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9월 1일

그들은 그를 버려두고 떠나려 했다. 부상 입은 남자는 자신의 눈길을피해 고개를 떨구는 소년을 보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 소년은 늑대 털가죽 모자를 쓴 남자와 언쟁을 벌여왔다. ‘정말 며칠씩이나 됐나?‘ 고열과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온 부상 입은 남자는 그것이 실제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혼미한 정신이 유발한 환청이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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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 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 이후락)이해야 한다는 불경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자질한이가 바로 신범식이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이 골프장에서 박정희에게 윤필용 이야기를 한 것은 유신 직후인 1972년 10월 말이고, 사건이터져 윤필용이 잡혀간 것은 이듬해 3월로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다는점을 강조했다. 조갑제는 "이 사건의 꼬투리가 된 신씨의 말과 윤 장군의 구속 사이에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은 이 사건이 어느 세력에 의해숙성, 발효되는 과정을 거쳤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보았다. 귀가얇고 의심이 많은 박정희에게 반이후락 세력이 단결하여 공동보조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후락 자신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표적은자신이었다고 이야기했다. - P73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 P77

 윤진원은 이 무렵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처음 그는 김대중을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기고, 오사카 항에 대기 중인 중정 공작선 용금호를 타고 일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오사카 요원들이 나타나지 않아 자신이김대중을 데리고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불안해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겨 그들이 김대중을 처리한다면 자신은 납치만 한 것으로 먼 훗날에라도 제한적인 책임만 져도 되지만, 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윤진원은김대중을 자신이 일본을 빠져나올 때 쓰려고 대기시켜놓았던 용금호에 실어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 금호에 실린 김대중이한국 영해로 들어가는 순간 김대중에 대한 관리책임은 ‘해외공작단장‘인 자신의 관할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죽이든살리든 그 책임을 이후락이나 박정희에게 떠넘긴 것이다. 김대중 납치가 공작의 궁극적인 목표였다면 윤진원은 의기양양하게 김대중을 잡아다 자신이 직접 이후락이나 박정희에게 바쳤을 것이다. - P86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숨 쉰 채 부산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박정희나 이후락이 지었을 표정은 가히 예술 작품이었을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 주인에게 ‘나잘했지‘ 하고 가져다주어 기겁하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한다. 윤진원은 이런 멍청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 - P88

 이에 대해 다나카총리는 "김대중이 들어오면 시끄러우니 보내지 말라"고 한국 쪽에 얘기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았다. 식민지시대부터 맺어진 한국과 일본 보수 정치인들 간의 끈끈한 유착에 기대어그들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이렇게 처리하면서 한일 간의 모든 문제가 ‘결착‘ 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와 함께 사건을 은폐한 일본의 태도는 2007년 10월 국정원과거사위원회를 마무리하면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했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일본 쪽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것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일본으로서는 수사를 재개하여 김동운의 송환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말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요구해왔다. 민주적 정권교체로 한국정부는 1973년의 냄새나는 ‘한일 결착‘ 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반면, 일본 정부는 두 나라 간의 부끄러운 거래가 드러나는 것을 여전히 원치않고 있었다. - P92

해가 바뀌어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의 주요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로 금지한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역시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 취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쑤서 넣은 조항이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고 법원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고 대통령의 명령이 법들과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긴급조치이니 3권분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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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마타 수비대에 행정장교 한 명이 필요하네." 로페스 로페스 대령은 커튼을 닫고 가구를 열쇠로 잠그고서 책상을 정리한 후 가방을든다. "아마존 강 대신에 티티카카 호수가 있을 걸세."
"밀림의 더위 대신 고산지의 추위를 견뎌야 할 거야." 빅토리아 장군이 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나가게 한다.
"특별봉사대원들 대신에 야마와 비쿠냐"가 있을 걸세." 티그레 코아소스 장군이 군모를 쓰고서 불을 끄고 손을 내민다. "판토하, 자네는 정말 이상한 놈이야. 그래, 이제 가도 좋네."
"어휴 추워. 너무 추워요, 너무 추워." 포치타가 몸을 덜덜 떤다. "성냥은 어디 있어요? 빌어먹을 초는 어디 있어요? 전깃불도 없는 곳에서 사는 건 너무 끔찍해요. 판타, 어서 일어나요, 벌써 다섯시예요. 난 왜 당신이 병사들 아침식사를 보러 가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일에 너무 집착해요. 너무 이른 시간이잖아요. 추워 죽을 것같아요. 아이, 이 바보. 또 그 팔찌 때문에 긁혔잖아요. 밤에는 좀 빼놓는 게 어때요? 벌써 다섯시라고 했잖아요. 판타, 어서 일어나요."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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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유세 때도 꽤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김대중은 "야당 청중은 걸어가고 여당 청중은 차에 실려간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도 그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비서관의 말에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 날랐지" 라고 군중 대부분이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인파가 몰렸을 때 북한 간첩이 경찰복장을 하고 총이라도 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북한이 이를 틈타 남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백만 인파를 동원하느라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이런 선거가 싫었고, 선거에 대한혐오감은 북한의 유세장 테러라는 상상의 위험으로 증폭되어 선거 망국론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 측근들은 이 무렵 박정희가 "이제 그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 라고 내뱉는 것을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한다. - P44

 다른 몇몇 자료들도 김기춘이 법무부 과장으로 있으면서 유신헌법 작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지목했다. 이에 대해김기춘은 자신은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잔심부름 외에는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기춘이 이때 평검사였던것은 맞는데, 그가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으로 승진했을 때 신문에서는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썼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서 ‘김기춘유신‘으로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기사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유신으로 출세한 자들이 유신헌법을 자기 손으로 만든 사실을 감추는 것을 보니 유신이 창피한 일이긴 한가보다. - P45

지만 그의 본명이 박정희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방문했을 때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雲親一郎)중장에게 큰절을 올린 행위가 일본의 보수 인맥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박정희가 미국의 압력으로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 대통령에 취임할때 일본에서는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를 경축특사로 파견했다. 오노는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한바 있었다. 오노는 도쿄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라고 자랑하면서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했다. 당시 양 김씨는 공교롭게도 각각 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민정당 대변인이었던 김영삼은 "일국의 대통령을 아들에 비유한다는 것은 국가 체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이것은 구보타망언(1953년 한일회담의 일본 쪽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에 유익했다고 주장)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배 더한 망언"이라고 규탄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자민당 · 국민의당 등 3당의 공동 교섭단체인 삼민회의 대변인이었는데 오노가 일본에 들어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사를 ‘세기적 연설‘ 이라고 치켜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아들 자랑‘이 심하다고 비꼬았다. <동아일보>는 오노의 망언이 국내에서 뒤늦게 보도된 데 대해 "외신검열에 혈안이 됐던 군사정권이 어째서 이 놀라운 망언기사를 묵인했는지 의문"이라며 "일본 정객들이 한국을 그렇게 얕보는 말에서장차 국가운명이 어떻게 될지 섬뜩한 생각이 든다고 논평했다. - P51

유신헌법 제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 이라불렀다.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 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 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제9대와 제10대 국회에서 의석수로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이아니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가 죽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유정호에 관한 연구는 놀라울정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P60

3년짜리 비정규직이었던 유정회 의원들은 재임명에 목을 걸었다. 1976년 3년 임기가 끝나고 2기 의원을 추천할 때 1기 중 3분의 1에 가까운 23명이 탈락했다. 또 3년 뒤 3기 의원을 추천할 때는 2기 때의 두배인 48명이 탈락하고 25명만 살아남았다. 한 언론인은 "체제의 방패역을 자임했던 유정회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추악한 정치 행태들을 연출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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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계엄령 선포는 한국의 국내문제이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결정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을 표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특별선언문에서닉슨의 ‘중공‘ 방문을 특별조치의 동기처럼 서술한 부분을 삭제해달라는 요구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발표를 몇 시간 앞둔 최종점검회의 중미국의 요구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가 답답해서...우리가 거짓말했나..." 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국내의 반발도 상당할 텐데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지는 것을피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로 이 대목을 삭제했다. 일본도 비슷한 반응을보였다. 일본 역시 일본-중 수교와 다나카 총리의 ‘중공‘ 방문이 박정희 친위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자신이 볼 때 유신을 단행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인 미국, 일본의 대중국 수교 문제를 특별선언문에서 빼게 된 것에 대해 유신이 뼈다귀 빠져 흐물흐물한 ‘곤냐쿠‘가 되었다고 일본 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박정희에게는 흐물흐물한 ‘곤냐쿠‘였지만 그 ‘곤냐큐‘에 민중들은 멍들고 질식당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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