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해방이 되어도 해방은 오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된다. 여기는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해방된 내나라다. 좌우로 갈라져버렸다고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좌익단체를 표적으로 삼은 백색테러가 그칠 줄 모른다. 나 또한 암살 시도도 몇 번 넘기고, 테러도 여러 번 피했다. 민족혁명당 청년대가 앞뒤 좌우를 둘러싸고 호위하지 않는다면 여운형 동지나 장덕수 동지처럼 누가시켰는지 밝힐 수도 없는 총탄에 벌써 쓰러졌을 몸이다.
테러를 저지르는 단체는 백의사다. 누구나 안다. 백의사 뒤에는 이승만이 있고, 이승만 뒤에는 미군이 있다는 사실 또한 모르는 사람이없다. 누구나 쉬쉬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 P14

"관리는 관리대로 양반은 양반대로 높으나 낮으나 백성 피만 빨았다. 왜놈 세상이든, 중국놈 세상이든, 조선 양반 세상보다 못하랴 싶은 마음이라 그럴 게다."
정수리에 화살이라도 맞은 듯, 할아버지 말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일본이 우리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바꾸었지만,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세우기 전에도 조선이었으니 똑같은 조선이라고 여겨 큰일 아닌 걸로 생각하는 거다. 임금도 황제에서 왕으로 호칭이 바뀌었지만 백성에게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일본이 직접 우리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잖니. 그러니 별일 아니라고 여기는 마음인 거지. 그래서 더 큰일인 거야."
- P23

의분으로 일어선 의병이 아니라 일본 군대보다 힘이 더 센 군대가있어야 한다. 지금 세계에서 일본보다 더 센 군대는 독일 군대뿐이니 독일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닿았다. 독일로 가려면 우선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 독일어를 배우려면 독일과 중국이 같이 세운 학교인 덕화학당에 들어가야 한다. 독일을 중국에서는 덕국이라고도 부르는데, 덕국에서 ‘덕‘을 따고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서 ‘화‘를 따서 이름이 덕화학당이었다. 중국 천진에 있다.  - P30

"살날 얼마 안남은 할아비한테 무슨 불효냐?"
내가 금릉대학에서 공부하고 독일로 가려면 방학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가볍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남자는 집을 나가면 뜻을 이루기 전에 돌아오지 않는 법이라며 입꼬리를 쭉 올렸다.
"왜놈이 쫓겨 가는 꼴을 꼭 보고 싶구나. 독일 군대든 중국 군대든 네 손으로 이끌고 오너라."
할아버지는 어느 나라 군대라도 우리 손에 있으면 우리 군대라고했다.
- P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는 매릴같이 이렇게 푹신한 낙엽 위에서 몸부림치고 낙엽은 하루하루 두텁게 쌓여 나를 포근히 안았다.
어머니는 내 간호 없이도 차츰 회복되어 가는 눈치였다. 정확히 말해 어머니 신체의 기능이 과거의 습관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득 걸레질을 하고 문득 설음질을 했다. 여전히 아무런 뜻도 담기지 않은 부연 눈을 한 채 간단히 묻는 말에 대답도 했다. 어머니를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좀 말수 적고 멍청할 뿐 정상적인 노인으로여길 만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발랄하고 적극적으로 살았는지를 모르는 이에게는 말이다. - P305

헛소리처럼 웅얼거리는 말 속에 가끔 여보라든가 욱아, 혁아라든가 하는 낱말을 골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표정은 그녀가 아주 즐겁던 날의 표정을 닮아가고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꿈속에서 고인들과 더불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어머니는 회복돼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문득 어머니가 회복돼가고 있다는 게 두려웠다. 어머니는지금 행복한데, 깨어날 것이, 어머니의 정신과 육체가 유명을 달리할 것이 두려웠다.
의사의 말은 틀린 것일까? 그녀는 분명히 살려는 의지 없이도 회복돼가고 있고, 나는 죽음보다도 살려는 의지 없는 삶이 더 두려웠다. - P341

나무 좌우에 걸린 그림들을 제쳐놓고 빨려들 듯이 곧장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 옆을 두 여인이 아이를 업은 한 여인은 서성대고 짐을 인 한여인은 총총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 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닳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 P376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우수수 바람이 온다.
이미 낙엽을 끝낸 분수가의 어린 나무들이 벌거숭이 몸을 애처롭게 떨며 서로의 가지를 비빈다.
그러나 그뿐, 어린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한채 바람이 간 후에도 마냥 떨고 있었다. - P3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확실한 것은 분류학자들도 명명이라는 일에 대해 다소 미신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종을 최초로 명명할 때 그들은 그 최초의 표본을 특별한 명예를 부여한 매우 특별한 유리단지에 넣어둔다. 그 표본은 공식적인 과학의 기록부에 오를 때 그종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기재된다. 분류학 용어로 모든 표본을 "모식模式, type"이라고 하는데, 최초의 신성한holy 모식은 영광스럽게도
"완모식完模式, holotype"이라 부른다.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유물이 그러하듯이 완모식 표본들도 안전한 장소에, 그러니까 전 세계의 박물관이나 학술기관들에 보관된다. - P95

완모식 표본에 관해서는 아주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다. 만약 완모식 표본이 소실되어도 새로운 표본을 그 성스러운 유리단지에 대체해서 넣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안 될 말이다. 그러한 상실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고 애도하고 상실되었다는 표시를 남긴다.
이제 이 종의 계통은 영원히 순수성이 훼손된 채, 그 종을 만든 최초의 존재가 없는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그 종을 물리적으로 대표할 새로운 표본이 선택될 테지만, 이 표본은 "신모식neotype"이라는더 낮은 지위를 부여받는다. 신모식 표본은 최초의 완모식 표본이 상실되었거나 파괴된 후에 그 종을 대표하는 표본 역할을 하도록 선택된 표본을 말한다. - P96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파괴의 잔해들은 스나이더 교수와 스타크스 교수가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린 덕분에 젖은 상태를 유지했다."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 하나인 이 문장은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할 가능성이 무척 낮은 출처에서 가져온것이다. 그 출처는 바로 제임스 뵐케가 쓰고 《스탠퍼드 어류학 편람》 5권에 실린 <스탠퍼드대학 자연사박물관에 있는 최근 어류의 모식 표본 카탈로그〉다.
"낮이나 밤이나 호스로 물을 뿌려. 낮이나 밤이나."
해는 뜨고 지고, 뜨고 지고, 데이비드의 동료 두 사람은 고무덧신을 신고서 물고기들의 살덩이를 향해 호스로 물을 뿌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불굴의 기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창밖에는 그들의 선지자가 머리를 거꾸로 처박고 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희부옇게 드리워 있으며, 이 난장판을 어떻게 다시 수습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차가운 물과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고스란히 받아내며 적어도 당장은 이것들을 마르지않게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 - P114

데이비드는 바늘에 실을 꿴 다음 바늘 끝을 파나마 망둥이의 목살에 찔러 넣어 반대쪽으로 뽑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이름표를 망둥이의 살갗에 곧바로 매달았을 것이고, 그렇게 망둥이는 짠 하고 다시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려졌을 것이다.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 혼돈의 그 작은 덩굴손 하나가 데이비드의 가차없는 끈기 덕분에 다시 질서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 P118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38

심리학자들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가혹한 운명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냉담한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은 보장되지 않고, 수십만 명을 상대로 경쟁해야 하며, 자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이고,
우리가 사랑한 모든 것이 결국에는 파괴될 것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작은 거짓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낼 수도 있고, 인생의 시련 속에서 계속 밀고 나아가도록 도와줄 수도 있으며, 그 시련 속에서 가끔 우리는 우연한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 P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물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가시는 이 순간 헛간 교실 바로 밖에서 헤엄치고 있는 모든 물고기, 그중 한 마리를 바다에서 건져올려 껍질을 벗겨보면 신이 보낸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어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가시가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인간은 [어류와] 그를 구별해주는 도덕적 지적 재능을 활용할 수도 있고 남용할 수도 있다. (...) 인간은 자기가 속한 유형 중 가장 낮은 위치까지 가라앉을 수도 있고, 영적인 높이로 올라갈 수도 있다. - P45

나는 더 용감한 여자아이, 더 견고한 영혼을 지닌 여자아이라면 그런 말도 웃으며 받아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 문제들이 얼마나 사소한 것들인지도 잘 알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그게 없었다. 그게 뭐였든 간에 말이다. 튼튼한 뼈대처럼 강한 기개를 찾으려 더듬거렸을 때 내 손에 잡히는 건 모래뿐이었다. - P59

하지만 그동안 세상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던 남자가, 그가 추구하는 것들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때로는 괴롭힘까지 당하던 남자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승격된 것일까? 나는 온순하고 음울하며, 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한 이 남자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은 채 미끄러지듯 슬그머니 지나다니다가, 어느새 어떤 목적의 빛으로, 공기로, 빛나는 물질로, 뭐가 되었든 아무튼 그 목적으로 서서히 차오르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목적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 P75

그건 그렇고, 데이비드는 다윈이 신을 없애버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추구는 여전히 고귀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자연의 사다리의 형태,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있고 지위가 정해져 있는지를 드러내줄 가장 높은 청사진에 대한 추적을 계속 이어갔다. 다만 이제는 그 질서를 만드는 것이 신이아니라 시간이라고 믿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그 청사진은 여전히가장 결정적이고 많은 것을 알려줄 비밀들을 품고 있을 터였다. 데이비드는 물고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상세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의 진짜 창조 이야기, 인간을 만드는 데 어떤 생명의 실험들이 필요한지를 알아내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일은 다른 생물들의 우연한 실수와 성공들 속에 쓰여 있는, 잠재적으로 인류가 더욱더 진보하도록 도와줄 실마리들을 찾는 것이었다. 이는 키를 잡고 있는 창조주의 존재가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아가시의 사명과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 P76

이 부부의 이름은 릴런드 스탠퍼드와 제인 스탠퍼드로, 1890년 어느 날이 부부는 블루밍턴까지 몸소 찾아와 자신들이 팰러앨토의 농지에 실험적으로 세운 작은 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어줄 수 있겠냐고물었다. 데이비드는 그 제안에 따르는 넉넉한 봉급, 눈부신 기후,
태평양의 기름진 보물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전망에 구미가 당겼다. 그를 주저하게 만든 유일한 요소는 스탠퍼드 부부였다. 릴런드 스탠퍼드는 악덕 자본가로 널리 알려진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그의 아내 제인은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죽은 아들과 만나려고 영매들을 찾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도덕적으로도 지적으로도 자신보다 열등해 보이는일개 시민의 변덕에 놀아나는 놈팡이나 노리개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 봉급에 그 날씨라면….
결국 그는 1891년 스탠퍼드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나이 갓 마흔 살이 되었을 때다.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엄마. 우린 아직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 아네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게 아녜요?"
"왜? 이대로도 우린 살아 있는데."
"변화는 생기를 줘요. 엄마, 난 생기에 굶주리고 있어요. 엄마가 밥을 만두로 바꿔만 줬더라도………. 그건 엄마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잖아요. 그런 쉽고 작은 일이 딸에게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는 걸 엄만 왜 몰라요?"
어머니의 부연 시선이 아무런 뜻도 지니지 않은 채 나를 보는지 내어깨 너머로 윗목의 장롱을 보는지 초점 없이 한군데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내 어머니가 다만 나에게 잡힌 치맛자락을 놔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또한 내 바람이 완강하게거부당하고 있음도, 그 거부 앞에 내가 얼마나 무력한가도 알아차렸다. - P127

대소쿠리, 담뱃대, 지게, 삼태기, 요란한 수가 앞뒤로 놓인 점퍼, 색이 바랜 조악한 천의 파자마, 갓 쓴 할아버지, 똥통멘 농부의 목각 인형∙∙∙∙∙…. 우리의 것이랍시고 내세운 물건들이 외국 사람, 아니 나에게 오히려 낯설고 정이 안 간다. 팔아먹을 것의 고갈, 그렇지만 팔아먹지 않고는 연명할 도리가 없는 상태, 그런 것이 바로 가난의 생태가 보다.  - P164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 P182

그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기억해낼 수는 없어도, 내가 형벌을 받는 동안 조금도 가엾지 않았다는 게 지금도 대견스럽게 회상됐다.
그렇지 나는 결코 나를 가엾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내가 조금씩 소중스러워졌다. 소중한 나를 배고프게 내버려둘 수는 더군다나 없었다. 발딱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눈치채지 않게 소리를 죽여가며 밥상을 챙겼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