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부모처럼 떠받드는 명조인데, 시험 삼아 과연 너를 (정말로) 구원하는지 짐은 점을 치려 한다. 자식이 화를 당하는데 어찌 아비가 구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천명을 받들어 거병하여, 하늘의 뜻을 거역한 조선국왕을 포위했는데, 과연 조선이 부모로 섬기는 명이 그 자식을 구하러 오는지 지켜보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당시 명의 군사 지원이 사실상 불가능함은 쌍방 모두에게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 문장은 홍타이지의 군사적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조선에 대한 조롱섞인 엄중한 경고이자, 대단원의 여운을 이어주는 일종의 카덴차cadenza라 할 수 있다.
이상 살핀 후반부 내용은 사실상 서신의 골자를 담고 있으며, 구성으로 보아도 클라이맥스이자 대단원을 이룬다. 그런데 이런 내용 전체가 『승정원일기』에 완전히 누락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관청의 기록이므로 사정에 따라 내용을 적지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게 과연 어떤 사정이었을까? 농성중이라 일일이 옮겨 적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테다. 지금까지 살핀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음이 확실하다. 대청 황제의 ‘정벌‘을 초래할 정도로 큰 죄, 곧 천명을 거스른 죄를 고스란히 인조에게 묻는 내용을 그대로는 도저히 실록에 기록할 수 없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천명은 오로지 명 황제에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 P141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동아시아 국제 질서 맥락에서 폭넓게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차이를 비교해 인식할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에 새롭게 이념화한 군부·신자 관계가 단순히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도 작동함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7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국토(왕조의 하드웨어)가 황폐해졌어도 정체성(왕조의 소프트웨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군부·신자 관계에 재조지은이라는 경험이 배어들면서정체성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명도 조선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북쪽으로는 만주 일대를, 남쪽으로는 일본열도를 견제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병자호란은 기존의 국제 관계를 뿌리째 뒤흔든사건이었다. 조선이 명·청 교체를 현실로 수용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16세기에 형성된 부자 관계라는 절대 가치 때문이었다. 과거에 송을 무너트린 여진이 중원을 차지하고 제국을 세운 뒤 종족과 무관하게 누구나 천명을 받을 수 있음을 설파한 바 있는데, 그 후예인 홍타이지가 이끄는 만주 또한 똑같은 논리로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배타적 화이 의식을 강조한 남송의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삼고 중화 문명국인 명과의 관계를 군신 및 부자 관계로 절대화한 나라였다. 이것이 바로 어떤 궁지에 몰리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선의 국가정체성이었다. 또한 이 점이야말로 이길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척화를 외치다가 남한산성에 스스로 갇힌 이유였다. 금수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느니 성안에서 척화를 외치다 교화받은 인간, 곧 (소)중화인으로 당당하게 죽겠다는 정체성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런 국가정체성을 심히 조롱하고 유린한 홍타이지의 언설을 그대로 실록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었다. 후대에 남길 실록을 ‘더럽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삼전도에서 청에게 굴복하였지만 『인조실록』을 편찬한 1653년까지, 더 나아가 『승정원일기』를 개수하던 18세기까지도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역사기록historiography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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