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에글린턴 백작은 보즈웰의 성격을 묘사했고, 보즈웰도 백작의 묘사가 정확했다고 인정했다.
"제이미, 자넨 머리는 가볍지만 엉덩이는 아주 무겁지. 분명 그런 사람은 내리막길에서 쉽게 달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야 오르막길을 오를 수 있어."
제임스 보즈웰은 "이것은 나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는 말이다. 나는 의욕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계획하지만, 실행 단계에선 의욕을 상실하고 꾸물거린다"고 일기에 썼다. - P126

드루어리 레인(Drury Lane)에 대한 평판은 아주 오랫동안 나빴다. 언어 역사학자들은 드루어리 레인이란 이름이 중세 영어 ‘druwery‘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druwery‘를 ‘성적인 사랑, 성관계, 성인 남녀의 짝짓기 그리고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사랑, 통정‘이라 정의한다.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작품에선 이 단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여인들의 사랑과 성적인 사랑(druerie)에 대하여 곧 내가 당신에게말해 주리"
18세기 매독은 ‘드루어리 레인 학질(Drury Lane ague)‘이라고도 불렸다. ‘오, 머핀 맨을 아시나요 (0 do you know the muffin man)‘란 노래의 원래 의미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는 드루어리 레인에 살아요‘란 가사는 의미심장하다(머핀 (muffin)‘에는 ‘성적인 매력이 있는 남성‘이란 의미가 있다.  - P136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직업을 선택한다. 보즈웰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법조인이 됐지만 법조인으로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천직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하게 되는 일이다.
보즈웰은 글쓰기와 음주는 중독성이 있다고 말했다.
"어디서 멈춰야 할지도 모른 채 그냥 흘러간다."
제임스 보즈웰에게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버지에게서 맞아가면서배운 진실성이었다. 평생 그는 메모를 했다. 줄거리가 있는 완전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짧게나마 기록으로 남겼다. 이렇게 모인 기록이 하나의 사건이 됐다. 반면 사실로부터 점점 멀어져 허구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두고 현대 비평가는 ‘상상이 된 사실‘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초기 일기에서 보즈웰은 자신이 보존하고 싶은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는 행위를 화가의 섬세한 손길에 비유했다.
"무언가를 묘사하다 보면 우리는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은 손길들을 무의식적으로 생략한다. 하지만 화가가 눈에 찍은 아주 작은 점 하나가 그림 속 인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 P141

당시 서양문화에서 자기 제시는 대단히 중요했다. 사람들은 타인의로부터 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꾸민다. 자기 제시는 진지한 인간(homo seriosus)과 수사적 인간(homo rhetoricus) 사이의 투쟁이다. 진지한 사람에게는 진짜 자아의 핵심이 있다. 다시 말해 진지한 사람은 그 무엇에 의해 영향을 받아 자아가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된 언어를 사용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진실되고 진실을 전달한다. 반면 수사적인 사람은 사회 속에서 존재하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수사적인 사람은 자기 성찰이 아닌 타인의 피드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수사적인 사람에게 언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이용하는 놀이의 수단이다. 수사적인 사람에게 언어는 ‘진실‘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과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진실성이 존재하기는 할까? - P144

몇 년 뒤에 제임스 보즈웰은 <더 히포콘드리악크>에서 이런 생각을인상적으로 풀어냈다. 그는 <더 히포콘드리아크>에서 3인칭 시점으로 자신을 등장시킨다.
"그는 나태함과 수치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집중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노동이 그에게 귀찮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일을 그만둘 결단력도 없다. 그는 경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합리화하지만, 습관적인 사고의 흐름은 그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노예처럼 행동한다. 의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인다."
나태함에 대한 죄책감은 양심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체벌이다. 반면나태함에 대한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P152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18세기 말까지는 무려 250여 가지의 범죄에 대해 사형이 내려졌다(1850년까지는 겨우 두 가지 유형의 범죄에 대해서만 사형이 내려졌다). 사형 선고를 받는 범죄의 거의 대부분이 주로 재산적인 법익을 침해하여 재산상의 손실을 입혀서 성립하는 범죄였다. 강 위에 떠 있는배에서 무언가를 훔치거나 수로에 있는 배에서 일어난 질도는 예외다), 가게에서 5실링 상당의 물건을 훔치거나, 타인으로부터 1실링 상당의 물품을 훔치거나, 사냥감이나 토끼를 죽일 의도로 타인의 토지에 들어가는 경우 사형이 선고됐다. 하지만 죽일 듯이 달려들어 누군가를 때리더라도 피해자가 살아 있다면,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계급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었다. 부유하거나 귀족 출신의 사람은 누군가를 공격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다른 누군가의 물건을 훔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론 많은 사형수들은 실제 사형되기보다는 식민지로 이송됐다. 이를 두고 권력층은 죄인에게 공정과 자비를 아울러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뭐가 되었든 죄를 지으면 자신들의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개 처형은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매년 타이번에서 몇몇 사형수들이 공개 처형됐다. - P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