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우린 아직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건 변화하게 마련 아네요. 우리도 최소한 살아 있다는 증거로라도 무슨 변화가 좀 있어얄게 아녜요?"
"왜? 이대로도 우린 살아 있는데."
"변화는 생기를 줘요. 엄마, 난 생기에 굶주리고 있어요. 엄마가 밥을 만두로 바꿔만 줬더라도………. 그건 엄마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잖아요. 그런 쉽고 작은 일이 딸에게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다는 걸 엄만 왜 몰라요?"
어머니의 부연 시선이 아무런 뜻도 지니지 않은 채 나를 보는지 내어깨 너머로 윗목의 장롱을 보는지 초점 없이 한군데 머물러 있었다.
나는 이내 어머니가 다만 나에게 잡힌 치맛자락을 놔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또한 내 바람이 완강하게거부당하고 있음도, 그 거부 앞에 내가 얼마나 무력한가도 알아차렸다. - P127

대소쿠리, 담뱃대, 지게, 삼태기, 요란한 수가 앞뒤로 놓인 점퍼, 색이 바랜 조악한 천의 파자마, 갓 쓴 할아버지, 똥통멘 농부의 목각 인형∙∙∙∙∙…. 우리의 것이랍시고 내세운 물건들이 외국 사람, 아니 나에게 오히려 낯설고 정이 안 간다. 팔아먹을 것의 고갈, 그렇지만 팔아먹지 않고는 연명할 도리가 없는 상태, 그런 것이 바로 가난의 생태가 보다.  - P164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도 지치지 않고 깊이 도사려 있으면서 내가 죽지 못해 사는 시늉을 해야 하는 형벌 속에 있다는 것에 아랑곳없이 가끔 나와는 별개의 개체처럼 생동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 P182

그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기억해낼 수는 없어도, 내가 형벌을 받는 동안 조금도 가엾지 않았다는 게 지금도 대견스럽게 회상됐다.
그렇지 나는 결코 나를 가엾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나는 내가 조금씩 소중스러워졌다. 소중한 나를 배고프게 내버려둘 수는 더군다나 없었다. 발딱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눈치채지 않게 소리를 죽여가며 밥상을 챙겼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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