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 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 이후락)이해야 한다는 불경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자질한이가 바로 신범식이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이 골프장에서 박정희에게 윤필용 이야기를 한 것은 유신 직후인 1972년 10월 말이고, 사건이터져 윤필용이 잡혀간 것은 이듬해 3월로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다는점을 강조했다. 조갑제는 "이 사건의 꼬투리가 된 신씨의 말과 윤 장군의 구속 사이에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세력에 의해숙성, 발효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보았다. 귀가얇고 의심이 많은 박정희에게 반이후락 세력이 단결하여 공동보조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후락 자신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표적은자신이었다고 이야기했다. - P73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 P77
윤진원은 이 무렵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처음 그는 김대중을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기고, 오사카 항에 대기 중인 중정 공작선 용금호를 타고 일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오사카 요원들이 나타나지 않아 자신이김대중을 데리고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불안해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겨 그들이 김대중을 처리한다면 자신은 납치만 한 것으로 먼 훗날에라도 제한적인 책임만 져도 되지만, 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윤진원은김대중을 자신이 일본을 빠져나올 때 쓰려고 대기시켜놓았던 용금호에 실어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 금호에 실린 김대중이한국 영해로 들어가는 순간 김대중에 대한 관리책임은 ‘해외공작단장‘인 자신의 관할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죽이든살리든 그 책임을 이후락이나 박정희에게 떠넘긴 것이다. 김대중 납치가 공작의 궁극적인 목표였다면 윤진원은 의기양양하게 김대중을 잡아다 자신이 직접 이후락이나 박정희에게 바쳤을 것이다. - P86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숨 쉰 채 부산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박정희나 이후락이 지었을 표정은 가히 예술 작품이었을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 주인에게 ‘나잘했지‘ 하고 가져다주어 기겁하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한다. 윤진원은 이런 멍청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 - P88
이에 대해 다나카총리는 "김대중이 들어오면 시끄러우니 보내지 말라"고 한국 쪽에 얘기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았다. 식민지시대부터 맺어진 한국과 일본 보수 정치인들 간의 끈끈한 유착에 기대어그들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이렇게 처리하면서 한일 간의 모든 문제가 ‘결착‘ 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와 함께 사건을 은폐한 일본의 태도는 2007년 10월 국정원과거사위원회를 마무리하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했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일본 쪽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것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일본으로서는 수사를 재개하여 김동운의 송환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말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요구해왔다. 민주적 정권교체로 한국정부는 1973년의 냄새나는 ‘한일 결착‘ 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반면, 일본 정부는 두 나라 간의 부끄러운 거래가 드러나는 것을 여전히 원치않고 있었다. - P92
해가 바뀌어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의 주요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로 금지한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역시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 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쑤서 넣은 조항이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고 법원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고 대통령의 명령이 법들과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긴급조치이니 3권분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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