 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 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