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라니까요. 여기 화순 아니에요."
남편은 전화를 끊고 어떤 여자가 자꾸 화순이냐고 묻는 전화를 두번이나 했다면서 투덜거렸다. 갑자기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남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셔터를 올렸다. 그러자 밖에서 여러 사람이 남편을 잡아채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나를 향해 큰소리로 내복을 가져오라고 외쳤다. ‘내복이 어디 있지? 벽장 속에 있을 거야." 당황했지만 방으로 뛰어들어 가 벽장문을 열었다. 벽장이높아 평상시에 의자를 딛고 올라가야만 했지만 그날은 가볍게 몸이올라갔다. 양말과 웃옷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남편이 옷을 받자마자 그들은 남편을 지프차에 태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 하나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니! 막막하기만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으로 들어오니 남편이 차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왜 시계를 못 챙겨 주었지?‘ 시계가 없어서 남편의 시간이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손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머릿속도 텅비어 버린 것 같다. 그 순간 남편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알려라‘
유인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민족민주화성회 때 읽은 유인물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각종 집회 유인물, 전국운동단체에서 발행한 문건들이 널려 있었다. 어쩌면 이것들이 남편을 옥죄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말 일이나 버렸구나. 유인물들을 치워야겠다.‘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문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문건들은 서점 안에도 많이 있었다. 다 모아서 책보자기에 묶은 뒤 우선 창고에 내놓았다.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찬찬히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 P54

"소식 들었습니다. 김상윤 형님의 후배입니다. 걱정되시겠습니다. 얼마 안 되지만 사식이라도 넣어 주십시오."
그러고는 봉투를 손에 쥐여 주었다. 갑자기 울컥해 눈물이 나올 것같았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선생님 성함을 모릅니다."
"삼계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국어선생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어서가보십시오."
짧은 인사를 남기고 그는 교실 쪽으로 걸어갔다. 이름을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버스를 탔다. - P67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소금을 넣어 만든 주먹밥을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다. 모두 두려워했지만 옆에 아는 얼굴들이 있어서인지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는 것 같았다.
"아따 이렇게 먹어도 맛있소!"
"형수는 이럴 줄 알고 쌀을 많이 사놨소?"
"쌀을 많이 사 놓긴 했는데, 어제 오늘 밥을 어찌나 먹었는지 쌀이거의 떨어져가네요. 쌀 사러 가야겠습니다."
"내일 집에서 좀 가져올게요."
"어제 오늘 여기서 밥 먹은 사람이 다 가져오면 쌀 부자 되겠네."
"형은 잡혀갔지만 형수님은 부자 되니 좋겠소."
그 말에 모두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공포도 걱정도 잠시 멈춘 것 같았다. - P70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대규모로 저항하고있으나, 이 움직임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어서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반드시 지도부가 있어야 한다. 우선 지도부가 만들어질 때까지 우리가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
계엄군은 시민과 학생들을 완전히 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무자비한 진압은 시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더욱 자극하기 위한 도발 같다.
시민과 학생들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도 상황에 맞는 대책을 제시하고 적절히 잘 대응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동참해야 하고, 반드시 학생지도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현재 유언비어가 지나치게 난무하고 있고, 이 상태로 가면 분노한 시민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학생지도부가 전면에 나서야 하고, 평상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도 나와서 일반 시민을 대표하는 지도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전남대 총학생회는 일부 연행되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피신했다. 게다가 운동권 일선에 있던 사람들도 예비검속되었거나 피신한 상태에서 어떻게 지도부를 만들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 혼란의 책임을 결국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모두 뒤집어씌울 것이 뻔하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탁월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없다. 계엄군에 저항하는 시민들은 평소에 민주화운동을 해 본 사람들이 아니어서 계엄당국에 요구하는 내용도 중구난방이며, 오직 살상을 일삼는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주변에 있는 돌멩이나 던지고목이 쉬도록 외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이라도 중심이 되어 시민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싸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위 소식과 시위의 정당성 그리고 우리의 요구를 명확히 밝히는 소식지를 만들자, 부상자를 치료하고, 밥과 물을 제공하며, 최루탄 가스를 피하기 위해 치약이나 랩을 준비하자! - P73

캄캄한 하늘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옥상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우산 두 개를 펴서 맞대어 놓으니 제법 피난처 같았다. 여차하면 시동생과 학생들을 이곳으로 피신시킬 참이었다.
피난처를 거의 다 만들었을 즈음, "와" 하는 함성 소리가 주택가에서 울려 퍼졌다. 급히 옥상에서 내려와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방금 9시 뉴스에서 ‘광주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있다. 군인들의 희생이 많다. 민간인 부상자는 두 명 정도 났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는 폭력 앞에서살기 위해 항의하는 시민들을 폭도라고 하다니! 수없이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곤봉에 맞아 쓰러진 그 많은 사람을 보고도 부상자가 고작 두 명이라니! 주택가의 함성은 이 어처구니없는 보도에 기가막힌 시민들이 터뜨린 분노의 탄식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우리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는 시민들의 분노가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았다. 시민들의 봉기가 계속된다면 우리도 피할 수는 없었다. 서점 문을 닫을수도 없었다. 이 일로 구속되거나 교사를 그만둬야 하더라도 어쩔 수없는 일이 아닌가? - P81

그때 골목 여기저기에서 머리에 대야를 이거나 옆구리에 바구니를낀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들은 요구르트와 김밥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다. 시민들은 감격했다.
"어제는 한 끼도 못먹었어요."
"3일 만에 처음으로 밥을 먹어 보네."
어린 학생들과 시민들은 밥 먹을 정신도 없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에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손에도 주먹밥을 쥐여 주셨다.
"어쨌든 일을 해도 밥을 먹으면서 해야 해."
동네 이웃끼리 모여서 학생들에게 밥이라도 먹이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만들었다며 어서 먹으라고 권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뒤에서 "어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아주머니가 활짝 웃으셨다. 뒤쪽에서 나이 지긋한 남자 분이 외쳤다.
"군인들도 하나씩 주면 좋겠소. 조선 인심은 똥 놔두고는 밥 먹어도 사람 놔두고는 밥 못 먹소."
"저놈들이 뭔 죄요. 자기 집에 가면 다 귀한 자식들인다. 시킨 놈들이 나쁜 놈들이제."
아주머니가 그 말을 듣고 주먹밥이 든 통을 들고 군인들 앞으로 갔다. 갑자기 군인들의 시선이 그 아주머니 쪽으로 쏠렸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자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 곤봉으로 아주머니를 확 밀어냈다. 아주머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시민들 사이에서 다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너는 부모도 없냐"며 야유를 보냈고, 분위기는 다시 험악해졌다.
시민 한 사람이 외쳤다.
"도지사 만나러 간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참읍시다. 저 어머니를 위해서 <어버이 은혜>를 합창합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여러 노래를 불렀다. 손을 잡기도 하고 어깨를걸기도 하면서 <봉선화>, <애국가> 등을 불렀다. 어머니들도 젊은이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아스팔트 위에서 듣는 노랫소리가 처연했다. 학생들이 시위하면서 불렀던 노래와는 많이 달랐다. 학생들은 훌라 송>이나 <우리 승리하리라>, <아침 이슬> 등을 불렀고,
시민들은 주로 <애국가>, <아리랑>,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전우야 잘자라> 같은 군가도 불렀다. - P94

나는 시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을 경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하고 성명서 문안을 작성했다. 광주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오판하여 북한이 휴전선을 넘어온다면 광주시민들이 앞장서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아무나 발언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 같은 집회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계엄사 쪽에서 프락치를 보내 교란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사태를 막기 위해 우리는 여러 사람이 사회자와 함께 분수대 위로 올라가 대비하기로 했다. - P115

전체적으로 도청 안의 분위기는 비장했다. 사람들이 점점 도청에서 빠져나갔다. 계속 총을 들고 싸우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갈등은 사라졌지만, 무기 회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도청에서 모두 철수해 버린 것도 불안감을 고조시킨 요인이었다.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클 것이다. 딱히 책임감 때문에 남아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도청에 남아 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저 사람도 혹시 나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감히 입 밖에 내지못했을 뿐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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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오래오래 기억하라

내가 1976년 가을에 전라남도 해남으로 내려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을 위해 구로공단에 취업했다가 나온 이후 서울에서는 전위냐 대중이냐를 두고 쟁론이 벌어졌고, 나는 소설가로서 대중운동 현장을 찾고 있었다. 다른 한 가지는 대하역사소설 ‘장길산‘을신문에 연재하면서 전통사회 민중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 가출하여 남도를 편력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는 언젠가 호남지방을 다시 돌아보리라 작정하고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의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나는 새로운조국을 발견하게 된다. 개발독재 기간 농촌사회의 분해와 재편성을위한 새마을운동이 선전되고 있었지만 전라도는 여전히 피폐했다. 강진, 해남 등지는 조선시대의 유배지로서 제주도까지 이어지는 유배문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을 뿐 아니라 동학혁명의 발자취 또한 뚜렷했다. - P5

전남대의 경우 학생회가 부활하기 전에 이미 어용교수 문제로 교내가시끄러웠다. ‘어용교수 백서‘가 발표되고, 지목된 교수들의 버티기가계속되자 학생들은 서서히 집단행동으로 뜻을 관철하려 했다. 총학생회에서 어용교수들의 연구실을 사실상 폐쇄하는 정침식(釘針式 교수실에 못을 박아 출입을 못 하게 하는 의식)을 했고, 정치외교학과 주수원 교수의 중재로 모임을 가졌으나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교수들이 버티고 있는 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총학생회 부활 후 전남대 교내시위는 어용교수 퇴진이라는 구호 아래 시작되었다. 5월이 되자 학내시위가 무르익었다.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 도청 앞에서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총학생회는 ‘반민주 반민족 행위자 매장비‘를 용봉탑 앞에 세우는 등 본격적으로 민주화 투쟁에 나설 준비를 갖추었다. - P36

"상윤이 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이대로 가만히 있을 놈들이아냐 학생들이 횃불 시위를 하고, 게다가 5·16 화형식까지 한다니 몹시 걱정이 되네. 군부가 나올 수도 있는데 무슨 대비책이라도 있나?"
대비책이 있을 수 없었다. 신군부가 군대를 동원해 민주화의 열기를 엎어버린다면 도대체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우려는 진작부터 있었어요. 어제 서울역 시위를 끝으로 대학생들이 모든 시위를 중단한 것도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을주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우려가 있다고해서 학생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민주화라는 대세를 뒤엎을 수 없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명분을 잘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네."
두 선배는 내 말에 수긍하면서도 이를 강조했다. 신군부가 쿠데타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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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언어에는 똑같은 속담이 존재합니다.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도 느끼지 못한다는 속담이죠. 그런데 전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감히 단정합니다. 우리가 억누르려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감정들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마음에는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유배중이라면, 두고 온 집과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려고 애쓸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서 그 사람을 떠올릴 겁니다.
복음서와 세상 모든 종교의 경전들은 신을 이해하기 위해,
민족을 나아가게 한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지구 표면을 방황하는 영혼들의 순례를 이해하기 위해 떠난 유배중에 씌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기대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우리 역시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을 수 없고 또 잊기를 원치도 않기 때문에 책들이 씌어지고 그림들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 P299

그녀는 그를 힘껏 껴안았다. 스크린에 ‘끝‘이라는 자막이 뜬다음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생각을 한다면,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시작하라고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옛날 옛적에......"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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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강, 저 호수, 저 집들, 저 성당이 보이세요? 오백 년 전에도 저 모든 것이 지금과 거의 흡사했어요. 도시가 텅 비어 있었다는것만 빼고 말이죠. 정체불명의 역병이 전 유럽을 휩쓸었죠.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사람들은 그 역병을 흑사병이라고 불렀죠. 그건 신이 죄악에 물든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퍼뜨린 대재앙이었어요. 일군의 사람들이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마음먹었죠. 그들은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즉 신체적인 아픔을 자신들에게 가했어요. 채찍이나 사슬로 자신을 후려치며 저 다리, 저 길들을 밤낮없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그 고통으로 신을 찬양했어요.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들은 자신들이 빵을 굽고, 땅을 경작하고, 가축들을 먹일 때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신체적 아픔은 이제 고통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사해주는 쾌락이었죠. 아픔이 기쁨이 되고, 삶의 의미, 쾌락이 되었던 겁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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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모처럼 떠받드는 명조인데, 시험 삼아 과연 너를 (정말로) 구원하는지 짐은 점을 치려 한다. 자식이 화를 당하는데 어찌 아비가 구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천명을 받들어 거병하여, 하늘의 뜻을 거역한 조선국왕을 포위했는데, 과연 조선이 부모로 섬기는 명이 그 자식을 구하러 오는지 지켜보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당시 명의 군사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함은 쌍방 모두에게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 문장은 홍타이지의 군사적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조선에 대한 조롱섞인 엄중한 경고이자, 대단원의 여운을 이어주는 일종의 카덴차cadenza라 할 수 있다.
이상 살핀 후반부 내용은 사실상 서신의 골자를 담고 있으며, 구성으로 보아도 클라이맥스이자 대단원을 이룬다. 그런데 이런 내용 전체가 『승정원일기』에 완전히 누락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관청의 기록이므로 사정에 따라 내용을 적지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어떤 사정이었을까? 농성중이라 일일이 옮겨 적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테다. 지금까지 살핀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음이 확실하다. 대청 황제의 ‘정벌‘을 초래할 정도로 큰 죄, 곧 천명을 거스른 죄를 고스란히 인조에게 묻는 내용을 그대로는 도저히 실록에 기록할 수 없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천명은 오로지 명 황제에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 P141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동아시아 국제 질서 맥락에서 폭넓게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차이를 비교해 인식할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에 새롭게 이념화한 군부·신자 관계가 단순히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도 작동함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국토(왕조의 하드웨어)가 황폐해졌어도 정체성(왕조의 소프트웨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군부·신자 관계에 재조지은이라는 경험이 배어들면서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명도 조선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북쪽으로는 만주 일대를, 남쪽으로는 일본열도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병자호란은 기존의 국제 관계를 뿌리째 뒤흔든사건이었다. 조선이 명·청 교체를 현실로 수용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16세기에 형성된 부자 관계라는 절대 가치 때문이었다. 과거에 송을 무너트린 여진이 중원을 차지하고 제국을 세운 뒤 종족과 무관하게 누구나 천명을 받을 수 있음을 설파한 바 있는데, 그 후예인 홍타이지가 이끄는 만주 또한 똑같은 논리로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배타적 화이 의식을 강조한 남송의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삼고 중화 문명국인 명과의 관계를 군신 및 부자 관계로 절대화한 나라였다. 이것이 바로 어떤 궁지에 몰리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선의 국가정체성이었다. 또한 이 점이야말로 이길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척화를 외치다가 남한산성에 스스로 갇힌 이유였다. 금수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느니 성안에서 척화를 외치다 교화받은 인간, 곧 (소)중화인으로 당당하게 죽겠다는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런 국가정체성을 심히 조롱하고 유린한 홍타이지의 언설을 그대로 실록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후대에 남길 실록을 ‘더럽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에게 굴복하였지만 『인조실록』을 편찬한 1653년까지, 더 나아가 『승정원일기』를 개수하던 18세기까지도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역사기록historiography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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