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는 러시아의 선례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가 된최초의 조선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선은 소련과 아주 가까운 사이다. 10월혁명 때, 수천 명의 조선인이 싸웠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은 극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18년에 그는 ‘이르쿠츠크 공산당‘이라는 최초의 조선인 공산당을 조직했으며, 그 일로 모스크바에 갔다. 하지만 자기가입당한 사실은 비밀로 하였다. 이것은 중국보다 4년 앞선 것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평화회의가 열리자 승전국들이 조선에 최소한의 정의를 베풀 것이라는 기대 속에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시베리아에 있는 조선인들은 회원이 수만 명은 되는 ‘시베리아 한인회‘를 만들어 1919년에 이동휘를 상하이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조선 민족운동의 시베리아-만주파 지도자로서 이동휘는 군대를 조직하여 대일전쟁을 시작할 것을 열망하였다. 그는 대일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임시정부하에 군사학교를 설치하였으며, 시베리아와 만주에 대규모의 조선군을 키울 계획을 세웠다.그 당시 만주에는 6,000명의 독립군이 있었다. 시베리아에 있는 빨치산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겠다. 1922년에 임시 의정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이동휘는 아메리카파 민족주의자들에게 패했다. 그러자 그는 임시정부가 쓸모없다고 생각하고는 임정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조선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이동휘의 생각은 우선 강력한 혁명적 대중정당을 조직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 P145
안창호가 부르주아적 원칙을 따르는 민주적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반면에, 이광수는 그것과 평행한 상층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지식층의 자유주의적 문화운동을 대변하고 있다. 이광수는 프롤레타리아의 세력 증대에 반대하지만 안창호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한다. 이광수는 가부장제 귀족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안창호는 참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이다. - P152
테러리즘은 조선인의 항일투쟁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해왔다. 무정부주의와 마찬가지로 테러리즘은 대중활동을 하기가 어려운 곳인, 고립된 농민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발전한다. 그것은 상존하는 억압과 좌절감, 허무감에 대한 강한 반발이다. 그것은 노예화된 민족만이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점잖은 사람들이다. 평화를 사랑하고, 조용하며, 신앙심이 깊다. 이러한 일반적인 수동성과 평생 줄지 않는 고통을 참고 사는 것에 대해 화가 나서 젊은이들은 직접적인 행동을 택했고, 고통과 불의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 직접 행동에 도움이 되는 무기-폭탄, 총, 칼만을 잡았던 것이다. 사회는 때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하는 가장 열렬한 개인적 영웅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변증법적 과정이다. 이러한 대담하고 희생적인 정신 때문에 조선사람은 극동 전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왜놈에게 테러를 하고 싶으면 중국인은 대개 조선인 중에서 지원자를 물색한다. - P159
1924년, 조선의 계급관계가 뚜렷이 변화해서 조선의 정치방향이 전반적으로 재조정될 시기에 이르자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분열되었다. 이 세 요소는이전부터 무정부주의 철학의 지배를 받으면서 같은 대열 속에 공존하고 있었지만, 결사가 하나의 결합력을 갖는 단위로되어왔던 것이다. 이렇게 분열된 이유는 조선 자체의 대중운동이 상당한 수준까지 솟구쳐오르고 있었으며 1924년에 이르러 대중운동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의 발전은 의열단원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정당성을 새로이 증명해주었다. 개인적인 테러리즘이 더는 필요가 없게 되었는데 이는 정치활동을 할 수있는 대중운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이미 노동조합과 농민조합, 청년단체들이 다수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왜놈들은 이 단체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사회단체들이 테러리즘과 의열단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왜놈들이 테러리스트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테러리스트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왜놈들은 선전과 대중운동보다는 폭탄과 총을 훨씬 더 두려워하였다. 1924년까지 300명에 가까운 가장 우수하고 용감한 의열단원들이 왜놈들에게 살해되었다. 별로 성과도 없이 희생만 늘어가자 단원들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남아 있는 의열단원의 태반은 공산주의자와 합류하였으며 대중적인 정치활동에 가담하기를 원했다. 이때까지 살아남았던 의열단원 거의 전부가 1925년부터 1927년 사이에 중국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 P163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그들은 사진찍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그들은 프랑스 공원을 산책하기를 즐겼다. 모든 조선 아가씨들은 의열단원을 동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아가씨들은 러시아인과 조선인의 혼혈이었는데 매우 아름답고 지적이었다. 이 아가씨들과의 연애는 짧으면서도 열렬했다. - P165
1921년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읽기 시작하였다. 우선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을 공부한 후, 레닌의 『국가와 혁명 (State and Revolution)』을, 그다음엔 『사회발전사(The Story of Social Development)』라는 논문집을 읽었다. 나는 과학적 대중투쟁의 중요성과 쿠데타와 테러행위의 무익함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테러리스트들의 영웅적인 희생에 찬탄을 금할 수 없으며 내 무정부주의자 친구들 사이에 만연한 동지들의 자유로운 정신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실패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분명히 느꼈다. 1922년에 나는 상하이로 와서 의열단과 무정부주의자 동지들을 다시 만났다. 우리는 술을 마구 퍼마셨지만 그리 즐겁지가 못했다. 상하이에서 돌아오자 나는 공산주의운동만이 조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희망이라고 단정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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