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책이라곤 거의 읽지 않는 환경에 태어나서 독서에 그다지 취미를 들이지 못했고 독서할 시간도 별로 없었던 나는 살면서 겪게 되는 이런저런 사정에 엮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 P11

주의 깊게 읽은 책과 한 번도 손에 잡아본 적이 없는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책 사이에는 여러 수준의 독서가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세밀하게 검토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책을 읽었다고하는 경우, 사람들이 독서라는 말을 정확히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에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사실 이 독서라는 말은 아주 상이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반대로, 분명히 읽지 않은 책이라고 해서 그책들이 우리에게 이런 저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책들도 메아리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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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수한 사례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물 진화의 규칙 하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만일 환경으로부터 어떤 신호를 포착하는 어떤 유기체감지기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감지기를 가진 종이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다양성이다. 이러한 생명의 풍부한 능력은 인간 오감의 무기력함을 일깨워 준다. 창조의 최고봉이라는 우리 종이 왜 다른 종들보다도 못한가? 왜 우리는 물리적인 장애가 있는 세상에 던져졌는가?
진화생물학은 이에 대해 단순한 대답을 내놓는다. 상이한 유전 형태의 차별적 생존과 번식으로 정의되는 자연선택은 필요에 따라서만 개체를 만든다. 개체의 능력은 니치(niche, 원래의 뜻은 벽감, 어떤 종이 소비하는 자원들의 집합과 그 종이 점유하고 있는 서식지. 옮긴이)에서 자신들의 적응도를 극대화하는 선까지만 진화한다.  - P103

간단히 말해 자연선택은 미래의 필요를 내다보지 못한다. 그러나이 원리는 설명력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점도 있다. 만일 이 원리가 보편적으로 사실이라면 자연선택은 어떻게 문명이 있기도 전에 문명을 위한 인간의 마음(정신)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이것이야말로 인간 진화의 커다란 수수께끼이다. 도대체 미적분학과 모차르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P104

세 번째는 물리학자인 유진 위그너 (Eugene Wigner)가 언젠가 말했듯이 수학이 자연과학에 놀랍도록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아직도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수학 이론과 물리학 실험 자료의 대응은 신비로울 정도이다. 이런의미에서 수학이 과학의 자연 언어라는 믿음은 지당해 보인다. 위그너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엄청난 유용성은 신비에 가까운 어떤 것이며 합리적 설명이 잘 안 되는 영역이다. ‘자연법칙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지만 인간이 그런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부자연스럽다. 물리 법칙을 공식화하는 데 수학 언어가 너무나 적절하다는 이 기적 같은 사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만한 수준도 못 된다는 의미에서 너무나 멋진 선물이다. - P105

우리의 두뇌와 감각체계는 인간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배가시키는 생물학적 장치로서 진화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 세계 중 아주 작은 영역에서만 돌아다닐수 있도록 진화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해 있던 니치는 모든 종류의감각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험 과학은 이런 장애를 제거해 주었다. 하지만 과학은 기구를 통한 감각 능력의 확장 그 이상이다. 과학은 자료를 해석하는 이론을 개발함으로써 실험 도구를 통해 향상된 감각 경험을 합리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 P110

최대한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즉 다른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와야 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한다.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을 우아함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최고의 과학은 종종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후속 발견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은 원래 원칙의 진위를 다시 시험해 보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섭이다. 즉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 있는 설명이 된다. - P112

500만 년 전 무렵 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존재와 공통조상을 공유했으리라고 믿어지는 침팬지는 뱀의 출현을 유별나게 두려워한다. 사전에 뱀을 만나 본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뱀을 만나면 "와!" 하는 경고음을 내면서 뒤로 물러나 안전한 장소로 피한 후 뱀이 어디로 가는지 뚫어져라 응시한다. 이런 반응은 침팬지의 청년기 내내 점진적으로 강화된다.
인간에게도 뱀에 대한 혐오는 선천적이며 침팬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청년기에 그 혐오의 강도가 점점 강해진다. 이것은 ‘준비된학습‘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발달상 편향이다.  - P155

뱀과 몽사는 어떻게 자연의 주체들이 문화의 상징들로 변환될 수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준비된 학습의 알고리듬을 두뇌 속에 프로그램하기 위해서는 유전적 변화가 필요한데 그런 변화를 위해서는 수천수만 년의 긴 기간이 흘러야 한다. 이런 장구한 세월 동안 독사는 인간에게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런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는 마치 독이 든 딸기를 고통스러운 시행착오를 통해 피하듯이 그저 피해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뱀이 나타나면 일종의 두려움과 무엇인가에 병적으로 홀린 상태와 같은 감정들이 표출된다. 뱀의 이미지는 학습을 통해 축적된 이질적 요인들도 매료시켜서 그 결과로 뱀의 이미지로부터 이끌리는 강렬한 감정은 전 세계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 황홀경과 꿈에서 몽사가 갑자기 출현하는 경향, 몽사의 꾸불꾸불한 형태 그리고 몽사의 힘과 신비는 신화와 종교의 자연스러운 재료들이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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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과학을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이 아니라 파우스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한 사람들은 계몽사상의 프로그램을 정신의자유와 생명 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다. 그러한 위협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경멸하는 것이다!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개인적상상력의 탁월함과 불멸에 대한 자신감을 다시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하여 더욱 고차원적인 영역으로 탈출하여 낭만주의 혁명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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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일이 꼬이면서 조이는 어릴 때부터 타고났다고 믿어온 자신의 행운이 그보다 고차원의 액운, 너무 잘못돼서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쁜 운에 압도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을지 모른다. 조이는 이런 부당함과 불의가 백일하에 드러나고 다시 세상이 바로잡혀 자신이 기대해온 대로 대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대상에 분노를 느꼈다. 돌이켜보니 그 대상은 거의 오사마 빈라덴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그 대상은 뭔가 더 깊은 것,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 구조적인 악 같은 것이었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보도에 불룩 튀어나온 것에 걸려 넘어지게 됐을 때그 불룩 튀어나온 것 같은 것이었다. - P308

 모피코트를 입은 두 여성이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앞에서 케이시가 손을 들어세운 택시에 뻔뻔스럽게도 재빨리 올라탔다. 지하철에서는 미니스커트 안에 청바지를 입은 섹시한 중학생들이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었다. 옥수수 밭이랑처럼 가지런히 머리를 땋아 붙인 흑인 빈민가 아이들은 엄청 큰파카를 입었고, 방위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채 그랜드센트럴 역을 순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의 해적판 DVD를 파는 중국인 할머니도 있었다. 근육이나 힘줄을 찢은 브레이크 댄서는 통증 때문에 6번 지하철 안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고, 집요하게 돈을 애걸하는 색소폰 연주자에게 조이는 5달러를 주고 연주를 들으려 했지만 케이시가 사기꾼이라고 말렸다. 이 모든 만남 하나하나가 조이에게는 보는 즉시 외워지는 한 편의 시 같았다.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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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츠는 패티가 지금 월터가 묘사한 갈팡잘팡 헤매는 듯 보이는 삶을 통해, 곡물밭에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원형 무늬처럼 넓은 옥수수 밭을 선택적으로용의주도하게 짓밟아 신호를 만들어놓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땅 위에 있는 월터는 읽을 수 없었지만, 높은 공중에 있는 캐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사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 사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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