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은 고국에서 먹던 갖가지 인스턴트라면을 사러, 한인 가족들은 설날에 해 먹을 떡국 떡을 사러 이곳에 온다. 큼직한 통에 담긴 깐마늘도 여기서만 살 수 있다. 한국 음식을 해 먹는 데 마늘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이곳뿐이라는말이다. H마트는 일반 슈퍼마켓 매대 중 달랑 한 칸을 차지하는 ‘세계 전통 식품‘ 코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서문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매는 매부리 (사냥에 쓰는 매를 기르고 부리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사물이 무너지고 중심이 지탱할 수 없다."
- W. B. 에이츠, 「재림」 중에서

중동 지역에서는 광활한 요새인 이란과 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한 채 맞서고 있다. 태평양 남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시대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중해에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당장 내일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서기 2020년대에 오신 걸 환영한다.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시대는 이제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열강들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수많은 주연 배우들은 물론 단역 배우들까지도 서로 밀치며 중앙 무대로 들어서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 P8

카르발라라는 도시에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과 영국 주도의 연합군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이라크 내에서의 반정부 투쟁은 여전히진행 중이었다. 수니파 무슬림인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는 자학의식을 포함한 상당수의 시아파 의식과 예배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모든걸 태워버릴 듯 맹렬하게 땡볕이 내리쬐던 그날, 나는 전국 각지에서 백만 명이 넘는 시아파 주민들이 카르발라로 밀려들어 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많은 남자들이 시아파 의식의 하나로 온몸이 피투성이가될 때까지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고 이마를 칼로 베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그들의 피가 모랫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에 동쪽 국경에 면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라크에 시아파가 지배하는 정부가 들어서도록 힘을 보태고, 또한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동맹 세력과 연계해서 중동의 서쪽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최대한 이용할 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리와 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불가피한일이기도 했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은 얼핏 종교 의식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이기도 하다. 열정에서 비롯된 이 파도는 지중해 지역에까지 그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는 거였다. 정치적 균형추는 움직였고 커져가는 이란의 힘은 그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위협할 수있을 터였다. 카르발라는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 P11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1910년부터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가운데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백인 가정이나 국가시설에 맡겨졌다. 두 경우 모두 강제적인 흡수와 동화가 그 목적이었다. - P33

그즈음 오스트레일리아 인구는 3백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도시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시드니와 멜버른의 인구도 저마다50만 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전히 대다수 이민자는 영국에서 왔는데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해도 거의 백인들이라고 보면 됐다. 새 정부가 초기에 통과시켰던 법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위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1901년부터 1978년까지 지속되었던 백인 이외 여러 유색 인종의 이민을 배척하던 백인 우선주의 정책으로 알려진 이민 제한법이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문구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느 모로 보나 인종차별적인 의도가 명백한 조항이 있었다. 이를테면 관계자 입회하에 "관리자가 지정한 유럽 언어로 50단어를 넣어 문장을 말하고그가 말한 내용을 받아쓰지 못한 사람은 이민이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 P3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10파운드 이민Ten Pound Poms 정책을 통해 많은 영국인들이 이 나라로 몰려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노동력이 부족했던 터라 당시 돈으로 10파운드만 내면 영국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행 배에 올라탈 수있었다. 정상 요금은 120파운드, 즉 보통 노동자들의 6개월치 급여와 맞먹었다. 전후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영국으로서는 이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1947년부터 1982년 사이에 150만 명이 넘는 영국인들이 기회와 태양빛을 찾아 새로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  - P39

이보다 앞선 2020년 초반에보다 심각한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파푸아 뉴기니의 다루섬에 대규모 어업단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한 후 그 지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불과 2백 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데, 그 주변 바다는 수산업의 잠재적 가치로 명성이높다기보다 오히려 중국의 저인망 어선들이 자주 정찰선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어업단지 건설이 단순한 비즈니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중국 군함들이 머물 만한 항만이 건설될 수도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이 지역에서 중국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자 공동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조선사람이 중국공산당 내에 여기 한 사람 저기 한 사람씩 흩어져 있는 것은 별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공동행동을 위하여 한데 모여야 하며 또한 중국만을 위하여 희생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조선혁명을 보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하였다. 1932년 이래 조선공산당과 우리의 만주공산당은 독립해 있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조선 문제를 연구하지 않았으며 조선 문제를 별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더는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처지가 못 된다. 우리는 쫓겨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세력에 가담하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중국에 가세해야만한다. 일본제국주의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장래의 행동을 위하여 조선인의 운동을 건설하고 준비하는 방향으로 재빨리 우리의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데 우리는 동의하였다.
1935년 8월 1일, 중국공산당과 홍군과 중화소비에트 정부는 국민당과의 항일연합전선을 제창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자 우리 조선인들은 즉시 중국민중과 협력하기 위하여우리 자신의 민족전선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였다.  - P459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나 자신에 대하여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 P464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P466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은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不死性)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 P473

내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1938년 한커우(漢口)에서 이 조선항일의용군 소속의 조선인 몇 명과 회견하였다. 그는 이들이 중국정부로부터 지원을 얻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내게 이야기하였다. 국민당은 이처럼 열렬한 좌익혁명가들이 자기네 군대에 대하여 형제애를 갖도록 하는 일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그랬을 경우 나타날 정치적 결과를 두려워하는 태도가 역력하였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부대는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자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여기에 합세하였다. 조선인의 일본군에 대한 태업도 많이 일어났다. 또한 그들은 중국의 첩보활동에서 매우 귀중한 부분이기도 하다. 조선인 징병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탈주하였다.  - P476

일본인 지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끊임없는 투쟁 이야기는어떠한 억압 아래서 이 투쟁이 유지되고 있는가를 고려해 볼때, 대단히 영웅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무장습격이 만주에서 행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인도, 자바, 인도차이나, 타이완, 버마의 식민지운동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대단히 집요하면서도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었다. 조선에서 검증된 것처럼 일본의 식민지정책은 개화한 제국주의의 모범 따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극동에서도 가장 불행한 나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P4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한편 임포스터였기 때문에 내가 거머쥘 수도 있었을 좋은 기회들을 번번이 놓치기도 했다. ‘못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해보기도 전에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기회를놓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행동이 겸손이라고 착각했다.
이런 착각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메타인지를 공부한이후로 내 태도를 ‘자신을 깎아내리는 겸손‘에서 ‘메타인지적 겸손‘으로 조금씩 수정해갈 수 있었다. 그러자 성공에 대한 태도도달라졌다. 메타인지는 문제에 대한 판단을 최우선에 놓는 것이다.
즉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보고 그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모니터링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수학 숙제에서 첫 번째 문제를 읽고 ‘아, 문제가 조금어렵네‘ 하는 자신의 생각을 모니터링하게 되면, 모니터링의 결과를 바탕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개선해나갈지 방향을 가늠하게 된다. ‘필기노트를 다시 읽어보자‘는 전략을 택하기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컨트롤 과정이다. 나는 메타인지를 사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겸손이 발휘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이고,
여기서 진전된 뭔가를 더 배우고 싶다"고 표현하는 것이 내가 말하는 메타인지적 겸손이다. - P236

부모에게 필요한 정확한 메타인지란 자녀의 자신감을 믿어주는것이다. 아이가 잘하는 것, 그리고 아직은 더 연습이 필요한 것을관찰할 수 있는 것도 메타인지다. 아이가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에 ‘넌 항상 부족하고 미숙한 아이‘라고 믿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 P242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런 ‘척할 때 쓰이는 에너지가 무한정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험결과에서 보듯 우리에게 주어진 정신에너지는 유한하다. 임포스터들도 마찬가지다. 실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자제할 때 실은 엄청나게 많은에너지를 쓰고 있는 셈이다. 나는 실험을 떠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내 자아가 몽땅 고갈돼버리고 말것이다. 그러니 그러기 전에 나 스스로 들켜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 P250

실제로 아들아이는 시험점수를 잘 받아오는 편이다. 초등학교때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점수 따기가 수월해서다. 하지만 벼락치기는 습관이 될 수 있다. 벼락치기 공부는 배운 내용을 내가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 부분을 내가 어려워하는지 살펴볼 기회를 앗아간다. 시험에 나올 법한 정보들을 머릿속에 욱여넣기 급급하다 보니, 자신의 학습상태를 모니터링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모니터링이 없으니 당연히 자기 수준에 맞게 학습전략을 컨트롤하는 단계도 시작되지 않는다. 더 나은 학습방법이 뭘까 궁리하고 시도해보는 일은 더욱 요원해진다. 스스로 학습방식이나 목표를 조절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아이는 학년이 올라가고 학업수준이 높아질수록 불안해진다.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공부를 미루게 된다. "나중에는 다 할 수 있겠지?" 하고마음을 달래보지만, 메타인지를 사용할 줄 모른다면 이런 생각은기만적인 자기위안에 불과하다. - P258

 임포스터인 내가 책을쓸 때 나의 ‘넘어짐‘을 드러내는 데 부끄러움이 없었고, 내가 이룬 성공에 대한 나 자신의 공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내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모든 부분, 즉 실수와 성공을 보며 스스로 이뤄낸 것들을 오롯이 인정하는 기회를 건네줄 수 있었다.
임포스터로 힘겨워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넘어짐과 성공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부모‘를보며 자녀들 또한 그들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들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 P2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7세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종교적 약속은 신앙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신앙이란 신의 힘으로 드러난 진실에 대한 내적 확신을 뜻했다. 하지만 18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열정의 향기가 났기 때문이다. 열정을 뜻하는 ‘enthusiasm‘은 ‘신이들린‘ (possesed by a god)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비롯됐다. 바로 이 열정이 청교도 혁명에 불을 지폈고 영국을 발칵 뒤집어 놨다. 새뮤얼 존슨은 ‘열정‘을 ‘사적 계시에 대한 헛된 믿음, 성은에 대한 헛된 확신‘이라정의했다. 존슨은 존 로크(John Locke)의 글에서 이 정의를 가져왔다.
"열정은 이성이나 신의 계시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만한 뇌의 자만심에서 나온다." - P518

영국 성공회는 고등 교육을 독점했다. 다시 말해 ‘39개조의 신앙고백‘에 적힌 가르침에 대해 맹세하지 않은 자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거나 학생을 가르칠 수 없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를 쓰기 위해서 역사적 문헌을 연구한 덕분에 과거에 존재했던 신학적 논쟁을 깊이이해하고 있었다. 기번은 신앙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말뿐만 아니라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즐겨 말했다.)주교는 세속적 권력도 가졌다. 그들은 종교적 귀족계층의 대표로서 상원에서 의석을 차지했고 투표권을 행사했다. 존슨은 이것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 누구도 학식과 독실함으로 주교가 될 순 없다. 의회에 이해관계가 있는 누군가와 연이 있는 자만이 주교가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많은 주교들은 막대한 부를 쌓았다. - P529

보즈웰은 존슨의 친구 윌리엄 제라드 해밀턴(William Gerard Hamilton)의말을 고별사로 대신했다. 해밀턴은 정계에 처음 입문했을 때 에드먼드버크와 함께 일했다.
"그가 떠나고 우리의 가슴에 아주 깊은 구멍이 남았습니다. 그 무엇도 이 구멍을 메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가득 채워지지않는 법입니다. 존슨은 죽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벗을 사귑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새뮤얼 존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당시 그 누구도 해밀턴이 존슨이 <더 램블러>에 했던 말을 떠올렸음을 알지 못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압제할 수 없다. 이것은 아마도 신의 섭리일 것이다. 한 개인이 은퇴하거나 사망하여 이 세상에 깊은 구멍을 남길 정도로 아주 중요한 존재여선 안 된다." - P566

에드먼드 멀론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매일 그가 너무나 그립다네. 그는 거의 매일 습관처럼 나를 찾아왔지. 나는 정신없는 그의 언행에 때때로 불평하곤 했지. 하지만 지금은 그가 만들어내는 소음, 우스꽝스러운 소리와 기분 좋은 우스갯소리가 너무나 그립다네. 가엾은 나의 친구. 보즈웰은 너무나 갑자기 우리의 곁을 떠났어. 나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도 않고 그 친구는 훌쩍 세상을 떠나 버렸어."
6월 8일 제임스 보즈웰은 오킨렉의 가족 지하 납골당에 안치됐다. - P590

이들 외에도 수백 명의 회원들이 더 있지만,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들은 아니다. 문학계와 예술계가 아닌 정계와 귀족 출신의 회원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다는 부분이 눈에 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점은 러디어드 키플링, 맥스 비어봄 그리고 T. S. 엘리엇이 회원으로 선출됐을 시기에 그들의 경력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새뮤얼 존슨과 에드먼드 버크가 살아 있었다면, 이토록 많이 이들이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며 어느 누가 새로운 회원으로 선출될 수 있었겠는가? 아마 디킨스(Dickens), 새커리(Thackcray), 트롤로프(Trollope), 하디(Hardy), 로렌스(Lawrence), 오웰(Orwell), 오든(Auden) 그리고 라킨(Larkin)은 회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 클럽에는 보수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총리들도 몇몇 있었지만, 영국의 가장 위대한 총리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없었다. 그리고 조지 엘리엇 (George Eliot)이나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도 회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더 클럽은 끝까지 남성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 P6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