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는 죽어 있었다. 복중의 주검도 차가웠다.
그때가 몇 시인지 우리는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고 왜 엄마 혼자서 임종을 지켰는지도 묻지 않았다. 엄마도 자다가 옆에서 끼쳐 오는 싸늘한 냉기 때문에 깨어났을지도 모른다. 체온 외엔 오빠가 살아 있을 때하고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눈 똑바로뜨고 지키고 앉았었다고 해도 아무도 그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을 포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 맞은 지 팔 개월 만이었고, ‘거기‘ 다녀온 지 닷새 만이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팔 개월 동안 서서히 사라져 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그의 임종을 못 본 걸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너무도 긴 사라짐의 과정을 회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곡을 할 것도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린 미리 상갓집에 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의 시간관념도 없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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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음모 따위는 실체가 없었기에,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은폴란드계 및 폴란드와 관련된 다른 소련인들, 폴란드 문화나 로마 가톨릭교를 박해해야 했다. 폴란드라는 민족적 특성을 억압하는 작전은 빠르게 확대되었는데, 아마도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었기 때문일것이다. 예조프의 편지는 민족주의 분자와 아직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폴란드 군사 조직‘ 회원의 체포를 승인해주었다. 이러한 범주는 너무나 모호해서, 내무인민위원회 장교들은 폴란드계라면 누구에게나 이를 적용하거나 폴란드와 유착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 P173

폴란드 박멸 작전은 연이어 벌어진 다른 소수 민족 박해 작전의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작전들의 대상은 스탈린주의가 만든 신조어로는 적국인 고국을 떠난 민족으로 그 고국과 실제 또는 허구의 관계를맺고 있는 집단이었다. - P187

이러한 살육 가운데 어떤 것도 전략적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일본 지도부는 남부 진공 전략을 채택, 중국을 거쳐 태평양까지진출하기로 했다. 일본은 대공포 시대가 시작된 1937년 7월 중국을침략했고, 이후에는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부농 박멸 작전과 이러한 동아시아 민족 박해 작전의 근거는 모두 잘못된 셈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을 두려워했던 것 같고,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1930년대 일본의 국가 목표는 대단히 공격적이었으며, 문제가 되는 것은 남쪽과 북쪽 중 어디로 밀고 들어갈 것인가뿐이었다. 일본정부는 불안정한 데다 정책을 너무 빨리 바꾸곤 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대량학살은 아직 시작되지 않고 있던 공격에서 소련을 전혀 보호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폴란드계 자국민 대량학살에 아무런 비용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만약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려 한다면, 이로써 소련 내부의 내응을 받기 어려워질 것이다. 공격 의도가 없어도, 대량 살인과 추방이 소련에 해될 일은 없다. 이러한 추론에도 역시 소련국가는 자국민의 생명과 행복이 알 바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또한 내무인민위원회를 이용해 내부의 적을 (그리고 내무인민위원회 자체를) 처리한 덕분에, 소련은 이번에도 자신에게 닥친 실제위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독일은 일본이나 폴란드의 지원 없이, 그리고 소비에트 압제에 저항하는 내부 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다. - P190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정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계급투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 재판에서 내려진 혐의처럼 소련으로 이주한 민족이 소련의 배신자가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과거의 경제 체제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에 따라 외국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 P195

바르샤바와 베를린이 유대인은 ‘문제‘라는 생각 그리고 이를 먼 외국 영토로의 이주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으며, 독일이 폴란드인의 동부 연합 가입을 계속 권유하는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폴란드의 지원과 인프라를 이용해 동유럽 유대인을 이송한다는 합의를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와의 동맹도 없었고, 유대인에 대한 독일과 폴란드의 공통 계획도 성사되지 않았다. 이 점에 있어 피우수트스키의 후계자들은 피우수트스키의 노선을 따랐다. 나치 독일 및소련 모두와 불가침 조약을 맺되 동맹은 맺지 않음으로써 베를린과 모스크바에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1939년 1월 26일,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인들은 독일 외무 장관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마지막으로 거부했다. 5년 동안 시도했지만, 독일인들은 독일에 영토를 제공하고 독일의 위성 국가가 되어 소련 영토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이는 것이 폴란드에도 이익이 된다고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이것은 독일이 폴란드와 함께 전쟁을 벌이는 대신 폴란드를 상대로, 그리고 폴란드의 유대인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함을 의미했다. - P201

독일이 일본 대신 소련을 동맹으로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 정부는 예상치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지도부는 이미 북쪽 대신 남쪽으로, 소비에트 시베리아 대신 중국과 태평양 쪽으로 확장한다는 데 동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모스크바와 베를린 간의 연합이 결성되면, 붉은 군대는 병력을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일본은 최정예 부대를 단순한 자체 방어를 위해 북쪽 만주국에 배치해야 하고, 남쪽으로의 진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동아시아에 대한 재량권을 주었고, 일본은 히틀러가 새 친구를 빨리 배신하기만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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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폴란드 연합의 소련 공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독일-일본 연합의 소련 공격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스탈린은 독일-폴란드-일본의 소련포위라는 공상을 독일-소련 연합의 폴란드 포위와 그에 따른 일본 고립이라는 현실로 바꿔버렸다.  - P207

유대인은 고대에 세계 각지로 흩어진 뒤 현지 주민과 통혼을 반복하며 인종적 동일성은 거의 없어졌고, 유대교의 계율과 관습을 따르느냐가 정체성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나치독일은 부계와 모계 어느 한쪽에서라도 유대인 혈통이 발견되면 유대인이라 정의했고, 이에따라 자신을 한 번도 유대인이라 생각하지 않은 독일 국민 다수가 박해를 당했다. - P217

타넨베르크 작전 당시 하이드리히는 "적국 사회의 상층부"가 독일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게 만들길 원했고, 이에 6만1000여 명의 폴란드인이 아인자츠그루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는 히틀러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조치였다. "그사회의 상층부가 사라진 국가만이 비로소 진짜 노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숨통 끊기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 사회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폴란드를 완벽하게 파괴하는 것"이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능력 있는 대다수의 폴란드인을 없앰으로써, 폴란드를 독일인종주의의 환상에 알맞은, 그리고 독일의 지배에 저항할 수 없는 기형으로 만들고 있었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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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대학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채 안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일년도 안 되는 동안에 그런 일들이 다 일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또 아무리 한동안 소식이 끊겼었다 해도 여고동창생에 대해 궁금한 게 얼마나 예뻐졌을까, 연애는 해 봤을까 따위가 아니라 죽었을까, 살았을까라는것은 환갑이나 지나고 나서야 할 짓이 아닌가. 나는 나를 스쳐간 세월의 부피와 경험의 부피가 맞지않아 용궁에서 대접받고 나온 어부와는 완전히 역으로 혼란스러워졌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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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화와 인위적 기근을 밀어붙이던 스탈린은 자기도 모르게 히틀러의 권력 강화에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스탈린이 소련에서 집단농장을 시작하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회원국 공산당들에게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class against class‘ 노선을 따르도록 했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피해야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만 인류 진보를 이끌 자격이 있으며,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사기꾼이자 ‘사회주의 파시스트‘였다. 그들은 나치를 포함해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모든 당과 연합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적은 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었다.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이 - P123

처음에 히틀러는 국내 정치에서 반유대주의보다 반공주의를 더 중시했다. 독일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그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분쇄해야 했다. 1933년에는 독일인 약 20만 명이 구금되었는데, 대부분은 정권에 대항하는 좌익으로 간주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자행한 테러의 목적은 제거가 아닌 위협이었다. 구금된 이들 중 태반은 나치가 ‘보호감호‘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짧은 기간을 거친 후 석방되었다. 공산당은 선거에서 차지해왔던 81석을 획득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의 모든 자산은 국가에 압수되었다. 1933년7월이 되자 독일에서 나치 이외의 다른 정당 가입은 불법이 되었다. 11월, 나치는 나치 후보자만 출마해 승리할 수 있는 의회 선거를 개최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아주 빠르게 일당 독재국가로 만들었는데, 스탈린이 구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다년간 소련을 제외한곳에서는 가장 강력한 공산당이었던 독일 공산당이 몇 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이곳의 패배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먹칠을 했다. - P126

히틀러가 떠오르면서 소련은 스스로를 유럽 문명의 수호자로 내세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 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유럽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반파시스트‘로 재정의하고, 사회민주주의자 및 다른 좌파 정당과 협력해야 했다. 유럽내 공산주의자들은 선거 연합인 ‘인민 전선‘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자 및 다른 좌파 정당과 연대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로써 한동안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 타도가 아닌 민주주의와의 타협에 힘써야했다. - P130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 P132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협력해 일본의 진격에 맞서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동료 공산당에 대한지원과 더욱 중요한 문제인 소련 안보에 대한 고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원칙에 따라 인터내셔널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지만, 스탈린은 국경 지대의 안정을 위해 국민당 정부에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소련의 카자흐스탄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회교도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는 신장에서도 스탈린은 ‘탈이념적 접근법‘을 선택했다. 그는 그 지역 군벌인 차이를 돕기로 하고,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공병과 광부들을 보내고는 보안 유지를 위해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도 파견했다.
세계적으로는 독일과 일본의 관계 회복으로 일본, 독일, 폴란드의소련 본토 포위가 완성되는 듯했다.  - P135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 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돌격대는 히틀러가 개인적인 권위를 내세워 적을 그리고 유권자를 위협하고 결국 1933년에 집권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돌격대가 즐겨 벌이던 시가전은 총통이 된 히틀러에게는 정치인 시절만큼 쓸모 있지 않았다. 룀은 히틀러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두 번째 혁명‘의 필요성을 1933년과 1934년에 언급했다. 또 독일 군대 재건이라는 히틀러의 계획에는 잘 맞지 않는 개인적야심을 키우기도 했다. 룀은 자신의 돌격대가 독일 군대보다 나치 정신을 더 잘 보여준다고 말했고, 독일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싶어했다. 300만 명에 달하는 그의 돌격대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0만 명밖에 허용되지 않던 독일 군대를 수적으로 압도했다. 히틀러는 이러한조약의 의무를 깨려 하면서, 군을 준군사 조직으로 대체하거나 병합하는 대신 독일 군대를 재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 P144

히틀러와 고위 장성들의 관계 개선은 친위대의 돌격대 제압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부에 룀을 없애준 일로 머리를 숙여야 했다. 1934년까지 히틀러가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주요국가기관은 군대뿐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돌격대를 확대하는 대신 군을 재건할 계획임을 밝히자, 상황은 급변했다. 몇 주 후 독일 대통령이 사망한 뒤, 군부는 히틀러의 국가원수 취임을 지지했다. 히틀러는 한 번도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지도자(퓌러)‘라는 직함을 선호했다. 1934년 8월부터 독일 병사들은 히틀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약속하는 선서를 했고, 선서 이후에는 그를 ‘나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같은 달 후반 국민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직함은 ‘지도자 겸 제국 총통‘으로 확정되었다. 1935년 3월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독일의 의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징병제를 다시도입했으며, 독일 군대 재건에 들어갔다. - P146

수용소행을 선고받거나 오래 복역해야 했던 부농들은 시베리아나 카자흐스탄, 소련 동부나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이들이일본의 침략을 지지하지 않을까? 1937년 6월 내무인민위원회는 시베리아로 추방당한 부농들이 "반란 세력 건설을 위한 방대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고했다. 외세의 지원과 전쟁을 가정하면, 부농들은 당연히 소련에 맞서 싸우리라 여겨졌다. 그들은 내부의 적이 될 터였다. 억압적인 정책 하나가 다른 억압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추방당한 부농들은 소련 체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추방당한 곳은 고향에서는 너무나 멀고 위협적인 외세, 즉 팽창 중인 일본 제국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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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인민위원회에 따르면 일본이 후원하는 "러시아 일반 군사 연합"은 일본 침략 시 부농 추방자들을 선동할 계획을 세웠다. 1937년 6월 지역 내무인민위원회는 "러시아 일반 군사연합"과의 공모 혐의가 있는 사람을 일제히 검거, 처벌할 권한을 받았다. 작전 대상은 추방당한 부농과 이들을 지휘할 전 러시아 제국 장교였다. 당연히 부농이 장교들보다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렇게 시베리아 추방지에서의 부농 학살이 시작되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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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33년 초반 몇 주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굶주림이 맹위를 떨칠때, 스탈린은 농민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공화국의 국경을 봉쇄했고, 농민이 구걸하지 못하도록 도시를 폐쇄했다. 1933년 1월 14일 소비에트 시민은 도시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하려면 국내용 여권을 휴대해야했다. 농민들은 그런 여권을 받지 못했다. 1933년 1월 22일 발리츠키는 모스크바에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공화국을 탈출하고 있다고 경고했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국가 경찰에게 농민의 탈출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농민에 대한 장거리 기차표 판매가 금지되었다. 스탈린이 내세운 이유는 농민 난민이 실제로는 빵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집단농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폴란드와 다른 자본주의 국가의 살아 있는 선전 기관 역할을 해 "반혁명 음모"에 가담한다는 것이었다. 1933년 2월 말이 되자 약 19만 명의 농민이 체포된 후 고향마을로 이송되어 굶주려야 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자신의 ‘요새‘를 구축했지만, 그것은 감시탑, 폐쇄된 국경,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노동, 그리고 한없이 이어지는 듯하다가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 거대한 기아 수용소를닮은 요새였다. - P94

 언론과 외국 기자단의 활동을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굶주림을 파괴 공작과 동일시한 당 노선 때문에 공식적인 도움이나 동정을 받지 못했으며, 극심한 가난과 불공평한 계획 때문에 경제활동에도 참가할 수 없었고, 규제와 경찰 저지선 때문에 다른 국민과 단절돼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홀로 죽어갔다. 그들의 가족들도 홀로죽었으며, 마을 전체가 고립된 채 죽어갔다. 20년 후,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기근이야말로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는 ‘원자화된‘ 현대사회 형성 과정의 중요한 포인트였다고 주장했다.  - P96

나중에 ‘인종 청소genocide‘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국제변호사 라파렘킨은 우크라이나의 사례를 일러 "소련 인종 청소의 고전적 사례"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농업사회 구조는 검사, 압박, 착취의 과정을 다 거쳤다.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소련 전역의 캠프들 사이에서 죽거나 능욕당하거나 흐트러뜨려졌다. 살아남은 이들은 죄의식과 무력감에, 때로는 변절과 식인 행위의 기억에 시달려야 했다. 수십만 명의 고아가 소련의 시민으로 자라났지만 그들은 우크라이나계라고 할 수없었다. 적어도 그들을 탄생시킨 우크라이나 가족과의 끈이나 우크라이나 농촌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마음의 의지가지를 잃어버렸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작가와 정치운동가는 모두 자살했다. 한사람은 1933년 5월에, 다른 사람은 같은 해 7월에. 소련 국가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얼마간이라도 자치권을 지켜주려는 시도를 분쇄했으며,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 말살해버렸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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