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유유가 발견한 아르테미시닌은 클로르퀸에 내성이 생긴 열대형말라리아를 치료하는 데 매우 유용했다. 아르테미시닌 덕분에 지난십여 년 동안 말라리아 사망률이 절반으로 줄었고,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생명을 구했다. 하지만 투유유 교수의 노벨상 수상을 두고 중국 전통 한의사들은 매우 착잡해했다.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에 따르면 "중국 한의사들은 토종 식물에서 단일 성분을 분리해 사용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으며 모든 약초는 함께 복용해야 한다"고 믿어왔는데, 투유유의 발견으로 자신들의 신념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 P195

1163년 마침내 교회는 치료법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수도승이나 성직자에게 방혈 시술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그 결과 이제까지 해왔던 머리 손질과 면도 같은 일에 더해 이발사가 방혈 시술, 발치, 심지어는 절단 수술까지 하게 되었다. 이발사들은 의료 교육을 받지 않았을뿐더러 대부분 문맹이라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으로 방혈 시술을 했다.
이발소 앞에서 돌아가는 흰색과 적색 줄무늬 봉은 중세 시대에 시술을 하고 난 뒤 가게 밖에 걸어놓은 피 묻은 수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세 영국에서 각각 다른 길드에 속했던 외과 의사와 이발사는 16세기 중반에 이발사-외과의barber-surgeon 라는 하나의 직종으로 합쳐졌다. 하지만 이후 전혀 다른 전문 직종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 잡으면서 1745년에 두 직종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 P217

르네상스 시대에 인체에 관한 과학적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방혈요법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1628년 영국 내과 의사인 윌리엄 하비 williamHarvey는 과거의 이론을 뒤집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1400년 전 갈레노스는 심장을 단순히 동맥과 정맥이 지나는 통로로만 생각했을뿐, 펌프 작용으로 온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의 중요한 기능을 알지못했다. 하비는 심장이 박동함으로써 혈액을 동맥으로 내보내며 이렇게 내보내진 혈액이 정맥을 통해 심장으로 되돌아온다는 혈액순환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 P218

과학자들은 노화의 생물학적 비밀을 풀어 평균수명을 120세까지 늘리기 위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미래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 인간수명에 큰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국내에서도 노령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인구의 감소, 사회복지와의료비 부담 등 많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미래평균수명의 연장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태어나서 생애 마지막 날까지 항상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건강수명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수명이란 평균수명에서 질병을 앓거나 부상을 당한 기간을 뺀 기간으로, ‘삶의질‘을 판단하는 지표가 된다. 현대 과학은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 P248

하지만 인공지능이 의사와 약사를 온전히 대체할 수 있을까? 사람이 가진 소통과 공감능력은 인공지능이 따라잡지 못하는 영역일지도모른다. 사람들은 진료하면서 눈 한 번 더 맞추며 믿음을 주고, 경과를 세심히 물어보고, 자기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하는 의사를 원한다.
지난번에 처방받은 약을 먹고 몸 상태가 어땠는지, 부작용은 없었는지, 약 먹을 때 주의 사항을 친절히 알려주는 약사를 원한다. 우리에게는 사람들과 소통하며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 따뜻한 전문가가 필요하다. 미래에는 가슴 차가운 전문가가 발 디딜 곳은 더더욱 없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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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집에 20년 넘게 살면서 집 구조를 많이 바꿨어.
수리도 여러 번 하고, 옥상 올라가는 계단도 부엌이 아니라 거실에 있었지. 내 말은, 얼핏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비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는 거야. 아궁이를 없애고 기름보일러를 들여놓고, 쥐도 안 나오고, 우리나라가 워낙 빨리 발전하잖니. 그러니까..."
엄마는 거기서 말을 흐렸고, 나도 뭐라고 더 말을 하지 않았어. - P100

한참을 웃고 나서 문득 ‘옛날에도 우리집에 이렇게 개미가 많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분명히 한때 우리 집에서는 쥐가 나왔어. 그런데 쥐가 나오지 않게 됐다고 해서 집의 위생상태가 나아진 건 아니야. 쥐가 사라지자 바퀴벌레가 들끓었고, 바퀴벌레 다음에는 개미가 나오고, 그랬던 거야. 뭐가 바뀌긴 했는데 나아진 건 아니었어. - P102

"예나야, 너 비행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빌딩꼭대기에서 낙하산 메고 떨어지는 거랑, 어느 게 더 위험한지알아?"
"어느 게 더 위험한데?"
내 동생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뜨악한 표정이었지.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해. 높은 데서떨어지는 사람은 바닥에 닿기 전에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잡을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그럴 여유가 없어. 아차, 하는 사이에 이미 몸이 땅에 부딪쳐 박살나 있는 거야. 높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 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 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해. 낮은 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 P124

"만약 남극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파블로를 잡아다 헬리콥터에 태워서 하와이에 내려다 줬다면..……… 파블로는 그래도 행복했을까?"
내가 물었어.
"어쨌든 하와이에 갔잖아."
지명이 고집했지.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 P160

공항을 나오니까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바람이불어. 햇빛이 짱짱해서 난 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선글라스를 끼면서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 나 자신에게.
"해브어 나이스데이."
그리고 속으로 결심의 말을 덧붙였어.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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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이랑은 내가 호주로 떠나는 날, 인천공항에서 공식적으로 헤어졌지. 그날 지명이가 자기 아버지 차를 몰고 와서 나를 공항까지 바래다줬어. 지지리 가난한 우리 집은 다섯 식구가 사는데도 자동차 한 대가 없었어. 지명이가 없었다면 흐물흐물한 이민 가방과 트렁크를 공항까지 들고 오는 것도 큰일이었을 거야. - P9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봐야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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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제너는 자신의 아들을 포함한 23명에게 우두접종법을 실험했고, 마침내 1798년 우두 접종법이 천연두를 예방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논문에서 제너는 처음으로 우두접종법을 ‘백신 vaccination‘으로 명명했다.
19세기 말까지 천연두 예방을 위해 우두접종법과 인두 접종법이 모두 사용되었다. 특히 의사들은 인두 접종을 위해 진료 가방에 천연두에 걸렸던 사람의 피부 딱지를 가지고 다녔다. 천연두에 걸린 가족을 구하기 위해 편지 봉투에 피부 딱지를 넣어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부 딱지가 아버지에게 빨리 도착하기를. 어제 아기의 팔에서 떼어낸 신선한 천연두 피부 딱지라서 또다시 잃어버리면 안 돼요. 이 정도면 열댓명은 충분히 접종시킬 수 있어요." 1876년 대도시에 거주하던 아들이 시골 마을에 사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제너는 우두 접종의 효과를 논문으로 입증했으며, 백신을 무상 공급하고 우두 접종법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우두 접종법을 반대하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백신을 개선하여 더 많은 사람이 접종받을수 있도록 노력했다. 1840년 영국 정부는 백신법을 제정해 위험 부담이더 높은 인두 접종을 금지하고 백신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의무적으로 백신을 사용하도록 법을 개정했고, 이로써 근대적 의미의 예방접종이 탄생했다. 제너의 업적은 100년 뒤 루이 파스퇴르가 광견병과 탄저병을 예방하는 진보된 개념의 백신을 개발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 P146

역사 이래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천연두 바이러스의 마지막 운명은 어떻게 될까. 1980년 천연두 바이러스가 사라진 뒤, 세계보건기구는 1993년을 끝으로 세계 모든 연구소에 남아 있던 천연두 바이러스 물질을 폐기하고 미국 질병예방센터 cdc와 러시아 벡터 VECTOR 연구소, 두 곳에만 보관하도록 했다. 그러나 천연두 바이러스가 이 두 장소에만 존재할 것이라고믿는 과학자들은 거의 없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저온에서도 생존할수 있기 때문에 어느 실험실 냉동고에 숨어서 잠자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개발도상국들은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천연두 바이러스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앨 것을 주장해왔다. 천연두 바이러스를보유한 두 나라 가운데 러시아는 천연두 바이러스를 대량으로 만들수 있는 시설을 갖췄고 탄도미사일에 바이러스를 실은 생물학 무기로 적을 공격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미국은 바이러스 연구를 위해서라도 천연두 바이러스를 완전히 없애면 안 된다며 세계보건기구를 압박하고 있다.  - P150

비엔나 병원 산부인과 의사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Ignaz Semmelweis는13년 동안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의 사망률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의사들이 관리한 제1병동의 사망률은 16%였는데, 조산원들이 담당했던 제2병동의 사망률은 2%에 불과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무릎을 꿇고빌면서 의사들이 관리하는 제1병동으로 보내지 말아달라는 산모가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출산한 여성은 산욕열 발생률 자체가 매우 낮았다.
제멜바이스는 왜 사망률에 차이가 나는지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제1병동 의사들이 매일 아침, 전날 사망한 출산 여성의 시체를 부검하는 반면에 제2병동의 조산원들은 시체 부검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루는 동료 의사가 시체를 부검하던 중에 손에 상처를입고 패혈증으로 사망했는데 산욕열로 사망한 여성의 발병 원인, 경과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갑자기 산욕열에걸린 여성과 내 동료는 같은 이유로 사망했으리라는 생각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의사들이 시체를 해부하고 절개했던 손과 손가락으로 분만을 도우면 죽음의 독소가 출산한 여성의 생식기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제멜바이스는 의사들이 병동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염소 액체 소독약으로 손을 소독하도록 했다. 그러자 사망률이 2%로낮아졌다. - P153

1955년 요오드 소독제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요오드와 다른 화학성분을 결합시킨 포비돈 요오드가 개발되었다. 포비돈 요오드는 요오드가 천천히 분해되어 피부나 점막에 자극이 적으며 피부에 착색되지도 않는다. 머큐로크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포비돈 요오드를 ‘빨간약‘이라고 부르지만 포비돈 요오드의 실제 색깔은 갈색이다. 베타딘이라는 상표로도 잘 알려진 이 약은 박테리아, 곰팡이, 바이러스를 죽이는 살균 작용이 뛰어나다. 손 소독제에는 7.5~10%의 포비돈 요오드 용액이 들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농도가 낮아질수록 살균 효과가 높아진다.
지난 180여 년 동안 많은 병원과 가정에서 요오드 소독제를 사용해왔지만 요오드에 죽지 않고 내성을 갖는 세균은 발견된 적이 없다. 여기서 소독제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좋은지 그 기준을 엿볼 수 있다. 소독제는 다양한 병원성 세균 및 바이러스를 빠르게 죽이는 반면에, 사람에게 해가 없어야 하며, 물에 잘 녹아야 한다. 특히 몸에 직접 바르는 소독제는 자극적이지 않고 악취가 없으며 사용법이 간단할수록 좋다. - P158

2015년 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국내 항생제 소비 수준은 OECD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감기나 독감에 걸려 병원에 가면 흔히 항생제를 처방한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미국 질병관리본부 자료에따르면 항생제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미국에서도 3분의 2가 넘는 환자가 항생제를 불필요하게 처방받았다. 기침, 콧물, 목이 아픈 감기나 독감은 바이러스가 주요한 원인이기 때문에 합병증이 생기는 경우가아니면 항생제는 필요하지 않다.
항생제는 세균 감염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지 감기나 독감 바이러스를 낫게 하는 약이 아니다. 병원은 불필요한 항생제 처방을 줄이고, 정부는 항생제사용 현황을 정확히 파악해 항생제 사용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세워 내성균이 나타날 위험을 줄여야 한다. 또한 매년 독감 백신을 맞고 손을 자주 씻으며 마스크를 써 독감을 예방하는 것도 불필요한 항생제사용을 줄이는 방법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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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머니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요?
- 어느 영혼들처럼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자들을 찾아 떠돌고 있겠지. 어쩌면 나는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미움을 샀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제 그런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뭔지도 모르는 양심의 가책을 찾다가 지칠 대로 지쳤거든. 나는 끼니도 거른 채 괴로워했지. 내게 쏟아지던 욕설과 저주를 송두리째 감수했던 기억 때문에 밤새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어. 그러면 됐지, 이제 뭘 더………. 죽는날을 기다리며 주저앉아 있는데, 내 영혼이 간청하더구먼. 일어나라고, 질질 끌려 다닐망정 억척스럽게 살라고. 순간 나의 죄업을 씻어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것 같기도 했지. 하지만 이미 삶을 포기했던 나는 "모든 것은 여기서 끝난 거야. 나는 더 이상 이런 삶을 끌고 갈 힘이 없어."라고 말한 뒤에 입을 열어주었지. 나의 영혼이 떠나는 순간, 나는 느꼈어.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바닥에 떨어지는것을. - P93

그 여자가 죽고 난 후에 땅이란 땅은 죄다 황무지로 변했지.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둔 땅을 바라보는 것처럼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더구먼. 마을에 불길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지. 남자들은 목구멍에 풀칠할 만한 곳을 찾아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했어. 나는 꼬말라가 온통 "잘 있어요!"라는 작별의 인사말로 넘쳐나던 날들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사람들이 서로 헤어지는 모습이 꼭 무슨 잔치를 치르는 것 같았으니까. 남자들은 다시 돌아온다며 처자식은 물론이고 세간까지 맡기고 떠났지.
어쩌다 처자식을 데려가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다들 처자식은 고사하고 고향마저 잊어버린 것 같았고, 나처럼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뻬드로 빠라모가 죽는 날만 기다렸어. 그 양반이 죽게 되면 재산을 나눠준다는 약속 때문에 간혹 돌아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해가 바뀌고 또 바뀌어도 그 양반은 죽지 않고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었어. 마치 광활한 메디아 루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 P113

‘당신은 마치 뚜깐 같아.‘ 그 사람이 나에게 말했어.
‘또 한 마리의 뚜깐 말이야. 당신은 밤의 어둠 속에서, 침실의 모포 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잖아.‘
하지만 그 사람은 떠나버렸지.
나는 다시 돌아왔어. 늘 다시 돌아오던 그 바다로, 바다가 밀려나고 있어. 내 발목을 적시던 바다가 저만치 밀려나고 있어. 나의 무릎과 나의 허벅지를 적시던 바다가, 보드라운 두 팔로 나의 허리를 안고 가슴을 어루만지던 바다가. 어깨까지 차오르며 목을 휘감던 그 바다가 멀리 밀려나고 있어. 나는 그 사람의 품속에 안겨 있어. 영원히, 나는 격렬한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온몸을 내맡긴 채 격랑의 물결 위를 떠다니고 있어.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지. ‘바다로 나가고 싶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
나는 다음 날에도 바다에 있었어. 그 물결에 온몸을 내맡긴 채." - P134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들 종소리에 홀린 듯 도처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꼰뜰라, 아니 더 먼 곳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대열이 흡사 성지 순례 행렬 같았다. 그들중에는 곡마단이나 거리의 악사들도 끼어 있었다. 조문객이든 구경꾼이든, 하나 둘씩 모여든 사람들이 가까워지면서 무리를 지어 어울렸다. 그사이 장례식은 축제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축제로 이어지고 있었다.
종소리가 그쳤지만 축제는 계속되었다. 그들에게는 한여인의 죽음과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몰려든 사람들을 떠나도록 만들 방법 역시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별개 문제였다. 죽음은 이미 다른 일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 P161

‘이제 새로운 밤은 찾아오지 않아. 그는 유령들로 가득찬 밤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유령들과 함께 땅속으로 묻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곧 아분디오가 나를 찾아오겠지.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내가 거부했던 돈을 달라고 할 거야. 하지만 나는 그자를 피해 눈을 가릴 손이 없어. 그래서 그자가 하는말을 듣고만 있을 수밖에 날이 새면서 그자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자의 목소리마저 죽을 때까지.‘
그는 누군가의 손길이 자신의 어깨를 어루만지고, 몸을ㅜ일으켜 세우는 느낌을 받았다.
- 저예요.돈 뻬드로.
다미아나가 말했다. 점심을 이곳으로 가져올까요?
- 아냐, 내가 가지. 지금 가고 있어.
뻬드로 빠라모는 그녀의 팔에 기댄 채 몸을 움직이려고 기를 썼지만,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렸지만, 입 밖으로 토해 내지 못한 채 쓰러지고 있었다. 땅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돌무더기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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