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슨은 문학은 항상 인생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그 자체보다는 제한되고 단순하지만 인생의 단편을 강력한 상상력으로 풍부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문학이라 여겼다. <셰익스피어의 서문>에서 그는 희극과 비극은 결코 섞여선 안 된다는 볼테르의 주장에 반박하여 정곡을 찌르는 말로 응수했다. 볼테르의 주장이 옳다면 그런 규칙을 따르지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당연히 열등한 작품일 수밖에없었다. 존슨은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엄밀히 따지면 비극이나 희극이아니다. 그의 희곡 자체가 독특한 장르다. 그의 희곡은 선과 악, 기쁨과 슬픔이 혼재되어 있으며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이 세상의 순리도 보여준다. 술에 취한 그는 잔에 담긴 와인을 벌컥 들이켰고, 슬픔에 잠긴 그는 자신의 친구를 땅에 묻었다"라고 적었다. - P436

조지 3세는 1760년에 22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1761년 조지 3세는 샬럿(Charlotte) 왕비를 위해 세인트제임스 궁전 인근의 버킹엄 하우스를 구입했다. 그녀의 사저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버킹엄 하우스는 ‘왕비의 집‘으로 알려졌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뒤, 버킹엄 하우스는 버킹엄 궁전이 됐고 군주의 관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지 3세는 책을 많이 읽었고 학문을 권장하는 왕으로 알려지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씌어진 고전문학, 시, 지리학, 역사, 수학, 법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방대한 양의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서는 더 많은 책을 수집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했다. 그리고 왕비의 집에 추가로 방을 만들어서 수많은 책을 보관했다. 학자와 문필가들은 원하면 언제든지 조지3세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었다. - P449

 1744년 발표한 《리처드 새비지의 인생》에서 존슨은 저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미개한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사악함과 자원이 풍부하다고 해서 타국을 침범하는 악의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런 입장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변하지 않았다. 1759년 《디아이들러》에 실은 에세이에서 존슨은 영국 군대가 영토를 짓밟는 모습을 지켜보는 어느 인디언 추장이 되어 그의 심경을 글로 옮겼다.
"저 침략자들은 분노하여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이들을 도륙하고, 항복하는 사람들을 재미삼아 죽이며 이 대륙을 돌아다녔구나. 살아남은자들 중에서 일부는 커다란 동굴에 들어가 주인을 위해 광물을 캐고, 다른 일부는 토지를 경작하는 일을 하게 되겠지. 외국 폭군들이 목숨걸고 캐낸 광물과 힘들여 얻어낸 수확물을 집어삼켜버릴 것이다. 원주민들이 그들의 검과 광산에서 목숨을 잃을 때, 그들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본국으로 끌고 갔다. 먼 타국으로 끌려간 그 사람들은 노역과 고문으로 죽어갈 것이다." - P467

당대 지식인들 역시 식민지화에 대하여 새뮤얼 존슨과 유사한 태도를 보였다. 애덤 스미스는 더 온화하고 차분한 어조로 《국부론》에서 존슨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어리석음과 부당함이 식민지 건설의 주된 원칙인 듯하다. 금광과 은광을 쫓는 어리석음과 초기 모험가들을 친절하고 따뜻하게 맞이한 악의 없는 원주민들의 땅에서 자원을 탐하는 부당함 말이다." - P468

 그리고 존슨은 가치있는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척박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은 영국에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그러나 역사가 반복되듯이, 1982년엔 이 군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졌다. 이어서 전쟁의 실상에 대해서 낱낱이 열거했다. 그가 전쟁의 실상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전문을 읽어보자.

전쟁에 대해 대부분의 인류가 냉랭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다니 실로 놀랍다. 멀리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거나 책에서 전쟁에 대해 읽었지만실제로 전쟁의 악폐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쟁을 재미있는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전포고, 군대, 전투 그리고 승리로 구성된 게임 말이다. 허나 실제로 누군가는 승리의 전장에서 죽어간다. 그들은 영예라는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다. 잉글랜드의 영광으로 가득한 정복의 기쁨에 취해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떠난다.
영웅소설은 현대 군인의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전쟁은 대포와 검보다 더 무시무시한 파괴의 수단들로 가득하다. 최근 벌어진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수천, 수만 명의 군인들 중에서 적의 검과 대포에 의해 죽어간 이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축축하고 부패한 막사와 배에서 시들어갔다. 그들은 창백하고 무기력하고 활기 없고 무력했다. 그들은 헐떡였고 신음했다. 오래 지속된 희망 없는 비참함으로 인해 완고해진 이들은 동정을 받지 못했다. 예고도, 추모도 없이 그들은 구덩이에 파묻히거나 바다로 던져졌다. 용기는 쓸모 없고 진취성은 실현 불가능한 불편한 야영지와 건강에 나쁜 주둔지에서 병력이 조용히 줄어들고 군대는 무기력하게 사라졌다. - P469

보즈웰은 "이것은 솔직하고 기분 좋은 고백이었다"라고 덧붙였다.
버크는 미국에 대한 연설로 웅변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773년 노스 행정부는 차 조례를 통과시켰다. 차 조례로 파산 국면에 빠진동인도회사는 독점적으로 면세 차를 미국에 수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인도에서 들여온 차가 미국에서 사실상 더 싸게 판매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타운센드법에 따라 1파운드당 3펜스의 세금이 차와 다른 5개 물품에 부과됐다. 5개 품목에 대한 세금은 이미 할인됐고, 조세 수입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 차에 부과되는 세금만남아 있었다. 보즈웰은 그 원칙은 효력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에선 차 조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보스턴 차 사건이 발발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과 미국 식민지들의 정면충돌이 머지않았다는불길한 징후였다. - P478

요즘은 으레 미국 독립 혁명을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의미의 혁명으로간주하지 않는다. 이는 사실이다. 신생국가에서의 삶은 혁명 전과 후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혁명 전에 권력을 쥔 자들이 혁명 이후에도 단단하게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에는 공식 헌법이 있었다. 버크는 미국 독립 혁명을 두고 이렇게 썼다.
"위대한 혁명이 일어났다. 기존 국가에서 이전 권력자들의 목을 자르고 새로운 자들이 권력을 잡는 형태의 혁명이 아니다. 이 지구상에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은 힘의 관계, 균형 그리고 중심의 변화였다. 태양계에 새로운 행성이 등장한 일과 맞먹는 것이었다." - P480

 《국부론》의 제1장은 ‘분업‘이다. 애덤스미스는 핀 공장에서 핀 하나를 생산하는 과정이 18개의 단위 작업으로 이뤄져 있음을 발견했다. 핀 공장에서 본 내용을 바탕으로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의 노동자가 전체 작업을 수행하는 대신 한두 개의작업을 수행하고, 다른 노동자가 이어서 나머지 작업을 수행하면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진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한 사람은 철선을 늘이고 다음 사람은 바르게 펴고, 셋째 사람은 자르고, 넷째 사람은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째 사람은 핀 머리를 붙이기 위하여 끝을 간다. 핀 머리를 만드는 데도 두셋의 공정이 필요하며, 그것을 붙이는 것이 특별한 작업이라면 핀을 휘게 만드는 것도 또 다른 작업이며, 핀을 종이에 포장하는 것까지도 하나의 작업인 것이다(그들은 판매를 위해 핀을 종이에 포장했다. 이리하여 핀 제조라는 중요한 일은 약 열여덟 종류의 작업으로 나뉘고, 어떤 공장에서는 이 작업들을 여러 직공들이 나눠서 하게 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작은 공장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겨우 열 명이 일하고 있었고, 그중 몇 사람은 두세 가지의 다른 작업을 겸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에 약 12파운드의 핀을 제조할 수 있었다. 1파운드의 핀은 중침으로 4,000개 이상이 되므로, 10명의 직공은 하루 4만8,000개 이상의 핀을 제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숙련공이라도 혼자서 하루에 20개 이상의 핀을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국부론>은 19세기 공장 시스템을 예견했다. 이것은 독창적이었다. - P491

로마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 기번은 그 도시의 역사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책으로쓰기 시작한 시점에 미국 식민지들은 영국에서 독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국들과 그들의 몰락은 아주 시사적인 주제였다. ‘위대한 제국의 ‘쇠망‘이란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되짚는다는 생각은 분명 영국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이었다. 기번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권에서 그는 널리 흩어진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로마가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을 다뤘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장애물은 그가 살던 영국이 직면한 장애물이기도 했다.

먼 지역과 외국을 그들의 의향과 흥미에 반하여 복종시키는 것만큼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반하는 것은 없다. 방대한 제국이 유지되려면 정책과 억압이란 정제된 체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중앙에 절대권력이 집중되어야 하고, 행동은 날래고, 자원은 풍부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에서 가장 먼 지역과의 의사소통이 신속하고 쉬워야 하고, 반란의 씨앗을 제거할 방어 시설과 중앙의 뜻을따르는 자를 보호하고 거스르는 자를 벌하는 행정기관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불만과 절망을 유발하지 않고 공포를 조장할 잘 훈련된 군대가 필요하다. - P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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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남자나 여자를 겁쟁이로 만들지 않아요. 오히려 더 용감하고 더 결단력 있게 만들지요. 만일 사랑 때문에 당신의 용기가 줄어든다면 나는 당신을 경멸할 것이고 그러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내 연인이 죽은 이래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없어졌어요. 삶이라는 것의 가치가 줄어들고 용기가 더욱 가치있게 된 거예요. 지금은 혁명에 대한 나의 임무가 이전보다도 커졌어요. 내 임무뿐만 아니라 그이의 임무까지도 수행해야 되기 때문이죠. 만일 당신마저 죽는다면 나를 믿고 자기 자신이 혁명대열에서 사라져버린다고는 생각지마세요. 나는 장래의 내 짐이 두 배로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없고,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혁명은 하나의 추상물이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인간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적 요소가 혁명에 유기적인 단결인 동지간의 충성과 더욱 커다란 책임을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우리는 튼튼하지만 떨어져있으면 당신도 나도 단지 개체에 불과할뿐 완전한 하나의 단위를이룰 수는 없습니다." - P320

만주에서 새로운 노선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노선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서로 협력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일제에 대한 투쟁만을 하고 중국인 지배계급이나 지주에 대한 투쟁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결정내렸다. 만주에는 대부분이 중국인 지주를 위하여 일하고 있으면서 중국인 봉건계급에게 시달리고 있는 조선인 농부가 100만 명이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제에 대한 투쟁은 물론이요, 그 당시 여타의 모든 지역에서 택하고 있던 일반적인 당 방침에 따라 중국농민과 합세하여 중국인 지배계급에 대한 농민투쟁을 지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우리는새로이 ‘조선인 · 중국인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1925년 이후 다수의 지식인과 도시노동자를 조합 속에 엮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는 이 지방의 중국공산당은 농민조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당원 가운데 농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 조선공산당은 농민과 농업노동자를 묶은 조합은 있었지만 도시무산자의 조합은 없었다. 이제 조선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농민조직창설을 돕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내에 농민부가 설치되었고 여러 명의 조선인이 거기서 일하게 되었다 - P329

비록 내가 아직도 극동에서의 지도적인 혁명과제가 중국문제라 생각하고 거기에 몰두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에 대한 믿음이 무한히 되살아나고 전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우리 조국의 앞날에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의 공산당은1928년의 일제검거로 깨어져 버렸고 아직도 각 파벌이 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그렇지만 이곳 만주에서는 그런 단계는이미 막을 내렸고, 대회는 통일된 지도부의 대표들을 구성하였다. 또한 대회에서는 조선혁명청년연맹은 만주위원회의 조선공산청년부의 지도하에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 대회를 지배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지, 민족주의자들이아니었다. 이는 고양되는 혁명의식의 지표였던 것이다.  - P330

하지만 중국에서 오랫동안 충실한 세월을보낸 지금, 나는 계급적 단결과 국제적 협력 모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억압받고 있는 제 민족과 제 계급을 지도하기 때문에, 소련을 나는 어머니처럼 사랑한다. 중국혁명은 그 삶과 운명이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와 같이 사랑하였다. 조선혁명은 어리고 불안정한 어린아이로서 애정이 갔다. 나는 조선혁명의 발걸음이 그전에 러시아와 중국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온 나이먹은 농부들은 내말을 꿈을 꾸듯이 듣고 있었지만, 젊은 농부들은 지혜와 결의를 가지고 열성적으로 방법과 수단을 물어왔다.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리고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에 영원한 기지를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과 또한 지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물론이요, 항일투쟁을위해서도 가난한 중국농민과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하였다. - P334

"오늘 같은 날에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뭔가요?"
ㅠ"조선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죽음과 패배의 노래입니다. ‘아리랑‘ 이지요."
나는 이 노래의 의미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황량한 갈색 벌판을 바라보고 광둥과 하이루펑을 생각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대단히 감동하여 이제까지 들은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칭송하였다.
"당신 부인도 이 노래를 알고 있습니다. 조선사람이면 누구나 대대로 이 노래를 알고 있지요. 만일 부인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 당신은 부인에게 새옷을 사주고 친절히 대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이 노래를 절대 잊지 않겠어요."
그는 다정하게 약속하고는 맥주를 주문하여 함께 마셨다.
해외에 파견되는 일본인 관리는 말단 직원까지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제국의 전위인 것이다. 조선 국내의 경찰은 이들과는 질이 다르다. 그놈들은 이만큼 정중하지가 못하다. 조선에서는 이미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2류 행정관리들이 파견되는 것이리라. - P367

법정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나서 나는 조선의 중심지인 신의주에 있는 큰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 감옥에는 1,000명이상이 수용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유격대원이었다. 왜놈을 죽였다거나 죽이는데 협조했다는 것이 입증되면 사형이었고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유기징역이었다. 1910년 이래 이 감옥에서 수천 명이 처형되었다.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싸운 가장 걸출한 조선의 투사들이.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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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의 장면들은 우리에게 메타인지 방식을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 "너 그것도 몰라?" 하고 누군가 핀잔을 줄 때에도 헤르미온느는 주눅들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알아? 머글 집안에서 자랐는데!"라고 받아친다. "나는 다른 건 잘 알지만 이건 잘 모른다"고 솔직히 시인하면서 "그러니 네가 나에게 좀 설명해줘"라고 요청하는 것이 메타인지 학습이다. 먼저 판단을 내린 뒤 (모니터링)더 배우고 싶다고 컨트롤을 하는 것이다. 메타인지가 작동하려면 헤르미온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모르는 상태라는 것을 편하고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P150

 이렇게 겸손하게 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하면, 성공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수 있어서다. 겸손의 말이 ‘스포트라이트를 나누어 비춰주는‘ 일종의 배려 양식이라고 소개한 연구도 있다. 겸손의 말 속에는 ‘이번엔 내가 운이 좋았지만 다음 번엔 너도 운이 좋을 거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고배를 마신 상대를 배려하는 방법중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겸손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하기도 한다. "이게 다 운이 좋아서"라고 얘기하게 되면, 우리가 지금껏 실수와 실패를 통해 쌓아온 과거의 노력은 몽땅 잊어버리고 사후과잉확신편향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가면을 쓰는 사람들은 성공한 사실을 ‘착오‘라고 믿게 되고 ‘나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폄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임포스터이즘에 빠지지 않으면서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 P168

연구자들은 두 가지 겸손에 대해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에게 자신이 겸손해졌을 때를 떠올려보게 한 후 ‘겸손한 마음‘ 하면 연상되는 감정과 단어, 행동을 모두 적게 했다. 참가자들이 적어낸내용에는 긍정어와 부정어가 다 담겨 있었다. 긍정적 연상에는 축하, 감사, 자부심, 명성 등의 단어들이, 부정적 연상에는 자기 평가,
타인으로부터 숨기는 것, 수치심, 순종,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음을 숨기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연구진은 전자의 겸손을 ‘감사하는 겸손‘ 후자의 겸손을 ‘자기비하적 겸손‘이라고 이름 붙였다. 2009년도에 버락 오바마BarackObama 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 그가 발표했던 소감문에는 두가지 겸손이 잘 드러나 있다.
"수상의 영예에 깊이 감사드리며 겸손한 마음으로 이 상을 받아들겠습니다(감사하는 겸손). 슈바이처, 킹, 마셜, 만델라 같은 전 수상자들에 비하면 제가 이룬 업적은 너무나 미미합니다(자기비하적 겸손)"
감사하는 겸손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어 있다. 누군가가 나의 어떤 면을 칭찬했을 때 "고마워요"라고 답할 수 있으려면 남이 칭찬한 그 면을 자기 자신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겸손은 메타인지와도 연결된다. 메타인지도 나 자신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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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석은 없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일찍 극장에 도착해서 극장 문이 열릴 때까지 주변을 배회하다가 극장 문이 열리면 자리를 잡기 위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인기 공연의 경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서서 공연을 관람했다. 심지어 박스석에도 예약석이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하인들을 미리 보내서 자리를 맡도록 했다.
빈지문이나 무대 평판이 무대의 양쪽 끝의 홈에서 나와 무대를 가렸다. 빈지문이나 무대 평판이 걷히면 무대 배경이 바뀌어 있고, 다음 장면에 출연하는 연기자들이 무대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극 소품은 거의 없었고 무대를 현실적으로 꾸미지도 않았다. 19세기가 되어서야 흔히 소품이 사용되고 무대가 현실적으로 제작됐다.
물론, 스포트라이트도 없었다. 하지만 반사판이 달린 조명이 연기자의 발 아래쪽에서 위쪽을 향하여 투사되는 각광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극장과 달리 무대를 제외한 관객석도 어둡지 않았다. 초가 가득 꽃힌 샹들리에가 객석을 밝혔고, 관객의 바이플레이를 유도했다. 바이플레이는 중심 연기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보조 연기다. 보즈웰은 바이플레이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했다. - P320

모든 사람들은 프랜시스 버니를 패니(Fanny)라고 불렀다. 버니에게 글을 쓰는 것은 숨 막히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그녀의 자매 중 누군가는 그녀를 내숭쟁이라 불렀다. 그녀는 누군가가자신의 일기를 보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한 심정을 일기에 담았다. 하지만 가끔 자매들끼리 일기를 공유하기는 했다. 자매중 누군가가 "패니는 평생 스스로를 억눌렀다. 그녀는 아주 겸손했다. 그녀에겐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억눌러온 감정이나 생각을 표출할 안전한 배출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일기였고, 패니는 일기에 모든것을 쏟아냈다"라고 말했다. - P354

아주 가끔 존슨은 필연적으로 나쁜 행실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770년 그는 다음의 글을 썼다.

"모든 인간은 자신은 스스로 다짐한 일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오랜 세월을 통한 잦은 실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만은 다짐한 일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는 굳은 믿음 때문에, 인간은 가끔 욕구에 굴복해 다짐을 지켜내지 못한 자를 항상 경멸한다. 그래서 다짐한 일을 매번 어겨 절망에 빠진 자들은 더 이상 다짐하지 않고, 교활해진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다짐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 P372

보즈웰은 장자상속을 고집했다. 이런 그의 고집이 폐기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만약 모든 사내아이가 보즈웰보다 먼저 세상을떠난다면, 모든 재산이 딸들이 아닌 먼 남자친척에게 상속된다는 의미였다. 장자상속에 더해 한사상속도 있었다. 한사상속이란 제1, 제2, 제3의 상속예정자를 미리 정해놓고 그 순서에 따라 가문의 지위와 명예를 이어받되 토지를 비롯한 재산에 대한 임의적인 처분권은 주지 않는 상속제도였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장자상속과 한사상속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장자상속은 봉건시대에는 타당한 상속제도였을 거라고 말한다. 봉건시대는 모든 위대한 지주는 소국의 군주이고 영토를 안전하게 지켜야 안보가 보장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상속은 현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는 한사상속도 비난했다.
"한사상속은 얼토당토않은 추정에 근거한다. 그 추정은 바로 대대로토지와 재산을 물려받은 남자 상속자들은 토지와 가문의 모든 재산에대해 동등한 권리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사상속에 따르면 현세대의 재산은 예를 들어 500년 전에 죽은 조상들의 바람에 따라 통제되고 관리되어야만 한다."
<오만과 편견> 속 베넷 일가가 개탄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들이없는 베넷 일가는 재산을 상속서열 상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 물려줘야 했다. 바로 거만하고 우스꽝스러운 콜린스였다. - P384

"자네에 대한 나의 애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네. 하지만내가 자네에게 얼마나 아끼는지를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지 않겠네.
자네가 들고 다니는 수첩의 첫 장에 이를 적어두고 다시는 자네에 대한 나의 애정을 의심하지 말게나."
한 사람의 인생을 기록으로 완벽하게 남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즈웰의 기발한 유머감각, 열정과 사교성은 존슨에겐 일종의 활력소다. 존슨은 보즈웰이 자신에게 조언을 구하고 애정을 확인받으려는 행동이 모두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보즈웰이 존슨에게서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존슨은 보즈웰에게서 그가 결코 가지지 못한 아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존슨에 대한 보즈웰의 존경심은 점점 커져 거의 숭배에 이르렀다. 그런 그의 존경심은 존슨의 인정 욕구를 가득 채워 줬을 것이다.
게다가 존슨은 보즈웰의 즉흥적이고 검열받지 않고 반항적이고 음탕한 행동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보즈웰의 언행은 대체로 가볍고 엉뚱했다. 반면에 존슨의 언행은 심각하고 도덕에 얽매여 있었다. 그래서 존슨은 보즈웰을 보며 작은 위안을 얻었다. 보즈웰은 어린아이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제멋대로 굴었다. 존슨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언행과 사고방식이었다. 존슨은 그런 보즈웰을 부모처럼 꾸짖으면서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보즈웰 역시 존슨이 자신을 아버지처럼 꾸짖어 주길 원했다. - P389

《코르시카 이야기》에 제일 처음 등장하는 단어는 ‘자유‘다. 그는 옷맹한 코르시카 사람들의 애국심이 최고조에 달하던 순간을 함께했고, 그들의 정신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책이 출간되고 1년 뒤에 코르시카 독립군이 궤멸됐다. 제노바는 코르시카 통치권을 프랑스에 이양했다. 프랑스는 통치권을 이양받자마자 코르시카를 침략했고 그 이후 지금까지 통치하고 있다. 파스콸레 파올리는 변호사인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 등 몇몇과 함께 산을 넘어 도망쳤다. 카를로 부오나파르테의 아내는 그로부터 3개월 뒤에 나폴레옹을 출산했다. <사회계약론>에서 어느 날 코르시카가 유럽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한 장 자크 루소의 예언을 아이러니하게 실현시킬 인물의 탄생이었다. - P392

당시에 포스트 체이스는 고속 이동수단이었다. 포스트 체이스의 ‘포스트‘란 단어에서 이 마차가 얼마나 빠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영어사전>에서 새뮤얼 존슨은 ‘포스트(post)‘를 ‘빠른 이동 항로나 방법‘이라 정의했다. 마부는 10마일이나 15마일마다 역마(驛馬)를 교체했고, 역로(驛路)를 따라 역마를 바꾸어 타던 역참(驛站)이 들어섰다. 참고로 포스트에는 본래 역참에서 다음 역참으로 우편물을 옮긴다는 뜻이 있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둔다는 뜻이 생겼다. 18세기에는 우편함이 존재하지 않았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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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가 데려가 달라고 요구하였다. 뒤에 남으면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행군에 따라나선다면 최소한 투쟁 중에 동지들 품안에서 죽을것이다. 그 때문에 백사에 남은 사람은 얼마 안 되었다.
1차로 100명이 레이양을 향해 떠나고 나머지 3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행군이었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자 중에 콜록거리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적병에 바싹 붙어서 행군하기 때문에 단 한 번만 기침을 해도 즉각 발각되어 우리 모두가 섬멸되고 말 것이다.
모두가 허약하고 허기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 전 생애를 통하여 이만한 극기를 본 적이 없었다! 상당수가 결핵에 걸렸거나 물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독감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험한 행군기간에 기침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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