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사우드와 루즈벨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에게 보장해 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경 안에 머물 것이며 미국은 그런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했다. 이븐 사우드에게는 꽤 많은 적들이 있었는데 특히 그 중에는 현재 이라크와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는 하심 가문이 있었다. 그가 이들을 메카와 메디나에서 쫓아낸 것은 불과 20년 전의 일이다. 만약 그들의 세력이 강했고 적절한 제안만 있었다면 그들은 헤자즈를 탈환해 보려 했을 것이고 그러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븐 사우드도 종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 최강국을 새로운 친구로 삼는 것이 적들과 강화를 맺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된다. 특히 하심 가문의 뒤를 밀고 있는 영국 정부로서도 이제는 그들이 영토를 점유하는 것을 섣불리 지지하지 못할 터였다. - P130

79년 그랜드모스크 점거사건의 여파는 컸다. 이란의 혁명 지도자인 호메이니는 탈환 작전의 배후로 미 제국주의와 국제 시오니즘을 지목하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의 비난은 아랍의 여러 나라에서 소요사태를 부추겼고 리비아와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관이 불에 타게 했다. 그것은 호메이니가 불러일으킨 일상적인 반사 행위였다. 그는 무슬림은 절대로 사원을 공격하지 않으니 늘 그렇듯 배후에는 숨은 손이 있고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공모했으리라는 말이야말로 수백만의 귀 얇은 대중들이 믿기에 딱 좋은 소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이 장기간에 걸쳐 끼친 영향은 이 사태로 겁을 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사회 영역을 현대화하려는 그 어떤 시도조차 지레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할리드 국왕은 다수의 반정부 세력이 국가보안대에 부대원 대부분을 공급하는 부족들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더욱더 종교에 기대는 것이었다. 이슬람교 말이다. - P135

신문에서 여성들의 사진이 사라졌고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여성 진행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추가 지원금을 받았고, 극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교육 과정에서 종교 교육 시간이 더욱 늘었다. 이후 종교 경찰의 야외 실전 훈련도 40년이나 지속되었다. 학교와 대학은 보다 더 많은 이슬람 성직자를 채용해서 와하비즘만이 진정한 이슬람이라고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니 훗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무신론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수만 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이 그리로 달려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귀국하고 나서도 국제적인 지하드 운동을 명분으로 군사 기술을 쓰고 싶어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들 가운데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다. - P134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사담 후세인의 다음 공격 목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일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자 왕국 바깥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오사마 빈 라덴이조국을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은 자기 휘하의 무자해딘(아프가니스탄의 무장게릴라 조직)을 투입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미국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스러운 2대 사원의 수호자>인 국왕이 수십만 명이나 되는 <불경스러운 병사들>(즉 미군 병사들)을 사우디 왕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가운데 일부는 여자들이 아닌가! 국왕이 이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교계 지도자들의 파트와가 필요했다. 그는 하나를 얻어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이 계산한 것 이상을 얻었다.
미국인들은 왔고, 보았고, 이겼다. 사우디아라비아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쿠웨이트에서 밀어낼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눌러앉았다. 빈 라덴을 추종하는 자들이 보기에 이건 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써가며 최첨단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어째서 신앙심 없는 미국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냐고 많은 이들이 묻고 있었다. 반면에 미군의 주둔은 개혁가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 P136

알카에다에 소속된 일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전사들은 국내에서도 투쟁을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들이 볼 때 사우드 왕가는 빈 라덴의 지원을 거절하더니 이제는 그들의 적을 돕고 있는 꼴이었다. 이제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에겐 왕국 내에 있는 미군을 쫓아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자체와 싸우고 있었다. 사우드 가문은 오랫동안 와하비즘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었지만 9·11 테러를 계기로 그 내부 장기들이 자신들을 잡아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슈끄지는 왕실과 갈등을 빚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2017년부터 미국에 머물면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2018년에는 왕세자의 행동방식을 비판하면서 정권과 사이가 더 틀어졌다. 그해 10월 2일 카슈끄지는 터키 국적 약혼녀와의 혼인신고를 위한 서류 준비차 터키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는데 나오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P138

여기서 알카에다의 전략이 확연히 드러났다. 혼란을 조장하고 보상을 얻어내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에 따르면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20퍼센트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더 많은 수가 짐을 쌌고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 편을 잠정 중단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나라의 첨단산업, 특히 가장 중요한 에너지 부문이 서서히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국민들의 생활 보조금을 보장해줄 수익이 없다면 정부에대한 그들의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이 상황이 국가를 붕괴시키고 알카에다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의 탄압을 넘어서는 강한 탄압이 재개됐고 다시 정보 기관이 상황을 장악했다. - P140

외교가에서는 MBS 왕세자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건에 대한 반응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아닐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오던 카슈 - P146

 왕실 고위 인사 일부가 리야드의 리츠칼튼호텔에 묵기로 예약된 일이 있었다. 리츠칼튼이라면 엄청나게 화려한(절제된 표현으로 호화로원) 호텔이다. 하룻밤에 8천 파운드 정도 쓸 여력이 있다면 기막히게훌륭한 로열스위트 객실을 추천하고 싶다. 불행하게도, 당시 왕실 인사들 중 일부는 그 호텔에 투숙하는 것이 일종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텔 예약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보 기관이 했으며 많은 손님들은 자신들의 객실로 안내될 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일종의 숙청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열한 명의 왕자들과 경찰, 군대, 경제계의 고위 엘리트 수십 명이 호텔에 감금됐다. 그 가운데는 정규군에 버금가는 병력을 가진 국가방위부의 수장이자 왕세자의 사촌인 미텝 빈 압둘라 왕자도 있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MBS 왕세자는 1만 5천 명에 달하는 가문 일가의 충성심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왕세자를 실질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많은 엘리트들은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호텔에 감금되면서 체포된 이들은 모조리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권력을 쥔 자가 찾아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찾지못하는 게 더 어려운 죄목이다. - P149

물을 마시기 위해 자신들의 석유를 태워야 할지도 모른다. 정부가운영하는 세계 최대 담수화(바닷물의 염분 제거) 시설에서는 국내에서 필요한 물의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거대한 이 시설을 돌리려면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석유에서 나온다. 강이 없는 이 나라는 담수화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비용도 많이 들고 많은 오염이 발생된다 해도 말이다.
ㅊ이 사업 초기에 담수화 해법을 구하느라 정부는 아람코 소속 전문가들을 찾아갔다. 이 거대 석유 기업은 전문 기술을 동원해 북부와 동부 사막지대 지하에서 대규모 담수 저장지로 쓸 만한 곳을 찾아냈다.
이전 세기에는 북아메리카의 5대호 가운데 4번째로 큰 호수인 이리호도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물을 저장했는데 집중적인 경작 활동으로 물 공급이 꾸준히 감소한 데다 부족한 강우량 때문에 다시 채우는게 어려워졌다. 관개된 토지는 최적의 가격으로 국내 및 해외 시장에 내다팔 작물과 가축을 기르는 데 이용된다. 이는 정부가 물값에 보조금을 대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 농부들은 모든액체 중 가장 비싼 이 액체를 소중히 다루는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물은 싼 자원이지만 나라에게는 비싼 자원이다. 전문가들은 이미 물의 5분의 4를 사용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2030년대에는 완전히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석유가ㅍ보조금을 대고 있지만 보조금을 지불할 물 자체가 고갈된다면 값싼 곡물은 물론 해외 시장도 있을 수 없다. 대신 많은 국민들은 치솟는 식량 가격에 툴툴댈 것이다. 정부는 밀과 같은 물 집약적인 작물 재배를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더불어 국부 펀드를 투입해서 다른 나라에 땅을사서 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모색하고 있다. - P155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 않다. MBS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타협하는 제안을 거절한 팔레스타인에 대해 맨 먼저 인내심을 잃은 아랍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긴 해도 다른 이들을 앞세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아랍에미리트의 실질적 지도자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왕세자와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아랍에미리트는 바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2020년에이스라엘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원래 살만 국왕은 이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왕세자가 대다수 자국 청년들은 기성 세대만큼 그문제에 민감하지 않다고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걸프 국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체 방어 능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그들과 거래할 용의도 있다. 이란의 위협을 늘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미사일방어시스템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다. 또 사막에 꽃을 피우는 기술도 자신들 국가의농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화해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 P158

영국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는 계속해서 이 나라의 문화와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영국은 바다 덕분에 유럽 본토의 과도한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이는 왜 이 섬나라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유럽이라는 공동의 집에대한 소속감이 덜한지 얼마간 설명해 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대학살도 유럽 본토만큼 영국을 크게 뒤흔들지는 못했다. 계량화하는 게 쉽진 않지만 이러한 <분리의 정서>가 브렉시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 P167

그해, 훗날 정복자 윌리엄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노르망디의 대공 윌리엄이 영국해협을 건너와서 남쪽 해안에 상륙했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물리친 뒤 런던으로 진군하여 스스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런던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수도가 되지못했는데 윌리엄 치하에서 급속히 성장했다. 그는 런던탑을 건설했고노르만과 잉글랜드 사이의 중개 도시로서 런던의 위치를 정립했다.
로마인들이 떠난 뒤 영국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침공을 들 수 있다. 그로 인해 영국은 스칸디나비아(즉 바이킹)와 연을 끊고 서유럽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얻는다.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바야흐로 프랑스어가 일상 언어에 스며들었고, 곳곳에대성당과 성들이 세워지면서 신흥 지주들은 적대적인 주민들로부터자신들을 보호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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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두 가지 지리적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는 국경지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딱딱한 빵의 가장자리 같은 형태의 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하듯 달리는 저지대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의 평평한 소금사막이다. 산맥은 이란을 일종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어느각도로든 이 나라로 접근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떡하니 가로막는 고지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곧 이 나라의 많은 곳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악지대가 카비르 사막과 루트 사막(루트Lut는 페르시아어로 물이 없고 식물이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을 가리킨다)이라는 내륙의 황무지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 P66

이란에게 이곳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대양으로 쉽게 진출하기가 어렵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 나라는 해양의 패권을 쥐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호르무즈 해협의 좁은 폭은 이란이 다른 모든 국가에게 그곳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원유 공급량의 5분의 1이 이곳을 통과한다고 할 때 이 해협의 봉쇄는 전 세계를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란 자신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란이 내놓을 수 있는 패이고, 이 나라 정권은 그것을 비장의 카드로 써볼 만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 P75

"우리는 호르무즈 해협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적들이 깨닫도록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어디까지 튈지 알 수 없는 도박의 성격을 띤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은 심각한 분쟁이 발발한지 몇 시간 안에 이란의 공격력을 최대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 걸프 국가들(페르시아만 연안 8개국)은 원유와 가스라인을 홍해로 향하게끔 설치해서 그곳에서 유조선들이 인도양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란이 예멘에있는 후티 (Houthis, 예멘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 동맹에게 제공한 미사일 공격의 목표가 되는 것만큼은 피하자는 것이다. - P76

그러나 세계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다. 반식민주의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큰 폭풍우가 되어 오늘날 앵글로-이란 오일컴퍼니라고 부르는 곳을 덮쳤다. 이 회사를 국유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1951년, 열렬한 국유화 지지자인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총리 자리에 오른다. 이란산 원유에서 나온 돈은 이란으로만 들어오게 하겠다는 공약의 결과로 법안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에 대한 서방의 반발이 곧장 터져나왔다. 영국 은행의 이란 자산은 동결되었고, 이란으로 향하던 물품들은 보류되었고, 아바단 정유소의 해외 기술자들은 철수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이란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953년 런던과 워싱턴은 M16과 CIA를 보내 군사 쿠데타를 사주했다. 모사데그가 법에 따라 통치하기 위해 사실상 국왕으로부터 권한을 이양받으려는 의도로 의회를 해산하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였다. 흔히 이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영국미국의 역할이 컸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란의 여러 파벌들을 도와 민주적으로 선출된 그 나라의 정부를 전복하게 했다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미국 영국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이란 국정의 혼란을 틈타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 P84

 이슬람이야말로 무슬림 세계에대한 해답이라는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쿠틉의 영향력은 군주제,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세속적 독재체제 등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패한 아랍 국가들에서 훨씬 강하다. 하지만 호메이니가 "이슬람은 정치적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천명했다것은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 1928년 이집트에서 창설된 단체로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운동 단체)의 쿠틉 추종자들이10년 이상을 전파해온 바로 그 말이었다. 쿠틉은 십자군과 시온주의자(유대인 민족주의자)를 물리치기 위해 폭력적인 지하드(zihad,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된 종교적 의무)를 신봉했다. 이란의 시아파 문화에서 순교 정신과 융합된 이 신념은 혁명기와 그 이후에 신앙심 깊은 대중을 사로잡은 광신주의의 핵심이 되었다. - P88

호메이니가 강조한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이슬람 성직자에 의한통치)라는 개념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시아파 신앙 안에 담겨 있는 이 개념은 가장 학식이 풍부한 이슬람 성직자가 정치와 종교를 통치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배경에서 호메이니는 헌법에 명시된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 이후 그의 뒤를 잇는 지도자들은 이슬람 고위성직자들의 단체인 국가지도자운영회의가 선임했다. 어떤 면에서는고위 지도자를 선임하는 이 같은 방식이 로마 가톨릭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핵심은 교황에게는 군 통수권자가 되거나 전쟁을 선포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호메이니가 권력을 잡은지 1년 뒤에 수행한 바로 그 권한 말이다. - P88

미국은 이란을 침공했던 이라크 수니파 정권(사담 후세인 정권)을 갈아치웠다. 이제 다시 한번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이란 전면에서 완충지가 되면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저지하고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소수파인 수니파권을 무너뜨렸으니 이라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지도자들이 확실하게 나라를 통치하도록 시스템을 잘 관리하면 그 결과로 이라크내에서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하지만 이라크내 시아파는 매 단계마다 이란의 도움을 받았다. 이란은 미군의 침공이후 발발한 이라크 내전에서 여러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함으로써 이라크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탰다. 꽤 많은 미군과 영국군에게 피해를 입힌 노상 폭탄 공격은 이란에서 자주 발생하던 일인데 이라크 민병대는 그런 테헤란으로부터 자금과 무기, 훈련을 지원받았다. 이라크는 이란의 푸들 강아지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라크 지도력으로는 동쪽에 있는 이웃인 이란을 향해 호의적인 손짓을자주 할 수밖에 없다. - P95

이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대학교수인 마다위 알 라시드는 해외에서쓴 글에서 다른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가 보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탄생은 "하나의 실체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단일한 역사적 기억이나 민족적 유산이 없는 사람들에게 강요한 국가의 출현을 상징하는것이었다.
이 논의가 중요한 것은 사우드 왕가의 지배력은 그 정통성에 대한인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십 년 이래 풍부한 에너지자원으로 얻은 막대한 부 덕분에 국민들 삶이 개선되면서 이 정통성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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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게 H마트는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엄마의 몸과 하이드로코돈" 복용량을 기록하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대신 두 분이 그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 고리 모양의 달콤한 짱구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고 흔들어대던 모습, 한국 포도를 먹을 때 껍질에서 알맹이만 쪽 빨아먹고 씨를 훅 뱉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던 모습을. - P23

봤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과육을 자르고 남은 관심을 알뜰히 베어먹었고, 엄마는 온전한 조각만 집어먹었다. 집에서 엄마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시에는 엄마가 미국에서 지낸 모든 시간을 벌충하려 애쓰는 중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여인이 내 엄마의 엄마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때인데, 두 분의 관계가 평생토록 우리 애착 관계의 모델이 되리라는 걸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으랴. - P52

"엄마가 모자 한번 써보라 해도 너는 싫어하잖아."
우리 엄마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언제나 열 발짝 앞을 내다보는 사람 엄마는 단숨에 그려볼 수 있었다. 평생 다이어트의 압박에 시달리는 외로운 삶을 이 사람 저사람 달라붙어 내머리카락과 얼굴을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매만지고, 무슨옷을 입을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무얼 먹어야 할지 일일이 다 정해주는 삶을 엄마는 명함을 받고 그냥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임을 알았다.
한국 아이돌로 살 수도 있겠다는 나의 희망은 그렇게 단박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잠깐이나마 나는 어쩌면 연예인이 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쁜 아이였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한낱 그 중식당의 애완용 악어 신세가 됐을지도 모른다. 화려한 수조에 갇혀 사람들의 심심풀이 구경거리 노릇을 하다가, 나이들어 몸이 더는 수조에 맞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바로 치워지는 신세가. - P62

 그러고선 끈적끈적한 블러드오렌지 마르가리타와 꾸덕꾸덕한 레프리토스" 얼룩이 묻은 청바지 차림 그대로, 소파에 누운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와, 내가 자신의 회색 대학 티셔츠에 얼굴을 파묻고 온종일 꽉꽉 억누른 감정을 기어이 쏟아낼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피터가 굳이 오지 말라고한 내 말을 듣지 않아줘서 정말 고마웠다. 피터는 한참 지나서야 내게 말해주었다. 우리 부모님이 자신에게 먼저 전화했노라고, 엄마가 아프다는 걸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았노라고, 내가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순간에 반드시 내옆에 있겠다고 두분에게 약속했노라고.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 지나갈 때까지 자기가 내 옆에 있겠노라고.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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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은 고국에서 먹던 갖가지 인스턴트라면을 사러, 한인 가족들은 설날에 해 먹을 떡국 떡을 사러 이곳에 온다. 큼직한 통에 담긴 깐마늘도 여기서만 살 수 있다. 한국 음식을 해 먹는 데 마늘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이곳뿐이라는말이다. H마트는 일반 슈퍼마켓 매대 중 달랑 한 칸을 차지하는 ‘세계 전통 식품‘ 코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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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매는 매부리 (사냥에 쓰는 매를 기르고 부리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사물이 무너지고 중심이 지탱할 수 없다."
- W. B. 에이츠, 「재림」 중에서

중동 지역에서는 광활한 요새인 이란과 그 숙적인 사우디아라비아가 페르시아만을 마주한 채 맞서고 있다. 태평양 남쪽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우리 시대 최강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자리매김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중해에서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스와 터키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이 당장 내일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보인다.
서기 2020년대에 오신 걸 환영한다. 미국과 소련이 전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시대는 이제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등장하는 열강들이 서로 대립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수많은 주연 배우들은 물론 단역 배우들까지도 서로 밀치며 중앙 무대로 들어서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 P8

카르발라라는 도시에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과 영국 주도의 연합군에 의해 축출되었지만 이라크 내에서의 반정부 투쟁은 여전히진행 중이었다. 수니파 무슬림인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는 자학의식을 포함한 상당수의 시아파 의식과 예배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모든걸 태워버릴 듯 맹렬하게 땡볕이 내리쬐던 그날, 나는 전국 각지에서 백만 명이 넘는 시아파 주민들이 카르발라로 밀려들어 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많은 남자들이 시아파 의식의 하나로 온몸이 피투성이가될 때까지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고 이마를 칼로 베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그들의 피가 모랫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이에 동쪽 국경에 면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라크에 시아파가 지배하는 정부가 들어서도록 힘을 보태고, 또한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동맹 세력과 연계해서 중동의 서쪽까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최대한 이용할 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리와 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불가피한일이기도 했다.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은 얼핏 종교 의식처럼 보이지만 정치적이기도 하다. 열정에서 비롯된 이 파도는 지중해 지역에까지 그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는 거였다. 정치적 균형추는 움직였고 커져가는 이란의 힘은 그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도 위협할 수있을 터였다. 카르발라는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 P11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1910년부터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가운데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백인 가정이나 국가시설에 맡겨졌다. 두 경우 모두 강제적인 흡수와 동화가 그 목적이었다. - P33

그즈음 오스트레일리아 인구는 3백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도시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시드니와 멜버른의 인구도 저마다50만 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전히 대다수 이민자는 영국에서 왔는데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해도 거의 백인들이라고 보면 됐다. 새 정부가 초기에 통과시켰던 법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위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1901년부터 1978년까지 지속되었던 백인 이외 여러 유색 인종의 이민을 배척하던 백인 우선주의 정책으로 알려진 이민 제한법이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문구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느 모로 보나 인종차별적인 의도가 명백한 조항이 있었다. 이를테면 관계자 입회하에 "관리자가 지정한 유럽 언어로 50단어를 넣어 문장을 말하고그가 말한 내용을 받아쓰지 못한 사람은 이민이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 P3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10파운드 이민Ten Pound Poms 정책을 통해 많은 영국인들이 이 나라로 몰려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노동력이 부족했던 터라 당시 돈으로 10파운드만 내면 영국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행 배에 올라탈 수있었다. 정상 요금은 120파운드, 즉 보통 노동자들의 6개월치 급여와 맞먹었다. 전후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영국으로서는 이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1947년부터 1982년 사이에 150만 명이 넘는 영국인들이 기회와 태양빛을 찾아 새로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  - P39

이보다 앞선 2020년 초반에보다 심각한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파푸아 뉴기니의 다루섬에 대규모 어업단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한 후 그 지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불과 2백 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데, 그 주변 바다는 수산업의 잠재적 가치로 명성이높다기보다 오히려 중국의 저인망 어선들이 자주 정찰선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어업단지 건설이 단순한 비즈니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중국 군함들이 머물 만한 항만이 건설될 수도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이 지역에서 중국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자 공동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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