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에 신학자들은 구원 이외에도 세속적인 경제 문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가톨릭 교단의 스콜라 신학자들은 시장의 정의와 도덕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특히 그들은 ‘공정 가격just price‘이라는개념을 고안했고, 고리대금업에 대해 교회의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구약이 같은 동족끼리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신학자들은 이자를 위험, 기회비용, 인플레이션, 불편 등 여러 다른 요소로 세분화하면서 고리대금업을 금지하는 계율에 흠집을 내고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내기 위해 애썼다.  - P41

†공정 가격 또는 가격의 공정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것을 체계화 한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 Aquinas 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Summa Theologica)에서 인간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정의(正義) 또는 공정 이므로 교환에 있어서도 중용에 의한 정의의 가격, 즉 공정 가격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 또는 공정이란 ‘분배적 정의‘와 ‘유통적 정의‘를 뜻하며,
교환에 있어서 공정 가격을 지배하는 것은 유통적 정의다. 정의의 일반적 형태는 균등이며, 따라서 교환은 등가 원칙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가치 이상으로 판매하거나 혹은그 이하로 매입하는 것은 부정이자 불법이며,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에만 공정한 가격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윤은 필요하고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쓰이면 무방하다. 또, 이윤은 노동과 비용을 보상하는 경우에만 정당한 것이다. 공정 가격은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한 투기를 막고 상거래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연법적 사상에서 도출된 가격 이론이다. - P41

스미스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면, 각각의 마을과도시, 즉 사회 전체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가 (리바이어던 Leviathan>에서 묘사한 사악한 자연 상태와왜 닮지 않았는지, 왜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있지 않은지 스스로 물으면서 이런 역설과 씨름했다. 홉스는 인간의 삶은 정부가 출현할 때까지는 "고독하고, 가엽고, 역하고, 잔인하며, 짧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미스는 한 가지 그럴듯한 대답을 찾아냈다. 그는사람들이 도덕적 선택의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고 충고하는 ‘공평한 관찰자 impartial spectator‘를 마음속으로 상정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들은 단지 자신의 사리만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관찰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견을 묻고, 충고를 받아들인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이기심이 아닌 동정심에 기초해 도덕적 선택과 판단을 내린다. - P56

애덤 스미스가 인간의 본성에서 발견한 중요한 자연적인 충동 또는
‘성향propensities‘이 그의 분석 토대이자 고전파 경제학의 기초를 이룬다. 첫 번째, 스미스가 발견한 인간의 자연적 충동 또는 성향은 모든 인간은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구. 다시 말해, 비록 공공연하게 들어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를 줄곧따라다니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어떤 변화나 발전을 바라지 않을 만큼,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 한 순간이라도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두번째, 스미스가 발견한 인간의 자연적 충동 또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이 갖는 분명한 성향은 (•••)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의 것과 교환하고, 교역하고, 거래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성향이다."
스미스는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인간의 자연적인충동을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이기적인 인간들 또는 인간의 이기심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풍부한 천연자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의 자비나 이타심에만 과도하게 의존하다보면, 사람들은 바보가 되고, 국가는 빈곤해질 수있다. 스미스는 인간은 항상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무작정 타인의 자비만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바람이라고 주장한다.  - P65

스미스는 <국부론>의 한 유명한 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사회 전체가 번영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얼핏 들으면 다소 모순되게 들리지만, 잘 들어보면 정말 그럴듯한 말이다. 즉, "그는(•••) 공익을 증진시키려는 의도도,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증진시킬 수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며, 그리고 이런 경우에,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목표를증진시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다." 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뚜렷한 상징이 된다.
그렇다고 스미스가 자신의 주장을 모두 이런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맡긴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사회적 조화를 이끌어내는 진정한 지휘자, 즉 자유시장을 상징한다. 20세기에 그 누구보다 자유시장 질서를 옹호했던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Friedrich von Hayek 는, 만일 시장 제도가 자연스럽게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마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칭송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장 경쟁은 한 이기적인 인간이 아침에 일어나 창밖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원료를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만큼 생산하고, 자신이 꿈꾸는 가격이 아니라 이웃이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가격에 판매한다. 즉, 자유시장에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으로 사회 전체가 번성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 P67

 다행히 그는 단 두 글자, 즉 ‘노동분업division of Labor‘이라는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스미스는 노동분업에 대해 매우 논리적이고 경험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핀pin‘ 공장을 예로 들어 경험적인 분석과접근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경제사상사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핀 제조업에 관해 (•••) 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는 (•••)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에 핀 20개는커녕 단 1개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핀 제조업이 운영되는 방식을 보면, 작업 전체가 하나의 특수한 직업일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수의 부문으로 나뉘어 있고, 그것이 또한 각각 특수한 직업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은 철사를 잡아 늘리고, 다른사람은 그것을 곧게 편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그것을 자르고, 네 번째 사람은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 번째 사람은 핀 머리를 붙이기 쉽게 다른 쪽 끝을 갈아낸다. 핀 머리를 만드는 데도 두세 가지 다른 공정이 필요하다. 핀 머리를 핀에 올려놓는 것과 이렇게 만들어진 핀을 표백하는 것도 각각 특수한 작업이다. 심지어 완성된 핀을 포장하는 것도 하나의 직업이다. 이런 식으로 핀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약 18개의 공정을거쳐야 한다. 어떤 공장에서는 이 세분화된 공정을 한 사람씩 각각 분담해서 하는 곳이 있다. (•••) 나는 이런 공정을 열 사람이 나누어서 하는 작은 공장을 견학한 적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한 사람이 (•••) 하루에 [평균]4,800개의 핀을 생산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이 모든 공정을 혼자서 독자적으로 한다면, 그리고 핀 제조업에 대해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하루에 핀 20개는커녕 단 한 개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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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실에서 가치가 나올 수 없다‘라는 지적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동물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런 이해가 나를 자동적으로 채식주의자로 변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겠다는 결정은 어떤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이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당위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실이 100퍼센트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실을 알게 되면 일단 바뀔 수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실이나 가치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것은 우리의 일상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사실과 가치는 그 연결이 느슨하거나 팽팽한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동맥과 정맥이 모세혈관을 통해 연결되어 있듯이 미세한 연결망들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사실만의 세상에서 살아가지 않듯이, 가치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 P323

저항이 없는 그 공간은 갈릴레오의 머릿속에 있었다. 그의 위대함은 그가 이러한 공간을 창조해냈다는 데 있다. ‘우리 주변엔 없지만 우주에 있을 수 있다. 지구가 태양을 계속 도는데 왜 계속 돌까? 저항이 없기 때문이다. 우주엔 저항이 없기 때문에 계속 도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그래서 지구엔 없을지 몰라도 저항이 없는 공간이 우주엔 존재한다. 우리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화된 공간을 먼저 이해하고, 그곳에서 만족하는 법칙을 만들어내고, 일상에서는 그 법칙을 변형하면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의 논증이 갈릴레오식의 논증이다.
정리해보자. 갈릴레오는 관성의 법칙이나 자유낙하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런 법칙은 자연에서 찾아질수 없다. 그는 마찰이 없는 평면, 저항이 없는 공간을 상상함으로써 이런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법칙이 만족되는 상황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갈릴레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물리학은 자연에 있는 법칙을 그냥 반영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규칙이나 법칙이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창의적으로만든 결과이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일이 예술가들이 하는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P333

과학 논문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옳은가를 검증하는 것은 과학자들이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대중문화에 나타난 과학이 얼마나 옳은가, 그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문화를 마치과학에 종속된 것인 양 생각하는 잘못된 태도이다. 괴물이라는 새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프랑켄슈타인 같은작품은 과학적으로 틀렸고 따라서 가치가 없다고여기는 것은 실로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보다는 과학의 일부가 녹아든 대중문화가 대체 세상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작가는 이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했는지, 이것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찰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일이다. 더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때, 과학은 우리의 문화에 더 튼튼하게 뿌리내릴 것이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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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리디아의 슬픔은 굉장했다! 단 한 사람의 죽음이 이십 대 때 그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다. 그런데 이제 열여섯 명이 더해졌다.
그 일을 생각하면 자신이 레이스 쪼가리처럼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보다 어떤 형태의 구멍이 뚫렸는지로 정의되는 듯하다. 이 열여섯 명의 죽음이 루카라는 사람을 어떤 형태로 만들지 상상조차 할수 없다. 신변이 안전해지는 대로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 루카에게는 의식이 필요하다. 자신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들 방법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지만, 리디아는 다시 주문을 외운다.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생각하지 마. 그러고는 도서관의 규모를 가늠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본다. 뒤로 살짝 젖힌 고개, 모든 물건의 표면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눈, 어쩌다 떠오르는 미소를 쫓아내는 노력.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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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가 되는 일은 쉽지 않다. 기업의 임원경제학자들이 비용과 이익을 정확하게 계산할 줄 모른다고 비난한다. 이타주의자들은그들이 비용과 이익에 대해 너무 까다롭게 군다고 나무란다. 한편, 정치가들에게 경제학자들은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모두가 공동 번영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공약에 찬물을 끼얹는 머저리에 바보천치들이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와 스코틀랜드의 수필가이자 역사가인 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등을 포함해 여러재치 있는 문필가들도 그들을 모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실제로 칼라일이 경제학을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비판한 이래 경제학자들은 정말 저주라도 받은 듯이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이런 비난에 억울함을 호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경제라는 기상에 그늘을 드리우는 나쁜 뉴스를 만드는 장본인들이 아니라 있는 사실을 알리는 단순한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달하는 메시지 또한 간단하다. 그들은 항상 인류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리는 더 이상 에덴동산에 살지 않는다. 세계는 젖과 꿀이 넘쳐 나는 곳이 아니다. 더 맑은 공기와 더 빠른 자동차, 더 큰 주택과 더 넓은 주차장, 더 많은 노동 시간과 더 많은 여가 시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나쁘고 어느 것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그것을 한번에 모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경제학은 선택의 학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단지 그들은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이해시켜 줄 뿐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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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화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의 과잉은 인류 전체의 저항력을 떨어뜨릴 위험으로 작용한다." 같은 것이 지배하는시스템 속에서 저항력이라는 용어는 오직 비유적인 의미로만 쓰일 수 있을 뿐이다. 면역학적 저항은 언제나 강조적 의미에서 낯설다고 할 수 있는 상대, 이질적인 상대를 향해 일어난다. 같은 것은 항체의 형성을 초래하지 않는다. 같은 것에 지배되는 시스템 속에서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면역학적 배척과 그렇지 않은 배척을 구별해야 한다. 비면역학적 배척은 같은 것의 과다, 긍정성의 과잉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또한 면역학적 내부 공간을 전제하는 배제도 아니다. 반면 면역학적 배척은 양적인 문제와 무관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타자의 부정성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내부를 지닌 면역학적 주체는 아주 적은 양이라 하더라도 이질적인 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밖으로 밀어낸다. - P18

보드리야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네트워크와 가상세계의 폭력은 바이러스성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염, 연쇄 반응, 모든 면역성의 제거 등과 같은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 바이러스적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정적 폭력과 반대로 긍정성의 과잉을 통해 작동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끝없는 증식과 비대화, 변이를 통해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암세포처럼.
가상성virtualité과 바이러스성viralité 사이에는 은밀한 친족성이 있다. " - P19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과 같은 신경성 질환은 바이러스성 폭력과 같이 여전히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면역학적 도식을 따르며, 시스템에 적대적인 특이한 개별자나 이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으로는 정확히 기술할 수 없다. 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적인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적인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이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Hyperaktivität에서 과잉hyper은 면역학적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 P22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규율사회에서는 여전히 ‘No‘가 지배적이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 P24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적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schaffens- und Könnensmüdigkeit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이상 할 수 있을 수없다 Nicht-Mehr-Können-Können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 P28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 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 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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