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증aphasia‘은 어원적으로 말을 잃었다는 뜻이지만, 이는 말보다는 언어 자체 (표현 능력이나 이해 능력의 전부 혹은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다(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아서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뇌를 다치거나 뇌졸중을 얻은 뒤에 실어증이 생겨서 수화를 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모로 보든 말하는 사람의 실어증과 비슷한 수화 실어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어증은 뇌의 어떤 부분이 관련되느냐에 따라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표현성 실어증과 수용성 실어증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경우는 전실어증이라고 한다.
실어증은 희귀한 장애가 아니다. 뇌졸중이나 머리 부상, 종양 또는 퇴행성 뇌질환의 결과로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300명 가운데 한 명꼴로 영구적 실어증이 생길 수 있다고 추산된다. 하지만 실어증은 완치율이높으며 부분적으로 치료되는 경우도 많다(단 몇 분만 지속되는 일과성 실어증도 있는데, 편두통이나 간질 발작을 겪을 때 일어날 수 있다).
아주 가벼운 형태의 표현성 실어증은 적합한 어휘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전체 문장 구조는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어휘만 잘못 쓰는 특성을보인다. 이러한 장애는 고유명사를 포함하여 특히 명사에 영향을 미친다. 좀 더 중증이면 문법적으로 완전한 문장을 구사할 수 없어서 짧고 빈약한 ‘전보문‘처럼 말하며, 실어증이 아주 심한 환자는 거의 말을 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젠장!"이나 "좋아!" 같은) 짧은 말을 내뱉을 수는 있다. 때로는 환자가 한 낱말만 거듭 반복하거나 모든 상황에 단 하나의 문장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환자도 이런 자신을 몹시 답답해한다. 한 환자는 뇌졸중이 발병한 뒤로 "고마워요, 엄마"라는 문장밖에는 말하지 못했고, 또다른 환자는 이탈리아 여성이었는데 늘 하는 말이 "tutta la verità, tut-ta la verità (온전한 진실 - 옮긴이)"였다. - P49

만성질환 환자를 문안하러 왔다가 마비되고 앞이 안 보이고 말 없는 ‘불치병‘ 환자 수백 명이 모여 있는 광경에 충격을 받는 사람이 적지 않다. 처음 드는 생각은 보통 이렇다. 이런 상황이라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일까? 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또 자신에게 장애가 생겨서 이런 곳에 살게 되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에 불안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른 면을 생각하게 된다. 대다수 환자들은 치료법이 아예없거나 차도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환자가 도움을받아 건강을 되찾고 장점을 살려서 다른 일을 할 만한 능력을 계발하며 현실을 극복하고 삶에 적응해간다(물론 이는 신경 손상의 유형이나 정도에 좌우되며, 개개인 환자의 내적 자원이나 외부 환경이 어떻게 뒷받침해주느냐에달려 있다).
병문안 온 사람에게 만성질환 병원의 첫인상이 견디기 힘들다면, 처음 입원하는 환자들에게는 공포스러울 것이다. 많은 입원 환자가 공포와 더불어 슬픔과 씁쓸함을 느끼며 격렬한 분노로 대응하는 경우도 있다(이러한 복잡한 감정 반응이 때로는 중증 ‘입원 정신장애‘를 일으키기도 한다). 내가 팻을 처음 본 것은 그녀가 베스에이브러햄병원에 막 입원한 1991년 10월이었다. 그때 팻은 분노와 좌절감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직원들도 모르고 병원 시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팻은 기관이 딱딱한 규정과 질서로 자신을 짓누른다고 느꼈다. 몸짓으로 의사 표현은 할 수 있었지만(그녀의 몸짓은 뜻이 완전히 통하지는 않았어도 늘 열정적이었다) 논리적인 말은 전혀 되지 않는 상태였다(하지만 직원은 팻이 가끔 "젠장!"이나 "꺼져!"라며 소리를 지른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꽤 많이 이해하는듯했지만 테스트해본 결과 말 자체보다는 어조나 표정, 몸짓에 반응하는것으로 밝혀졌다. - P54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낸시 에트코프 연구진의 2000년 <네이처> 논문에서는 실어증을 겪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언어 장애가 전혀 없는 사람들보다 거짓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이 월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실어증 환자들이 그런 능력을 갖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주장하는데, 실어증이 발발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환자들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팻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에는 타인의 감정이나 의도를 알아차리는 데 능하다고 보기 어려웠지만, 몇 해가 지나면서 초자연적이라고 할 만한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실어증을 겪는 사람들이 비언어적 의사 표현을 이해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같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데도 노련해질 수 있다. 팻은이제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많은 경우에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단계로 들어섰다. - P57

뇌졸중이 발병하거나 뇌 손상을 입은 뒤로 12~18개월 뒤에는 더이상 회복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일반화가 잘못임을 입증하는 환자도 많이 보았다. 게다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신경과학은 뇌의 회복력과 재생력이 기존에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손상 부위가 지나치게 크지 않을 경우에는 손상되지 않은 부위가 손상된 부위의 기능을 대신하는 ‘가소성‘이라는 위대한 능력도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적응 능력, 즉 원래의 방법이 더이상 통하지 않을 때 새로운, 혹은 다른 방법을 찾는 능력을 발휘한다. 팻은 뇌졸중을 앓은 지 다섯 해가 지나서도 매우 제한적이기는 하나 계속해서 수용력이 높아졌고,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 - P59

노엄 촘스키가 언어학에서 혁명을 일으켰다면, 스티븐 코슬린은 심상연구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기‘와 ‘보여주기‘ 논했다면, 코슬린은 ‘서술적이고 ‘묘사적인 표현 방식을 논한다. 정상적인 뇌는 두 방식을 모두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어서 어느한 방식만 쓸 수도 있고 두 방식을 전부 쓸 수도 있다. 팻은 명제 구성 능력, 단언 능력, 서술 능력을 거의 상실했으며, 이 능력을 회복할 가능성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묘사 능력은 뇌졸중의 영향에서 벗어나언어를 잃은 상태에 적응하면서 현저하게 향상되었다. 그녀의 묘사 능력은 다른 사람의 몸짓과 표정을 읽어내는 능력(수용성)과 자신의 의사를손짓과 몸짓으로 표현해내는 기교(표현성)의 양면성을 띤다. - P60

팻의 딸들조차 그녀의 회복 능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어떻게 우울해하지 않죠? 우울증 이력이 있는데 말이에요. 처음에는 어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사실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칼이라도 집어 드는 건 아닐까하고요." 다나는 어머니의 몸짓이 ‘세상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게 뭐야? 내가 왜 이런 방에 있는 거야?‘ 하고 호소하는 듯하며, 어머니가 날선 뇌졸중의 공포에 사로잡힌 것 같다고 자주 이야기했다. 하지만 팻은 자신이 반신불수 상태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아주 운이 좋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뇌 손상의 범위가 넓기는 하지만 정신력이나 성격을 허물어뜨리지는 않았다는 점, 딸들이 그녀에게 마음 붙일 일과 활동을 만들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인 도우미와 치료사를 별도로 고용할 경제력이 있었다는 점, 팻을 끊임없이 면밀히 관찰해주는 병리사를 만났다는 점, 인간적으로 용기를 주고 그녀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도구인 ‘경전‘을 준비해서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는 점 등 팻은 실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팻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세계와 교감하고 있어서 가족에게 "달링"이라고 말하지만 병동에서는 팻이 달링이었다. 팻은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전혀 잃지 않았으며(다나가 말하길, "어머니는 선생님도 사로잡았지요, 색스 선생님"), 왼손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다. 그녀는 살아 있다는 사실,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으며, 다나는것이 어머니가 의욕을 잃지 않고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보았다. - P64

우리가 생각하는 읽기는 분할할 수 없이 하나로 이어지는 행위이우리 읽을 때는 그 의미와 글로 쓰인 언어의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많은 과정은 의식하지 못한다. 하워드 엥겔이 겪은 것과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알고 보면 읽기의 단계들이 일렬로 혹은 서열에 따라 연결된 하나의 전체에 종속되어서 어느 순간에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890년, 독일 신경학자 하인리히 리사우어가 뇌졸중이 발생한 환자가잘 아는 사물을 시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심맹psychic blind-ness" 이라고 기술했다. 이 상태, 즉 시각 실인증을 겪는 사람들은 시력, 색 인지, 시야 등은 완전히 정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보이는것을 전혀 인지하거나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독증은 특수한 형태의 시각 실인증으로, 문자언어를 인지하지 못하는 장애다. 1861년에 프랑스 신경학자 폴 브로카가 말의 ‘운동 심상‘을 관장하는 중심부를 찾아내고, 그로부터 몇 해 뒤에 독일의 신경학자 카를 베르니케가 말의 ‘청각 심상을 관장하는 중심부를 찾아낸 뒤로, 19세기 신경학자들은 뇌 안에 말의 시각 심상을 관장하는 부위(손상될 경우에 읽기장에 즉 ‘심맹‘을 일으키는 부위도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겼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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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해산으로 남편은 의원직을 상실했고 권노갑 비서는 실직했다. 나는 비서진을 불러 몸조심을 당부하고 생활비를 조금씩 나눴다. 엄영달, 김옥두, 방대엽, 이수동, 이윤수 그리고 내외문제연구소 한화갑 전문위원 등 7명이었다. 남편과 가까운 신민당 소장파 김상현, 조윤형, 김녹영, 김한수, 김경인, 박영록, 조연하 의원 등 11명은 영장도 없이 잡혀갔다. 그들의 비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한 열흘 지났을까.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있는데 김옥두비서가 감시를 뚫고 담을 넘어 숨어들어 왔다.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요?"
"정보부에서 일주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방금 나왔습니다. 사모님, 조길환이 고문에 못 이겨 우리를 도운 경제인들 이름을 불었습니다.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70대 노인까지도 발가벗겨 몽둥이로 때리고 잠을 안 재우고 코로 물을 들이붓는 등 갖가지 고문을 했다. 그는 바로 아세아자동차 이문환 회장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친정아버지처럼 보살펴주셨던 어른이다.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씨의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치가 떨리는 이 고문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잡혀간 측근들이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이지 미칠것만 같았다.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처지임을 탄식했다. 차라리 그들 대신 남편이나 내가 끌려갔더라면 ••••••. 집은 적막강산이었다.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아무도 접근할 엄두조차 낼수 없었다. 설령 오더라도 외부인 출입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나 역시 연행을 각오한 터라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기도하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당당하게 잡혀갈 수 있도록 제게 용기를 주세요. - P127

인적이 끊어진 동교동에 어느 날 외신 기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미국 CBS방송 한영도 기자와 일본 RKB마이니치방송 미요시 특파원이었다. 그들은 남편의 소식을 가져왔고, 이후의 비밀 메신저를 자원했다. 집에 다시 오기 어려우니 공중전화를 이용하기로 하고 ‘스미요시‘라는 가명을 쓰기로 했다. 나는 몇 차례 조용한 경양식 집을 이용했다. 밤에는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만나 그들의 차로 바꿔 탔다. 그리고 당시 개발되지 않았던 강남의 빈 들판으로 가기도 했다. 남편의 근황을 듣고 편지를 교환하고 국내외 정보를 들었다. 캄캄한 밤 허허벌판에 차를 세워놓고 헤드라이트를 끄고 그러고도 소곤소곤하는 것이 마치 007 첩보영화같았다. 남편 소식을 듣고 난 후 안도감으로 눈을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의별들이 쏟아부어 놓은 듯이 반짝였다. 그즈음 그들은 단절된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남편과 나는 오직 그 외로운 연결 고리를 통해 숨을 나누고 희망을 주고받았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염려로 얼마나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그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한다. - P130

남편은 일본에서 성명을 내고 언론에 인터뷰와 기고를 하고 강연을 하는등 반유신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그는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 본부를 결성하고 7월 10일 일본 지부를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에 앞서 박 대통령이 6월 평화통일외교정책‘
에 관한 특별 성명(6.23 선언)으로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더 나아가 북한과 유엔 동시 가입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통일에대한 논의가 좀 자유로워졌을 때다. 남편은 혹시 내가 염려할까 봐 ‘한민통‘을 하면서 두 가지를 확실히 한다는 자세한 편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절대 지지‘와 ‘선 민주 회복 후 통일 실현‘이었다. 일부에서는 망명정부를세우자, 통일운동을 우선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 절대 지지와 유신 정권 반대‘와 ‘민주화를 이룬 후 국민적인 합의 후 통일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용공의 굴레를 씌우려고호시탐탐 노리는 저들의 속셈을 너무 잘 아는 사람으로서 그는 노선과 선후를 분명히 했으며 항상 편지, 녹음테이프 등 기록을 남겼다. - P132

행방불명 6일째 되던 날인 13일 저녁에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국제적십자사에 호소하기로 했다. 여권 발급을 요청하기로 하고 서류를 작성하고있는데 "국제적십자사가 가족이 요청하면 여권을 발급할 용의가 있다고 9시 뉴스에서 보도했다"라고 전화로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희망을 갖고서류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그때 마침 구속자 가족을 돌보던 김한림 여사와 안순덕 씨, 그리고 김정례 씨가 걱정된 나머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안방에서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응접실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났다.
"오셨어요!"
"의원님이 오셨어요!"
여러 사람이 외치며 우르르 대문으로 몰려갔다. 급히 현관으로 나가니 남편이 들어서는 게 아닌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정신이 혼미했다. 한동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서면서 맨 먼저내 손을 잡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다. 감사 기도를 바치는 내내 눈물이 흘러 목과 가슴을 적셨다. 남편의 증언이다.

바다에 던져 수장하려고 몸을 나무 판에 누이고 끈으로 꽁꽁 묶었다. 게다가 손과 발에 무거운 추를 달아매기에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있을 때 돌연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납치당한 후 줄곧 기도를 했는데 정작 이때는 살아날 궁리를 하느라 기도할 생각을 못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국민들을 위해할 일이 있습니다. 구해주십시오!"
그 순간 쿵쿵 소리와 함께 "비행기다~" 하고 외치며 사람들이 몰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동안 배가 속도를 내며 요동을 쳤다.
그러더니 잠잠해진 다음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남자가 말했다.
"혹시 김대중 선생님 아니십니까?"
"그렇소."
"나는 부산에서 선생님에게 투표했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도쿠시마입니다."
동여맨 결박을 풀었다. 이때부터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었다. 눈은 여전히 가린 채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11일 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더 지낸 다음 12일 아침 7시 부두에 접안했다. 건강 상태를 진찰받고 차에 실렸다.) 농가를 거쳐 이틀을 지낸 어느 건물에서 잘 훈련된 수사관 같은 젊은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김대중 선생, 왜 해외에서 국가를 반대하는 투쟁을 합니까?"
"나는 대한민국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소. 내가 반대하는 것은 정권이지 국가는 아니오."
"정부가 국가 아니오. 뭐가 다릅니까? 죽고 싶으면 계속 반대하시오."
그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선생을 차에 태워 집근처에 풀어줄 것입니다. 상부 명령입니다. 차에서 내리거든 소변을 보고 눈의 테이프를 풀고 집으로 가십시오." - P136

 8월 23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서울발 특종기사로 ‘김대중 납치 사건 정보부 기관원 관련‘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국가기관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기사였다. 그러자 당국은 <요미우리신문> 서울 지국을 폐쇄 조치하고 3명의 기자를 즉시 추방했다. 이날 일본 국회에서는 법무성 장관이 "내 육감으로는 모국의 비밀경찰이 한 짓이 분명하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답변이므로 모국의 나라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라고 말했다. 법인 중 한 명이 지문을 남겼는데 도쿄 주재한국 대사관 1등서기관 김동운의 것이었다.
10월 중순 정보부 이용택 국장이 찾아왔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되었으니 가족과 더불어 미국으로 떠날 것을 종용했다. 남편도 미국행을 원했다. 재차 방문한 이 국장은 청와대에 들러 박 대통령을 만나고 허가를 받은 사항이라며 서둘렀다. 집안 정리를 하고 나중에 가겠다는 나에게도 즉시 남편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부랴부랴 짐을 싸놓고 기다리는데 그다음부터 소식이 없었다.
라이샤워 교수가 가져온 하버드대 초청장으로 여권을 신청해보아도 서류가 반려되었다. 오히려 1974년 6월 1일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출두 명령이 떨어졌다. 이유인즉 1963년 윤보선 대통령 후보 대변인으로 선거 기간 중 선거법 위반했다는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등을 밀었다가 발을 묶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일본이 미국행을 반대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납치 문제가 계속 이슈로 떠오르면 곤혹스럽게 될 일본과 한국이 공조한 결과 찾아낸 궁색한 방편이었다. 10년 전 서류 더미에서 건수를 찾아내 ‘재판 중‘이라는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구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일본 측의 김동운 서기관 수사를 거부했다. 일본 영토에서 일어난 납치 사건은 명백히 일본 주권의 침해였다. 일본 내의 여론이 들끓자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사죄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1974년 8월에 일어난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이번에는 일본이 궁지에 몰리게되자 양국은 야합하지 랂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40

1975년 목요기도회는 사형 구형이 내려진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으로 뜨거웠다. 4월 9일 청천벽력이 내리쳤다. 어제 사형이 선고된 그들이 오늘 새벽에 전격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가 시무하는 응암동 성당에서 영결 미사를 본다고 해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성당은 텅 비어있었다. 영구차가 녹번동 삼거리에서 대치 중이라고 해 몰려가니 경찰이송상진 씨의 시신을 싣고 성당으로 가려는 영구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한 젊은 부인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 유족들은 거리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경찰은 영구차를 탈취했으나 누군가 껌으로 열쇠 구멍을 막아버려 움직이지 않자 크레인으로 차를 끌고 가 벽제 화장터에서 자기들 멋대로 화장을 했다. 얼마나 고문을 했던지 그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영구차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차 앞에 누웠던 제임스 시노트 James Sinnot 신부는 곧 추방당했다. 문정현 신부는 차바퀴 밑에 깔렸다. 문 신부는 이로 인해 영원히 다리를 절게 되었다. 이토록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국내외에 용감하게 주장했던 조지 오글George Ogle 목사는앞서 추방당했다.
우리는 울부짖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 P146

신학기 각 대학에서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했다. 유신헌법에 대해 말하거나 비방하거나 이를 전파하는행위를 하는 자는 모두 영장 없이 체포, 압수 수색할 수 있는 초헌법적 조치였다. 대학 구내에는 군대를 투입해 모든 집회와 시위를 전면 금지했다.
한편 6개월여간 반유신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섰던 김영삼 총재가 5월21일 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독대하고 비밀 회담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당에도 나타나지 않은 의혹으로 인해 도덕성을 잃고 임시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잃었다.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 지 일주일 만의 일이다. 새 총재 이철승 씨의 중도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신민당은 노골적으로 유신 체제에 협조해 민주화의 불씨는 허무하게 사그라졌다. - P153

1976년 5월 1심 판결은 김대중 · 윤보선 · 함석헌 · 문익환 4명이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고등법원 항소심은 5년, 1977년 3월 대법원 전원합의부는 상고를 기각했다. 양심의 마지막 보루 사법부도 권력의 눈치를 보며 검찰의 구형을 그대로, 벽돌처럼 찍어내던 시절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정치근 검사는 고속 승진을 하고 5공 때 검찰청장, 6공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판사는 대법관이 되었다. 현역 의원 정일형 박사는 의원직을 박탈당했고 그의 부인 이태영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최다선 8선의 야당 원로를 제명하다니. 정권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다음은 정일형의원의 최후진술이다.

나는 항일, 반공 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일관해왔다. 자유민주주의가국시인 대한민국에서 민주회복을 주장했다 하여 재판을 받는다 함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항일 투쟁 할 때 일본군의 앞잡이는 누구이며 내가 반공 대열에 섰을 때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독재자로 전락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 P157

2차 공판 날에는 덕수궁길 입구에서 방청권 화형식을 했다. 요식행위인재판은 방청할 필요가 없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가족들은 면회실, 지하철, 버스, 자동차, 인권위원회 등 언제 어디서나 짬만 나면 큰 가방에서 털실을꺼내 뜨개질을 했다. 고난과 평화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V‘자형 숄을 짜고 이를 ‘빅토리 숄‘로 이름 붙였다. 4코를 거는데 ‘민‘, ‘주‘, 회‘, ‘복‘ 하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숄은 주로 미국, 캐나다, 서독, 일본의 교회와 인권 단체로 팔려 나갔다. 한 장에 10달러를 받았다. 수익은 전액 양심수들의 영치금과 무의탁 수감자의 겨울 내복을 마련하고 더러 출옥 복학생의 등록금에 보탰다. 숄뜨기 운동이 확산되자 동대문시장에서 보라색 털실이 자취를감췄다. 정보부 짓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중단하지 않았다. 숄과 털실은 문동환 목사의 아내인 페이 문이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미8군 미군 우편을 통하거나 선교사들이 날랐다.
재판이 있는 날에 우리 가족들은 법정 밖에서 모두 보라색 한복을 일제히 입고 나타났다. 한복을 입은 점잖은 부인들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할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보라색은 평화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또한 나라꽃 무궁화 색깔이었다. 우리는 연보라색 숙고사로 통일해 동대문시장에서 한 벌에 3,000원씩 주고 맞췄다. 한복 가슴에 공개재판, 민주 회복 리본을 달았다. 이 리본을 한 움큼씩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나누어 주기도 하고 기관원이 떼면 즉시 다시 달았다. 때로는 소품을 적절히 활용했다. 흰 양산에다 ‘양심수 석방하라‘, ‘공개재판하라‘라고 쓰고 이를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버스를 향해 폈다 접었다 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둥글고 큰 부채 역시 멋진 소품이었다. ‘공개재판‘, ‘민주 인사 석방‘ 구호를 써서 높이 쳐들기를 반복했다. 붓글씨는 주로 궁체의 멋진 서체를 자랑하는 문익환의 아내 박용길이 쓰고 내가 옆에서 도왔다. - P159

어떤 지독한 고난도 그 내부에 기쁨을 감추어놓고 있는 법이다. 나는 국내외 여러 학교를 다녀 지인은 많았지만 공작과 음해의 대상 김대중의 아내인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할 친구가 별로 없었다. 이런 고립무원 속에서 3.1 사건 구속자 가족들과 1년여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 10명 중 벌써 공덕귀, 이우정, 고귀손, 김석중 네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 또한 감옥에서 새로운 인연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났다. 종교, 재야, 학계의 민주 인사들과 만났고 변호인 반대신문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전개하며 자신을 단죄하려는 집권층의 폐부를 찔렀다. 그는 법정에서 제한된 청중에게나마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알릴 수 있는 기회와 표현의 자유를 한껏 누린 것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신구교가 같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인 김대중이 재야와만나 이후의 집권으로 가는 돈독한 연대를 맺은 계기가 되었다. 사건을 키운 박 대통령이 맺어준 우정이었다.
"내가 감옥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여러분과 같은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 P166

정국이 극한 대치 상황인 와중에 김영삼 총재는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해 YH무역사태가 세계에 알려졌다. 박 정권은 이를 빌미로 김영삼 제거 작전을 시작했다. 야당을 회유, 협박하고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유정희 의원들을 동원해 10월 4일 마침내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스스로 무덤을 판 처사였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의원직을 빼앗긴 김영삼 총재가 이 당시 한 말은 이후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하는 유명한 어록이 되었다.
이로부터 10여 일이 지났다. 10월 16, 17일 김영삼 총재의 지지 기반인 부산에서 부산대와 동아대학생 5,000여 명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부산대는 1974년 이후 단 한 차례의 시위도 없던 대학이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서울의 이화여대에서 가위를 포장해 소포로 부쳤다는 해괴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런 부산대가 일어난 것이다. ‘유신 철폐‘, ‘언론 자유‘, ‘김영삼 제명 철회‘를 외치며 교내에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이 해산시키자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시내 중심가로 집결했다. 이는 곧바로 시민들도 가세하는 대대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유신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공화당사, 파출소, 경찰차, 방송국, 신문사 등을 습격하는 격렬한 시가전으로 발전했다. 당국의10시 통행금지 명령을 시민들은 지키지 않았다. 파출소가 불타고 박정희의사진도 끌어 내려져 짓밟혔다.
정부는 18일 자정을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긴급 투입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위는 20일에 이르러 인근 마산과 창원으로번져나갔다. 마산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의 민주 성지였다. 경남대 학생과 시민들이 화염병과 각목 등으로 경찰과 맞섰다. 정부는마산 창원 지역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이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사태 앞에 박 대통령은 20일을 기해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부산과 마산에서 1,563명이 연행되었고 그중 89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중 20명이 실형을 받았다.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이 사건을 우리는 ‘부마항쟁‘이라고 부른다.
박정희와 유신 독재를 향한 국민의 증오와 염증이 이렇게 드러났음에도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유신 독재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이었던 중앙정보부의 눈으로 보아도 더 이상 유신의 지속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을 텐데 말이다. - P181

그러나 우리는 결코 박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다. 장기 독재의 종식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암살‘이라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는 비열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애석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랬듯이 박 대통령도 조만간 국민들 앞에 스스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궁정 모반‘이 일어났다고 불의가 불의를 단죄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민주화 운동의 흐름이 혹시 단절되고 왜곡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김재규는 군사 법정에서 의인처럼 행동했다. 부마항쟁의 실상을 보고하니 대통령은 몇십만 명쯤 차지철 경호실장은 몇백만 명쯤은 죽어도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건재하는 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같은 고향, 동기, 상관이기도 한 개인적 정분을 끊고 야수 같은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남편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를 포함해 일관되게 김재규를 의인으로보는 시각과 운동에 반대했다. 그는 말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선거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쿠데타나 암살로 얻어디운 것이 아니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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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이런 편지를 받았다.

색스 박사님,

제가 겪는 (아주 특이한) 문제를 한 문장으로, 비의학적 용어로 말씀드리자면 읽지를 못합니다. 음악이든, 뭐가 됐든 읽지 못해요. 안과에서는 시력검사판의 맨 아랫줄까지 한 글자씩 전부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낱말은 읽지못하고, 음악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로 몇 년을 시달리면서 최고의 의사들을 만났지만 아무도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박사님께서 시간을 내어 저를 봐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진심을 다하여,
릴리언 칼리르 드림 - P15

후방피질위축증PCA 을 처음 공식적으로 기술한 것은 1988년 프랭후 벤슨의 연구진이었지만, 알려지지 않았을 뿐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벤슨 연구진의 논문이 돌풍을 일으켰고, 현재까지 10여 건의 사례가 기술되었다.
후방피질위축증을 앓는 사람들은 시력과 움직임이나 색깔을 인지하는 능력 같은 시지각의 기본 요소는 잃지 않는다. 하지만 글 읽기나 사람 얼굴, 물건을 인지하는 데 곤란을 겪으며 이따금 환각이 나타나는 등 복합적인 시지각 장애의 경향을 띤다. 또한 시지각적 공간지각 결함이 심해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는 동네나 심지어는 집에서도 길을 잃는다. 벤슨은 이를 ‘환경 실인증‘이라고 불렀다. 그밖에 좌우 혼동, 쓰기와 계산 장애, 심지어 자신의 손가락을 인지하지 못하는 실인증의 네 가지 주요 증상을 보이는 게스트만증후군도 많이 나타난다. 일부 환자는 색을 구분하고 분류할 수는 있지만 색의 이름은 말하지 못하는 이른바 색깔실어증을 보일 수 있다. 이보다 희귀한 경우지만, 시각적 조준과 움직임 추적에 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장애와는 대조적으로 기억력, 지능, 통찰력, 개성은 이 병의 말기까지 보존되는 경향을 보인다. 벤슨이 기술한 모든 환자가 "자신의 과거를 말할 수 있고, 최근 일어난 일도 인지하며, 자신이 처한 곤경에 대해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후방피질위축증은 분명히 퇴행성 뇌질환이지만, 더욱 흔한 알츠하이머병과는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 듯하다. 알츠하이머의 경우에는 기억력과 사고력, 언어의 이해와 사용, 행동과 성격까지 총체적 변화가 나타나며, 일반적으로는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통찰력을 초기에 상실한다. - P28

릴리언이 내 사무실이나 골목길 일대의 많은 상점에 있는 물건들을 잘분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익숙한 것, 암기한 것에 얼마나 의존해서 생활하는지, 어째서 자신의 아파트와 동네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명확해졌다. 어떤 장소를 자주 찾다보면 점차 그곳에 익숙해지긴 하겠으나 엄청난 인내심과 비상한 수완, 전적으로 새로운 분류 및 기억 체계가 필요한, 너무나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앞으로는 내가 릴리언의 아파트로 찾아가는 왕진 방식을 고수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는데, 릴리언이 스스로 정돈되었다고 느끼고 주인으로서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외출은 그녀에게 갈수록 초현실적인 시각적 모험이 되었다. 환상이 넘치지만 때로는 무시무시한 착각이 기다리는 - P36

릴리언은 발병한 후로 11~12년까지 창의적이었고 원기 왕성했다. 시각이면 시각, 음악이면 음악, 감정이면 감정, 지능이면 지능 등,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끌어내 자신을 지탱해왔다. 가족과 친구들, 특히 남편과 딸이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 동료들 그리고 슈퍼마켓이나 거리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 모든 사람이 그녀의 도전을 도와주었다. 그녀가 실인증에 대해 보여준 적응력은 실로 대단했다. 이는 끊임없이 진행되는 영구적 인지 장애에 맞서 자신을 단단히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소중한 수업이었다. 그러나 릴리언이 병에 대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초월하게 해준 것은 기술, 즉 음악이었다. 이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은 릴리언이 피아노를 칠 때였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감각과 근육, 육체와 정신, 기억과 환상, 지성과 감성, 자신의 총체, 살아 있음이 총체적으로 융합된, 일종의 초융합적 상태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었다. 그녀의 음악적 능력은 천만다행하게도 병에 영향받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었다.
릴리언의 연주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난해해지는 듯했는데, 그녀에게 예술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이는 어떤 문제들이 닥치더라도 그녀가 여전히 기쁨을 누리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 P41

그런데 내가 그녀가 전에 들려주었던 하이든 4중주곡을 언급하자 릴리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가 정말로 홀딱 빠졌던 곡이에요.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연주하는 사람이 아주 드물거든요." 릴리언은 그 음악이 얼마나 뇌리를 떠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머릿속으로 하룻밤 사이에 피아노곡으로 편곡했는지, 그때 일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내가 다시 연주를 청했다. 릴리언은 못한다고 했지만 다시금 조르자 피아노 쪽으로 몸을 옮겼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클로드가 살며시 바로잡아주었다. 피아노에 앉은 릴리언은 첫 음을 잘못 쳤는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내가 어딜 친 거죠?" 릴리언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가슴이 무너졌다. 하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아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했다. 높이 울려 퍼지다가 서서히 녹아들어 안으로 휘감기는 소리였다. 클로드는 놀라고 감동받았다. "2~3주간 전혀 연주하지 않았거든요." 클로드가 내게 속삭였다. 릴리언은 연주하면서 허공을응시했고 입으로는 선율을 흥얼거렸다. 릴리언이 전에 보여주었던 힘과 감정이 온전히 실린 절정의 예술적 연주 속에서 하이든의 음악은 격랑, 음악적 격론에 휘말려 들어갔다. 연주가 피날레를 향하고 마무리 화음이울리면서 릴리언이 말했다. 간결하게 "다 용서했어."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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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섬

1

새 원장이 부임해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
탈출 사고는 실상 새 원장에 대한 우연찮은 부임 선물이었다.
새 원장은 부임 인사를 하지 않았다. 탈출 사고의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 P15

하지만 상욱은 알고 있었다. 원장이 그처럼 감탄해 마지않는 섬의 조경은 실상 섬 자체의 경관이 아니었다. 조경에 관한 한 아름다운 것은 섬이 아니라, 섬 바깥쪽이었다. 섬에서는 그것을 바라볼 수있을 뿐이었다. 화가가 전해준 소녀의 이야기도 섬 안에 남아 있을때는 아름다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화가와 함께 섬을 떠나 섬 밖에서 비로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고 있다. 좀더 분명한 섬의 모습을 그에게 보게 해주고 싶었다. 사람들을 찾아 이야기를 들는 거나, 부하 직원들로부터 사무적인 보고 따위를 듣고 앉아 있는것보다 그 자신이 직접 섬을 돌아보고 그것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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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국회 최대 현안은 한일 국교정상화였다. 연이은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심각하여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우리는 일본의 보상과 경제원조가 절실했다. 사실 이 경제개발 계획은 민주당이 전문가 그룹과 함께 만든 시안이었다. 1955년부터 꾸준하게 면밀히 다듬어온 계획이었다. 그러나 발표 사흘 전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다행히 군사정권은 이를 적극 활용했다. 한일 양국은 1961년 비밀리에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무성 장관과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이 두 차례 만난 후에 1962년 11월 12일 합의를 보았다.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라는 것으로 국회에서 폭로되었다. 한국에 대해 무상경제협력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한다는내용이었다. 비공식 외교 채널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이 교섭은 우선 그 액수가 굴욕적이었다. 게다가 박 대통령이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친일 배경이 의혹을 더해 국민적인 저항을 일으켰다.
1964년 3월 6차 한일회담 본회의를 앞두고 야당과 각계 대표들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야당의 강경 선봉은 제1야당인 민정당 윤보선 당수였다. 그는 한일 교섭 즉각 중지를 주장하고 교섭 당사자들을 매국노‘라고 매도했다. 민주당의 박순천 당수와 남편은 온건파를 대표하며 제안했다. "국가적 이익을 확보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국교정상화를 적극적으로추진해야 할 때가 왔다. 야당도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자."
그 무렵 미국은 소련, 중국, 북한 등 공산권에 맞설 미국, 일본, 한국의 공동 대응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우리 정부에 일본과의국교 정상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던 터였다. 김대중은 무조건 반대만하는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놓은 박 정권으로서는 무척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이는 우선 야당 내부를 뒤흔들었다. ‘공화당 첩자다‘, ‘돈을 먹었다‘, ‘사쿠라다‘ 등등 펄펄 끓는 반일 민족 감정 앞에서 소수 의견은 두렵고 외로운 것이었다. 지역구로부터는 ‘다음에 출마하지 않을 생각이냐며 거센 압력이 밀려들었다. 나 역시 교회와 친구들 모임에서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출강하고 있던 이화여대에도 여기저기서 비난의 소리가 날아들었다. 시아버지께서는 편지를 보내 질책하셨다.
‘전도가 바닷길처럼 양양해야 할 아들이 어쩌자고 일본에 나라 팔아먹는 여당의 앞잡이가 돼가지고 세상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느냐?
정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 P82

그는 지역구 의정보고대회나 야당의 여러 집회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강경파의 선동에 "일본 정부로부터 1억 3,000만 달러를 선도금으로 챙겼다"라는 야당 김준연 의원의 폭로가 기름을 부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이 제공한 것으로 후에 일부 사실로 밝혀졌다. 공화당은 그동안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해온 눈엣가시 같은 5선의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4월 21일에 상정했다. 공화당이 절대다수였으므로 상정은 바로통과를 의미했다.
남편은 전날 밤 늦도록 준비를 했다. 의사 진행 발언권을 얻어 한일 국교수립 과정의 잘못된 점과 구속의 부당성 그리고 국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저녁 8시까지 김대중 의원의 발언이 계속되자 이효상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했다. 결국 구속 동의안은 상정되지 않았다. 이날 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계속된 그의 발언은 여당이 비집고 들어와 발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는 의정 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가장 긴 의사 진행 방해 flibuster 발언 기록이다. 이 일로 인해 다음 7대 국회에서는 의사 진행 발언을 30분 이내로 제한하는 국회법을 제정했다. - P84

그러나 정작 우리 정부는 굴욕적인 배상 금액을 허용하고 말았다. 한일회담은 1951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20억 달러를, 장면 정부는 28억 5,000만 달러를 국교정상화의 대가로 일본에 요구한 바 있었다. 36년간 강제로 점령당한 채 혹독한 수탈에 시달린 우리가 유상, 무상을 합해 6억 달러에 합의해준 것은 협상의 수준이 아니었다. 3년간 식민 통치를겪은 필리핀이 무상으로 5억 5,000만 달러를 전쟁 배상금으로 받아낸 것에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일본에선 보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금‘ 이라고 쾌재를 부른 정말 수치스럽고 의혹이 많은 협상이었다. 이때 남편은 그 액수라면 차라리 보상을 받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고, 그 대신 한일 무역수지 불균형을 시정하자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7년이 지난 1972년에 중국은일본과 수교 협상을 하면서 침략과 난징학살에 대한 보상에 인색한 일본의 돈을 아예 거부했다. 중국은 이를 국제사회에 자국의 자존심을 세우고일본의 왜소함을 고발하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 정부는 정말 터무니없이적은 보상으로 대일청구권, 어업권, 문화재 반환권 등에서 너무 많은 양보를 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한이 서리서리 맺혀 있는 한국인 원폭 피폭자, 강제징용, 종군위안부, 사할린 동포 귀환, 독도 문제 등 어느 것하나 명확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뒤돌아보면 보다 큰 국익 앞에서 야당과의 전략적인 공조가 아쉬웠던 협상이다. - P85

그래도 내가 늦게나마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사위가 국회의원이 된 것도 보고 가셨으니 큰 불효는 아니했다고 스스로 위로하곤 한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이 있을까. 그런데 나는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아버지가 나의 모습을 보시지 않게 된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자식의 마음은 같은가 보다. 남편은 납치, 사형선고, 망명 등혹독한 탄압을 받는 아들을 보지 않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별세에 다음과같이 적고 있다.
"어머니는 그때 돌아가신 게 다행입니다. 늙으신 어머니를 더 이상 슬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P89

상대는 쿠데타 때 지대한 공을 세운 헌병사령관이었다. 게다가 체신부장관이라는 국정 경험을 지닌 육군 소장 출신 김병삼 씨로, 거물급적 공천이었다. 이때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현직 대통령이 지방 순시라는 명목으로 전국을 돌며 총선에 몰두했다. 그중에서도 한 후보를 위한 대중 지원유세를 한 것은 목포가 유일했다.
"김병삼 후보가 당선되면 목포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학도 지어주겠다."
박 대통령의 이 목포역 앞 연설에는 2만여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우리 진영은 아연 긴장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목포에 옮겨 온 듯 각료들을 대동하고 재차 방문해 국무회의를 열었다.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자 부총리는 연일 지역 개발을 겨냥한 장밋빛 청사진을 쏟아냈다. 한반도 서남쪽 끝자락 목포 선거전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으며 역설적으로 김대중의 지명도를 높여주었다. 왜 이토록 대통령이 나서서 필사적으로 김대중을 낙선시키려고 하는가? 우리는 의아했다. 재선에 성공해 느긋해야 할 대통령이 일개 국회의원에게 이토록 집요한 데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박 대통령을 명석하고 멀리 보고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그는 상대의 의중을 골똘히 탐색하고 꿰뚫었다.
"3선 개헌을 하려는 의도가 분명해요.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나를 미리 제거하려는 겁니다."
여당은 목청 돋우는 강경파보다 합리적이며 대안을 내놓는 김대중이더 껄끄러웠던 것이다. 김대중의 역량을 가장 먼저 정확하게 본 사람은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마침내 유세에서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3선 개헌 의도가 아닌가?"
대통령은 응수했다.
"나는 헌법을 고쳐서 세 번이나 대통령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치적중상모략이다." - P90

마지막 과제는 밤에 이뤄지는 개표 부정 저지였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모든 것이 허사였다. ‘표를 지켜야 한다. 이심전심이었을까. 개표 장소인 유달국민학교 운동장에는 비가 내리는데도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그 당시의 가장 흔한 수법은 정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 도중 전깃불이 나갔다. 가상훈련에서 연습했던 대로 몇 명은 엎드려 가슴으로 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준비해 온 플래시를 켜려는 순간 갑자기 대낮같이 환해졌다. 국내외 방송 라이트 등 보도진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진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다. 역설적이지만 공화당이 스스로 불러들인 보도진이었다. 운동장에서는 시민들이 성난 합성을 올렸다. 정전은 이후에 두 번 더 있었다. 그러나 부정을 저지르기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결과는 6,000여 표 차이로 여유있는 낙승이었다. 후일담이지만 박 대통령이 작전을 지휘했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질책하자 김 부장이 한 말이라고 한다.
"3 • 15부정선거 때 마산을 방불케 하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습니다." - P93

우리는 대구 수성못에서 마지막 유세를 장식했다. 19만여 명이 운집했으니 대구 인구의 10%가 모인 셈이었다. 경찰은 3만 명으로 보고를 했고박 대통령은 "김대중 별거 아니구먼"이라고 반응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19만 명이라고 보고하는 바람에 대경실색해 공중촬영사진을 재검토하는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전국 어디를 가나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에 초조했던 여당은 새로운 술책, 즉 지역감정 유발을 개발했다. 선봉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공화당 의장으로 경상도지역 연설회 단골 연사였다. 그는 노골적이었다. "쌀 속에 뉘가 섞이면 밥이 안 되는 법이다. 경상도 표에 전라도 지지 표가 섞이는 것은 뉘가섞이는것과 마찬가지다", "신라 1,000년 만에 나타난 박정희 후보를 뽑아서 경상도 정권을 세우자" 등등. 이 발언은 호된 비판을 받았다. 대구 시민들은 매를 들었다. 한 달 후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물을 낙선시키고 야당 후보(신진욱)를 당선시킨 것이다. 지역감정이 뿌리내리기 전의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러나 이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유도하는 불행한 신호탄이었다.
경상도 전역의 후보 벽보 ‘2번 김대중‘ 밑에는 다음과 같은 격문을 붙여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호남인이여, 뭉쳐라!‘,  ‘호남 후보에게 몰표를 주자!‘, ‘호남인이여, 럭키 치약을 사지 말자!‘ 영남 유권자를 자극하는 원색적인 흑색선전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보부의 작품이었다. 지역감정을 조장해 선거에 이용하기 시작한 원년으로서 부끄럽고 통탄할 만한 장면이다. - P108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무안쯤에서 마주 오던 트럭이 갑자기 핸들을 꺾고 차선을 넘어 돌진해 ‘이제 죽었구나‘ 싶어 눈을 감았다고한다. 기사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차 트렁크 왼쪽 부분이 트럭과 부딪치고치는 논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던 그는 양 손목의 동맥을 다쳤다. 동승자 중 가장 가벼운 부상을 입은 편이었다. 만약 순간적으로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았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앞 저수지에 떨어졌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아마도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의 일행이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반면에 뒤따라오던 택시는 트럭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탑승자 2명이 숨진 큰 사고였다.
돌이켜보면 해방 공간에서 김구, 여운형 등 수많은 지도자가 암살당했다. 그런가 하면 위협적인 정적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여 사법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사형시킨 이승만 독재 정권의 추억이 아직 생생한 때였다. 나는 몹시 두려웠다. 남편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정치적 경쟁자 1호가 아니던가. 더욱이 차적 조회 결과 트럭 회사의 사장은 당선이 확실한 공화당 전국구 8번인 당시 변호사협회 회장의 아들이었다. 등장인물이 화려하고 의문과 추리가 무성할 법도 한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졸음운전을 했다"라는 트럭 운전사의 진술에 따라 단순 교통사고로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신문에는 또한 보일 듯 말 듯한 1단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백번 양보해 설령 단순한 교통사고였다 하더라도 이슈조차 안 된 것은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었다. - P113

자신의 문패를 주문하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친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가 쓴 <나의 삶 나의 길>에서 인용한다.

나는 가끔 아내에게 억지를 부리곤 한다. 노처녀를 구제해줬으니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농담이다. 아내가 얼마나 어려운결정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시용문패라고 했다. 그러나 전시용이 필요 없을 때부터 우린 그렇게 살아왔다.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막상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 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었다.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의 서두인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 와 함께 이 문패는 우리 부부의 동반자 관계를 설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밖에서는 혹시 김대중의 시대를 앞선 여성관을 여성운동가인 이희호의 영향력으로 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이2개의 문패는 오로지 그가 스스로 깨닫고 판단하고 실천한 것이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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