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머니의 고향 마을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남은 이들의 얼굴을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는 상상을 하곤 한다. "뭔가 해야 해요!" 나는 우리 가족이 정당한 몫보다 열배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음을 알고, 탐욕스러운 생활 방식을 대표한다는 것도 알고, 이런 생활방식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 이런 집에서 내 후손이 내 얼굴을 움켜쥐고 "뭔가 해야 해요!"라고 고함치는 광경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믿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 P36

아이의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흥분 상태에서 나온 힘 덕분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에게 어떤결함이 있기에 나는 불안한 지붕, 그 지붕 위의 불안한 하늘은 무시해 버리고 살고 있는 걸까? 우리 할머니가 살던 마을의 유대인들은 살갗에 파리가 앉으면 틀림없이 때려잡았을 것이다. 내가 허술한 지붕과 재앙을 몰고 오는 기후를 무시하고 그냥 살듯이, 할머니의 마을 사람들도 나치가 오는줄 알면서 대부분은 그냥 마을에 남았다. 우리의 경보 체계는 개념적인 위협을 포착하지 못한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사람은 머리로 안다 해도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하지 않는다. 내용인즉 아무리 옳아도 가슴을 울리지못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가슴만 둥둥울려댈 뿐 머리에 닿지 않으면 개꿈처럼 공허하다. 올바른 논거, 적확한 낱말만으로는 부족하다. 표현이 아름다워야하고 가슴을 흔들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달변이 무엇을할 수 있는지 명백히 보여줄 것이다.
- P3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종말의 서
가장 오래된 유서는 약 4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쓰였다. 이 유서를 처음 번역한 사람은 여기에 ‘삶에 지친 자가 영혼과 벌인 논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내 영혼에 입을 열어 말한다. 영혼의 말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어 지은이는 산문과 대화, 시를 오가면서 자살에 동의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설득하려 노력한다.
- P11

점점 강해지는 대형 태풍, 더 심각해지는 해수면 상승,
가뭄과 물 부족, 점점 넓어져 가는 오염 해역, 대규모 해충발생, 죽어 가는 숲, 매일같이 사라지는 수백 종의 생물과같이 잇따르는 비상사태들이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전 지구적인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지만 마치 저 멀리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비슷하다. 우리는 실존을 뒤흔드는 위기와 그 위급함을 인식하지만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음을 알고 있을 때조차도 거기에 온전히 몰두하지는 못한다. 인식과 느낌의 간극 때문에 사려 깊고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다시 말해 기꺼이 행동할 뜻이 있는 사람들조차 행동하기가 아주 힘들 수 있다.
- P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대학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나는 훌리아와 사랑놀음을 벌이기 시작한 이후로 수업을 자주 빼먹은 데다 미친놈 칼춤 추듯 더 많은 소설을 휘갈겨댄 바람에 그 중차대한 시험을 치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 P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들은 이미 그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자기 위로 몸을 굽히고 있는 얼굴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자기를 간질이고 찌르고 비집는 손가락들을 느끼고서 이 새로 온 사람들이 자기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시계를 낚아채고 호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빼내고, 그가 첫번째 영성체를 받은 이후로 목에 두르고 다녔던 림피아스의 신부가 새겨진 메달을 잡아뜯었다. 루초 아브릴 마로킨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놀라움을 못이겨 어둡고도 어두운 밤 속으로 빠져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P3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