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식생도 인간 언어의 다양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열대림처럼 따뜻하고 습하고 식생이 울창한 지역의 언어는 서늘하고 탁트인 거주지의 언어보다 자음을 적게 쓰는 경향이 있다(일부 언어학자들은 통계적 근거를 내세워 이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자음을 알아들으려면 주파수가 높고 진폭 변화가 급격해야 하는데, 이런 특징은 빽빽한 식생에서 손상되기 때문이다. 낭랑하게 퍼지는 우와 아는 ㅍㄹ(pr)와 ㅅㅋ(sk) 같은 자음군에 비해 숲에서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또한 고저가 있는 모음은 건조한 공기에서는 후두에 부담이 되므로, 건조 기후의 언어는 자음을 많이 쓰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나는이 글을 영어로 쓰고 있는데, 이 언어는 비교적 탁 트인 지대와 건조한공기에서 생겨난 언어의 후손이다. 유라시아에는 건조한 평야와 사바나가 많으며 심지어 비교적 습한 기후에서도 겨울이 추워서 습도가낮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나의 영어에 자음이 풍부하고 모음이 드문것과 달리 열대림에서 발달한 언어는 모음이 풍부하다. - P137

동물계의 소리 표현이 무척 다양한 데는 지구의 물리적 성질이 다양한 탓도 있다. 우리가 노랫소리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그 소리가진화한 물질적 맥락을 듣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맨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각각의 소리는 그 자신의 환경에 맞춰져있다. 우리의 감각은 전체의 작은 부분에 국한되어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물의 수면 아래서 물고기들이 서로에게 북소리를 내는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연안에서는 고래가 심해음파통로로 노래를보낸 뒤 지구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응답에 귀를 기울인다. 나무에서,풀과 꽃의 줄기에서 곤충들은 이중창을 부른다. 능동적으로 발성되든 페이지를 통해 전달되든, 인간 언어에서 우리는 서식처, 식단, 공기와 식물의 물리적 성질이 우리 조상의 말에 남겨준 유산을 듣는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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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님은 내가 건네주었던 등잔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등잔불은 아래에서 호르헤의 얼굴을 비추었다. 호르헤 노인은자기 앞에 놓인 서책을 집어 사부님에게 건네주었다. 낯익은표지였다. 내가 시약소에서 펼쳐 보고는 아랍어로 씌어진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서책이었다..
「윌리엄 형제, 천천히 책장을 넘기면서 읽도록 하세요. 그대가 이겼어요. 그대에게는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사부님은, 덥석 서책을 잡는 대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법의 자락에 손을 넣어 장갑 한 켤레를 꺼냈다. 필사사(筆寫士)들이 쓰는, 손가락 부분이 없는 장갑이 아니라, 죽은 세베리노의 손에서 벗겨낸, 손가락이 온전한 장갑이었다. 나도가까이 다가가 그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호르헤 노인은 예의그 예사롭지 않은 청력으로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감청하고소리쳤다.
「오, 너도 와 있었구나! 나중에 너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마」 - P854

857「계속해서 읽어 보아요. 이제 그 서책은 그대의 것이니까.
그대가 번 것이지요.」그러자 사부님은 태평스럽게 웃으면서 노인을 놀려 주었다.
「호르헤 수도사, 아까 날 보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더니.
당신, 당신 거짓말을 한 모양이구려.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시방 장갑을 끼고 있소이다. 장갑 때문에 손가락이 어둔해서 당신 주문대로 책장을 빨리 넘길 수가 없는것이지요. 마땅히 맨손으로, 그것도 이따금씩 마른 손가락을혀끝에 대어 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인데 말이오. 오늘 아침우연히 문서 사자실에서 손가락에다 침을 칠해 가면서 책을읽다가 당신의 수법을 알아낸 겁니다. 손에다 침을 묻히면서, 독이 혀끝을 통해 입 안으로 충분하게 좀 들어가게 읽어야 하는데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독은 무슨 독이냐고시치밀 한번 떼어 보시지 그러시오? 나는 지금 당신이 옛날에 세베리노의 실험실에서 훔쳐 낸 독을 말하고 있는 것이오.  - P857

『시학』 제2권의 윤곽이 잡혀 옵디다. 굳이 읽었다면 나 역시당신의 의도대로 죽었겠지만 나는 읽지 않고도 내용을 말할수 있는 사람이지요. <코메디>, 즉 <희극>이라는 말은 <코마이>, 즉 <시골 마을>이라는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희극이라는 것은 시골 마을에서 식사나 잔치 뒤에 벌어지는 홍겨운 여흥극인 것이지요. 희극이란 유명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희극은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왜곡시켜 보여 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효과를 연출하지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을, 교육적 가치가 있는, 선을 지향하는 힘으로 봅니다. 거짓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실상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런데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을 보여 주는데도 불구하고 기지 넘치는 수수께끼와 예기치 못하던 비유를 통해 실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검증하게 하고, <아하, 실상은 이러한 것인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든다는것이지요. 말하자면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준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 P863

「그래서 책장에다 독을 발랐군요. 어둠 속에서 그런 일을하자니 얼마나 어려웠겠소?
「내 손은 그대의 눈보다 낫소이다. 세베리노에게 솔 같은걸 가져 오게 했지요. 물론 장갑도 끼었고…… 그대는 오랜좌절과 고구 끝에야 장갑을 낄 수 있었겠지만「그래요. 나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걸 상상했지요. 가령 독을 칠한 바늘 같은 것을...... 당신이 쓴 방법이 대단히 영리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고 침입자는 십중팔구 혼자 있을 때,
혼자서 도둑질이라고 하는 듯이 서책을 읽다가 중독되었을테니까.......
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두 분이 오로지 상대의 갈채를 받기 위해서 싸워 온것인 양 서로 상대에게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렝가리오가 아델모를 유혹하는 데 쓴 수법, 나의 감정과 욕망을유발시키기 위해 여자가 보인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은,사부님과 호르헤 노인이 겨루어 온 두뇌와 재주,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교묘한 언변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치순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레 동안 두 사람은교묘한 약속 아래,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 증오하면서 은밀히서로를 찬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 P864

「그래! 잘 들어 둬. 당신은 속았어.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이런 게 바로 악마야! 악마는 그가 가고 있는 곳을 알고 있고, 움직이면서 언젠가 그가 온 곳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음험하지. 악마는 교활해! 무슨 까닭으로? 당신이 어디에 이를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야. 따라서 영감이 바로 악마야! 봐라. 영감은 악마답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살고 있지 않아! 영감이 나를 설득하려 했다면 그건 실패로 끝났어. 영감, 나는당신이 싫어. 당신 같은 인간이 싫어. 가능하다면 영감을 아래층으로 굴렸다가 마당으로 끌고 나가 옷을 홀랑 벗기고,똥구멍에는 깃털을 꽂고 면상에는 물감을 칠하여 요술쟁이나 어릿광대로 만들어 놓고 싶어! 그러면 수도원 전체가 영감을 보고 깔깔거릴 테지. 그러면 이 어린것들이 더 이상 영감을 겁내지 않을 테지. 그래, 영감의 몸에다 꿀을 잔뜩 바르고, 깃털 위로 굴린 다음 가죽끈을 목에다 감아 끌고 저잣거리로 나가 이렇게 외치고 싶군.
<이 영감이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한다. 진리라는 것이 죽을 맛이라고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영감의 말을 믿을 것이아니라 꼴을 믿으시라>
영감,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은혜의 폭포를 영감에게 허락하시고도 한 가지를 더 허락하셨어. 그게 뭔고 하니, 세상에 대한 영감의 그 거지같은상상력이야. 이 세상의 그 잘난 체하는 진리의 해석자란, 오래 전에 배운 말이나 깍깍거리는 얼빠진 까마귀와 다를 바없어!」 - P873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장서관이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엇이냐. 가짜 그리스도 올 날이 임박했다. 이제는 학문이 가짜 그리스도를 저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오늘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가짜 그리스도라고 하시면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使者)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 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 - P896

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 P897

그렇다면 사부님, 가능성에만 매달려서야 필연적인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과, 태초의 혼돈 사이에 무엇이 다릅니까? 하느님의 절대적 전능성과 그선택의 절대적 자유를 긍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이 존재하지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지 않을는지요?」사부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네 질문에 그렇다고 해버린다면, 식자들이 어떻게 배운것을 풀어 먹겠느냐?
나는 그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반문했다.
「진리의 기준이 없으면 전달 가능한 학문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상대가 그 의견을 승인하지 않으면지식을 전달할 수 없다는 뜻인지요?」그 순간 숙사의 지붕 일부가 내려앉으면서 엄청난 양의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경내를 떠돌아다니던 양과 염소무리가 애처롭게 울며 우리 옆을 지나갔다. 불목하니 떼거리가 부딪쳐 쓰러뜨릴 듯이 우리를 지나치면서 뭐라고 고함을질렀다.
사부님이 탄식했다.
「이곳은 너무 시끄럽구나. <이런 난장판에는, 이런 난장판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아Non in commotione, non in commo-tione Dominus>.......」 - P900

문서 사자실이 추워 손이 곱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stat rosa pristinanomine, nomina nuda tenemus.> - P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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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원장은 능히 그런 사람을 골라 내어 지하 보고에서 쳐죽이고, 수도원 명예를 높인답시고 그 콩팥을 꺼내어 성보 상자에다 넣을 수 있는 위인이다. 그러니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 비천한 소형제 수도사들이야 이거룩한 집에서 쥐구멍밖에 찾을 것이 있겠느냐? 허나, 저 원장이라는 자를 보면 쥐구멍도 찾게 해줄 성싶지도 않다.......<고맙소, 윌리엄 형제,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실 것이오. 이아름다운 반지가 보이지요? 그럼 안녕히 가시오> 그렇게는안 될걸. 이건 나와 원장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나와 내 직무사이의 문제다. 나는 내 직무가 끝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떠났으면 했지? 그래. 이게 제 집이니까, 오라 가라 할 수 있을 테지....... 오냐, 그렇다면 내일아침까지는 내 일을 끝내는 수밖에...... 그래, 기필코 끝내고말겠다.
「끝내어야 합니까? 이제 이 사건의 조사는 사부님 의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까?
「아드소, 우리에게 그런 의무를 지운 사람은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알 것은 알아야 하는 사람이다.」 - P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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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징벌하기 위해, 더러운 자들을 피로 정화하기 위해 죽였습니다. 어쩌면정의를 향한 미치광이 같은 욕망에 쫓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인 한, 하느님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나 지나친 무류에겨워 죄를 짓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내셨고, 마지막 날 영광의 승리자로 선택하신, 참 영혼을 가진 대중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파멸을 앞당기고, 천국에서그 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우리만이 그리스도의 사도였을뿐, 다른 이는 모두 그분을 배반한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게라르도 세가렐리는 신목(神木), <믿음의 뿌리에서 싹튼 신의 식물planta Dei pullulans in radice fidei>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하느님께서 몸소 세우신 교단입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당신네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무고한 자도 죽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모두에게두루 미치는, 보다 나은 새 세상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탐욕이 불러 일으킨 전쟁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당신네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정의와 행복이 뿌리내리려면 우리 모두가 피를 흘려야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은...... 사실은 그런데도 최후의 날은 앞당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타벨로에서 카르나스코 강물을 핏빛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우리 피도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 피와 당신네들의 피가……돌치노의 예언이 실현될 날이 가까워진 듯해서 우리로서는그 징조가 보이는 날을 앞당겨야 했던 것이지요.」레미지오는 부들부들 떨면서 두 손을 법의 자락에다 비볐다. 머리로 상상했던 피를 실제로 닦고 있는 것이었다. - P714

그러나 나는 여기에다 여섯째 조항을 덧붙입니다. 나는정통신앙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단자들에게 사악한 사상을 불어넣는 서물(物)의 저자까지 이단자무리에 포함시킬 것임을 밝혀 둡니다.」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베르티노를 노려보았다. 황실측의 소형제회 사절단은 그제서야 베르나르의 뱃속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회담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 뒤로, 그날 오전에 오고 갔던 이야기를 다시 입에 담는 사람은없었다. 말을 해봐야 어차피 그날의 사건 이야기밖에는 할것이 없는 터에 공연히 이단 혐의만 날아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가, 양측의 화해 협상을 깨뜨리기 위해 교황이보낸 사람이라면, 베르나르는 임무를 썩 훌륭하게 완수한 셈이었다. - P724

 내 사부님이신 로저 베이컨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탐욕이 아니었다. 그분은 당신의 지식을 쓰시되, 하느님백성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쓰셨다. 따라서 그 분은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은 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베노는 제 삶을가꾸는 수단으로서, 제 비천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서, 다른 인간을 믿음의 전사나 이단의 첨병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지식을 구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탐욕이라고 해서꼭 육(肉)의 탐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르나르기는 탐욕스러운 위인이다. 베르나르는 정의에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정의에의 탐욕이 아니라 권력에의 탐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의 신성한, 그러나그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신성하지 못한 교황은 부(富)에의 탐욕에 사로잡힌 자이다. 식료계 레미지오? 이자는소시적부터 제 몸으로 체험함으로써 저 자신을 변용시키겠다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던 자이다. 그러나 이제는 참회와죽음에의 탐욕에 사로잡혀 있을 게다. 베노는 서책에 대한탐욕에 지나친 집착을 보인다. 제 씨앗을 땅에 흘린 오난의경우가 그러하듯이, 무릇 모든 탐욕이 그러하듯이, 베노의탐욕은 참으로 덧없는 것,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것인 법이다.」 - P735

베노 수도사는 이제 제 손에 들어온 서책의 선을 지킨답시고 그 책을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부터 지킬 터인데 어떻게이것을 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서책의 선은 읽혀지는 데 있다. 서책은 하나의 기호를 밝히는 또 하나의 기호로 되어 있다. 기호는 이렇게 모여서 한사상(事象)의 모습을 증언하는 게다. 이를 읽는 눈이 없으면,
서책은 아무런 개념도 낳지 못하는 기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서책은 벙어리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장서관은 원래 서책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다만 이제는그 서책을 묻어 버리고 있구나. 이 장서관이 부정과 죄악의수채 구멍이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레미지오는 제가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더구나. 베노도 그랬고....... 그런데 베노를 보아라. 베노는 저 자신을 배신하고 있다. 참으로 지긋지긋한 하루였구나. 피가 튀고 이 세상 귀퉁이가 우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하루였다. 이 하루가 어찌 이리도 길었던고. 종과 성무 시간이다. 어서 들렀다가 자리에 들자.」 - P736

나는 이제 와서야 자연 철학의 원리를 근거로 하는 사부님의 예언, 혹은 삼단 논법을 이해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의예언이나 추론이 나에게 하등의 위안거리도 되지 못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여자가 화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책임을 느꼈다. 여자가 화형을 당하면, 내가 지은 죄까지 사함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도 부끄러워 눈물을 떨구며 내 방으로 돌아와 밤새울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알았더라면, 동료들과 멜크 수도원에서 몰래 돌려 가며 읽던 기사 무훈담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밤새 애통해 할 수 있었을 것을......
이것이 내가 경험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세속적 사랑이다. 그때도 그랬고 그 뒤로도 그랬지만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본 바가 없다. - P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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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선에는 위선적인 자비와 얼음장 같은 냉소와 냉혹한 독기가고루 무르녹아 있었다. 그의 위선적인 자비는 피의자에게<두려워 말아라, 너는 지금 네 선을 드러내어 악을 가리려는형제들 앞에 있음이다>, 얼음장 같은 냉소는, <네가 네 선을모르니 내가 일러 주리라>, 냉혹한 독기는, <심문하고 있는한 너는 내 수중에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미지오는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를 어렴풋이 헤아리고 있을 테지만, 베르나르 기의 침묵과 의도적인 지연 작전은 레미지오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같았다. 심문관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피의자는 그만큼 기가 꺾이면서 사람값이 깎이다가 결국은 체념하고, 손에다 잔뜩 침을 칠하고기다리는 심문관의 먹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 P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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