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화와 인위적 기근을 밀어붙이던 스탈린은 자기도 모르게 히틀러의 권력 강화에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스탈린이 소련에서 집단농장을 시작하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회원국 공산당들에게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class against class‘ 노선을 따르도록 했다.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피해야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만 인류 진보를 이끌 자격이 있으며, 억압받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사기꾼이자 ‘사회주의 파시스트‘였다. 그들은 나치를 포함해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모든 당과 연합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적은 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었다. 1932년 하반기와 1933년 초반, 자신이 일으킨 대재앙이 지속되는와중에 스탈린이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이라는 국제 노선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든 소련 인민의 끔찍한 고통과 떼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은 ‘부농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다. 독일 국내정치에서 이 노선은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더 열심히 지지토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소련 기근의 중대한 몇 달은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즉각적인 계급 혁명을 주장하던 독일공산주의자들 덕분에 나치는 중산층의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사무직과 자영업자도 사회민주당보다는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래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지지율을 합산하면 나치당의 지지율보다 더 컸다. 그러나 두 정당은 스탈린의 노선 때문에 서로 협력할 수가 없었다. 이 - P123
처음에 히틀러는 국내 정치에서 반유대주의보다 반공주의를 더 중시했다. 독일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그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분쇄해야 했다. 1933년에는 독일인 약 20만 명이 구금되었는데, 대부분은 정권에 대항하는 좌익으로 간주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자행한 테러의 목적은 제거가 아닌 위협이었다. 구금된 이들 중 태반은 나치가 ‘보호감호‘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짧은 기간을 거친 후 석방되었다. 공산당은 선거에서 차지해왔던 81석을 획득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의 모든 자산은 국가에 압수되었다. 1933년7월이 되자 독일에서 나치 이외의 다른 정당 가입은 불법이 되었다. 11월, 나치는 나치 후보자만 출마해 승리할 수 있는 의회 선거를 개최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아주 빠르게 일당 독재국가로 만들었는데, 스탈린이 구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다년간 소련을 제외한곳에서는 가장 강력한 공산당이었던 독일 공산당이 몇 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이곳의 패배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먹칠을 했다. - P126
히틀러가 떠오르면서 소련은 스스로를 유럽 문명의 수호자로 내세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1934년 6월,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스탈린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선포된 인터내셔널의 새노선에 따르면 이제 정치는 더 이상 ‘계급에 대한 계급투쟁‘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소련과 세계 공산당은 반파시스트 캠프에서 널리 좌파 세력을 결집하기로 했다. 계급투쟁을 엄격히 수행하는 대신, 공산주의자들은 부상하는 파시즘으로부터 문명을 구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때문에 유명해진 단어인 파시즘을 소련은 후기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부패의 결과물로 제시했다. 파시즘의 확산은 기존 자본주의 질서의 종식을 의미했던 한편, 소련에 대한 파시즘의 극심한 증오(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는 소련과 여타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수호를 위해 다른 자본주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유럽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를 ‘반파시스트‘로 재정의하고, 사회민주주의자 및 다른 좌파 정당과 협력해야 했다. 유럽내 공산주의자들은 선거 연합인 ‘인민 전선‘에 가입해 사회민주주의자 및 다른 좌파 정당과 연대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로써 한동안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주의 타도가 아닌 민주주의와의 타협에 힘써야했다. - P130
스페인에서는 정당 연합이 인민 전선을 형성했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건이 완전히 다르게 진행되었다. 7월에는 극우 집단의 지지를 받는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 정부는 저항했고, 그 결과 스페인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인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 문제였지만, 인민 전선에 대한 이념적 적들이 참전했다. 소련은 1936년 10월 궁지에몰린 스페인 공화국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우익 세력을 지원했다. 스페인 내전은 베를린과 로마의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은 유럽 내 소련 정책의 관심이 집중되는 격전지가 되었다. 스페인은 몇 달 동안 주요 소련 신문의 1면을 차지했다. ‘스페인을 돕자!‘는 위험에 빠진 공화국 편에서 싸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구호가 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소련이 민주주의 편에 선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 P132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 진행 중인 내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장정‘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부대는 중국 서북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중국의 무력을 독점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던 지역에서조차, 그들은 지역군벌에 의존해야 했다. 스탈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협력해 일본의 진격에 맞서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소련의 대외 정책은 비교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동료 공산당에 대한지원과 더욱 중요한 문제인 소련 안보에 대한 고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원칙에 따라 인터내셔널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했지만, 스탈린은 국경 지대의 안정을 위해 국민당 정부에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소련의 카자흐스탄과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 회교도 인구 대부분이 거주하는 신장에서도 스탈린은 ‘탈이념적 접근법‘을 선택했다. 그는 그 지역 군벌인 차이를 돕기로 하고, 천연자원 개발을 위해 공병과 광부들을 보내고는 보안 유지를 위해 내무인민위원회 요원도 파견했다. 세계적으로는 독일과 일본의 관계 회복으로 일본, 독일, 폴란드의소련 본토 포위가 완성되는 듯했다. - P135
비슷한 시기인 1934~1937년, 히틀러 역시 폭력을 이용해 당, 경찰과 군대라는 권력 기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그도 스탈린처럼권력 재창출 수단을 확보했고, 자신을 돕던 사람들을 죽였다. 죽인 사람 수는 훨씬 적었지만, 히틀러의 숙청은 독일 법률이 지도자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내무인민위원회를 자신의 발아래 둔 스탈린과는 달리, 히틀러는 자신이 선호하는 준군사조직인 친위대의 발전을 위해 테러를 명령하고, 다양한 독일 경찰 병력에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스탈린은 숙청을 이용해 소련 군대를 위협했지만,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이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한 나치 당원들을 사살함으로써 독일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숙청의 가장 중요한 표적은 나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의지도자 에른스트 룀이었다. 돌격대는 히틀러가 개인적인 권위를 내세워 적을 그리고 유권자를 위협하고 결국 1933년에 집권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돌격대가 즐겨 벌이던 시가전은 총통이 된 히틀러에게는 정치인 시절만큼 쓸모 있지 않았다. 룀은 히틀러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두 번째 혁명‘의 필요성을 1933년과 1934년에 언급했다. 또 독일 군대 재건이라는 히틀러의 계획에는 잘 맞지 않는 개인적야심을 키우기도 했다. 룀은 자신의 돌격대가 독일 군대보다 나치 정신을 더 잘 보여준다고 말했고, 독일 군대를 직접 지휘하고 싶어했다. 300만 명에 달하는 그의 돌격대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0만 명밖에 허용되지 않던 독일 군대를 수적으로 압도했다. 히틀러는 이러한조약의 의무를 깨려 하면서, 군을 준군사 조직으로 대체하거나 병합하는 대신 독일 군대를 재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 P144
히틀러와 고위 장성들의 관계 개선은 친위대의 돌격대 제압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부에 룀을 없애준 일로 머리를 숙여야 했다. 1934년까지 히틀러가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 주요국가기관은 군대뿐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돌격대를 확대하는 대신 군을 재건할 계획임을 밝히자, 상황은 급변했다. 몇 주 후 독일 대통령이 사망한 뒤, 군부는 히틀러의 국가원수 취임을 지지했다. 히틀러는 한 번도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지도자(퓌러)‘라는 직함을 선호했다. 1934년 8월부터 독일 병사들은 히틀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약속하는 선서를 했고, 선서 이후에는 그를 ‘나의 지도자‘라고 불렀다. 같은 달 후반 국민 투표를 통해 히틀러의 직함은 ‘지도자 겸 제국 총통‘으로 확정되었다. 1935년 3월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독일의 의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징병제를 다시도입했으며, 독일 군대 재건에 들어갔다. - P146
수용소행을 선고받거나 오래 복역해야 했던 부농들은 시베리아나 카자흐스탄, 소련 동부나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한 상태였다. 이들이일본의 침략을 지지하지 않을까? 1937년 6월 내무인민위원회는 시베리아로 추방당한 부농들이 "반란 세력 건설을 위한 방대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고했다. 외세의 지원과 전쟁을 가정하면, 부농들은 당연히 소련에 맞서 싸우리라 여겨졌다. 그들은 내부의 적이 될 터였다. 억압적인 정책 하나가 다른 억압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추방당한 부농들은 소련 체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추방당한 곳은 고향에서는 너무나 멀고 위협적인 외세, 즉 팽창 중인 일본 제국과는 가까운 곳이었다. •••••• 내무인민위원회에 따르면 일본이 후원하는 "러시아 일반 군사 연합"은 일본 침략 시 부농 추방자들을 선동할 계획을 세웠다. 1937년 6월 지역 내무인민위원회는 "러시아 일반 군사연합"과의 공모 혐의가 있는 사람을 일제히 검거, 처벌할 권한을 받았다. 작전 대상은 추방당한 부농과 이들을 지휘할 전 러시아 제국 장교였다. 당연히 부농이 장교들보다 수가 훨씬 더 많았다. 이렇게 시베리아 추방지에서의 부농 학살이 시작되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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