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건 환각이었을 뿐 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시냇물도 흐르지 않았다. 산불도 꺼지지 않았다. 한밤중 불붙은 그 산에서 산폭도들이 산불을 옮겨왔다. 마을은 불타고 그 이튿날 학교 운동장에 불에 탄 공비의 시체 하나가 전시되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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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응당 가해자의 멱살을 붙잡고 떳떳이분노를 터뜨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빨갱이로 몰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피해자인 섬사람들은 삼만이 죽은 그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치부해버린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 자신이 반복해서,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당했거니 하고 체념해버린다. 허울 좋은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 그것을 자기 박복한 탓으로, 전생에 무슨 죄가있는 탓으로 돌리다니.
어머니의 자격지심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당신 탓으로만 여겼다. 천재지변과 같이 막강한 가해자들, 그들에게 분노나 증오를 품는다는 것은 마치 천둥벼락에 적개심을 품는 것과 다를바 없이 허망한 노릇이었다. 고향 섬 해변을 수시로 침범하여 섬여자를 약탈, 겁간, 살인을 자행하던 왜구들이 전설 속에서는 해룡(海龍)으로 묘사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가 아니었을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인 해룡, 해룡에게 먹히는 사람들은 다 팔자소관일 뿐, 해룡에 대한 적개심은 털끝만큼도 없다. 오직 덜덜 떨리게 두려울 따름이다. 피 묻은 흰 저고리와 시푸른 군복이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마다 숨이 가빠지는 것은, 그러니까 분노도 증오도 아닌 바로 겁이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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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의례의 기능은 중앙의 정보원으로부터 어떤 의미 meaning를 각각의 수용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수용자가 다른 수용자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인지하도록 만든다.
이런 논의는 그간 학계에서 서로 무관한 것으로 간주해 온 맥락과 연구 전통들 간에 가교를 놓음으로써 광범한 사회현상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공식 행사가 어떻게 통치자의 권위를 강화시켜 주는가에 대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행사의 ‘내용‘content 이 신적 영역과 의미BR있는 연계를 창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 행사의 ‘공지‘
publicity‘에 주목한다면 - 다시 말해 어떻게 공유 지식이 형성되는지 밝혀낸다면 - 우리는 왕실 행치royal progress", 혁명 페스티벌, 그리고프랑스혁명 이후 새로운 도량형의 수립과 같은 의례적 실천ntual practice을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다. 공식 행사는 감정을 고양시켜 행동하게 만든다고 간주되어 왔다. 반면, 우리의 논의는 ‘차가운‘ cold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다. - P17

‘조정 문제‘라고 불리는 상황에서 각 개인은 다른 이들도 참여할 경우에만 집합행동에 참여하려 한다. 이 문제를 조정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단순하게 "모두 함께합시다"와 같은 메시지로 소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 개인은 다른 사람들도 참여할 때에만 참여할 것이므로, 메시지 전달이 성공적이려면 각 개인이 그런 사실을 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그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각 개인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간에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연쇄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메시지는 공유 지식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 P23

단순히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의사소통이 성공할 수는 없다.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메시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인지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데 대한 앎, 즉 ‘메타지식"metaknowledge 을 필요로 한다.
창밖의 동료가 소리칠 때,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찾는 당신을 보았지만 당신이 나를 보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바깥의 신호를 보았고 당신이 밖을 내다보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당신 또한동료의 제안을 알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버스에 머물기로결정한다. 왜냐하면 내가 안다는 것은 당신이 아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단계의 메타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조정에 성공하려면 모든 단계마다 메타지식이 필수적이다. 나는 고함소리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당신은 내가 고함소리를 들었음을 알아야하며, 나는 당신이 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당신도 내가 안다는 것을알아야 하며, 내가 알고 있음을 당신이 안다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하는 등의 메타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말하자면 바깥의 고함이 ‘공유 지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유 지식‘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 P25

체제에 대한 저항운동은 조정 문제이다.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구속될 가능성은 낮아야 하므로, 각 개인은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할 때에 자신도 참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국은 대중 집회, 출판물, 깃발, 심지어 낙서까지 포함해 공적 의사소통에 대해 검열을 하려든다. 그런 수단들을 통해 사람들은 메시지를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집한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Sluka 1992: Diehl1992), 30여 년간 이집트에서 빵 한 덩어리의 값은 변하지 않았다. 1977년 사다트 대통령이 빵 값을 올리려 하자 커다란 저항이 일어났다. 그 뒤로 정부는 빵의 크기를 차츰 작게 만들고, 밀가루에다 값싼 옥수수 가루를 섞었다(Jehl 1996). 이런 전략은 개인들에 대한 기만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개인들은 빵이 작아지고 맛이 달라지는 것을 인지했지만, 다른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크기와 맛의 차이는 가격인상과 같은 공개적인 사건public event 이 아니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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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파병 소대장이었던 중호는 그것이 말이 소개이지 실은 초토작전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소개란 취약지구의 인원과 물자를후방 안전지대로 후송시킴을 뜻하는데, 이건 숫제 마을에 불을 놓아 물자를 모조리 태워버리고, 거기다가 폭도들이 섞여 있을지 모른다고 인원마저 파괴했으니, 초토작전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게릴라란 물고기와 같아서 인민이라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월남에서 배웠지만, 교대로라면, 인민이란 물을 퍼내서 게릴라가 서식처를 잃고 자멸하도록 해야 옳지 않았던가. 누구는 편리하게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전쟁이란 으레 그런 거다, 그게 전쟁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전쟁이 그렇게 시킨다. 그 사람들이 특히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쟁 통에선 어느 때 어디서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일이다. 월남 땅 밀라이 사건을 보라, 하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전쟁 중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6·25 터지기 두해 전 일, 그러니까 그건 전쟁이아니라 좌익폭동진압이었다. 폭동진압에서 삼만이 죽었다니! - P149

그 악몽의 현장, 그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이나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중호는 고향의 모는 것을 미워했다. 측간에서 똥 먹고 사는 도새기(돼지)가 싫고, 한겨울에도 반나체로 잠수질해야 하는 여편네들이 싫고, ‘말은 다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하는 속담이 싫고, 육지 사람이 통 알아들을 수 없는 고향 사투리가 싫고, 석다(石多)도 풍다(風多)도 싫고, 삼십년 전 그 난리로 홀어멍이 많은 여다(女多)도 싫고, 숱한 부락들이 불타 잿더미가 되고 곳곳에 까마귀 파먹은 예송장이 늘비하게 널려 있던 고향 특유의 난리가 싫고, 그불행이 그의 가슴속에 못 파놓은 깊은 우울증이 싫었다. 걸핏하면 버릇처럼 꺼질 듯한 숨을 내쉬는 어머니도 싫었다. 육지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牧民)에는 뜻이전혀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를 살찌우는 목마(牧馬)에만 신경 썼던 역대 육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 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이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과 심한 우울증밖에는 가르쳐준 것이 없는 고향, 그것은 비상하려는 그의 두 발을 잡아끌어당기는 깊은 함정이었다. 그 섬사람이 아니고 싶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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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차가운 도시

조리와 조리의 사촌은 지나가는 차에 눈 뭉치를 던지며 장난을 치고있었다. 조리가 서 있는 밀워키의 니어 사우스사이드 근처 길모퉁이에서 6번가를 따라 달리는 자동차들은 늘어서 있는 두 세대용 아파트 앞을 지나쳤다. 아파트에는 현관 계단이 딸려 있고 보도 가장자리에는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북쪽을 향해 가는 차들 앞에는 성 요사팟 성당이 있었는데, 조리에게는 이 성당 위에 왕관처럼 올라앉은 돔모양의 지붕이 마치 막힌 변기를 뚫을 때 쓰는 고무 플런저를 뒤집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때는 2008년 1월, 밀워키 시는 관측 이래로 가장많은 눈이 내리는 겨울을 맞았다. 이따금 차 한 대가 6번가를 벗어나눈으로 둘러싸인 아세로에 더듬거리며 진입했고, 소년들은 바로 그런때를 노렸다. 조리는 눈을 단단히 뭉쳐 날렸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멈춰 서더니 한 남자가 내렸다. 소년들은 아파트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조리가 엄마 알린과 남동생 자파리스와 함께 사는 곳이었다. 자물쇠는 싸구려였고, 남자가 몇 번 세게 발로 차자 문이 부서졌다. 남자는 그걸로 만족하고 바로 사라졌다. 문이 부서졌다는 사실을 알게된 집주인은 알린과 아이들을 내보내기로 결심했다. 알린의 가족이그곳에 산 지 8개월만의 일이었다.
알린과 아이들은 하필이면 추운날이 집을 나와야했다. 하지만 알린이 더 버텼다면 집주인은 보안관을 불렀을 거고, 그러면 총을 찬 보안관이 부츠를 신은 운송업체 직원들과 함께 알린의 집이 더 이상 알린의 것이 아니라고 고지하는 판사의 명령문 종이를 들고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면 알린에게는 두 개의 선택이 주어졌을 것이다. 트럭 아니면 길바닥. - P14

한때는 미국 도시의 가장 그늘진 지역에서조차 강제 퇴거가 드물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공황기에는 매년 벌어지는 강제 퇴거에 직면했던 빈민 가정의 수가 지금에 비하면새발의 피였는데도 퇴거가 일어나면 폭동이 발생할 정도였다. 1932년2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브롱크스에 사는 세 가정을 퇴거시키는 데 저항하는 지역사회의 반발을 설명하며 이렇게 전했다."군중이 겨우 1,000명뿐인 건 아마 추위 때문이지 싶다." 이웃들은 판사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퇴거의 대상이 된 가정이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들어오도록 돕거나 이들의 가구를 깔고 앉아 퇴거에 저항하다가 직접 집행관들과 맞붙기도 했다. 집행관들 스스로도 퇴거를 이행하는 데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이 배지와 총을 들고 있는 건 퇴거를 집행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P17

이 책은 퇴거의 과정에 휩쓸린 여덟 가정을 추적한다. 흑인 가정도 있고, 백인 가정도 있으며, 아이가 있는 집도 없는 집도 있다. 퇴거는 도시 전역에서 일어나고 그 과정에는 집주인과 세입자뿐 아니라 친척과 친구, 연인과 옛 연인, 판사와 변호사, 마약공급책과 교회장로들까지 얽혀 있다. 퇴거는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집을 잃은 가정은 쉼터로, 폐가로, 거리로 내몰린다. 우울증과 질병을 불러오고, 가족들은 위험한 동네의 질 낮은 주택으로 떠밀리게 되며,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고 아이들이 해를 입는다. 퇴거는 사람들의 창의력과 배짱은 말할 것도 없고 약점과 절망감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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