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도 설명이 필요 없어졌다. 엔트로피와 진화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가난은 인류의 초깃값이다. 물질은 저절로 집이나 옷으로 배열되지않고, 생물은 우리의 식량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가진 재주를 다 부린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설명이 필요한 것은 부이다. 하지만 천재지변이나 질병에 가해자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오늘날에도 가난을 논할 때는 가난이 누구 탓인가 하는 주장들이 난무한다. 이 모든 말은 자연계에 악의가 없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진화는 이 세계에 악의가 차고 넘치게 만들어 놓았다. 자연 선택은 다음 세대에도 발현되고자 하는 유전자들의 경쟁이고, 오늘날 우리가보는 유기체들은 싹, 음식,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터에서 적수들을 몰아낸 승자의 후손들이다. - P52
언어 덕분에 생각은 개인의 머리 안에서 추상화되고 조합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고 그 공동체 안에서 축적될 수가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년)은 언어의 힘을 다음과같이 비유했다. "내 촛불로 자신의 양초에 불을 붙인 사람은 나를 침침하게 하지 않고서도 불빛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내게서 생각을 받은 사람은 내 생각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도 가르침을 얻는다." 최초의 공유애플리케이션으로서 문자가 발명되자(그리고 이후에 인쇄술이 발달하고 문해력이 확산되며 전자 미디어가 발명되자 언어의 힘은 더욱 세졌다.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 네트워크는 인구가 증가하고 사람들이 섞이고 도시 집중화가 진행됨에 따라 계속 확대되었다. 그리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생존에 필요한 최저선을 돌파하게 되자 더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대화하는 여유를 누리게 되었다. - P55
반계몽주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안이 종교적 신앙이다. 어떤 것을 신앙에 기초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땅한 이유 없이 그것을 믿는다는 뜻이며, 또한초자연적 존재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이성과 충돌한다. 종교는 휴머니즘과도 자주 충돌한다. 인간의 안녕보다 도덕적 선을 더 강조하면서, 가령 구세주를 인정하거나, 신성한 이야기를 인가하거나, 제의나 터부를 강요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켜 그런 관행을 강요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을 처벌하거나 악마로 몰아세울 때 항상 그 같은 충돌이 일어난다. 종교가 생명보다 영혼에 더 가치를 부여할 때도 휴머니즘과 충돌하는데, 이런 가치 부여는 그 어감처럼 구원적이지는 않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건강과 행복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지상에서의 삶은 우리 존재 중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세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인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임을 의미하고, 순교는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일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종교와 과학의 불화로 말하자면, 갈릴레오 재판과 스콥스 원숭이 재판에서부터 줄기세포 연구와 기후 변화에 이르기까지 그런 불화를 대표하는 전설과 사건이 역사에 즐비하다. - P61
두 번째 반계몽주의 이념은, 사람은 어떤 초유기체(superorganism) — 씨족, 부족, 민족, 종교, 인종, 계급, 국가의 소모품이며 따라서 지고선은 그런 집합체의 영광이지, 그 구성 세포인 인간의 안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민족주의가 명백한 예이다. 여기서 초유기체는 민족 국가, 즉 정부를 가진 민족 집단이다. - P62
좌파의 또 다른 경향은 인간의 이익을 또 다른 초월적 존재인 생태계에 종속시키는 운동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낭만적인 녹색 운동(greenmovement)은 인간의 에너지 포획을 엔트로피에 저항하고 인간의 번영을 증진하는 방법으로 보는 대신 자연에 대한 극악한 범죄라고 보고, 자연이 결국에는 자원전쟁, 오염된 공기와 물, 문명을 파멸시키는 기후 변화의 형태로 무섭게 보복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유일한 구원은 과학 기술과 경제 성장을 뉘우치고 중단하는 것이며 더 소박하고 자연적인 생활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데 있다고 믿는다.위협들을 풀어놓은 것은 그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비록 기술 문명이 어렵사리 파멸을 피한다고 해도, 세계는 폭력과 부정이 판치는 디스토피아 - 테러리즘, 드론 무기, 착취 공장, 폭력단, 밀매, 난민, 불평등, 사이버 폭력, 성폭행, 증오 범죄가 난무하는 멋진 신세계로 서서히 바뀌고 있다고 걱정한다. 다른 성격의 쇠퇴주의는 정반대의 문제로 괴로워한다. 근대성이 삶을 힘들게 하고 위험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너무 즐겁고 안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비판자들에 따르면 건강, 평화, 부는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부르주아적 유희에불과하다. 기술 자본주의가 공급하는 이 속물적인 쾌락에 젖을 때 사람들은 결국 원자화되고, 체제 순응적이고, 소비주의와 물질주의가 가득하며, 부조리하고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영혼을 좀먹는 황무지로 내몰리게 된다. 이 부조리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소외, 불안, 아노미, 무기력, 부정직, 권태, 위기감, 혐오감으로 고생하고, "고도(Godot)를 기다리면서 황무지에서 발가벗은 채 점심을 먹고 있는 투명 인간들이 된다. - P64
남은 반계몽주의 이념 두 가지는 좌파와 우파의 경계를 넘나든다. 거의 200년 동안 다양한 부류의 작가들이 현대 문명은 진보하기는커녕 꾸준히 퇴보해서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고 선언해 왔다. 『서양사의 쇠퇴 개념(The Idea of Decline in Western History)』에서 역사학자 아서 허먼(ArthurHerman, 1956년~)은 지난 2세기 동안 인종, 문화, 정치, 혹은 생태계의 악화를 경고해 온 예언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정말 세계는 오래전부터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듯하다." 어떤 쇠퇴주의는 우리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과학 기술에 손을 댔다고 한탄한다.‘ 우리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쳤을 때부터 스스로 멸망할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 환경을 오염시키고 핵무기, 나노 기술, 사이버 테러, 바이오 테러, 인공 지능 등 세계를 노리는 실존적 - P64
그렇다. 세계가 손수레에 실려 지옥으로 굴러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유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생각이 지적으로 바뀔 때는 그렇게 생각한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장밋빛 안경을 끼고 본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발견했다. 자신은 이혼, 해고, 사고, 병, 혹은 범죄의 희생양이 될확률이 일반 사람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그들의 사회로 질문이 바뀌면 폴리애나에서 이요(Eeyore, 「위니 더 푸(Winniethe Pooh)」에 나오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당나귀. 옮긴이)로 돌변한다. 여론 연구자들은 이것을 낙관주의 간극(optimism gap)이라고 부른다. 20여 년 동안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었지만, 여론 조사원이 유럽인들에게 내년에 그들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좋아질지 나빠질지를 물었을 때 절반 이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응답했지만, 그들 나라의 경제적 상황에 관해 물었을 때는 절반 이상이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다.‘ 영국인대다수가 이민, 10대 임신, 쓰레기, 실업, 범죄, 반달리즘, 마약이 국가적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사는 지역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사람은 거의 없다. - P73
저널리즘의 습성과 인지 편향이 서로 맞물려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우리가 세계의 상태를 믿을 만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그 답은 숫자에 있다. 폭력에 희생된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수를 기준으로 몇 퍼센트나 되는가? 아픈 사람이 얼마나 되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가난한 사람, 문맹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그 수는 늘어나고 있는가, 줄어들고 있는가? 정량적 사고방식은 일견 촌스러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실은 도덕적이고 개화된 사고 방식이다. 우리와 가장 가깝거나 가장 유명한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고, 모든 인간의 생명을 동등한 가치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고, 그 후에는 어떤 수단이 고통을 줄이는데 가장 유용할지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 P77
글쎄, 폭력의 수치가 항상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면 순환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낮다고 해도 다시 올라가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닐까? 아니다. 시간에 따른 변화는 통계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변동이 있기는 해도 순환적이지 않으며, 양극단 사이를 오가는 추처럼 왕복운동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느 때나 역전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역전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뜻은 아니다. (주식 투자에서, 사실은 예측할수 없는 변동인데도 많은 투자자가 ‘경기 순환으로 착각하고 큰 손해를 본다.) 진보는 긍정적으로 변해 가는 추세 속에서 그런 역전이 덜 빈번해지거나, 덜 극심해지거나,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멈출 때 이루어진다. 정말 폭력이 감소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뉴스에서 학교 총격사건(또는 폭탄 테러, 포격, 축구장 난동, 술집의 칼부림 사건)을 보지 못했는가? 감소는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y>x"라는 진술은 "y=0."이라는 진술과 다르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도 크게 감소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폭력 수위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폭력이 감소해 왔는가 하는 문제와 완전히 무관하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현재의 폭력 수준을 과거의 폭력 수준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폭력 수준을 볼 때마다 오늘 아침의 뉴스 제목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지금에 비해 그 정도가 아주 심했음을 알게 된다. - P80
물론 비관주의에도 밝은 면이 있다. 공감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갈수록 무감각해지는 시대에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는 불행에 관심을 갖게된다. 요즘 우리는 시리아 내전을 인도주의적 비극으로 인정한다. 이전시대의 전쟁들, 즉 중국의 국공 내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 한국 전쟁은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지만 그런 비극으로 기억되지는 않았다. 내가 클 때 괴롭힘은 남자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여겨졌다. 2011년에 버락 오바마가 했듯이, 언젠가 미국 대통령이 연설 중에 그 폐해를 언급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인류를 더 염려함에 따라, 우리 주위의 불행들을 우리의 기준이 상승한 징표가 아니라 세계가 그만큼 몰락한 징표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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