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런 터무니없는 설명 너머에 있는 시의 핵심에는 만물을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의 기본 원칙이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는 우주 공간을 무작위하게 움직이는 무수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원자들은 햇빛 아래에서 떠다니는 먼지처럼 충돌하고, 서로 들러붙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기도 하며 다시 부분으로 깨지기도 하면서 생성과 파괴의 부단한 과정을 끊임없이되풀이한다. 이 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는 없다. 당신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낄 때, 당신은 신들의 작품을 보고 있거나 잠시 머무는 이 덧없는세계와는 동떨어진 다른 반짝이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도 그 일부이며 당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원소들로 만들어진 물질계(material world)이다. 여기에는 종합적인 계획도, 신성한 조물주도, 지적인 설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한 종을 포함한 사물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경우에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따르지만, 기본적으로 진화는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우연히 살아남아번식하는 데에 성공한 종은 버티고 그렇지 못한 좋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종(種)으로서의 우리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이 행성, 그 위로 매일 타오르는 태양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영원불멸한 것은 오직 원자뿐이다. - P12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지구와 그 거주민이 우주의 중심을 점하고 있다고 믿을 아무런이유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이유가 전혀없다. 인간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불가능하고 종교적 광신이 들어설 여지도 없다. 금욕적인 자기 부인은 불필요하고, 전지전능한 힘이나 완벽한 구원에 대한 환상은 근거가 없다. 정복욕이나 자기 과시욕도 불합리하다. 그 어떤 것도 자연에 맞서 이길 수없으며 생성과 파괴, 그리고 재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안전에 대한 거짓 환상을 팔거나 죽음에 대한 비논리적인 공포를 선동하는 자들에게 분노하는 한편,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이전에는 너무나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 자신도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라고 썼다. - P13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유래한 철학적 전통은 신이나 국가에 대한 숭배와는 병립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니 고대 지중해 세계의 관용적인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이 철학을 불미스러운 사상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이 전통의 신봉자들은 때때로 미치광이취급을 받았고, 불경하다거나 심지어 그저 아둔하다는 이유로 배척되었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이들 문헌은 가차 없는 공격을 받고 희화화되었으며 끝내는 불살라졌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파괴적으로 작용했던것은 무시되는 것,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망각되는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라져가던 철학 사상을 명료하게 표현한 위대한 작품 하나가 끝내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의 부활이 바로 이 책의주제이다. 약간의 자투리 글모음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간접적인 인용문을 제외하면, 풍성했던 한 철학 전통에서 살아남은 모든 것이 이한권의 저작에 담겨 있다. 이 저작이 우연한 화재와 약탈, 이단이라고 판단된 사상들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말살시키려는 결정 속에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면, 근대화는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을 수도 있다. - P14

1
책 사냥꾼

1417년 겨울, 포조 브라촐리니는 독일 남부의 나무가 울창한 언덕과 계곡을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오래된 필사본의 보고(寶庫)로 유명한 수도원이었다. 오두막 문 사이로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가 낯선 외지인임을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마른 체구에 말끔하게 면도를 한 그는 만듦새는 훌륭하지만 간소한 차림새로 단순한 튜닉과 망토만을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남자가 흔한 촌뜨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시골에서도 때때로 볼 수 있는 여느 도시 사람이나 궁정 사람 같지도 않았고 쩔렁이는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분명히 게르만족 기사도 아니었다. 사실 어느 비쩍 마른 촌놈이라도 곤봉으로 힘껏 후려치면 그를 손쉽게 제압했을 것이다.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나 높은 지위를 드러내는 익숙한 징표도없었다. 그는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향수를 뿌린 긴 가발을 쓴 궁정의 고관대작도 아니었고, 종종 매 따위를 데리고 시골로 사냥을 나오는 귀족도 아니었다. 그리고 옷이나 머리 모양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는 분명히 사제나 수도사도 아니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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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목적지 중 다수가 노동자들의 영역이었다. 이런 곳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흔한 폐지론자의 이미지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특권층 지식인이나 퀘이커 교도가 아니었다. 이들은 농장노동자나 장인 등 나이가 젊고 손으로 일해 먹고사는 남녀였다.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이 회상했듯, 폐지론은 강단이나 대학교보다는 공장이나 신발 가게에서 더 강력했던 민중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기 나름대로 정의를 요구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강한 지지를 얻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급진주의는 신발 가죽 냄새와 함께 갔다". 운동의 핵심에는 흑인 운동가나 유색인 운동가들이 있었다. 세일럼의 레먼즈처럼 유명한 사람도 그중 하나였다. 크래프트 부부가 방문한 곳에서 흑인 아닌 "유색인"은 수도 적고 현존하는 기록에서도 덜 드러나지만, 이들 역시 쉬지 않고 여행하는 이 부부를 응원했다.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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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학창 시절, 나는 학년 말이면 여름 한 철 읽을 만한 것을 찾으러 예일대학교 협동조합 상점에 가곤 했다. 주머니 사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조합에서 운영하는 서점은 잘 안 팔리는 책들을 말도 안 되는 싼 값에내놓았다. 나는 상자 속에 무더기로 뒤섞여 쌓여 있는 이런 책들을 별생각 없이 훑어보면서 내 흥미를 끌 만한 뭔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로 기묘한 페이퍼백 표지가 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 일부로, 지면 위로 아득히 떠 있는 초승달 아래 몸통은 없이 다리 두 쌍만이 천상의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그 책은 루크레티우스가2,000여 년 전에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를 산문으로 바꿔 번역한 영어판(On the Nature of Things)이었다. 책값은 10센트에 불과했고, 나는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고백하건대, 물질계에 대한 고대의 설명에 대한 호기심 못지않게 표지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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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사이 몇 년 가운데 어느 무렵, 나는 유철인이 말한 "맺힌 원한, 좌절의 슬픔 또는 억울함을 풀어내는(...)신세 한탄" 비슷한 것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음에서,
몸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 되풀이되는 엉킴"에 대처하기위해 수행되는 의식이지만, 여기서 자아는 마치 무당처럼 다른목소리나 매개체를 통해 말한다. "환자는 자신의 언어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당이 환자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 매개체는 주로 "환자를 치유하거나사회적 탈구까지" 치유한다고 여겨진다. 나는 다른 이의 목소리로 혹은 탈구된 나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라는 매개를통해 ‘신세 한탄‘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기"는 우리에게 주체성의 경험을 안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젝을 인용하자면

하지만 그 목소리가 동시에 주체의 자기 존재감과 자기 투명성을 대단히 근본적으로 해치는 건 아닐까? 나는 나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지만 내가 듣는 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은 아니며 내 심장 안에 있는 이질적인 몸, 기생충이다. 그리하여 그 목소리는 산 것도 죽은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 원초적인 현상학적 상태는 자신의 죽음에서, 그러니까 의미의 퇴색에서 살아남은 유령 같은 허깨비의 상태,
살아있는 죽음의 상태이다. 

리 타지리처럼 나는 일부분이 삭제된, 진실이 아닌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고, 종국에는 새로운 이야기들, 과거 사건 혹은 만개한 환각을 아주 조금 변형한 반복들, 진실도 전부도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썼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주체에게 묶이지는 않았지만 디아스포라의 무의식 속에 살아 있는 기억의 정동적인 표현이다. - P329

이 책의 핵심적인 동기는 어머니였지만 여러분이 상상하듯 가족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내게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내가 말들을 무대 위에 올리자 가족 내에서 이견과 분란이 일어났지만 이 드라마가 이어졌을 때 내 글쓰기를 유일하게 지지해준 분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반대하셨더라면 이 책은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으리라. 결국 어머니는 내가수년 동안 입밖에 내고 싶었던 그 말들을 발화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내 무의식을 다독이는 선물을 내게 주셨다.
어머니에게 "엄마, 난 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수치스럽지않아요. 엄마는 인정받아 마땅해요"라고 말할 수 있어서 대단히 행복했다. 이 책은 책으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망각되었을것들의 기억을 살아 있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다. 이모든 말들이 종국에는 어머니를 그늘에서 끌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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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군 신부로서의 양공주가 자기 몸 안에 있는 양갈보로서의 양공주를 억압할 때, 그래서 자기 과거의 유령에의해 배회당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런 유형의 정신적 폭력은 동화 프로젝트가 유발하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만 한게 아니라 동화 프로젝트에 가해지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기도하다. 양공주가 명예 백인성이라는 판타지 주변을 배회하기 때문이다. 양공주에게는 뒤에 남겨진 모든 양공주들과 죽음을통해 기지촌을 탈출한 이들뿐만 아니라, 감춰진 그 자신의 과거가 유령처럼 들러붙는다. 양공주가 그 자신에 관해, 그리고 자신이 상징하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관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은 디아스포라 전체에 무의식적으로 전파된다.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들마저도 또 다른 이의 과거에서흘러나와 주위를 맴도는 공포에 의해 여전히 배회당한다. - P258

 마치 기억의메커니즘이 그 비극이 일어난 현장에 있었던 개인이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며 유포된 눈과 혀와 그 외의 부분들이 결합된 아상블라주라는 듯이.
이 아상블라주는 픽션이 섞인 이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서,
침몰 사건이 일어나고 56년이 지난 뒤 그 우키시마호를 보고있는 사람들의 눈까지 포괄한다. 존스턴은 이런 형태의 보기를 ‘기계 비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수동적인 감각기관인 눈뿐만 아니라, 환경 속에서 이질적인 조건들과 협력하는유포된 눈들의 아상블라주의 기능이다. "새로운 유형의 집합적인 정신 장치에 해당하는) 이 아상블라주의 사회적 공간들 안에서는, 이미지를 보기 또는 흡수하기가 일반적인 형태의 기계 비전을구성한다. 존스턴이 밝히듯 기계적 아상블라주가 "새로운 유형의 집합적인 정신 장치"라면 우리는 초세대적 배회를 기계 비전의, 그리고 좀 더 일반적으로는 유포된 지각의 사례로 파악할수 있다. 대신 말해줄 다른 몸들을 찾는 초세대적인 유령이 그렇듯, 주체가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트라우마를 보지못하는 까닭에 주체의 눈은 몸과 세대를 횡단하여 유포된다. 디아스포라의 기계 비전은 어쩌면 배회당하는 역사를 ‘볼‘ 수있는 유일한 수단인지 모른다. - P299

주체가 자신의 역사를 말하지 못할 때, 역사가 이해불가능하거나 이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누가 또는 무엇이 주체를 위해 이야기할까? 직접적으로 발화되지 못하는 것은
"복화술사처럼, 주체 자신의 정신적 지형도 내의 이방인처럼 작동하는"유령이 된다. 4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 유령은몸을 타고 아래로, 몸을 횡단하여 전달되고, 목소리는 다양한 화자를 통해 스스로를 유포함으로써 표현 방법을 찾아낸다. 알리사르보는 한 세대의 기억이 다른 세대의 기억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한 시기나 장소의 기억이 미래에 투사되어 일상의여기와 지금처럼 보이는 곳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때 나타나는 이 현상을 "한다리 건너뛴 기억memory once removed"이라고 부른다.
다른 세대의 목소리가 침투된 무의식은 르보가 "간접적인" 혹은 "전이적인 자서전"이라고 부르는 글쓰기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야기에서 화자는 원 사건이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지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는, 그래서 원래의 것을 환영으로 만드는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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