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사우드와 루즈벨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에게 보장해 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경 안에 머물 것이며 미국은 그런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했다. 이븐 사우드에게는 꽤 많은 적들이 있었는데 특히 그 중에는 현재 이라크와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는 하심 가문이 있었다. 그가 이들을 메카와 메디나에서 쫓아낸 것은 불과 20년 전의 일이다. 만약 그들의 세력이 강했고 적절한 제안만 있었다면 그들은 헤자즈를 탈환해 보려 했을 것이고 그러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븐 사우드도 종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 최강국을 새로운 친구로 삼는 것이 적들과 강화를 맺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된다. 특히 하심 가문의 뒤를 밀고 있는 영국 정부로서도 이제는 그들이 영토를 점유하는 것을 섣불리 지지하지 못할 터였다. - P130
79년 그랜드모스크 점거사건의 여파는 컸다. 이란의 혁명 지도자인 호메이니는 탈환 작전의 배후로 미 제국주의와 국제 시오니즘을 지목하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의 비난은 아랍의 여러 나라에서 소요사태를 부추겼고 리비아와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관이 불에 타게 했다. 그것은 호메이니가 불러일으킨 일상적인 반사 행위였다. 그는 무슬림은 절대로 사원을 공격하지 않으니 늘 그렇듯 배후에는 숨은 손이 있고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공모했으리라는 말이야말로 수백만의 귀 얇은 대중들이 믿기에 딱 좋은 소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이 장기간에 걸쳐 끼친 영향은 이 사태로 겁을 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사회 영역을 현대화하려는 그 어떤 시도조차 지레 포기하게 만든 것이다. 할리드 국왕은 다수의 반정부 세력이 국가보안대에 부대원 대부분을 공급하는 부족들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더욱더 종교에 기대는 것이었다. 이슬람교 말이다. - P135
신문에서 여성들의 사진이 사라졌고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여성 진행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추가 지원금을 받았고, 극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공교육 과정에서 종교 교육 시간이 더욱 늘었다. 이후 종교 경찰의 야외 실전 훈련도 40년이나 지속되었다. 학교와 대학은 보다 더 많은 이슬람 성직자를 채용해서 와하비즘만이 진정한 이슬람이라고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니 훗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무신론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수만 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이 그리로 달려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귀국하고 나서도 국제적인 지하드 운동을 명분으로 군사 기술을 쓰고 싶어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들 가운데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다. - P134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사담 후세인의 다음 공격 목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일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자 왕국 바깥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오사마 빈 라덴이조국을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은 자기 휘하의 무자해딘(아프가니스탄의 무장게릴라 조직)을 투입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미국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스러운 2대 사원의 수호자>인 국왕이 수십만 명이나 되는 <불경스러운 병사들>(즉 미군 병사들)을 사우디 왕으로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가운데 일부는 여자들이 아닌가! 국왕이 이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 교계 지도자들의 파트와가 필요했다. 그는 하나를 얻어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왕이 계산한 것 이상을 얻었다. 미국인들은 왔고, 보았고, 이겼다. 사우디아라비아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쿠웨이트에서 밀어낼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눌러앉았다. 빈 라덴을 추종하는 자들이 보기에 이건 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써가며 최첨단 방어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어째서 신앙심 없는 미국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냐고 많은 이들이 묻고 있었다. 반면에 미군의 주둔은 개혁가들을 대담하게 만들었다. - P136
알카에다에 소속된 일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전사들은 국내에서도 투쟁을 이어가고 싶어 했다. 그들이 볼 때 사우드 왕가는 빈 라덴의 지원을 거절하더니 이제는 그들의 적을 돕고 있는 꼴이었다. 이제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에겐 왕국 내에 있는 미군을 쫓아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자체와 싸우고 있었다. 사우드 가문은 오랫동안 와하비즘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있었지만 9·11 테러를 계기로 그 내부 장기들이 자신들을 잡아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슈끄지는 왕실과 갈등을 빚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2017년부터 미국에 머물면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2018년에는 왕세자의 행동방식을 비판하면서 정권과 사이가 더 틀어졌다. 그해 10월 2일 카슈끄지는 터키 국적 약혼녀와의 혼인신고를 위한 서류 준비차 터키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는데 나오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P138
여기서 알카에다의 전략이 확연히 드러났다. 혼란을 조장하고 보상을 얻어내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에 따르면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20퍼센트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더 많은 수가 짐을 쌌고 브리티시 에어웨이는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 편을 잠정 중단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나라의 첨단산업, 특히 가장 중요한 에너지 부문이 서서히 멈춰버릴지도 모른다. 국민들의 생활 보조금을 보장해줄 수익이 없다면 정부에대한 그들의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이 상황이 국가를 붕괴시키고 알카에다가 정권을 장악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의 탄압을 넘어서는 강한 탄압이 재개됐고 다시 정보 기관이 상황을 장악했다. - P140
외교가에서는 MBS 왕세자에 대한 엄청난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건에 대한 반응에 비하면 이는 아무것도아닐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오던 카슈 - P146
왕실 고위 인사 일부가 리야드의 리츠칼튼호텔에 묵기로 예약된 일이 있었다. 리츠칼튼이라면 엄청나게 화려한(절제된 표현으로 호화로원) 호텔이다. 하룻밤에 8천 파운드 정도 쓸 여력이 있다면 기막히게훌륭한 로열스위트 객실을 추천하고 싶다. 불행하게도, 당시 왕실 인사들 중 일부는 그 호텔에 투숙하는 것이 일종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텔 예약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보 기관이 했으며 많은 손님들은 자신들의 객실로 안내될 때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일종의 숙청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열한 명의 왕자들과 경찰, 군대, 경제계의 고위 엘리트 수십 명이 호텔에 감금됐다. 그 가운데는 정규군에 버금가는 병력을 가진 국가방위부의 수장이자 왕세자의 사촌인 미텝 빈 압둘라 왕자도 있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MBS 왕세자는 1만 5천 명에 달하는 가문 일가의 충성심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왕세자를 실질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많은 엘리트들은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호텔에 감금되면서 체포된 이들은 모조리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권력을 쥔 자가 찾아내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찾지못하는 게 더 어려운 죄목이다. - P149
물을 마시기 위해 자신들의 석유를 태워야 할지도 모른다. 정부가운영하는 세계 최대 담수화(바닷물의 염분 제거) 시설에서는 국내에서 필요한 물의 대부분을 성공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문제가 있다. 거대한 이 시설을 돌리려면 엄청난 양의 전력이 필요한데 이것은 석유에서 나온다. 강이 없는 이 나라는 담수화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비용도 많이 들고 많은 오염이 발생된다 해도 말이다. ㅊ이 사업 초기에 담수화 해법을 구하느라 정부는 아람코 소속 전문가들을 찾아갔다. 이 거대 석유 기업은 전문 기술을 동원해 북부와 동부 사막지대 지하에서 대규모 담수 저장지로 쓸 만한 곳을 찾아냈다. 이전 세기에는 북아메리카의 5대호 가운데 4번째로 큰 호수인 이리호도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물을 저장했는데 집중적인 경작 활동으로 물 공급이 꾸준히 감소한 데다 부족한 강우량 때문에 다시 채우는게 어려워졌다. 관개된 토지는 최적의 가격으로 국내 및 해외 시장에 내다팔 작물과 가축을 기르는 데 이용된다. 이는 정부가 물값에 보조금을 대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이 나라 농부들은 모든액체 중 가장 비싼 이 액체를 소중히 다루는 것 같지 않다. 그들에게물은 싼 자원이지만 나라에게는 비싼 자원이다. 전문가들은 이미 물의 5분의 4를 사용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2030년대에는 완전히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석유가ㅍ보조금을 대고 있지만 보조금을 지불할 물 자체가 고갈된다면 값싼 곡물은 물론 해외 시장도 있을 수 없다. 대신 많은 국민들은 치솟는 식량 가격에 툴툴댈 것이다. 정부는 밀과 같은 물 집약적인 작물 재배를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더불어 국부 펀드를 투입해서 다른 나라에 땅을사서 작물을 재배하는 것도 모색하고 있다. - P155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 않다. MBS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타협하는 제안을 거절한 팔레스타인에 대해 맨 먼저 인내심을 잃은 아랍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긴 해도 다른 이들을 앞세우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아랍에미리트의 실질적 지도자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왕세자와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아랍에미리트는 바레인이 그랬던 것처럼 2020년에이스라엘과의 국교를 정상화했다. 원래 살만 국왕은 이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왕세자가 대다수 자국 청년들은 기성 세대만큼 그문제에 민감하지 않다고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은 걸프 국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체 방어 능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그들과 거래할 용의도 있다. 이란의 위협을 늘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미사일방어시스템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다. 또 사막에 꽃을 피우는 기술도 자신들 국가의농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화해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 P158
영국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는 계속해서 이 나라의 문화와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영국은 바다 덕분에 유럽 본토의 과도한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이는 왜 이 섬나라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유럽이라는 공동의 집에대한 소속감이 덜한지 얼마간 설명해 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대학살도 유럽 본토만큼 영국을 크게 뒤흔들지는 못했다. 계량화하는 게 쉽진 않지만 이러한 <분리의 정서>가 브렉시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 P167
그해, 훗날 정복자 윌리엄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노르망디의 대공 윌리엄이 영국해협을 건너와서 남쪽 해안에 상륙했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물리친 뒤 런던으로 진군하여 스스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런던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수도가 되지못했는데 윌리엄 치하에서 급속히 성장했다. 그는 런던탑을 건설했고노르만과 잉글랜드 사이의 중개 도시로서 런던의 위치를 정립했다. 로마인들이 떠난 뒤 영국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을 꼽으라면 바로 이 침공을 들 수 있다. 그로 인해 영국은 스칸디나비아(즉 바이킹)와 연을 끊고 서유럽으로 눈을 돌리는 계기를 얻는다.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바야흐로 프랑스어가 일상 언어에 스며들었고, 곳곳에대성당과 성들이 세워지면서 신흥 지주들은 적대적인 주민들로부터자신들을 보호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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