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은 진리를 검증하는 사유 방법인데, 헤겔이 보기에 기존의 형식 논리학은 ‘변화‘하는 세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헤겔은 그동안 형식 논리학이 ‘모순‘을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면서, 모순 안에 존재하는 역동성과 변화 가능성을 놓쳤다고 보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으며, 모순이야말로 변화 발전의 원인이라고 본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헤겔은 기존의 형식 논리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제시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모순‘에 의한 변화 발전이고요.
- P79

변증법의 모순을 다룰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대립물의 통일‘입니다. 모순된 요소가 사물이나 현상의 내부에 공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지요. 해바라기 씨앗 안에 형태를 유지하려는 요소와형태를 버리고 싹을 틔우려는 요소가 공존합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착함과 악함의 모순된 두 요소가 공존하고요. 앞서 변증법을설명하면서 부르주아혁명의 예를 들었는데, 만약 봉건 지주와 자본가가 서로 다른 별에서 산다면 갈등과 모순이 없었겠지요. 동일한 시공간에서 공존하기 때문에 모순 관계를 형성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의 내부에 한 가지 요소만 존재한다면 역동적인 운동과 변화발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 P82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이행의 법칙‘은 모순에 의한 변화와 발전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법칙입니다. 모순에 의한 변화 발전은 아무렇게나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양적 변화가 계속 축적되다가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질적 변화가일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지요.
부연 설명을 하자면,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질적 변화를 부정하며 양적 변화만을 인정하는 세계관입니다. 질적 변화는 틀이 바뀌는 변화잖아요. 반면에 양적 변화는 틀이 바뀌지는 않지요. 예컨대 서양 중세사회는 국왕, 성직자, 귀족, 농도 등으로 이루어진계급사회였습니다. 이러한 계급구조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서 합리화되었고요. 이 구조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사회의 ‘질적 변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세상을 고정 불변하는 틀(신분제)‘로 파악하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신흥 자본가계급은 자신들의 부와 사회적 입지를 축적 양적 변화해나가는 가운데, 혁명의 순간에 이르러 봉건귀족들을 누르고 사회의 ‘질적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기존 신분제가 영원할 것이라는 봉건귀족들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잘못됐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역사적 사건이지요. 이렇듯 형이상학은 질적 변화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변증법은 질적 변화를 인정합니다.
- P97

‘변증법적 부정‘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변화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대체‘하는 상황을 일컫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변화 발전한다는 것은, 예전의 낡은 모습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체의 진화를 생각해보세요. 거듭된 진화 과정을 통해 생명체는 과거와 다른 모습을띠게 되지요. 중세 봉건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할 때도예전의 낡은 봉건 시스템이 새로운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대체됩니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 의해서 ‘부정‘ 되는 것이지요. ‘정-반- 합의 과정에서 ‘정-반‘의 모순 관계가 갈등과 투쟁을 통해 새로운 ‘합으로 변화 발전하는 것이 ‘변증법적 부정입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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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보다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관계를 무기 삼아 심리적인 공격을 한다.
예들 들어 자기들끼리 피해자를 비웃거나, 말을 비비 꼬아서 상처를 주거나, 악의적인 내용의 쪽지나 문자를 보내거나, 뒷담화를 하거나, 보란 듯이 시선을 피하거나 또는 경멸의 눈빛을 보내거나,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퍼트리거나, 노골적으로 친구집단에서 소외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은밀하고 철저하게 피해자의 심리를 공략하여 고통을 주기 때문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 어른들이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목격하더라도 확실하지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몸에 상처를 남기지는 않지만 왕따 같은 관계를 무기로 삼는 괴롭힘은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여자 아이들의 경우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다른 일이 뒤에서 벌어질 수 있음을 인지하고 항상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 P214

아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화를 내는 패턴이 달랐다. 그러나 모두 언젠가는 멈춘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화는 결국 멈춘다는 것, 영원히 지속되는 감정이 아니라 언젠가 멈추는 감정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언젠가 ‘멈추는‘ 감정이기에 얼마든지 ‘멈추게 할 수도‘ 있으며, 그 열쇠는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싶었다. 자신의 분노를 활활 불타오르게도 사그라들게도 할 수 있는 존재, 즉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수 있는존재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큼 강력한 분노조절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 P221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언어를통해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제시한 감정 표현법은 ‘
나사·감·바 전달법‘ 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객관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의사소통법으로, ‘너는‘ 이 아니라 ‘나는‘ 이라고 시작하고, ‘판단‘ 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며, 당시 ‘감정‘ 을 표현하고,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대화법이다. ‘나 사 감 바‘는 이를 줄인 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아이가 늦게 집에 들어와 엄마가 야단치는 상황이라고 하자.
"너,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있다 온 거야?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정신이 있어, 없어? 왜 전화도 안 해?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같은 상황을 나사 감 · 바로 바꾸면 이렇다.
"어디에 있었니? 네가 전화도 없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엄마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알아? 엄마는 정말 걱정되고 속상했어."
  - P226

‘센‘ 야동을 통해 성과 사랑을 배운 아이들에게는 ‘센‘ 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음란물로 인해 성과 사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진 아이들에게 정자와 난자가 어떻고, 자궁과 고환이 어떻고 하며 생물학적으로 얘기해봤자 잘 듣지도 않는다. 단도직입적이고 적나라하게 야동의 실체를 밝히고 성에 관한 아주 민감한 질문에 대해 직설적이고 정확하게 대답해줄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생식기는 그저 성행위를 하기 위한 기관이 아니라 소중한 생명을 만드는 기관이기에 건강하게 관리하고 서로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 이제 자신의 몸은 언제든지 새 생명을 만들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지금까지 음란물을 통해 배운 성과 사랑은 연출되고 조작된 가짜라는 것 등을 배워 나갈 수 있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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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철학!

먹고사는 데 ‘철학‘ 따위는 필요 없다고들 합니다. 돈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웬 철학이냐는 게지요. 게다가 구닥다리 불온 인물
‘마르크스‘까지 덤으로 붙어 있으면 말 다했지요.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1980년대 사상 서적도 아니고 말이에요..
- P4

철학은 세계관 世界理에 관한 학문입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중세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습니다. 모든 게 하느님의뜻이라고 믿었지요. 그러니 그림도 기독교 일색일 수밖에요. 십자군 전쟁도 하느님의 뜻이고 마녀사냥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만사 오케이! 이것이 세계관, 즉 철학의 위력입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니 괜찮을까요? 현대 자본주의는 ‘돈‘ 중심세계관이 대세입니다. 중세 서양에서는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돈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
더욱 놀라운 것은, 마치 중세 서양에서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을 당연시했듯 우리가 그런 자본주의 상황들을 당연시 한다는 점입니다. - P5

학생 : 아! 관념론 신화나 종교)이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는 말씀이군요.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인정하면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봉건 지배층의 입지도 타격을 받을 테니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관념론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네요. 갈릴레이가 종교계로부터 왜 그렇게 비난과 탄압을 받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선생님 : 과학이 발전할수록 종교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정치적으로는 진보(과학)와 보수(종교)의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반해 종교는 낡은 교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요. 갈릴레이의 지동설 재판이나 다윈의 진화론 논란, 낙태에 대한 과학과 종교의 대립 등은 그런 양상을 잘 보여줍니다. 종교계는 정치적으로도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지요. - P55

선생님 :버클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내 밖에 객관적 실체로서 나무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나무를 연상시키는 감각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즉, 물질의 존재는 불확실하나 내가 느끼는 ‘관념‘만은 명백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지요. 이것이 ‘주관적 관념론‘ 입니다.
학생 : 그러면 혹시 ‘객관적 관념론‘도 있나요? 주관적인 게 있으면 객관적인 것도 쌍으로 존재할 것 같은데요?
성생님 : 타이밍 좋게 잘 질문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신‘의 경우, 우리 외부에 정신적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요? 이데아나 신이 세상의 근원이며본질이라고 주장하고요. 이것이 ‘객관적 관념론‘입니다.
버클리의 주장을 ‘주관적 관념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버클리에게는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라고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관념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버클리는 주관적 관념론을 통해 유물론의 토대인 물질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거지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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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가장 중요한 열쇠가 어른들의 진솔성과 진정성이다. 아이들은 권위 인물이 먼저 자신의 내밀한 부분을 오픈하면 그것을 진솔성으로 받아들인다. 단 어른들의 자기 개방이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자기 개방은 15세 인생수업을 이끄는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부모와 교사가 익혀야 할 덕목이다. 부모와 교사가 먼저 자기 개방을 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의 모델링이 되어 아이들도 자기 개방을 할 수 있게 된다. 개방은 개방을 낳고 치유적 관계가 된다.
- P138

지수처럼 자신에게 많은 장점이 있다고 옆에서 말해줘도 쉽게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장점을 장점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아예 자신의 장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넌 어떤 장점을 가졌니?"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장점은 나를 이루는 하나의 특성이므로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곧 자신을 보다 깊숙이 이해하는 일이며, 또한 어린아이에서 성숙한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이를 토대로 ‘긍정적인 자아상‘ 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P142

그렇다면 왜 이 시기에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해야 할까? 긍정적인 자아상은 성숙한어른의 모습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핵심 요소인 ‘자존감‘ 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말 그대로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으로, 자기 자신에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자신에 대한 신념의 집합이다.
자존감은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과 나는 할 수 있어!" 라는 자신감이 어우러져 형성되는 인간 행동의 특성이다. 즉 자존감은 인간의 모든행동의 근원으로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자존감이다.
실제로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사회에 잘 적응하며 리더십이 뛰어나고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공감능력 · 의사소통능력 문제해결능력 · 갈등조절능력 등이 뛰어나다고 한다. 자존감이 이처럼 인생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한 개인이 가진 재능과 자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P144

15세를 비롯한 청소년기는 추상적인 자아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부모로부터의 독립 욕구가 폭발하는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어딘가에 소속되어 의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함께 존재하는 시기이다. 즉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충만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은,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이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는 친구집단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부모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죽을 것처럼 굴던 아이들이 친구와만 이야기를 하려 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는 존재로 생각했던 부모를 자신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존재로 여기며 격렬하게 저항하고 반항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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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성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다. 종교는 대부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집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 그리고 그것이 품고있는 배타적 도덕성은 그것을 잉태시킨 경쟁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
- P267

물론 종교를 모든 부족간 갈등의 원흉으로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서 케이스 Arthur Keith 가 지적했듯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나치 운동을 민족사회주의라고 명명함으로써 집단내의 도덕성과 집단 외의 잔인성이라는 이율 배반적 기준을 완성시켰다. 사회주의란 단어는 종족 내의 공동체주의를, 민족이라는 단어는 사악한 외부인을 지칭한다. 그에게는 종교적 선동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인간이 수백만 년 동안 집단 이기주의에 따라 조장되어 온 부족주의적 본능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종교가 개종자들의 공동체와 이교도의 추악함을 강조할수록 그만큼 번성할 수 있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둥은 자신의 논문에서그 같은 전통에 물들어 있는 종교들이 보편적 도덕성을 가르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전 지구를 단합시킬 만한 다른 세계의 적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보편적 도덕성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공허한 꿈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 P269

집단 간의 노동 분화가 집단 내의 노동 분화보다 더 생산적이라는 데에는 이론적 근거가 있다. 개체들끼리 서로 남는 것을 공유하는 행위는 각 개체가 언제 직면 할지 모르는 궁핍의 위험을 줄여준다. 그러나 생존 자원의 고갈이란 문제는 서로 다른 활동에 종사하는 부족들이나 서로 다른 지역에 떨어져 사는 부족들에게 동시에 닥칠 가능성보다는 한 부족 전체에게 동시에 닥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가뭄이 닥치면 수렵 부족은 큰 피해를 입지만 물고기를 잡기는 더 쉬워진다. 노동 분화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낡은경구는 집단 내에서뿐 아니라 집단들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P290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가 사라지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주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위선적 감상주의를 드러낸다. 루소의 시대에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는 사회적 미덕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생태론적 형식을 취한다. 윤리적 수준에서 지구 자원의 지속 가능한 활용을 중시하는 태도는 도덕적 인간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환경 감상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약자를존중하는 태도, 범죄와 탐욕에 대한 혐오, 인간에 대한 믿음, 남이 나에게 하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먼저 한다는 황금률의 준수등 대의를 지향하는 그 어떤 성향을 표명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오늘날 공해를 옹호하는 것은 13세기에 사탄을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앞 장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진화적으로 당연한 이유 때문에 대의를 설교(실천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하는 데 중독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본능을 표출하기 위해 정치적 이슈를 활용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가장 강력한 수단은 환경 보존 윤리를 내세우면서 사라져 가는 고래와 열대 우림의 운명을 서글퍼하고, 개발과 산업과 성장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우리 조상들(현대의 원주민 부족들)이 우리보다 얼마나 도덕적으로 우월했는가를 장밋빛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 P299

생태학자 찰스 케이 Charles Kay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큰 짐승을 보호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과거 엘크의 생장을 현재와비교한 자료에 근거해서 콜럼버스가 상륙하기 전에 이미 인디언들은 로키 산맥의 대부분 지역에서 엘크를 완전히 멸종시키기 직전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극단적 결론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백인이 도착했을 때 분쟁 지역을 제외한(분쟁 때문에 사냥을 하지 못한 지역) 북아메리카 전역에 짐승이 놀랄 만큼적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설사 짐승을 보호하라는 어떤 영적 · 종교적 명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효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케이는오히려 종교적 · 샤머니즘적 의식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사냥 행위와 짐승 숫자와의 관계를 깨닫지못했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 체계가 오히려 발굽 달린 짐승들에 대한과잉 착취를 조장했다. 종교적인 동물 숭배와 동물 보호는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설교하는 것이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P301

그렇다면 우리는 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일까? 대답은 별다른것이 아니다. 환경 파괴는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의해 일어난다. 게임 참가자가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만 다르다. 죄수의 딜레마에 따르는 숙제는 두 명의 이기주의자가 더 큰 이익을위해 협동하면서 상대편의 희생 위에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을 회피하는 것이다. 환경 보존의 문제는 이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기주의자들이 공해와 쓰레기를 배출해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자제를 실천하면 그는 몰상식한 다른 사람의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된다. 나의 인내는 너에게 기회가 된다. 이것은 게임 참가자가 두 사람이 아니어서 게임이 더 힘들다는 점만 뺀다면 죄수의 딜레마와 똑같은 상황이다.
- P312

그러나 장담할 수 있는 결론 하나는 우리 인류에게 본능적인 환경 윤리 같은 것, 즉 자제의 습관을 계발하고 가르치는 내재적 경향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 윤리는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스르면서 가르쳐져야 한다. 그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이 사실을 잘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적절한 슬로건을 외치거나 정성스레 기도를 하면 우리의 가슴 내면으로부터 생태론적으로 고상한 야만인이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우리 가슴속에 그는 없다. 보비 로 Bobbi Low 와 조엘 하이넨 Joel Heinen은이렇게 말했다. "보편화된 방만한 집단 이익에 기대하는 환경 보존 철학은 보존 관리에 개체적 · 친족적 이익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이 전망이 빗나가기를 우리도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P313

메가포드 산란지, 비버 댐, 극락조 나무, 카누용 나무 등을 매머드, 맥, 청어 등과 비교할 때의 차이점은 전자는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소유권이 안정적이고 명확하며 보호받기가 쉽다. 우리의 조상들이 매머드나 엘크를 멸종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은 야생 동물에 대해서는 소유권을확립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소유권이 반드시 개인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 공동체의 것이어도 된다 —— 아무튼 소유권은 환경 보존적 미덕의 열쇠이다.
- P335

폰암족의 이야기는 교훈적이다. 부나 재산의 사적 소유는 존경과 지위를 보장해 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질시와 배척을 초래하기도 한다. 때문에 사적 소유권의 옹호가 성공적인 환경 보존의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사적 소유권의 옹호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다. 현대 환경 보존론자들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해 있다. 논리대로 하자면 사람들에게 환경을 보존할 동기를주기 위해 사적 또는 공동체적 소유를 추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축재에 대한 터부가 그런 생각 자체에 대해 반기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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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완전하다면 국유화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능할것이다. 그러나 시장이 완전하지 못한 것에 못지않게 정부도 완전하지 못하다. 정부는 부패를 통해서는 파킨슨의 법칙을 통해서든항상 부를 그 자신에게로 돌린다. 환경 문제를 처리하는 데도 정부는 해결자가 아니라 문제의 원인 제공자이다. 정부가 이전에는존재하지 않았던 공동 소유의 비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정부에 속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뉴기니 사람들이 벌목이나 극락조 사냥을 중지할 것인가? 뉴기니 정부가 헬리콥터 군단을 동원해 밤낮으로 산림을 순찰 비행하고 위반자를 사살한다면 가능할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부를 원하지 않으며 설령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이라고 해도 그런 정부 아래 살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태적 미덕은 밑으로부터 생겨나야 하며, 위로부터 생겨나서는 안 된다.
- P339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사회 질서가 생겨났다.
고 믿었다. 홉스는 전제군주로부터, 루소는 은둔자로부터, 그리고 레닌은 당으로부터 사회 질서가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들은 모두 틀렸다. 사회 질서의 뿌리는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 완전한 조화와 미덕의 사회를 실현할 본능적인 능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실현할 능력은 존재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제도는 이 같은 본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제도이다. 다시 말해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 교환을 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들 간에 우정을 쌓기위한 최선의 처방이 교역이듯이, 해방되어 권력을 회복한 개인들간에 협동을 조장하는 최선의 처방은 거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등한 개인 간의 사회적·물질적 거래를 조장해야 한다. 신뢰는 거래를 통해 획득되고, 또한 신뢰는 미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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