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유세 때도 꽤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김대중은 "야당 청중은 걸어가고 여당 청중은 차에 실려간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도 그날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비서관의 말에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 날랐지" 라고 군중 대부분이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인파가 몰렸을 때 북한 간첩이 경찰복장을 하고 총이라도 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북한이 이를 틈타 남침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수백만 인파를 동원하느라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 이런 선거가 싫었고, 선거에 대한혐오감은 북한의 유세장 테러라는 상상의 위험으로 증폭되어 선거 망국론으로 확대되었다. 박정희 측근들은 이 무렵 박정희가 "이제 그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 라고 내뱉는 것을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한다. - P44

 다른 몇몇 자료들도 김기춘이 법무부 과장으로 있으면서 유신헌법 작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지목했다. 이에 대해김기춘은 자신은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로 일하면서 상부에서 시키는잔심부름 외에는 한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김기춘이 이때 평검사였던것은 맞는데, 그가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으로 승진했을 때 신문에서는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썼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서 ‘김기춘유신‘으로 검색해보니 대부분의 기사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유신으로 출세한 자들이 유신헌법을 자기 손으로 만든 사실을 감추는 것을 보니 유신이 창피한 일이긴 한가보다. - P45

지만 그의 본명이 박정희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박정희가 처음 일본을방문했을 때 만주군관학교 시절의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雲親一郎)중장에게 큰절을 올린 행위가 일본의 보수 인맥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박정희가 미국의 압력으로 군복을 벗고 선거를 치러 대통령에 취임할때 일본에서는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를 경축특사로 파견했다. 오노는 1962년 말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한바 있었다. 오노는 도쿄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라고 자랑하면서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했다. 당시 양 김씨는 공교롭게도 각각 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민정당 대변인이었던 김영삼은 "일국의 대통령을 아들에 비유한다는 것은 국가 체면상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이것은 구보타망언(1953년 한일회담의 일본 쪽 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에 유익했다고 주장) 정도가 아니라 그 몇 배 더한 망언"이라고 규탄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자민당 · 국민의당 등 3당의 공동 교섭단체인 삼민회의 대변인이었는데 오노가 일본에 들어가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사를 ‘세기적 연설‘ 이라고 치켜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아들 자랑‘이 심하다고 비꼬았다. <동아일보>는 오노의 망언이 국내에서 뒤늦게 보도된 데 대해 "외신검열에 혈안이 됐던 군사정권이 어째서 이 놀라운 망언기사를 묵인했는지 의문"이라며 "일본 정객들이 한국을 그렇게 얕보는 말에서장차 국가운명이 어떻게 될지 섬뜩한 생각이 든다고 논평했다. - P51

유신헌법 제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 이라불렀다.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 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 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제9대와 제10대 국회에서 의석수로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이아니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박정희가 죽고 물거품처럼 사라진 유정호에 관한 연구는 놀라울정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P60

3년짜리 비정규직이었던 유정회 의원들은 재임명에 목을 걸었다. 1976년 3년 임기가 끝나고 2기 의원을 추천할 때 1기 중 3분의 1에 가까운 23명이 탈락했다. 또 3년 뒤 3기 의원을 추천할 때는 2기 때의 두배인 48명이 탈락하고 25명만 살아남았다. 한 언론인은 "체제의 방패역을 자임했던 유정회는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추악한 정치 행태들을 연출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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