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다윈의 정원을 거닐며

"개와 비둘기에 관한 내용만 남기고 뒤에 있는 어려운 내용을 덜어낸다면 이 책은 정말 대박이 날 것입니다."
1859년 어느 날 존 머리 John Murray 출판사의 한 편집자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1809~1882) 이 써 보낸 《종의 기원On the Originof Species》 초고를 검토한 후에 조언한 내용이다. 다윈이 이 조언을 무시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세상을 바꾼 책 《종의 기원》을 독파하려는 열망으로 책장을힘차게 넘겨본 독자라면, 제1장 처음부터 살짝 품격이 떨어지는이야기들 때문에 적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옆 동네에 사는 아무개 사육사가 그러는데 비둘기 이놈저놈을 교배시켰더니 이런 기막힌 놈이 나왔다" 뭐 이런 식이다. 그는 육종사의 ‘매직핸드‘에 의해 비둘기나 개의 다양한 변이들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시시콜콜하게 써내려갔다. 제1장 제목부터가 사육 및 재배환경에서의 변이 ‘이지 않는가! 그러니 뭔가 폼 나는 얘기를 기대하던 독자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윈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가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9세기 영국 사회에서는 육종을 통해 특이하게 생긴 비둘기나 개를 만들어내는 일이 대유행이었다. 계층을 막론하고 개 품평회 같은 것들은 가장 인기 있는 이벤트였다. 애견으로 육종된 닥스훈트니 그레이하운드니 그런 것들이 다 그때 탄생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둘기와 개 얘기로부터 책을 쓴 다윈은 얼마나 탁월한 글쟁인가! 그는 책 중반에 가서야 히든카드(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를 꺼냈다. - P6

다윈은 일개 사육사의 흙 묻은 경험에도 귀를 기울이는 과학자였다. 다윈 같은 상류 지식층 인사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 자체가 파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질학자, 식물학자, 해부학자, 그리고 철학자들을 불러들여 함께 산책했고, 뛰노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며 정원 한쪽에 앉아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1819-1880) 의 소설들을 읽었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사상과 글은 어느 누구에게나 호소력을 가진 콘텐츠로 진화했다.
《종의 기원> 개정판 6판(1876)을 출간하면서 출판사 사장에게 런던의 일일 노동자의 임금이 얼마냐고 물었던 일화는 꽤 유명하다. 그 이유는 저렴한 보급판을 만들어 그들에게도 자신의 책을 읽히고 싶어서였다. 그가 책을 써서 벌어들인 인세는 오늘로치면  10억 원 정도가 된다. 지금보다 훨씬 더 작았을 그 당시의 출판 시장을 생각해보면, 그의 책은 정말 대박이었던 셈이다. 고급 문화 매거진 <뉴요커New Yorker>의 고정 칼럼니스트인 애덤 고프닉Adam Gopnik 은 다윈의 필력을 분석하며 그를 ‘자연의 소설가Natural novelist‘라 평했다. 만일 다윈이 자신의 전공 분과에만 갇혀소수의 전문가에게만 통하는 글을 썼다면, 《종의 기원>>과 같이세상을 바꾼 과학책이면서 동시에 베스트셀러인 독특한 저작물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윈의 3부작인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The Expression of Emotions in Man and Animals)은 말그대로 그 정원에서 가꾼 지식 융합의 열매들이다. - P14

그렇다면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런 인간관은 기존 인문학의 인간관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여기서 인간에 대한 현대 진화론의 두 가지 중요한 통찰에 대해 논의하려고 한다. 그중 하나는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밈의 생존 기계‘
이기도 하다는 주장이다. 인간이 이 두 유형의 기계라는 측면에서, 나는 인간을 ‘다윈 기계Darwinian machine‘라 부르려 한다. - P21

예컨대 개미와 벌을 비롯한 진사회성 곤충eusocial insect들의타적 행동은 이 모형에 의해 극적으로 잘 설명되었다. 개미 사회를 보자. (벌 사회도 마찬가지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독특한 유전 체계를 가지고 있다. 개미 가계도에 나타나 있듯이 만일여왕개미가 알을 낳을 때 보관하고 있던 정자를 사용하여 수정란을 낳으면 그 수정란은 암컷으로 자라 일개미 또는 차세대의 여왕개미가 된다. 하지만 정자를 사용하지 않고 미수정란을 낳으면 그 자식은 수개미가 된다. 따라서 개미 사회에서 암컷들은인간처럼 염색체를 한 쌍씩 지니고 있는 이른바 이배체diploid이지만 수컷들은 염색체를 하나만 지닌 반수체haploid 이다.
이런 독특한 유전체계 때문에 개미 사회에서 일개미들, 즉자매들 간의 유전 근연도genetic relatedness는 2분의 1이 아니라 4분의 3이다. 그런데 만일 일개미가 수개미를 만나 짝짓기를 하여자식(일개미)을 낳는다면 어미 일개미와 자식 일개미 간의 유전근연도는 2분의 1이 된다. 그런데 2분의 1은 4분의 3보다 작다.
해밀턴은 이 사실에 근거해서 일개미가 자식을 낳지 않는 대신에여왕개미의 출산을 도와 자매를 많이 갖는 쪽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왜 곤충 사회에서 ‘불임‘과 ‘자매 돌보기‘라는 극단적인 이타적 행동이 존재하는지가 리로 인해 명쾌하게 설명되었다. - P26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연역 추론 능력은 주어진 과제가 ‘사회적 교환social exchange‘의 상황일 때 가장 잘 발휘된다. 이런 결과는 인류 진화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 수렵·채집의 기간 동안 인류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해결해야만 했던 적음적 문제 (이 경우에는 사회적 교환 상황에서 사기꾼을 잘 탐지해야만 하는 문제에 대해 인간의 마음이 적용되었다는 증거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마음에 ‘사기꾼 탐지 모듈‘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회적 교환 상황에서는 사기꾼을 탐지하느냐 못하느냐가 생사와 번영의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모듈module‘이라는 용어와 "인간의 마음이 모듈화되어 있다"라는 주장은 저명한 심리철학자인 제리 포더 JerryFodor(1935~)가 철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이때 ‘모듈‘이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그것의 구성 인자들끼리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되 다른 모듈의 구성원들과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장치를 말한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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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당 안을 보면 가운데 푸른 천과 붉은 천으로 두른 임금의 찬안饌案(진연 때 임금에게 바치던 음식 또는 그 음식상)이 반쯤 드러났고 찬안 뒤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아랫부분이 조금 보인다. 조선 궁중 행사 그림에서 임금은 그리지 않기 때문에 이때 임금을 상징하는 물건이 일월오봉병이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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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하나의 방법은 ‘한국인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답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사진으로 많이 남아 있는 조선 말과 일제시대 생활상을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그런데사진을 들여다보니 국토는 대부분 민둥산이며 사람들은 양반이건 서민이건 기운이 모두 침체되어 있다. 이것은 나라의 정신과 살림이 가난하던 시대 상황 탓이다.
물론 조선 오백 년 내내 그랬을 리 없다. 사진이 담아낸 것은 기울어가던 시절의모습일 뿐이다. - P8

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은 사람 구경이라고 했던가.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는 산수화만큼 사랑받았다. 그런데 중국생각으로 살던 시절에 그린 풍속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중국인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생각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풍속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조선인으로 바뀌었다. 남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보다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하다. 이를 진경풍속眞景風俗이라 부른다.
진경풍속의 주인공은 양반 혹은 평민이다. 진경풍속은 선비 화가들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처음 담으면서 시작되었고 소재를 평민들의 삶까지 넓히면서 완성되었다. 즉 양반 풍속으로 시작해 평민 풍속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진경풍속의 원조는 진경산수의 창시자인 겸재 정선이다.  - P12

풍속화와 더불어 조선인들의 삶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그림이 공공 모임을 그린 기록화이다. 기록화에도 당대 사람들과 물건이 나오기 때문에 넓은의미에서 풍속화라고 봐도 될 것이다. 기록화는 대부분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고 초상화와 더불어 회원들이 그린 가장 중요한 그림이었다. 기록화 가운데 압권은 임금이 등장하는 궁중기록화이고 그 가운데 역시 희귀성에 있어으뜸은 임금이 기로소에 들어간 사건을 그린 기사 이다.
문화 절정기 시절 숙종과 영조 임금이 연이어 기로에 들어가는 경사가있었다. 이때 일어났던 중요 모임을 시간 순으로 정확하게 그림으로 남겨놓았는데 이는 조선이 임금이 주인인 군주제 국가였고 노인을 우대했던 경로사회였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등장인물과 물건들을 모두 빠짐없이 그림 속에 표현하여 조선이 철저한 기록사회였음을 보여주었다.
기사 속 장면은 실록 기사 내용으로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낳았다. 한편 두 임금 모두 기로소 입소 행사를 경덕궁(경희궁의 원래 이름)에서 치렀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경덕궁이 숙종, 영조 시대 역사의 중요 무대였던 사실을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기로소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궁중기록화는 지금은 사라진 궁궐 모습을 그림으로 만나게 해주는 사료 역할도 한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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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 P223

아가야, 미안하다.
나는 부른 배를 잡고 헐떡이며 걷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알리와 나는 길을 메운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차들 사이를이리저리 돌아서 길을 건너갔다. 내가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걷다가 돌아보니 알리도 울고 있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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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래할 위기의 원인이 단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 조선업에 있다고 할 수만은 없다. 외려 경쟁은 진정으로 글로벌하게 다가올 수 있다. 2017년 말, 조선 3사가 해양플랜트 1기 (FPSO)에 대한 입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 수주 잔량이 줄어들어 먹거리가 갈급했기 때문에, 최저가, 즉 손익분기점을 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입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종 수주를 따낸 말레이시아조선소는 한국의 조선소들보다 20% 가깝게 싼 가격으로 입찰가를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싱가포르에 상주하는 유럽엔지니어링 회사 지부의 축적된 설계와 시공 경험을 가지고있는 엔지니어, 동남아 역내에 산업 인프라 투자를 지속하려는 싱가포르 정부,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노동자의 조합이 예상치 못한 대항마로 나타난 것이다. - P289

중소형 조선소는 이제 중국뿐 아니라 더 싼 노동력을동원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 조선소들과의 경쟁에 내던져졌다. 선박 시장에 초활황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 이상, 중소형선박에서 가격의 우위를 가져가기는 어렵다. 중국처럼 국가가 대량으로 선박을 발주하거나 국가 내 물동량을 자국 선박으로만 운영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상 중소형 선박의 경쟁력은 좋지 않다. 고부가가치 선박 건조를 위한 투자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지금의 여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업 노동자들이 적어도 인접한 중소기업으로 전환 채용될 수 있도록 보조해줄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이 조선산업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작 ‘동남권‘에 있는 ‘귀족 노동자‘들의 안위를챙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귀족노동자‘로 떵떵거리며 살아온 이들을 위해 국가가 왜 세금을투입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귀족 노동자‘를 운운하며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조선소 노동자들에게 돌리는 것은 너무도 불합리한 일이다. 이는 산업의 거시적인 구조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 P306

그러나 경남의 주력 산업인 조선산업, 기계산업, 자동차산업 등의 전방산업이 선전하지 않는 이상, 부품-소재-장비를 제작하는 이들의 수익이 자동화를 통해 혁신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른 행주 짜기‘가 체질이 된 원청-하청 관계 자체를 손보지 않는 이상 이들의 추가 수익은다음 해에 있을 원가 절감 압박 속에서 손쉽게 사라질 것이다.
이는 결코 조선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GDP의 12%이상을 담당하며 전체 국토의 주요 축을 구성하는 동남권 벨트의 모든 제조업이 비슷한 숙제를 안고 있다. ‘인더스트리4.0‘이라는 4차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었던 독일의 사례를 보더라도, 새로운 혁신의 기조는 기존 제조업, 특히 부품·소재·장비를 생산해 공급하는 중소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을 풀기 위해 시작됐다. 사물인터넷 IT, 자율주행차 등의 ‘신상품‘이아니라 기존의 산업들을 어떻게 더 잘 기능하게 할 것인지를쟁점화해야 한다. - P317

구조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흔히 몰락해봐야 변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몰락하지 않고도 변하고 성장하는 도시를 기대한다면 헛된 바람일까. 과거 조선소의 혁신은 노동자들이 모여 사소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이축적되면서 이루어졌다. 일하는 사람들의 그 감각이 여전히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거제는 실험대에 올라 있다. 거제가 모쪼록 노동과 삶을 훌륭히 아우를 수 있는 산업도시가 되길 바라본다. 현장에서 분투하는이들, 혁신을 위해 궁리하는 이들, 공동체를 다시 세워보려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내일을 꿈꿀 수 있으면 좋겠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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