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흔들리고 있었다.
펄럭펄럭펄럭펄럭.
도대체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것일까.
온갖 바람들, 그 어디선가에서 머리 풀고 일어난 바람들이 나뭇잎을 떨구고, 닫힌 창문을 흔들고 미친년 치마폭을 펄럭이다가 그래도 아직 기운이 남아서 여기저기 아직 사라지지 않은 그늘진 곳의 썩은 고인 눈을 한두 번 헤적이다가는 이윽고 한데 모여서 서커스천막의 빈틈 사이를 여지없이 짓쑤시고 있었다. - P164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구덩이 속을 기어내려간다. 가는 사다리가 수직으로 뻗어내려 있다. 땅으로부터 오십 미터의 깊이 발 하나 잘못 놀리면 그대로 추락해서 즉사해버린다. 종대는 순서를 기다려사다리에 몸을 싣는다. 얼핏 비 오는 산 계곡이 가득 눈에 찬다. 잠시 심호흡을 한다. 비릿한 공기가 가슴 가득히 차오른다. 물 속으로가라앉는 잠수부들이 얼핏 숨을 모아 쉬듯 종대는 온몸 구석구석에맑은 공기를 분배한다.
다시 갱을 나설 때까지 이 맑은 공기를 조금씩조금씩 아껴 쓰지않으면 안 된다. 땅 속은 공기가 희박할 뿐 아니라 더운 열기에 차있어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숨이 차오른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자를위한 공기가 아니다. 땅 밑에 묻힌 죽은 사람들, 수억 년도 전에 우리가 얼굴에 주름을 만들듯 땅이 분노로 깊은 주름을 만들 때 파묻힌 나무뿌리와 길짐승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마지막 숨을 모조리뿜어내어 만든 지하수와 같은 공기인 것이다. 그것은 산 자를 위한공기가 아니며 그것은 오직 죽은 자들의 탄식 속에 조금씩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 공기는 몸 속에 뛰노는 혈관을 서서히 죽여나간다. 살아서 조금이라도 손상되지 않은 몸으로 이 금광을 도망쳐 나가려면 힘껏 들이마신 맑은 공기로 생명을 지켜나가야 한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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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세는 한 달 전 그들이 읍내로 들어왔을 때를 분명히 기억하고있었다.
추수한 빈 들판을 가로지르며 기차역에서부터 고물 트럭 한 대가 먼지를 풍기며 나팔 불면서 붕작붕작 읍내로 들어오자, 어른이고아이들이고 한걸음에 군청 앞까지 나아가 이 요란한 풍각쟁이들을 박수로써 맞았다.
트럭 위에서 난쟁이가 흰 가루를 연방 방귀 뀌고 있었고, 원숭이 두 마리가 모자를 쓴 채 까악까악 비명 지르며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물 마른 냇가에 말뚝을 박고 장대를 세우고 밧줄을 연결하고 천막을 세우기까지 다른 한 떼의 풍각쟁이들은 온 읍내를 돌아다니며 나팔 불고 노래를 불렀다.
"슈산 슈산 슈산 보이,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이들은 종일토록 읍내를 돌아다니는 풍각쟁이들의 뒤를 졸졸따라다니고 있었고 어른들은 벌쭉벌쭉 웃으며 그들을 구경했다.
그날밤부터 서커스는 시작되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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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수 부모의 돈으로 자랐다. 그 돈으로 학원에다녔고, 책을 사 읽었다.
손 여사는 매년 몇백 권씩 되는 책을 사줬고, 종이를 아끼지 않고 쓰고 그릴 수 있도록 해줬다.
지금도 여전히 손 여사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내가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지를 걱정한다.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나의 고양이들도 봐줬다. 어디 나가서 허풍선이가 될까 봐 언제나 확실한것만 말하라고 뼈 아픈 조언도 해준다. 그러면서도 내가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덕에 나는 진보의 가치를 접했고, 진보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다르지만 다른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
모두 다 손 여사 덕분이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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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혼이 영원히 지옥의 불길 속에서 타오르게 하려면 몸을 비틀며 죽어가는 도살장이거나 복개된 청계천의 하수구 밑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곳, 더럽고 축축한 곳, 그곳에서 나는 종대의 마지막 꿈을거둬갈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세는 되돌아 나가려는 발길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그것조차 의미를 주는 행위일 것이다. 도대체 그의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어 있는 무(無) 그 자체였다.
그는 먼지였으며 티끌이었다. 그는 생의 빛나는 생성과 경이로운신비한 조화를 모르는 저주받은 한줌의 바람에 불과하였다. 바람이불어왔다 불어간 자리에 바람을 위해 묘비명을 새길 필요가 있을것인가. 바람은 풍장(風葬)으로만 그쳐야 할 것이다. - P50

마찬가지로 일주일 계속된 비로 도시의 벽은 민물고기의 비늘을뒤집어쓰고 있었다. 덜 마른 생선의 비린내가 모든 사물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마시는 커피 속에도 먹는 음식 속에도 빗방울이 섞여 있고, 습기찬땅 속에서 꿈틀거리며 튀어나온 지렁이들이 주머니 속에서 만져졌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내부로는 어느 정도 부패해 있어 달콤하고강렬한 썩은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눅눅하고 어두운 곳에 갓 돋아난 독버섯이 현란한 아름다운 무늬를 가지고 있듯이, 모든 사물은그들 내부의 독을 전부 숨김없이 드러내고 적의를 보이며 함부로 부러진 시계의 날카로운 분침처럼 각(角)을 보이고 있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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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여사와 김 작가

여름 한 달 동안 프랑스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모든준비를 다 마쳤지만 딱 하나 정리하지 못한 게 있었다.
나는 손 여사에게 언제나처럼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손 여사도 언제나처럼 ‘알았어‘
란 답을 보내왔다. - P7

나를 안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손 여사의 얼굴이떠오른다. 물론 내 기억은 아니다.
손 여사가 어린 나를 안고 좋아하고 예뻐했다고 증언해준 사촌 오빠들의 말 때문에 갖게 된 이미지다. 나는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아기 때의 나를 떠올릴 때면 행복이 충만한 얼굴을 한 손 여사와 방긋 웃는 민머리 아기인내가 그려진다.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내가 가공한 이미지를, 내 상상을, 기억처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상상이 기억을 이기기 마련이니까. - P15

나는 지금도 비척비척 싸움에 밀리던 아버지의 뒷걸음질을 배를 문지르며 악을 쓰던 손 여사의 발그레한얼굴을 기억한다.
몇 번을 떠올려도 너무 슬픈 기억이다.
싸움의 기억이라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남자를 알게 되고,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많은 책임과 가책을 함께하는 것인지, 도저히 말로는 옮겨지지 못할 많은 감정들이 쏟아지고 쏟아져, 깨지고 상하고, 문드러지고 휘발되어버리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사랑을 나누는 것이 두렵기도하다. 사랑을 믿어서인지도 모르겠다. - P38

 내가 언젠가는 눈꼬리 값을 꼭 할 거라고. 그 말은 ‘너를 믿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손 여사는 언니들에게는 지나치게 엄격했다. 두 언니들을 키우면서 조금씩 관대해진 것도 있었지만, 특히 나에게 관대했다. 내가 하는 선택과 결정들을 존중해줬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고 하기 싫은 것을억지로 시키지 않았다. 자라는 동안 내내 손 여사 부부는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내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는 것은 손여사 부부가 내게 보내주는 믿음,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어떤 종류가 되었든 믿음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매번 원하는 만큼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도 세심하게 신경 쓰려고 한다. 믿어주고 기억해주면 학생들은 마음을 열었다. 언제나 믿음에 화답을 해줬다.
한 명의 어른만 있어도 아이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 P56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숨 쉬고 싶었다.
그래서 내 속의 우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잦아들 때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시작했다. 글이라는 건, 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멋진 도구였다. 나는 점점 내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고, 그 문제 안에 있던 보수적인 손 여사와 나의 관계도 직시하게 되었다.
쉽게 풀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면의 아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첫 문장은 ‘미안해‘였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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