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는 러시아의 선례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된최초의 조선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선은 소련과 아주 가까운 사이다. 10월혁명 때, 수천 명의 조선인이 싸웠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은 극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18년에 그는 ‘이르쿠츠크 공산당‘이라는 최초의 조선인 공산당을 조직했으며, 그 일로 모스크바에 갔다. 하지만 자기가입당한 사실은 비밀로 하였다. 이것은 중국보다 4년 앞선 것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평화회의가 열리자 승전국들이 조선에 최소한의 정의를 베풀 것이라는 기대 속에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에 있는 조선인들은 회원이 수만 명은 되는 ‘시베리아 한인회‘를 만들어 1919년에 이동휘를 상하이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조선 민족운동의 시베리아-만주파 지도자로서 이동휘는 군대를 조직하여 대일전쟁을 시작할 것을 열망하였다. 그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임시정부하에 군사학교를 설치하였으며, 시베리아와 만주에 대규모의 조선군을 키울 계획을 세웠다.그 당시 만주에는 6,000명의 독립군이 있었다. 시베리아에 있는 빨치산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다.
1922년에 임시 의정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이동휘는 아메리카파 민족주의자들에게 패했다. 그러자 그는 임시정부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는 임정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조선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동휘의 생각은 우선 강력한 혁명적 대중정당을 조직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 P145

안창호가 부르주아적 원칙을 따르는 민주적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반면에, 이광수는 그것과 평행한 상층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지식층의 자유주의적 문화운동을 대변하고 있다. 이광수는 프롤레타리아의 세력 증대에 반대하지만 안창호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한다. 이광수는 가부장제 귀족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안창호는 참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이다.  - P152

테러리즘은 조선인의 항일투쟁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무정부주의와 마찬가지로 테러리즘은 대중활동을 하기가 어려운 곳인, 고립된 농민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발전한다. 그것은 상존하는 억압과 좌절감, 허무감에 대한 강한 반발이다. 그것은 노예화된 민족만이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점잖은 사람들이다. 평화를 사랑하고, 조용하며, 신앙심이 깊다. 이러한 일반적인 수동성과 평생 줄지 않는 고통을 참고 사는 것에 대해 화가 나서 젊은이들은 직접적인 행동을 택했고, 고통과 불의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직접 행동에 도움이 되는 무기-폭탄, 총, 칼만을 잡았던 것이다. 사회는 때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하는 가장 열렬한 개인적 영웅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러한 대담하고 희생적인 정신 때문에 조선사람은 극동 전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왜놈에게 테러를 하고 싶으면 중국인은 대개 조선인 중에서 지원자를 물색한다. - P159

1924년, 조선의 계급관계가 뚜렷이 변화해서 조선의 정치방향이 전반적으로 재조정될 시기에 이르자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이 세 요소는이전부터 무정부주의 철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같은 대열 속에 공존하고 있었지만, 결사가 하나의 결합력을 갖는 단위로되어왔던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이유는 조선 자체의 대중운동이 상당한 수준까지 솟구쳐오르고 있었으며 1924년에 이르러 대중운동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의 발전은 의열단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을 새로이 증명해주었다. 개인적인 테러리즘이 더는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이는 정치활동을 할 수있는 대중운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이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청년단체들이 다수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왜놈들은 이 단체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사회단체들이 테러리즘과 의열단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왜놈들이 테러리스트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테러리스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왜놈들은 선전과 대중운동보다는 폭탄과 총을 훨씬 더 두려워하였다. 1924년까지 300명에 가까운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의열단원들이 왜놈들에게 살해되었다. 별로 성과도 없이 희생만 늘어가자 단원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남아 있는 의열단원의 태반은 공산주의자와 합류하였으며 대중적인 정치활동에 가담하기를 원했다. 이때까지 살아남았던 의열단원 거의 전부가 1925년부터 1927년 사이에 중국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 P163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그들은 사진찍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그들은 프랑스 공원을 산책하기를 즐겼다. 모든 조선 아가씨들은 의열단원을 동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아가씨들은 러시아인과 조선인의 혼혈이었는데 매우 아름답고 지적이었다. 이 아가씨들과의 연애는 짧으면서도 열렬했다. - P165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기 시작하였다. 우선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을 공부한 후, 레닌의 『국가와 혁명 (State and Revolution)』을, 그다음엔 『사회발전사(The Story of Social Development)』라는 논문집을 읽었다. 나는 과학적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쿠데타와 테러행위의 무익함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찬탄을 금할 수 없으며 내 무정부주의자 친구들 사이에 만연한 동지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분명히 느꼈다. 1922년에 나는 상하이로 와서 의열단과 무정부주의자 동지들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술을 마구 퍼마셨지만 그리 즐겁지가 못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자 나는 공산주의운동만이 조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희망이라고 단정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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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에글린턴 백작은 보즈웰의 성격을 묘사했고, 보즈웰도 백작의 묘사가 정확했다고 인정했다.
"제이미, 자넨 머리는 가볍지만 엉덩이는 아주 무겁지. 분명 그런 사람은 내리막길에서 쉽게 달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야 오르막길을 오를 수 있어."
제임스 보즈웰은 "이것은 나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이다. 나는 의욕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계획하지만, 실행 단계에선 의욕을 상실하고 꾸물거린다"고 일기에 썼다. - P126

드루어리 레인(Drury Lane)에 대한 평판은 아주 오랫동안 나빴다. 언어 역사학자들은 드루어리 레인이란 이름이 중세 영어 ‘druwery‘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druwery‘를 ‘성적인 사랑, 성관계, 성인 남녀의 짝짓기 그리고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사랑, 통정‘이라 정의한다.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작품에선 이 단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여인들의 사랑과 성적인 사랑(druerie)에 대하여 곧 내가 당신에게말해 주리"
18세기 매독은 ‘드루어리 레인 학질(Drury Lane ague)‘이라고도 불렸다. ‘오, 머핀 맨을 아시나요 (0 do you know the muffin man)‘란 노래의 원래 의미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는 드루어리 레인에 살아요‘란 가사는 의미심장하다(머핀 (muffin)‘에는 ‘성적인 매력이 있는 남성‘이란 의미가 있다.  - P136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직업을 선택한다. 보즈웰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법조인이 됐지만 법조인으로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천직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하게 되는 일이다.
보즈웰은 글쓰기와 음주는 중독성이 있다고 말했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도 모른 채 그냥 흘러간다."
제임스 보즈웰에게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버지에게서 맞아가면서배운 진실성이었다. 평생 그는 메모를 했다. 줄거리가 있는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짧게나마 기록으로 남겼다. 이렇게 모인 기록이 하나의 사건이 됐다. 반면 사실로부터 점점 멀어져 허구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두고 현대 비평가는 ‘상상이 된 사실‘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초기 일기에서 보즈웰은 자신이 보존하고 싶은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는 행위를 화가의 섬세한 손길에 비유했다.
"무언가를 묘사하다 보면 우리는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은 손길들을 무의식적으로 생략한다. 하지만 화가가 눈에 찍은 아주 작은 점 하나가 그림 속 인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 P141

당시 서양문화에서 자기 제시는 대단히 중요했다. 사람들은 타인의로부터 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꾸민다. 자기 제시는 진지한 인간(homo seriosus)과 수사적 인간(homo rhetoricus) 사이의 투쟁이다. 진지한 사람에게는 진짜 자아의 핵심이 있다. 다시 말해 진지한 사람은 그 무엇에 의해 영향을 받아 자아가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된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진실되고 진실을 전달한다. 반면 수사적인 사람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수사적인 사람은 자기 성찰이 아닌 타인의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수사적인 사람에게 언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이용하는 놀이의 수단이다. 수사적인 사람에게 언어는 ‘진실‘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과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진실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 P144

몇 년 뒤에 제임스 보즈웰은 <더 히포콘드리악크>에서 이런 생각을인상적으로 풀어냈다. 그는 <더 히포콘드리아크>에서 3인칭 시점으로 자신을 등장시킨다.
"그는 나태함과 수치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집중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노동이 그에게 귀찮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일을 그만둘 결단력도 없다. 그는 경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합리화하지만, 습관적인 사고의 흐름은 그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노예처럼 행동한다. 의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인다."
나태함에 대한 죄책감은 양심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체벌이다. 반면나태함에 대한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P152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18세기 말까지는 무려 250여 가지의 범죄에 대해 사형이 내려졌다(1850년까지는 겨우 두 가지 유형의 범죄에 대해서만 사형이 내려졌다). 사형 선고를 받는 범죄의 거의 대부분이 주로 재산적인 법익을 침해하여 재산상의 손실을 입혀서 성립하는 범죄였다. 강 위에 떠 있는배에서 무언가를 훔치거나 수로에 있는 배에서 일어난 질도는 예외다), 가게에서 5실링 상당의 물건을 훔치거나, 타인으로부터 1실링 상당의 물품을 훔치거나, 사냥감이나 토끼를 죽일 의도로 타인의 토지에 들어가는 경우 사형이 선고됐다. 하지만 죽일 듯이 달려들어 누군가를 때리더라도 피해자가 살아 있다면,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계급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었다. 부유하거나 귀족 출신의 사람은 누군가를 공격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다른 누군가의 물건을 훔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론 많은 사형수들은 실제 사형되기보다는 식민지로 이송됐다. 이를 두고 권력층은 죄인에게 공정과 자비를 아울러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뭐가 되었든 죄를 지으면 자신들의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개 처형은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매년 타이번에서 몇몇 사형수들이 공개 처형됐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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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의 일본인이 조선에 있는 일본인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제국주의의 사무원과 앞잡이는 식민지 주민을 억누르기 위해 고용된 것이요.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태도가 본토에 있는 일본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도쿄에서 사귄 많은 일본인들에게 호감을 가졌다. 일본에서는 1919년에 혁명적 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무정부주의자가 주요한 급진세력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공산주의운동이 주도권을 잡았다.
일본인은 아주 좋은 동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일본 공산당원은 정직하고, 강인하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열적으로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몸을 바친다. 나는 내가 잘 아는 일본인을 정말로 좋아한다. 중국에서는 반식민지투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운동에서조차도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아주 강하다. 그러나 일본 공산주의운동에는 이런경향이 조금도 없다. 중국인과 달리 일본인은 조선인이나 그밖의 외국인 동지들을 절대로 구별하지 않으며 정말로 국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
- P114

학생 1,000명을 포함하여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6,000명이 살해되었고, 중국인도 600명 이상 피살되었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일본은 한창 전후 경제위기의 고비에 있었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지배계급은 1918년의 쌀폭동에 필적할 만한 폭동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폭동이 일어난다면 농민뿐만 아니라 지진으로 생계가끊긴 공장노동자들도 가담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폭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선수를 치고 일본 민중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지배계급은 소수민족에 대한 조직적인 테러행위를 재빨리 결행하였다. 정부는 국민들의 분노를 정부로부터 멀리 떼어놓고 국민들의 주의를 다른 곳에 쏠리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 P116

1923년의 사건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일본의 중요한 정치가는 그 배반적인 학살 후에 극동의 어느 민족도 더는 일본이 보이는 거짓 ‘우호‘에 속지 않을 것을 깨달았고, 자기들이 한 짓거리에 당황했다. 조선은 하나의 실례로서 다른 모든 민족에게 확실한 교훈을 주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이라는 사상을 열심히 선전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구호를 열광적으로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후에 일본군국주의로 발전한 반동적 운동도 그 해의 공포와 불안에서 시작되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모든 조선인에게 커다란 정치적 영향을 끼쳤고, 중요한 정치적 재편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족주의운동이 급진화되었고 소극적인 대일우호 감정까지도 깨끗이 씻겨버렸다. 조선 팔도 어디를 가든지 1923년의 대학살로 일본에서 자기 친척이 살해당한 가족을 볼 수가 있다.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는 너무나 격렬해서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와 협력하자고 할라치면 언제나 1923년의 일을 끄집어낸다. 그들에게 믿어도 괜찮은 일본인도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는 것은 아주 어려웠다. - P118

1923년 이후 많은 학생과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가지 않고 중국으로 갔다. 2년 동안은 일본으로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조선인은 제국주의와 반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중국의 협력을 구하게 되었다. 학생 대부분이 중국혁명을 위해서든 조선을 위해서든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그 후, 1927년에 국민당이 반동으로 돌아서자 중국으로 가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927년 이후 일본 유학생이 평균 2,000~3,000명은 되었을것이다. 중국은 문화수준이 낮고 교육받은 조선인을 필요로하는 일자리가 없었으며,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지독히 힘들었다. 또 가족도 없고 도움 받을 만한 곳이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혁명 활동이나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인은 심지어 끼니를 잇는 것조차 어려웠다. - P120

나는 계급적인 증오, 민족적 증오, 개인적 증오, 국가 간의 증오를 수없이 봤다. 너무나 많이 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잔인함이 더는 도덕적 가치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승리에 자극되었고 패배로 각성하였다. 그러나 승리를 얻기위한 수단으로서 잔혹성은 긍정한다. 잔혹성을 띠지 않는 어떤 역사적 변혁이 일어난다면 커다란 감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꿈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전에 나는 청년시절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깡그리 떨쳐내버렸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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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찬이 아니다. 새뮤얼 존슨의 <영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 모든 사전은 단어 목록에 지나지 않았다. 의미의 뉘앙스에 별 관심을두지 않았고,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왔는가에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존슨은 단어의 ‘맛‘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은 언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인지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 프랑세즈도 사전 편찬을 준비하고 있었다. 목표는 영구히 모든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존슨은 단어를 정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는 단어가 사용되는 모든 상황을 사전에 담고자 했다. 작가들이 그 단어를 사용한 구체적인 문맥을 예문으로 사용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이 방법에 따라 단어를 정의한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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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어느 가을날, 조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국을 원망했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조선은 평화를 원했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난 이후에………. 조선은 멍청하게도 세계일강을 향하여 ‘국제정의‘ 의 실현과 ‘민족자결주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어리석은 늙은 할망구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조선 땅에 태어나서 수치스럽게도 이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버렸을까? 나는 분개했다.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인간해방의 비책을 배우고 싶었다.  - P56

서울 근처에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진 가지에 목이 매여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 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리랑‘은 이 나라의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 P60

내가 체험한 인생살이의 큰 윤곽을 그려볼 때, 거기에 보이는 것은 다만 뼈를 깎는 아픔 속에서 얻어낸 패배의 연속일 뿐이며, 앞길에는 험준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역사에 밀착해서 살아왔다. 역사는 목동의 피리소리에 맞춰서 춤추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싸움하는 소리뿐이다. 투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내세계에서는 하나도 의미가 없다. 바로 그 투쟁의 대립물 속에 나와 인간생활의 일치가 나와 인간역사의 통일이 존재하는것이다. - P67

학생들은 와! 하고 함성을 터뜨렸고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껑충껑충 뛰어올랐고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 주위에 가까이 모여 선생님께서 무슨말씀을 더 하시는가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국민 전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윌슨 대통령은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또한 모든 나라와 모든 인민들을 위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대통령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국민이 버티고 서 있다. 일본이 조선을 노예화하는것을 미국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독립과 민주주의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어느 민족이나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리이다. 우리는 무기를 든다거나 폭력을 써서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거부될수가 없다. 조선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만세! 만세!"
우리는 만세삼창을 외쳤다.
"정말로 파리평화회의에서 조선을 도와줄까요?" 하고 우리는 선생님께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강력하게 주장하셨다. - P87

사형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률상의 구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위운동 참가자들이 "우리는 단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을 뿐,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것이 아니다"라고 공공연하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조선의 법률로는 사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법에 의하면 살인죄에 대해서만 사형을 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놈들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대신에 거리에서 학살하였던 것이다. 이 얼마나 뛰어난 일본인 특유의 전문수법인가!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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